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76화 (176/203)

■ 176. 결투 □

쾅!

오늘도 변함없이 이준성 교수가 시끄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흐흐흐흐.

그리고 징그럽게 웃었다.

마치 낮술에 취한 백수 삼촌 같은 느낌이었다.

"자, 드디어 크리틱 시간이 왔구나. 너희들이 열심히 해준 덕에 제법 알찬 학기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이제 3학년 2학기의 마지막 과제다. 아무래도 4학년부터는 졸전을 준비하느라 철저히 개인플레이를 하게 될 거다. 그러니까 오늘, 최선을 다해 싸워라. 오늘 여기서,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것들을 시원하게 풀고 가라. 흐흐흐."

변태 교수 이준성.

마치 학생들을 위해 크리틱을 독려하는 것 같지만, 순전히 자기가 즐기기 위해서다.

그렇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회화 4의 크리틱이 시작되었다.

3학년 2학기의 마지막 과제.

이 발표가 끝나면 기말고사 조금 끄적대다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과연 산뜻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자, 조소과 꼴찌들. 나와라. 나와서 과제 발표를 진행해라.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젠 조소과 콤비도 이준성의 도발에 제법 익숙해졌다.

아니면 과제에 자신 있는 걸까?

임진만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강의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네, 그럼 크리틱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과제는 식물 중 하나를 선택해서 두 가지 매체로 표현하기입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순서는 어떻게 할까요?"

이번 과제는 솔직히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준성 교수의 수업은 긴장하게 된다.

그런데 임진만, 하우영 덕분에 과제를 두 배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들 임진만을 노려보는 시선이 곱지가 않았다.

강의실의 분위기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임진만의 표정은 여유가 넘쳤다.

"그럼 순서는 자유로 하겠습니다. 초등학생 숙제 검사도 아니고, 대학생 크리틱에 순서를 정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원하시는 분은 먼저 나와서 발표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평가는 크리틱으로 합니다. 질문은 공격, 대답은 방어. 공격과 방어를 잘 한 팀에게 더 많은 점수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흐르는 정적.

"저요! 저희 조가 먼저 하겠습니다."

먼저 손을 든 사람은 형수님, 아니 이정원과 김대성이었다.

난 그동안 이정원에게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외로웠던 형원 선배를 구제해줬기에 요즘은 조금 식구처럼 느껴졌다.

둘은 과제가 담긴 상자와 캔버스를 가지고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짧은 의논 후, 이정원이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 조는 여러 식물 중 선인장에 주목했습니다. 선인장은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잎을 가시로 변화시켰습니다. 단단한 줄기와 날카로운 가시. 그런 방어적인 모습이 현대의 도시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성이 상자에서 묵직한 작품을 꺼내 교탁 위에 올렸다.

그것은 커다란 비누 조각이었다.

작품을 꺼내자 비누향이 확 풍겨왔다.

선인장처럼 색도 녹색이었고,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선인장의 모양을 그럭저럭 비누 조각으로 재현했다.

음······

누가 봐도 선인장인 것은 알겠는데, 아무래도 시간의 한계나 경험의 부족인지 그닥 정교한 모양은 아니었다.

작품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임진만이 싱글거리며 손을 들었다.

"너무 평범한 형태의 재현 아닙니까? 거기다 비누는 제일 다루기 쉬운 재료죠. 그리고 형태도 너무 무난한 모양의 선인장. 너무 쉽게 접근하신 것 아닙니까?"

이정원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곤 발표를 이어갔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비누 조각입니다. 그런데 실제 선인장은 만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비누 선인장은 물에 젖은 손으로 만지면 부드럽게 녹아내립니다. 저희는 그 점에 착안했습니다. 선인장처럼 가시가 달린 도시인도, 결국 타인과의 접촉으로 단단한 가시를 녹일 수 있다는 것!"

뭐, 그럭저럭 괜찮은 은유 같기도 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질 때, 임진만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런 의도를 담으려 했으면 더욱 더 선인장 묘사를 철저히 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리한 가시의 느낌을 살려서, 차마 손을 뻗어 만질 수 없는 날카로운 선인장을 더 생생하게 전달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비누의 역설이 성립하는 것 아닌가요?"

이정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의 이정원은 반박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임진만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이정원, 김대성 조의 선인장 다소 미숙했다.

"아무래도 두 개의 작품을 동시에 해야 했고, 저희가 입체에도 익숙하지 않다보니······그리고 비누 조각도 생각보다 어려워서 날카로운 가시의 묘사는 다소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딱 이 정도만 만들고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겁니까?"

이정원에게 전에 당했던 대로 돌려주는 임진만.

얼굴에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정원은 부들거리며 임진만을 노려봤다.

[이게 다 당신이 과제를 두 배로 냈기 때문이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정원은 입술을 깨물고 두 번 째 과제인 그림을 가리켰다.

이번엔 김대성이 나섰다.

"그림은 제가 발표하겠습니다. 저희는 앞서 정원이가 말했듯 선인장이 현대의 도시인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인장을 사람으로 그려보았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추상화 느낌?

사람들이 검은 양복을 입었는데, 머리는 선인장이었다.

양복을 입은 선인장 인간들이 회색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번에도 임진만이 다짜고짜 끼어들었다.

"르네 마그리트의 표절인가요? 저 검은 양복과 거리 풍경,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요?"

"표절이 아니라 오마쥬입니다!"

김대성이 다급하게 항변했다.

"도시인의 차가운 일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옷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고른 옷은 검은색 정장이었습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선인장! 그렇게 구상했더니 필연적으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과 유사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일부러 마그리트의 느낌을 더 부각시켜서 그림의 흥미를······"

"식물을 관찰해서 표현하라고 했더니 다른 화가의 그림을 관찰하셨군요."

임진만이 김대성의 말을 끊고 놀리듯 말했다.

그러자 참지 못한 이정원이 다시 끼어들었다.

"분명 유사성이 있긴 하지만, 그림의 목적도 다르고 방향성도 다릅니다! 저희는 비겁하게 마그리트의 그림을 훔친 게 아닙니다. 마그리트의 그림과 닮은 점을 오히려 강조해 우리의 의도를 더 뚜렷이 드러내려 한 것뿐입니다!"

"그것 참 편한 논리네요. 알겠습니다. 본인들이 당당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임진만은 능글맞게 넘어갔다.

마치 겉으로는 임진만이 수긍하고 넘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이정원, 김대성은 분해서 씩씩 거렸다.

내가 봐도 표절은 아닌 것 같다.

다만 크리틱에서는 화내면 지는 것!

인정하기는 싫지만 오늘은 임진만의 승리였다.

이준성 교수는 얼굴가득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표절이든 아니든 학생들이 싸우면 마냥 즐거운 것이었다.

원래 끼어들기 좋아하는 이준성이었지만, 멋진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지금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얌체 같은 면도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발표가 진행되고 유나, 수진의 차례가 되었다.

수진 선배가 생글거리며 앞으로 나가 발표를 했다.

"저희는 식물의 잎과 꽃잎을 보며 옷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에게 최초의 옷은 바로 식물이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옷의 모양과 기능이 점점 복잡해지는 현대에도 여전히 모든 옷에는 식물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레이스, 지퍼, 단추. 저희는 반대로 옷을 자르고 분해해 식물을 창조해보았습니다."

원래 솜씨가 좋은 두 사람.

유나와 수진 선배는 옷으로 만든 입체와 그 입체를 그린 그림을 가져왔다.

방금 전까지 강의실에는 살벌한 칼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수진, 유나가 발표를 할 땐 화기애애하고 따뜻하다.

일단 수진 선배의 친절한 미소.

수진 선배는 적이 없다.

그리고 생글거리는 유나.

평소엔 이빨을 드러내지 않지만, 유나와 제대로 논쟁을 펼치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래서 덤비기가 쉽지가 않다.

유나, 수진 조는 한 마디로 크리틱의 중립지대, 무적 콤비라고 할 수 있었다.

작품 자체도 딱히 약점이 없어서, 무난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용하게 둘의 발표가 끝났다.

"자, 다음 차례는 누구죠?"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마치 우리 차례를 재촉하듯 임진만이 히죽거리며 나와 김태민을 바라보았다.

먼저 발표해도 되지만, 왠지 임진만에게 떠밀려 나가는 기분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임진만이 징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럼 저희가 먼저 하겠습니다. 순서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미 작품은 완성되어 있는데."

그리고 마치 부하를 대하듯 하우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우영이 일어나 강의실 뒤에서 작품을 가져왔다.

'대체 얼마나 자신 있길래.'

임진만의 여유로운 태도가 굉장히 거슬렸다.

하지만 나는 냉철한 회귀자.

이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임진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의실 모두가 임진만을 노려보는 가운데, 임진만은 당당하게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는 먼저 여러 종류의 식물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식물의 본질적인 부분을 작품으로 다루고 싶었습니다. 식물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조용한 강의실.

호응 없는 질문.

하지만 아랑곳 않는 임진만.

"저희는 그것이 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식물은 땅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화려한 색으로 벌레들을 모으고, 화려한 색으로 광합성을 하고, 화려한 색으로 천적을 쫓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식물의 색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짜잔!

임진만의 발표에 맞춰, 하우영이 솜씨 좋은 마술 조수처럼 작품을 덮었던 신문지를 벗겨냈다.

가져온 작품은 두 개지만, 먼저 입체부터 공개한 것이다.

아아······

하얀색 플라스틱 꽃이 줄기부터 입까지 고스란히 교탁 위에 놓여 있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꽤 잘 만든 작품.

'당당할 만 했구나.'

순간 강의실의 정적이 감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잘한 것은 잘한 거고, 크리틱은 크리틱이다.

자기 차례에서 호되게 당했던 이정원.

같이 당했던 김대성.

그냥 임진만이 싫은 김태민.

임진만 괴롭히기에 재미를 붙인 나.

우리 넷은 다 같이 작품을 노려보며 결점을 찾았다.

"여러 식물 중에서도 저희는 나리꽃을 선택했습니다. 나리꽃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식물 중에서 모양이 제일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색도 요란했고요. 색과 형태가 복잡한 그물처럼 긴밀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리꽃을 선택해 색을 소거해 보았습니다. 나리꽃에서 색이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보십시오. 이게 그 결과물입니다."

너무 당당한 임진만.

자기의 작품에 완전히 심취한 것 같았다.

작품에 대해 말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칭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손을 들기 싫었다.

다행히 강의실의 누군가가 대신 손을 들고 질문했다.

"재질이 뭐죠? 플라스틱 같은 건가요? 줄기는 가늘고, 잎과 꽃잎은 얇아서, 입체로 만들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만든 건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하하하, 네, 맞습니다. 일종의 플라스틱이죠. 저희 조소과는 여러 종류의 재료를 다루니까, 다른 과 사람들에겐 신기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꽃의 특성상 한 번에 떠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이파리 하나씩 플라스틱으로 모양을 만든 후에 일일이 조립해서 꽃을 완성했습니다. 꽤 힘든 작업이긴 했지만······작품을 위해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겨우 선인장 가시를 시간이 없어서 재현을 못했다?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더군요."

엉겁결에 다시 언급된 이정원, 김대성 조.

이정원이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플라스틱이었군요! 원래 작품을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인데 방금 하시는 말씀을 듣고 생각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작품 자체에 강하게 거부감이 듭니다. 아마도 플라스틱 재질 위에 흰색 아크릴 물감으로 색칠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인공으로 가득 찬 이 작품! 모양은 식물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전혀 식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게 과연 성공적인 식물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이정원의 날카로운 반격!

하지만 임진만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바로 그겁니다! 거부감! 저희가 원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가까이서 보고 즐겼던 예쁜 꽃에서 색을 제거했을 때 느껴지는 이질감, 당혹스러움, 거부감! 바로 저희가 원하던 작품의 의도였습니다. 이정원씨가 그렇게 느껴주셨다니, 저희 작품이 제대로 먹혔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크읏.

공격하려고 나섰던 이정원.

오히려 임진만을 도와준 꼴이었다.

크리틱 꿈나무 이정원이 임진만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정원아, 형원 선배랑 썸을 타더니 창날이 무뎌졌구나.'

쯔쯔쯔.

수제자 탈락이다.

이정원은 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형원 선배. 안심하세요. 정원이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임진만은 제가 물리칠 테니, 형은 정원이를 잘 달래주세요.'

내가 고요히 손을 들었다.

흐흐흐.

기다렸다는 듯 이준성이 웃음을 흘렸다.

마치 권투의 메인 시합을 기다리던 관중 같았다.

그리고 임진만의 입꼬리도 한쪽으로 올라갔다.

과연 평소의 나만 보던 쩔쩔매던 그 임진만이 아니었다.

강의실을 가르는 음흉한 목소리.

"네, 이주원씨. 말씀하시죠."

끼이익.

나는 의자를 뒤로 밀고, 천천히 일어났다.

"일단 좋은 작품 잘 봤습니다. 복잡한 형태의 꽃을 이렇게 정교하게 재현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임진만이 어깨를 으쓱하며 뭘요, 이쯤이야, 표정을 지었다.

"식물의 본질이 색이다. 그래서 색을 소거했다. 발상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식물의 다양한 색은 흥미로운 부분이며, 또한 서양화에서 쓰는 많은 물감도 식물의 색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식물은 모든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죠."

임진만이 미소 속에 적의를 감추고 나를 노려봤다.

[ 이제 덕담은 그만하고, 싸움을 시작하지. 덤비라고. ]

[ 그러지. ]

짧은 시선의 교환 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목소리를 바꿨다.

"그런데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식물의 색을 논하기 위해 색을 소거했다. 그래서 흰색 플라스틱 나리꽃을 가져왔다."

"그렇습니다."

"흰색은 흰색 아크릴 물감을 칠한 거죠. 그렇다면 원래의 플라스틱은 무슨 색이었습니까?"

그걸 왜 묻는 거지?

임진만의 얼굴에 짧은 의혹이 흘렀다.

폴리코트의 원래 색은 한마디로 설명이 힘든 복잡하고 미묘한 인공적인 회색이다.

임진만이 대답을 망설이는 찰나.

"아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식물에서 색을 소거하면 흰색이 됩니까?"

"네?"

"꽃이든, 난초든, 감나무든. 아니면 상추라도. 어떤 식물이든 상관없습니다. 머릿속에 하나의 식물을 상상해보죠. 그리고 그 식물의 색을 소거하면 흰색이 남습니까?"

"그, 그건······"

"사물에서 색을 소거하면 흰색이 된다. 그건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가 아닌가요? 그림을 배운 우리야, 작품에서 색을 소거하면 흰색이 남겠죠. 색을 칠하기 전 종이가 흰색이고, 석고가 흰색이고, 스티로폼도 흰색이고, 에폭시 퍼티도 흰색이고······등등등. 하지만 사물은요? 사물도 그렇습니까?"

"그, 그건······"

당당하던 임진만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뭔가 답변을 생각하려 애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때 한 번 더 공격해야 한다.

"원래 종이는 흰색이 아닙니다. 물감을 칠했을 때 발색이 좋도록 독한 화학 표백제로 자연의 색을 씻어내는 거죠. 하지만 나리꽃도 그럴까요? 인간이 작품을 만들기 좋도록, 꽃의 분홍색을 소거하면 흰색이 남습니까?"

"그건, 제 작품의 흰색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편의상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입니다.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입니다. 원래 나리꽃의 색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색이 사라지고 아무 색도 아닌 흰색이 남은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원래의 색이 중요하지 않다고요? 색이 식물의 본질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본질이 중요하지 않다? 그것 참 편리하군요. 분명 자연에서 흰색은 색의 공백이 아닐 겁니다. 이 작품은 색을 소거한 게 아니라, 흰색이 원래의 색을 대체한 것뿐입니다. 마치 플라스틱 위에 흰색 물감을 바른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작품의 색의 개념이 크게 어긋났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래도 본인이 당당하다면 상관없겠지만요."

나는 임진만이 약 오르도록 생글거리며 웃었다.

크윽.

임진만의 얼굴에서 그 징그럽던 미소가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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