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82화 (182/203)

■ 182. 이유 □

드디어 4학년, 개강을 맞았다.

4학년이 되면 수업의 방식이 조금 바뀐다.

이제까지는 교수들이 과제를 내주면, 학생들이 그것을 고민했다.

하지만 4학년부터는 학생들이 직접 주제를 정하고, 작품을 연구한다.

그래서 수업 명칭도 '작품연구'.

작품연구의 수업은 강사가 아닌 정식 교수들이 맡는다.

교수별로 하나씩.

보통 한 학기에 서너개의 작품 연구 수업을 듣는다.

학생들이 주제를 가져오고 작품을 만들면 교수들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하는 방식.

교수들이 학생들을 보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6월이 되면!

여름방학이 되기 직전, 대망의 1차 졸전 평가를 한다.

그땐 4학년들이 다 모여서, 한 학기 동안 만든 작품들을 교수들 앞에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거의 죽음의 날이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방학동안 놀지 못하도록 살벌하게 몰아친다.

[ 이래서 졸업을 하겠어! ]

[ 겨우 4년 동안 생각한 게 이 정도야? ]

[ 이런 작품을 졸전에 내고 창피하지 않겠어? 이게 고등학교 학예회야? 애초에 이 실력으로 여기 합격은 어떻게 한 거냐? ]

평소 친절하던 교수들이 매섭게 몰아치면 충격은 2배가 된다.

그것도 동기들 전부가 보는 앞에서.

물론 작품이 좋으면 모든 4학년 학생들과 교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칭찬을 듣는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린 깨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짝 긴장하고 4학년 첫 수업을 맞았다.

이번엔 유나와 김태민, 수진선배까지 우린 가능한 시간표를 똑같이 짰다.

그런데 연구 수업은 사실 전공 필수 과목이라 아는 얼굴들을 거의 다 만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첫 연구 수업은 강영 교수.

"오랜 만이다. 방학 잘 보냈나. 푹 쉬었으면 이제 시작해야지? 그리고 올해는 내가 졸전 총괄을 맡기로 했다. 그러니 모두 같이 괜찮은 졸전을 만들어보자."

지도 교수가 누구냐에 따라 졸전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젊고 세련된 강영 교수가 맡았으니 우리는 꽤 운이 좋은 편.

강영 교수는 강의를 이어갔다.

"졸전도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에 어차피 완벽한 예술가는 없다. 너희들은 대학생이니까 더더욱 그렇겠지. 허점투성이 일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래서 내 작전은 이렇다. 너희들 각자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끌어내고, 단점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다."

맘에 드는군. 강영.

사실 이 몸도 언제나 전략적으로 움직이지.

면접도 전략, 소개팅도 전략, 사업도 전략.

내가 바로 전략의 남자, 이주원이다.

"자, 그래서 내가 제안하겠다. 본격적으로 6월 평가를 위한 과제를 만들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분석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다음 주까지 각자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정리해 오도록. 각자의 장단점을 모두들 앞에서 발표하고, 그 해결법을 모색해보자."

나름 괜찮은 방법인 듯.

그렇게 4학년 첫 수업의 과제가 내려졌다.

그리고 두 번째 연구 수업.

바로 마녀 윤성례 교수.

차가운 표정의 윤성례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워낙 악명이 높아서 보는 것만으로 살짝 떨렸다.

"나는 주로 작가노트 쓰는 법을 가르친다."

다른 교수들은 적어도 한 번 쯤은 2, 3학년 때 겪게 된다.

하지만 윤성례 교수는 오직 4학년 수업만 맡는다.

그래서 우리 모두 처음 만나는 상황.

보통 처음이면 자기소개부터 할 텐데, 윤성례 교수는 그런 것 없었다.

[ 설마 나를 모르지 않겠지? 나를 모른다면 그건 너희들 잘못이다. ]

아마도 이런 자신감?

하긴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윤성례 큐레이터는 반드시 알아야 할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마녀의 강의는 계속 되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특별히 강의실에서 수업하고, 다음 주부터는 하루에 4명씩 내 사무실로 찾아온다. 순서는 너희들이 알아서 정하고, 내게 명단을 제출하도록."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떨면서 들어가 울면서 나오는 공포의 1:1 면담.

물론 나는 노련한 회귀자.

나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고 싶어서 살짝 승부욕이 들기도 했다.

과연 윤성례는 회귀자도 울릴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수진 선배나 유나, 심지어 김태민까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통 작가들이 작품을 하는 순서는 이렇다. 먼저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의 배경과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노트를 쓴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해 본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에 대해 작가노트를 쓰는 것이다. 작품은 너희들이 1차 평가에 제출할 세 점의 작품들로 한다."

음······

이것도 괜찮은 과제 같은데?

순서를 바꿔보는 것은 언제나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준다.

역시 성깔만으로 한국 최고의 큐레이터가 된 게 아니었다.

"물론 작품은 나중에 바꿔도 된다. 어쨌든 너희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가상작품으로 최대한 그럴듯하게 작가노트를 써오면 된다. 그리고 나와 작가노트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시간은 꼭 지키도록."

학생을 괴롭힌다는 점에서 윤성례 교수는 이준성 교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이준성 교수는 당당하게 저항하거나 자신을 웃긴 학생에겐 관대하다.

하지만 윤성례 교수는 저항하는 학생은 더 철저히 짓밟는다.

물론 둘 다 학생을 괴롭히면서 즐기는 변태라는 점은 똑같다!

어쨌거나 어느새 수업은 끝나고 과제가 내려졌다.

4학년이 시작하자마자 과제 2개가 벌써 떨어진 것이다.

'과연 4학년은 바쁘구나.'

마지막으로 서춘일 교수.

서춘일 교수는 2, 3학년 회화 수업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할아버지 교수 같아서 서춘일 교수의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방학 잘 보냈나. 너희들도 드디어 졸업반이구나."

서춘일 교수는 느릿느릿 자상한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모두 바쁠 테니까, 내 수업은 편하게 가자. 모두 알아서 자기 작품을 진행하면 된다. 나도 설렁설렁 작업실을 돌아다닐 테니까 혹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날 붙잡고 물어보면 되고. 아니면 내 교수실로 찾아와도 된다. 앞으로 출석은 부르지 않을게. 모두 출석한 걸로 해주마. 학점도 모두 잘 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

단?

"나도 가끔 수업을 빼 먹을 지도 모르니까, 교수실 노크를 했을 때 답이 없더라도 그러려니 하도록. 나이 드니까 힘도 없는데 부르는 곳은 많아. 그리고 내가 자꾸 깜박깜박해서. 너희들도 4학년이니까 내 마음 이해하지? 그러니까 우리 서로 편하게 한 한기를 넘기도록 하자."

대단하다!

이런 초특급 날먹 교수를 봤나.

이렇게 수업을 진행하고 수백만 원 을 받아가다니!

의욕에 찬 젊은 교수 강영.

학생을 짓밟는 것을 즐기는 마녀 변태 윤성례.

그리고 할아버지 날먹 교수 서춘일!

그렇게 4학년 1학기가 시작되었다.

* * *

학교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김태민과 함께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에 가기로 했다.

김태민을 만난 김에 물어봐야지.

"태민아."

"응?"

"그런데 왜 갑자기 아버지 조수로 들어오려는 거야?"

원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것도 왜 하필 막차로?

"음······"

김태민이 잠시 대답을 정리했다.

"실은 어렸을 때는 아버지 작업실에 자주 놀러갔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좀 에너지가 많이 넘치잖아."

확실히 그랬다.

아프리카 물소란 말이 완전히 공감이 갈 정도였다.

"아버지가 언제나 의욕이 넘치고, 사람들을 앞에서 이끌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고······처음엔 그런 모습이 멋있었거든. 그런데 보고 있으면 뭐랄까······주위 사람들이 거기에 말려들고 휘둘려서 지배당하는 느낌?"

음.

확실히 다른 조수들도 굉장히 충성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김용철 작가의 카리스마가 대단하긴 했다.

김태민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느새 나도 아버지한테 휘둘리는 느낌이 들었어. 조금 나이 먹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 후에는 아버지 작업실에 가지도 않았고, 아버지랑은 그림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는 자신감이 생긴 거야?"

"응. 아직 확실히 자신감이 생긴 건 아니고.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어. 나도 이제 미대 4학년이니까. 지금이라면 아버지한테 휘둘리지 않고, 내 색깔을 지키면서도 같이 작업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단순히 재미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김태민에게도 나름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그리고 나 졸업하면 임용고시 준비해야 하잖아. 그럼 한동안 그림 안 그릴 지도 모르니까, 그 전에 아버지랑 같이 작업해보고 싶기도 했었어."

끄덕끄덕.

난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런데 임용고시도 참 대단했다.

김용철 작가의 인맥 정도라면 굳이 임용고시를 보지 않더라도 사립학교 미술 선생님으로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려면 최소 1~2년.

그마저도 백퍼센트 합격을 장담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태민은 아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직접 고시를 치를 생각이었다.

평소엔 어린 아이 같은 구석도 많지만, 확실히 이런 점은 멋있기도 했다.

"아버지 작업실엔 항상 사람들이 많잖아. 잘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곳에, 또 다들 열심히 작업하는데 혼자 기웃거리기가 좀 그랬거든. 그런데 유나가 네가 조수로 채용되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막 달려갔지! 기회다 싶어서."

음, 그랬었군.

"그런데 나 조수로 뽑힌 지 며칠 됐는데, 아버지가 말씀 안 해 주셨어? 그걸 유나한테 들었다고?"

"아······"

김태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해맑게 웃었다.

"최근에 수진 누나랑 논다고 집에 잘 안 들어갔거든."

그랬구나.

우리 태민이도 겨울방학을 참 알차게 보냈구나.

그렇게 모든 퍼즐이 완벽히 맞춰졌다.

* * *

나. 김태민. 최미향.

우리 셋은 긴장하고 김용철 작가 앞에 섰다.

참고로 김태민은 자기도 판화를 잘한다고 우겨서 들어왔다.

그런데 거짓말이었다.

김태민은 분명 그림을 잘 그린다.

색감도 탁월하다.

하지만 정교하고 힘든 작업을 오래하지 못한다.

피규어 만들 때도 뇌가 정지했었다.

판화야 말로 정교함과 반복된 육체노동의 정수!

둘 다 겪어본 내가 말하건대, 피규어 만들기의 세 배 정도 힘들었다!

물론 진짜 피규어는 또 어떨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과연 김태민의 두뇌가 판화를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김태민은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 것인가?

그리고 나는?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지배해버리는 김용철 작가.

나는 과연 그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것들만 쏙쏙 잘 훔쳐갈 수 있을 것인가?

김용철 작가가 우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번에 내 작품의 컨셉은 '거닐다'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고, 지금은 실험적인 단계다. 한 남자를 떠올려보자. 그 남자가 앞으로 걷고 있다. 그럼 그 남자 주위로 배경이 변하고 시간이 흐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변화를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김용철 작가의 설명을 들었다.

"나는 시간과 배경의 변화를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생각이다. 하나는 목판화. 간단한 도형들을 목판으로 찍어서 반복적으로 나열한다. 그리고 색깔을 다양하게 바꿔준다. 색과 도형의 반복과 변화로 관객에게 율동감과 시간의 흐름을 주입하는 것이다."

과연 김용철 작가의 아이디어는 거침이 없었다.

같은 모양을 반복해서 표현하려면 확실히 판화가 유리하다.

특히 목판화는 풍부하고 아름다운 색의 연출에 유리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동판화다. 애니메이션을 연출하듯이 배경의 움직임을 판화로 연출할 것이다. 그렇게 관객에게 마치 자기가 걸어가서, 배경이 변하는 듯한 느낌을 심어줄 생각이다."

목판화는 말 그대로 나무판에 새겨서 찍는 것.

그에 반해 동판화는 방법이 다양하다.

직접 동판에 그림을 새길 수도 있고, 아니면 화학 약품으로 부식을 시켜서 그림을 새길 수도 있다.

동판은 목판에 비해 정교한 연출이 가능하다.

그리고 마치 인쇄물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어서, 확실히 애니메이션 느낌의 표현에 유리할 것이다.

"자, 목판과 동판. 나는 두 작업을 동시에 진행할 것이다. 그럼 셋 중 누가 목판, 누가 동판을 맡을 건가?"

음······

이번 작업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목판화는 단순한 도형을 새기되 색에 여러 변화를 줘야한다.

다시 말해 색이 중요한 작업!

그에 반해 동판화는 세밀한 연출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드로잉의 기본기와 판화의 기술이 중요할 것이다.

'색이라······'

참고로 나는 그림에서 '색'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의 영역이라 믿는다.

대상을 묘사하는 드로잉 기술은 충분히 훈련으로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색은?

동일한 색을 대할 때도 사람들은 각각 다른 감정과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재능 있는 화가들은 마치 대형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색의 미묘한 변화를 이용해 관객의 마음을 지휘한다.

김태민이 그리는 미묘한 신비로움.

유나가 그리는 서정적인 느낌.

모두 상당 부분 색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내 그림이나 남동민의 그림이 살짝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역시 색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김태민이 목판화를 맡고, 내가 동판화를 맡는 게 맞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자기가 잘 하는 것만 해서는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난 고생하기 위해 여길 찾아온 것이다.

'언제까지 내 색감이 촌스럽다고 인정하며 살 수 없잖아.'

이번 기회에 극복해보겠다.

내가 최미향에게 말했다.

"제가 목판화를 하겠습니다. 누나가 판화 기술이 뛰어나니까, 누나랑 태민이가 함께 동판화를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김태민도 내 의도를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작업실에 조수가 되겠다고 찾아왔으니까, 더 이상 어리광을 부려선 안 될 것이다.

정교하고 치밀한 동판화.

김태민도 이번 기회에 자기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난 좋아요. 제가 동판을 할게요. 누나는 어때요?"

"나도 좋아. 우리 둘이 동판을 맡으면, 두 작업의 속도가 얼추 맞을 것 같아."

우리의 의논을 김용철 작가가 옆에서 보고 있었다.

김용철 작가는 분명 내 성향과 아들의 성향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번 결정이 뭘 의미하는지도 대강 짐작할 것이다.

"그래, 그럼 한 번 잘 해보자고."

그렇게 씨익 웃으며 우리를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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