■ 188. 싸움 □
5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용철 작가의 조수로 고용된 것은 5월 말까지.
힘들긴 했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학교의 판화 작업실은 시설도 낡았고, 판화 수업을 듣는 다른 학생들과 같이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은 넓고 쾌적했다.
장비도 모두 최신식.
결국 나는 월급까지 받으면서, 최고의 작업실을 무료로 쓸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이었다.
'아, 진짜 김용철 작가님······'
말 그대로 최고의 선배이자 최고의 고용주.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오늘은 김용철 작가 작업실의 회식이었다.
메뉴는 소박하게 소고기 집.
우린 5시에 모여 작업을 시작한 후, 밤 11시 쯤 식당으로 이동했다.
입체 팀 2명, 회화 팀 2명.
비서 누나 1명.
나와 김태민, 최미향씨 외에도 5명이 함께 갔다.
사무실 직원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산양미술관 소속으로 오늘은 참석하지 않았다.
지글지글.
석쇠 위에 굵은 소금이 뿌려진 빨간 소고기를 구우며 김용철 작가가 말했다.
"난 말이야. 여전히 고기가 좋아. 회도 맛있긴 하지만, 이렇게 고기를 구워 먹으면 어릴 때가 생각 나.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하나. 회보다 고기가 더 좋다는 게 내가 아직 젊다는 증거 같거든. 물론 어릴 땐 소고기 대신 삼겹살을 먹었지."
고기가 더 끌리면 젊다니.
아무 근거 없는 논리.
하지만 김용철 작가가 젊게 사는 것은 사실이니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천천히 늙는 것 같다.
원래 물건은 많이 쓰면 빨리 닳기 마련인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많이 일할수록 더 젊어지는 것이다.
이번 생은 나도 천천히 나이 들고 싶은데.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나?
어쨌거나 소고기는 맛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이 사주는 고기는 맛있구나.'
그렇게 고기를 제법 먹었을 때, 김용철 작가가 젓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자, 잠깐 주목."
소고기를 먹느라 정신없었던 우리들은 잠시 멈추고 김용철 작가를 바라봤다.
"자, 이제 슬슬 날도 더워지는데, 모두 고생이 많다. 그리고 이번 작업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이번 작업의 가제는 '거닐다'였다.
보통은 전시에서 관객은 작품을 관찰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번 김용철 작가의 작품에서 관객은 작품들 사이를 거닐게 된다.
작품을 관찰하는 입장이 아니라, 작품들과 혼재해서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는 통로 모양으로 꾸며진다.
그리고 내가 속한 판화팀은 반복적인 도안으로 통로의 벽을 장식한다. 관객들에게 장소나 시간의 변화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입체팀은 서 있는 사람 모양의 조상을 만들어 통로 곳곳에 배치한다.
통로를 거니는 관객들 사이에 작품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김용철 작가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이번에도 상품을 걸까 한다. 특히, 이번 종목은 두 가지다. 첫째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 '거닐다'다. 이게 말이야, 내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작품이 잘 나오고 있어. 그런데 그게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단 말이야. 그 말은 아직 개선할 부분이 있다는 뜻이겠지. 너희들도 이제 나만큼, 이 작품을 접했으니까 분명 하나씩은 아이디어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
상품이라······
김용철 작가가 '이번에도'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김용철 작가는 종종 이렇게 상품을 걸고 아이디어를 수집한 것 같았다.
나야 재미있을 것 같았다.
지금 참여하고 있는 작업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기회도 되고.
또 김용철 작가의 작품에 내 아이디어가 반영된다면, 그래서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된다면 그것도 꽤 보람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품이 걸린다.
화끈한 김용철 작가의 성격상 절대 시시한 상품은 아닐 것이다.
"첫 번째는 '거닐다'의 개선 방안.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적극 수용하고 작품에 반영하겠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지금 너희들이 하고 있는 개인작업이다. 너희들의 개인작업으로 크리틱을 하자. 나도 참석하겠다. 오랜만에 신나게 물고 뜯으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 보자고."
전설의 크리틱 장인 김용철.
드디어 김용철의 크리틱을 실제로 보는 것인가?
"그래서 아이디어와 개인작업 두 가지를 다 평가하겠다. 상품은 바로 9월 싱가폴 전시다. 1등을 하는 사람은 싱가폴에도 데려가고, 전시에서 부스도 하나 내주겠다. 그러니까 모두 열심히 하도록!"
그렇게 긴급 미션이 내려졌다.
나야 대학생이니까 크게 끌리는 상품은 아니었다.
아마 9월이면 2학기 졸전 평가로 한창 바쁠 테니까.
그래서 오히려 상품보다는 경연 자체가 끌렸다.
김용철 작가 작품에 아이디어를 낼 기회와 김용철 작가가 참여하는 크리틱.
하지만 전업 작가를 목표로 하는 다른 조수들에겐 무척 큰 상품일 것이다.
그들에겐 전시의 기회 하나, 하나가 소중할 테니까.
특히 김용철 작가와 함께 하는 전시라면 더더욱.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큰 소리로 대답했다.
"자, 나이든 사람이 너무 오래 앉아있으면 야단맞지. 눈치 없다고. 여기 카드 두고 갈 테니까, 실컷 마시도록 해."
그렇게 김용철 작가는 탁자 위에 카드를 올려 두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용철 작가가 일어나자 모두들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예술가들이 일반 직장인들보다 더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디서나 월급을 주는 사람은 극진히 존경받는다.
김용철 작가가 먼저 떠나고.
"역시 작가님, 화끈하게 쏘신다니까!"
"2차, 어서 2차!"
우린 자리를 옮겨 계속 마셨다.
특히 나와 김태민은 최미향에게 판화에 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듣는 게 무척 유익했다.
작업실에서도 많이 배웠지만, 술자리에서도 얻는 게 많았다.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요."
그리고 김태민이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김태민이 자리를 비우고, 나도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세수하고 술 깨우고 또 작업실 가야지.'
그리고 자리로 돌아갈 때.
안쪽에서 얼핏 내 이름을 들었다.
"이주원, 걔 어때?"
"무슨 말이야?"
첫 목소리의 주인은 입체팀의 박정용.
박정용은 조소과 대학원 출신으로 이제 29살이었다.
박정용도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에 1년 넘게 일해오고 있었다.
"처음엔 학부생이 뽑혔다길래 웬일인가 싶었거든. 게다가 같이 면접 본 사람은 판화과 대학원생이었다며? 그런데 알고 봤더니 작가님 아들 친구였어."
"어이, 얘 취했네. 야, 임마. 그만해. 그 이야길 왜 해."
언제나 조소과가 문제군.
옆에 있던 임영태가 박정용의 말을 끊으려고 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중에 들어가기도 어색해서 나는 그냥 밖에 서 있었다.
"야, 안 취했어. 놔 봐. 태민이까지는 내가 이해를 해. 어차피 작가님 작업실이니까, 그 정도는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이주원은 너무 한 거 아니야? 가족끼리 경영하는 중소기업도 아들 친구는 안 뽑겠다."
"야, 그만 하라고! 주원이 누구보다 열심히 하잖아."
"여기 열심히 안 하는 사람도 있어? 나 솔직히 이번에 작가님한테 조금 실망했다고. 이번에도 크리틱 하면 뭐해? 이번에도 뽑힐 사람은 벌써 다 정해져 있는 거 아니야? 이럴 거면 채용 공고는 왜 한 거야?"
"야, 야 그만하라니까!"
그래도 임영태가 말려줘서 고마웠다.
"주원이 잘해서 뽑힌 거 맞으니까, 판화팀에 신경 꺼. 그리고 진짜 열심히 하잖아."
최미향도 한 마디 거들었다.
고맙군.
그런데 나는 별로 화는 나지는 않았다.
화가 나기보단 오히려 김용철 작가에게 미안했다.
'다른 사람들은 불만이 있었구나. 그런데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최미향의 말대로 이윤재든 누구든, 내 대신 뽑을 수 있었던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 역시 충분히 많은 것을 얻었으니 후회는 없다.
김용철 작가를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번에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
그리고 크리틱까지 근사한 작품을 완성하는 것.
'그래서 내가 마냥 낙하산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자.'
그게 나를 위해서도 김용철 작가를 위해서도 중요할 것 같았다.
그렇게 뜻밖에 강력한 과제가 생기고 말았다.
"어? 안 들어가고 뭐해?"
수진 선배와 통화를 마치고 들어오며 김태민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저 씁쓸히 웃을 수밖에.
박정용 덕분에 술자리가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 * *
회식이 끝나고 새벽 2시.
유나에게 몇 통 전화가 와 있었는데, 회식자리가 어수선해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
내가 걸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
나는 택시를 타고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
그래서 김용철 작가의 작품을 다시 관찰했다.
'작품 속을 직접 관객이 거닌다. 보는 작품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
나는 미완성인 작품들을 사진 찍고 그것을 다시 스케치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김용철 작가라면?'
조수로 참여하는 것과 작품의 주인이 되는 것은 또 다를 것이다.
머리로는 김용철 작가의 작품을 생각하면서 손으로는 또 목판을 새겼다.
목판을 조각하는 것은 명상과도 약간 비슷했다.
한 칼, 한 칼.
한바탕 새기고 나면 손은 아팠지만, 머릿속은 맑아졌다.
그렇게 작업했더니 벌써 새벽 5시.
초여름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날이 밝고 있었다.
'어이쿠, 아침 수업 있는데.'
나는 그제야 작업실 자리를 정리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샤워하고, 한 두 시간 자고, 아홉시 수업에 들어가면 간신히 시간은 맞겠구나.
그렇게 후다닥 빌라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야, 이주원."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내 빌라 현관 앞 어두운 계단에 유나가 앉아 있었다.
평소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
울기라도 했는지 얼굴이 좀 붓고, 눈이 빨개져 있었다.
"유나야, 여기서 뭐해, 이 시간에? 안에 들어가 있지."
"이주원. 너 항상 이 시간에 다니는 거야? 어제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회식이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졌다.
작업실에 돌아간 게 새벽 2시였고.
유나가 잘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박정용의 뒷담화 탓에 아무래도 내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유나와 통화하기가 좀 그랬다.
"나 걱정해서 기다린 거야?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묻는 말이나 대답하라고!"
그리고 유나의 주먹이 날아왔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진지한 주먹.
"왜 항상 이런 식인데! 전화 한 통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건 그냥 미련한 거지! 넌 적당히 하는 것도 몰라? 이게 뭐야, 지금이 몇 신데! 왜 사람 말을 이렇게 안 듣냐고!"
진짜 유나에게 한참 맞았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작업실에서 잠깐 잤어. 저녁에 회식 있었거든. 술 마시고 잠 들어서 전화 못 받았어. 들어가자, 새벽인데 옆집에서 놀라겠다."
유나를 토닥이며 집안으로 겨우 데려갔다.
얼굴로는 미안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조금 웃었다.
날 걱정하느라 울어주다니.
미안하면서도, 따뜻한 느낌.
박정용 때문에 불쾌했던 기억이 전부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미안, 진짜 미안. 다음부터는 일찍 들어올게. 작업실에서 잠 들어서 오늘만 늦은 거야."
그렇게 변명했지만, 몇 대 더 맞았다.
"오늘만, 진짜 오늘까지만 넘어갈 거야. 다음부터 또 잠 안 자고, 말 안 들으면 정말 그때는······"
"그래. 시간도 잘 지키고 보고도 잘 할게. 나 테라핀 범벅이라 좀 씻어야겠다."
유나를 먼저 재우고, 나는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내가 유나를 울리는 날이 오다니.
사귄지 4년이 되니까 우리도 역시 싸우게 되었다.
내가 비록 노련한 회귀자이긴 하지만, 연애에는 노련해질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젠 절대 안 울려야지.
굳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