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청개구리 작전 □
"자, 공고에서 봤겠지만 이번에 내가 할 작업은 판화입니다."
김용철 작가는 느릿느릿 말했다.
전에도 말했듯 판화는 육체적으로 꽤 힘들다.
판화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같은 그림을 여러 장 찍어내려면 단순 작업, 반복 작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목판화나 고무판화라면 직접 조각도를 들고 그림을 새겨야 한다.
그러니 김용철 정도의 작가라면, 조수를 구하고 일을 나누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특히 김용철처럼 다작을 하는 작가라면 판화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회화에서도 조수를 쓰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그래서 판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군요. 미리 말하자면 나는 판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도 종종 판화를 찍곤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점이 판화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까? 자유롭게 말해보세요."
"그럼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김용철 작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윤재가 씩씩하게 나섰다.
그러라는 뜻으로 김용철 작가가 찡긋 눈빛을 보냈다.
"저는 판화는 평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시장경제에서 가장 진화된 미술의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거창하군요. 왜 그렇죠?"
김용철 작가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이윤재는 여전히 씩씩하게 대답했다.
"넵,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판화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미술작품들은 부자와 귀족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미술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과학이나 문학 같은 다른 분야보다 미술의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판화는 미술작품 소유의 장벽을 크게 낮춰 줍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긴 했다.
판화는 똑같은 그림이 여러 장 존재하니까 확실히 값이 싸긴 하다.
"판화는 사진과도 다릅니다! 사진이 이미지의 복제라면, 판화는 한 장, 한 장이 전부 진품이니까요! 판화는 예술에 있어서 사회적 평등을 완성하는 가장 정의롭고, 가장 진보한 미술 형식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명감을 가지고 판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 최고의 작가님의 작업에 사명감을 가지고 제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대단하군요."
거창한 이윤재 그 뒤에 최미향은 비교적 무난하고 평범한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작전, 주원아 작전을 짜자.'
회귀자의 두뇌가 광속으로 회전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아프리카 물소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인가?
정답은?
정직이다.
어떤 근사한 대답을 해도 김용철 작가는 맘속 진심을 훤히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김용철 작가 같은 유명인은 화려한 말로 포장된 인간관계가 지겨울 것이다.
그렇다면?
내 전략은 바로 아들 친구의 풋풋한 진심이다!
나는 정직한 답변으로 달린다!
"주원씨는요? 주원씨는 왜 판화를 좋아하죠?"
"저는 판화가 비겁해서 좋습니다!"
"네?"
비겁?
나의 뜬금없는 대답에 김용철 작가는 물론, 이윤재와 최미향까지 의혹에 찬 얼굴을 지었다.
"전 솔직히 그림에 대해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때로는 다소 무섭기도 합니다. 그런데 판화는 무섭지 않습니다. 판화는 기술적 제약이 많습니다. 수정도 쉽지 않고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영역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래서 결과물에 대해 '판화라서 그렇다'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변명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어서 저는 판화가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판화는 안전하기 때문에 더 즐겁고,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반응은?
김용철 작가가 살짝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감췄다.
웃은 건가?
일단 웃었다면 절반은 성공이다.
"그런데 이주원씨. 정리해봅시다. 제약이 많다. 그래서 변명할 수 있다. 덕분에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제약이 많은데, 자유롭다? 이건 모순 아닌가요?"
역시 김용철.
예리하군.
"네, 모순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자신을 감출 수 있으면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이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서는 악플을 다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피식.
이윤재의 거창한 답변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달리는 나의 대답.
익명 게시판이나 악플 같은 단어에 김용철 작가뿐 아니라 다른 두 명도 함께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 선택조차 내 전략의 일부!
김용철 작가의 면접은 계속 되었다.
"그럼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 봅시다. 세 분 다 포트폴리오는 우수했습니다. 다들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그래도 본인이 설명하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은 다를 테니까. 직접 사진을 보면서 자기 작품들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작품에서 어떤 점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우리 다 같이 한 번 들어봅시다."
이번엔 최미향이 먼저 했다.
판화 공방에서 수강생들을 가르친다는 최미향.
꽤 성실하고 괜찮은 작품들.
다음은 이윤재.
한국대 다음 미술 명문으로 꼽히는 H대 대학원생답게 자기 작품에 대해 자부심이 엄청났다.
그는 이번에도 씩씩하게 작품들을 설명했다.
"이 작품에선 인간 소외와 물질주의를 비판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의견 제시만이 제 작품의 주제는 아닙니다. 제가 작품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바로 저 자신의 행복과 만족입니다. 예술가로써 사회적 역할 이행과 작가 개인의 성찰이 함께 수행될 때 비로소 예술의 가치가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점을 가장 정확히 이행하시는 분이 바로 김용철 작가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거창한 주제의식으로 시작해 적절한 아첨까지.
이윤재의 답변은 잘 훈련된 만점 답안지 같았다.
"그렇군요. 좋게 봐줘서 고맙군요. 다음은 이주원씨."
나는 최대한 간단하게 내 작품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 작품은 대부분 학교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학점입니다!"
난 이번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학점이라는 말에 김용철 작가는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직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웃겼으면 일단 성공!
"말씀 드렸듯 저는 아직 제 그림에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섣불리 확신을 갖는 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그림을 그릴 땐 행복하고, 또 치열하게 몰입합니다. 하지만! 화가는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을 남과 공유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유할 수 없는 행복은 치졸한 자기만족일 뿐! 자신을 편애하는 예술가만큼 한심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주먹을 한 번 불끈 쥐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외쳤다.
"제 주위에서 가장 정확한 공유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교수님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 항상 교수님의 눈으로 제 작품을 바라보고, 객관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려고 애씁니다."
"음, 그렇군요. 나도 동감합니다. 객관적인 반성은 언제나 중요하죠."
김용철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나의 컨셉은 청개구리.
기름기는 쏙 빼고, 남들과는 반대로 초 솔직함으로 달린다.
과연 나의 청개구리 작전은 먹힐 것인가?
그렇게 면접은 흘러, 흘러 드디어 마지막 질문.
"그럼 마지막으로 물어보죠. 이윤재씨. 최미향씨. 그리고 주원군. 셋 다 유능하고 바쁜 젊은 인재들인데 왜 이번에 내 조수로 지원했죠? 지원한 목적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군요."
어쩌면 오늘 면접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일 수도 있었다.
먼저 최미향.
"저는 판화 공방을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나 주부들, 퇴근한 직장인들을 상대로 예쁜 판화를 찍는 요령을 가르쳐주고 수강료를 받습니다. 그것도 괜찮은 직업입니다. 다만······나도 이것과 다른 삶을 살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이 모집 공고를 봤습니다. 어쩌면 이 일이 내게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최미향은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이윤재.
"김용철 작가님의 조수로 지원하는 것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늘 동경하던 분이고, 또 존경하는 분이었습니다. 김용철 작가님의 작품들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가치 있고, 앞서 나가는 작품들입니다. 그 완성에 제가 기여할 수 있다면 한국 미술사의 최전선에서 같이 호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최고의 작가님에게 배울 수 있다면 저 자신에게도 강력한 성장의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게 봐줘서 고맙군요."
그리고 김용철 작가가 내게 얼굴을 돌렸다.
"그럼 주원씨는,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굳이 왜 내 조수로 지원했죠?"
내가 바쁜 것을 아시는 군.
어쨌거나 마지막 답변.
나는 눈알을 굴리면서 대답을 정리했다.
그래, 이번에도 솔직하게 지르자.
그리고 크게 외쳤다.
"사실 별 거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큭.
나의 청개구리 답변에 김용철 작가는 드디어 소리 내서 웃었다.
일단 웃겼으면 성공!
"김용철 작가님은 약주를 무척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배들도 많이 챙기고, 미술 경매부터 방송, 대담까지 여러 행사에도 부지런히 참여하십니다. 그러니 어쩌면 김용철 작가님보다 제가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도 김용철 작가님은 부지런히 새 작업들을 시도하십니다. 물론 김용철 작가님도 사람이니까! 잠도 주무시고, 식사도 하실 겁니다. 그러니 남들 할 거 다 하면서도 자기 시간을 만들고 에너지를 충전하시는, 틀림없이 어떤 비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아주 작은 비결일지라도 꼭 찾아내서 훔치고 싶습니다!"
"훔친다고요?"
"그리고!"
"또 있어요?"
"방금 전 말씀 드렸듯 저는 아직 제 작품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매 순간 불안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김용철 작가님도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안의 형태는 다르더라도 말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슬쩍 김용철 작가의 눈치를 살폈다.
김용철 작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김용철 작가님은 한 번 작품을 내어놓을 때마다 수많은 비평가와 관객들이 달려듭니다. 그런데도 매번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실험하십니다. 일류 작가라면 안전한 선택을 할 법도 한데, 매번 모험을 택하십니다. 작가님도 사람이니까, 새로운 시도는 떨리실 겁니다. 그러니 작가님에겐 분명 불안과 두려움을 다루는 작가님 만의 기술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기술이 있다면, 꼭 배우고 싶습니다!"
씨익.
이제 김용철 작가는 감추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불안을 다루는 기술이라······재밌는 말이군요."
김용철 작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게 태웠다.
경쟁자들이 너무 강력해 합격은 나도 장담 못하겠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작가이자, 절친, 그리고 최고 라이벌의 아버지를 웃겼다.
웃겼으면 된 것이다!
'조수로 채용하진 않더라도 분명 나중에 술 한 잔은 사주시겠지.'
꾸미지 않고 진짜 내 이야기를 했더니 뭔가 후련한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면접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실 대단한 채용도 아닌데 면접이라고 부르니 조금 부끄럽군요. 어쨌거나 오랜만에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더니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김용철 작가의 사무실을 나서자 비서가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는 두툼한 봉투를 세 개 꺼내 우리에게 나눠줬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고 작가님이 드리는 겁니다."
면접비?
별로 길지도 않은 면접에 이렇게 두툼한 봉투를?
김용철 작가가 후배들을 잘 챙긴다는 말은 자주 들었다.
심지어 그걸 안 좋게 보는 작가들도 있었다.
마치 자기 파벌을 만드는 것처럼 해석한 것이다.
어쨌거나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현금 봉투를 받자 꽤 감동이었다.
물론 내 한 시간 시급의 십분의 일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이지만.
그래도 현금은 언제나 기분이 좋은 것이다.
* * *
같이 면접 본 두 사람과 헤어지고, 집으로 운전하는 길에 살짝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태민이가 부럽구나.'
유명하고 돈 많은 화가 아버지라서 부러운 게 아니었다.
아주 잠깐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언제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최고의 행운이 아닐까?
뭐, 그렇다고 내 친아버지가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그 양반은 영······
'좋은 아버지를 갖기는 이미 글렀으니까.'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겠다.
나도 근사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원래 버킷리스트에 있는 항목이었지만, 오늘은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서 강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