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83화 (183/203)

■ 183. 장점과 단점 □

나와 김태민, 그리고 최미향은 곧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김태민과 최미향부터.

두 사람은 동판화, 그 중에서도 에칭을 시작했다.

에칭의 순서는 이렇다.

먼저 금속판에 부식 방지 약품을 바른 후, 약품을 긁어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금속판을 산성 용액에 담그면, 그림이 그려진 부분만 산에 녹아서 오목한 홈이 생기게 된다.

그 후, 산성 용액을 씻어내고 잉크를 발라서 찍으면 부식된 부분만 잉크가 묻지 않아 하얗게 나온다.

'설명은 단순하지만 꽤 어렵지.'

일단 금속을 부식시킬수록 산성 용액은 계속 묽어진다.

그러니 용액의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효과를 위해 부식 시키는 시간이나 방식에 여러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러니 에칭은 쉽게 하면 쉽지만, 제대로 하면 한없이 어려워진다.

게다가 산성 용액은 상당히 위험하다!

'이걸 과연 김태민이 할 수 있을까?'

슬쩍 김용철 작가의 눈치를 살폈다.

'나랑 같은 걱정을 하시는 구나.'

김용철 작가가 러프한 스케치를 둘에게 건넸다.

'오, 이것이 김용철 작가의 스케치.'

상당히 거칠면서도 유려한 느낌.

김용철 작가의 도안이 거친 것은 그림을 대강 그려서가 아니었다.

작품이 처음 떠오른 순간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김용철 작가의 거친 도안을 에칭에 적합하도록 최미향과 김태민이 매만진다.

그리고 그 그림을 금속판 위에 옮겨 그린다.

그리고 다양한 효과를 가정해 부식 방식을 결정하고, 금속판을 긁어낸다.

이때 여러 시도를 위해 가끔 같은 금속판을 여러 개 제작하기도 한다.

부들부들.

일단 단순 반복 작업이 시작되자 김태민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김태민의 손이 떨리고,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김태민의 뇌가 정지하기 직전!

하지만 다행히 최미향이 있었다.

판화 공방을 운영하는 최미향은 판화 가르치기의 달인!

"천천히 하면 돼요. 날 따라서 해봐요. 세상에서 제일 천천히. 판화는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그래서 천천히 하는 게 결국, 결과적으로는 더 빠른 거예요."

최미향은 친절하게 차근차근 가르쳤다.

"꼼꼼히 살펴보고, 실수는 없나 확인하고. 한 번 더 살펴보고. 천천히.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시간을 때우면서 게으른 놀이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김태민은 무사히 에칭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몇 번 반복하자 요령도 생기고, 결과물도 좋으니까 본인도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김태민도 조금씩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었다.

참고로 최미향이 원래 친절한 성격인지, 아니면 세상 모든 여자를 자상한 누나로 만드는 김태민의 마력이 작용한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었다.

종종 학교의 어린 후배들도 김태민을 대할 때는 친절한 누나로 변신하곤 한다.

나야 그저 부러울 따름.

'나한테는 그나마 유나라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유나가 없었으면 정말 슬플 뻔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

김용철 작가가 내게 건넨 도안은 훨씬 단순하다.

'하지만 반대지······'

화학 약품으로 부식시키는 에칭과 달리 목판은 전부 조각도로 깎아내야 한다.

그리고 도안이 간단하다는 것은······

'내가 파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

그러나 고생은 내 천직.

나는 목판에다 낑낑대며 도안을 파냈다.

조각도를 쓰는 오른손이 상당히 아팠지만, 며칠 참고 계속 했더니 견딜만해졌다.

특히 목판화는 칼자국도 그림에 같이 찍혀 나온다.

그래서 단순히 도안을 파내는 것이 아니라, 칼의 방향이나 칼자국의 길이까지 머릿속에 담아두고 작업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작업의 목적은 색의 표현!'

나는 색의 깊은 맛을 살리기 위한 여러 방법을 고민했다.

그래서 여러 물감을 배합해 한 번에 찍는 대신, 한 장의 종이 위에 여러 번 목판의 색을 바꿔가며 중첩해 찍었다.

그랬더니 훨씬 더 깊고 오묘한 색이 나왔다.

'그리고 하나 더!'

똑같은 작업을 리놀륨 판으로도 시도해 보았다.

리놀륨 판은 일종의 고무판을 생각하면 된다.

목판의 경우엔 칼자국이 강하게 남는다.

그리고 나무가 단단해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다.

하지만 리놀륨판은 부드러운 고무라서 그만큼 칼자국이 둥글다.

그리고 리놀륨판은 물감을 흡수하지 않아서 선명하게 찍힌다.

반면 목판은 미묘하게 물감을 흡수하기 때문에 신비롭고 은은한 느낌이 난다.

나는 김용철 작가가 건넨 도안들을 색과 판을 달리해서 이렇게 여러 형식으로 완성하고, 김용철 작가가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애쓰는 구나. 고생이 많다."

내가 부지런히 작업하자, 김용철 작가가 슬쩍 다가와서 격려했다.

꽤 만족스러운 지 얼굴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김용철 작가가 사람들을 이렇게 장악하는 구나.'

평소엔 카리스마가 넘치는 김용철.

하지만 힘들게 작업할 때 어느새 다가와 따뜻하게 건네는 한마디 칭찬.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작업실의 조수들이 하나같이 김용철 작가를 존경하는 이유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넌 판화의 좋은 점이 비겁한 거라고 했지."

"네. 그런 점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거 알고 있나? 피카소도 판화를 무척 좋아했어."

피카소는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가끔 무시당하곤 한다.

남들 다 아는 피카소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자신이 평범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피카소는 여러 장르의 작업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달려든 존경할만한 예술가였다.

김용철 작가가 계속 말했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피카소는 천재였지. 그리고 평생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남자였어. 피카소에게 판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피카소라면 절대 비겁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음······"

김용철 작가는 조수를 단순히 조수로 대하지 않았다.

마치 후배를 이끌어주는 선배처럼 가끔 이렇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나는 잠시 김용철 작가가 건넨 화두를 생각해보았다.

"피카소는 천재라서 모든 그림이 너무 쉽고 빠르게 완성되니까, 일부러 힘들고 오래 걸리는 판화를 선택해 본 게 아닐까요?"

내 대답을 듣고 김용철 작가는 슬쩍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넌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구나. 하긴. 비겁한 게 언제나 나쁜 게 아니듯이, 빠른 게 언제나 좋은 것도 아니겠지. 아, 그리고 태민아, 미향씨."

김용철 작가는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우리 세 사람을 불렀다.

"여기서 작업할 땐 의무적으로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 중 적어도 사분의 일은 자기 작품에 할애하도록. 남의 작업만 하다보면 머리가 굳어버리거든. 그리고 머리가 딱딱해진 조수는 필요가 없으니까."

돈을 줘서 고용한 조수들에게 자기 작업을 하라고 시키다니.

그리고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엔 값비싼 미술재료들이 가득했는데 전부 마음대로 쓰도록 했다.

'그래서 내 결론은······'

며칠 같이 지내본 결과, 김용철 작가는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아랫사람들에게는 정말 친절하다는 것.

그리고 영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조수로 오길 정말 잘했다. 배울게 많구나. 그나저나 이준성 교수에겐 미안하지만······'

학생들을 약 올리고 술도 얻어먹으려는 이준성 교수와는 너무 극과 극이었다.

이준성 교수가 싫은 건 아닌데, 어쨌거나 하늘과 땅이었다.

그렇게 매일,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에서 새벽까지 김태민과 같이 작업했다.

주 5일 출근이었지만, 거의 최소 6일을 출근했다.

우린 몸에 안 좋은 유성 물감을 뒤집어 써가며 치열하게 작업했다.

'생각만큼 몸에 해롭지는 않은 가 보구나.'

왜냐면 김용철 작가가 바로 거의 세계에서 제일 많이 유성 물감을 호흡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건강했다.

그러니 유성물감의 독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김태민도 생각보다 잘 버텼다.

잘 버티는 정도가 아니라, 훌륭한 동판화도 여럿 뽑아냈다.

친구가 대견하기도 하고.

근사한 아버지가 있어서 부럽기도 했다.

* * *

집에 도착하니 거의 새벽 두 시 반이었다.

차에서 내리려다 핸드폰을 봤는데 부재중 통화가 여럿 와 있었다.

유나였다.

그리고 몇 통은 아주 방금 걸려온 전화였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유나에게 곧바로 전화했다.

금방 유나가 받았다.

"운전 하느라 몰랐어. 아직 안 잔 거야?"

"응. 유미도 공부하고, 나도 과제하느라 아직 못 잤어. 그냥 생각나서 전화해 봤어. 이제 도착한 거야? 나 잠깐 내려갈게, 너 차에서 기다려."

유나의 집과 우리 집은 걸어서 4~5분 거리.

나는 유나가 시키는 대로 유나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후다닥.

작은 그림자가 빌라에세 나와 차로 달려왔다.

딸깍.

금방 조수석에 유나가 올라왔다.

"바보야, 피곤해 죽겠지? 그러게 회사랑 학교랑, 안 그래도 바쁜 놈이 왜 조수까지 욕심을 내!"

얼핏 들으면 야단치는 것 같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유나는 그냥 솔직히 말하는 게 어색할 뿐, 새벽에 내가 걱정돼서 얼굴까지 보러 온 것이다.

"야, 그리고 이거."

유나는 내게 보온병을 내밀었다.

"유미 먹이려고 야채죽 만들었는데, 너도 아침에 먹어."

봤나? 김태민.

친절한 누나들 다 필요 없다.

유나만 있으면 된다.

"잘 먹을게. 맛있겠다. 그런데 무슨 과제 했어?"

"강영 교수 과제. 자기 장단점 발표. 아오. 초등학교 자기소개 같은 과젠 줄 알았는데,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잘 안 풀리는지 유나는 씩씩 거렸다.

"그래서 네 장단점이 뭐라고 했는데?"

"어, 그래. 한 번 들어봐. 내 장점은 일단 검정색을 잘 쓰는 색감."

물감에 검정색을 섞는 것을 암청색이라고 한다.

암청색은 투명하고 순수한 느낌, 또는 우울하고 서정적인 느낌, 혹은 수묵 담채화 같은 효과를 줄 수도 있다.

유나는 암청색을 쓰면서도 밝은 느낌의 그림을 잘 그렸는데, 자신의 그 부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어. 내가 그리고 싶어서 기억해뒀던 장면이랑, 그 때를 찍어둔 사진이랑 나중에 비교해보면 너무 다른 거야. 이 점을 내 장점이라고 하고 싶은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건망증?"

"우이씨."

"기억조작."

"아, 진짜!"

"그리고 내 단점은······"

"말을 못 되게 하는 거, 자꾸 때리는 거, 화를 잘 내는 거."

나는 괜히 끼어들었다가 몇 대 더 맞았다.

안 그래도 힘들게 목판을 새기느라 온몸이 뻐근했는데, 주먹으로 맞으니까 안마도 되고 정말 시원했다.

"그런데 이주원, 너는 장단점 뭐라고 할 건데?"

"음. 일단 부지런한 거?"

"그건 인정이지."

"돈이 많은 거, 건물이 많은 거."

"아, 장난치지 말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친구가 있는 거, 그 여자 친구를 확실하게 사로잡은 거······"

여기까지 말했을 때, 어김없이 유나의 주먹이 날아왔다.

"네 단점은 헛소리를 잘하는 거! 매를 버는 거다!"

좀 앙칼지긴 하지만, 꽤 괜찮은 자동안마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