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내가 임진만이다! □
나는 파주의 영화사 마당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내가 처음 김제우 감독을 만난 것은 5년 전.
그때 영화사 마당의 사옥은 강남에 있었다.
하지만 영화사 마당은 계속 승승장구했고, 지금은 파주의 으리으리한 사옥에 머물고 있다.
김제우 감독이 만든 영화는 평가는 언제나 그닥이었다.
하지만 흥행만큼은 꾸준했고, 그가 제작한 영화들도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아마 파주 사옥도 시세 차익이 제법 될 것이다.
'어쩌면 김제우 감독은 영화보다는 사업쪽에 소질이 있는 지도······'
그리고 김제우 감독과 면담을 가졌다.
"어서 오게. 그래, 수진씨랑은 이야기를 해 봤나?"
뭔가 잔뜩 기대에 찬 표정.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미안했다.
"실은 저도 그 영화 건축학기초의 시나리오가 맘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제작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주연은 수진 선배한테 맡길 생각입니다."
어어?
김제우 감독이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금은 제가 충분히 유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영화 제작 일은 잘 몰라서 감독님께서 여러 모로 조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김제우 감독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다 자리를 찾아갔다.
"자네가 하겠다고?"
"네. 그래볼 생각입니다."
자금은 넉넉했다.
영화 제작비가 얼마나 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영화라도, 화장품 브랜드 5DE의 한두 달 이익이면 100% 충분히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1년에 빌딩 열 개 살 거를 여덟 개 산다고 마음먹으면 되겠지.'
영화 한 편 제작은 내게 그 정도 부담밖에 되지 않았다.
"자네가 하겠다고? 그리고 나보고 조언을 해달라고?"
믿어지지 않는지 김제우 감독이 같은 말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네, 언제나처럼 많이 도와주십쇼."
김제우 감독은 내가 마음에 든다고 원 디자인 초창기부터 내 후원자를 자처했다.
지금이야 하이 유나의 매출이 멀찌감치 원 디자인을 추월했다.
하지만 사업 초창기에는 김제우 감독이 소개해준 거래처들이 내게 든든한 돈줄이 되었다.
"그럼 나도 하겠네."
"네?"
어라? 이번엔 내가 놀랐다.
김제우 감독은 이 영화가 절대 안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참여 선언을 하다니.
"자네가 요 몇 년 손대는 일마다 다 대박을 친 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영화판에 제일 중요한 게 뭔 줄 아나? 흥행 공식도 공식이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건 운이야. 그리고 자네는 대박의 행운이 늘 함께 하지. 내가 누군가? 자네 후원자 아닌가? 자네가 하면 나도 하겠네.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역시 김제우 감독은 영화감독보다는 사업가 체질인 것 같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제작을 선언하자, 그 틈새에서 돈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다.
놀라운 태세 전환.
물론 나로서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김제우 감독은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 제작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흥행을 미리 알고 있는 시나리오에, 유능한 제작자까지.
거기에 넉넉한 제작비.
이 정도면 실패하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물론 건축학기초가 내 손에 제작된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흥행도 예전보다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미대생 CEO.
수익도 수익이지만, 영화 하나를 제대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다.
수익은 그 후에 생각할 문제.
어쨌거나 김제우 감독이 합류한다면 내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럼 일단 내가 박기용 감독과 자리를 만들겠네. 최대한 빨리. 셋이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세. 그리고 다른 투자자들과도 자리를 만들겠네."
"저, 제작비라면 제가 전액 부담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그러는 게 아니야. 자네 돈 많은 건 내가 잘 알지. 하지만······"
하지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제우 감독이 신나서 설명했다.
"대한민국 영화판은 좁아. 그리고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굴러가지. 그래서 일을 제대로 벌이려면 다른 사람들도 숟가락을 얹고 같이 돕도록 만들어야 해. 돈이 모자라서 투자를 받는 게 아니라네. 물론 자네가 제일 큰 지분을 갖도록 하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끼워줘야 해."
"아, 그렇군요."
내가 몰랐던 부분.
역시 영화 제작의 달인이었다.
"김제우 감독님이 함께 해주신다니 정말 든든합니다."
"아니야. 나도 갑자기 흥분되는 군."
"그런데 감독님은 건축학기초가 성공하는 영화의 충무로 공식을 전부 비켜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해. 하지만 공식을 안 따를 뿐이지, 이게 잘 쓰여진 각본이란 건 모두들 안다네. 그리고 요즘 괜찮은 영화사는 전부 강남이나 파주에 있어. 우리가 굳이 충무로 공식을 따를 필요가 없지. 시대가 바뀌지 않았나? 하하하하."
역시 사업가.
사업가들은 언제나 합리화의 달인이다.
김제우 감독은 지난 번 미팅과 180도로 말을 바꿨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모습이 더 믿음이 가는지.
아무튼 김제우 감독과의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돈 냄새를 맡은 김제우 감독은 망설이지 않고 마구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다.
사업가로서 배울 점도 많았다.
* * *
내 이름은 임진만.
나이 27세.
키 184.
몸무게 91키로.
학벌 한국대 조소과.
덩치면 덩치, 학벌이면 학벌 어디 하나 꿀리는 곳이 없다.
얼굴?
나도 인정한다.
내가 예쁘게 생긴 미남은 아니다.
하지만 이 키에, 이 덩치에 예쁘게 생겨서 어디다 쓰게?
오히려 아주머니들은 나 같은 남자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큼지막한 코.
두툼한 입술.
부리부리한 눈동자.
내가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은 길다.
지금은 여학생들이 나를 신경 안 써도 자기들이 서른쯤 되면 갑자기 내가 멋있어 보일 거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는 잘 나가는 조각가가 되어 있겠지.
아마 해외 유학도 다녀왔을 테고, 지방대 강사 정도는 맡고 있을 것이다.
그럼 어쩌면 뜻밖에 로맨스가 시작될 지도 모른다.
[ 그땐 우리 너무 어렸었다며······ ]
마치 김동률 노래의 가사처럼.
그렇게 차근차근 작가로서 경력과 명성을 쌓다보면 내게도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까 내 삶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좋았다.
물론 지금의 이 자리도 쉽게 얻은 게 아니다.
그림은 고 1에 시작했다.
그땐 키도 작고 비쩍 말랐다.
내가 잘하는 거라곤 그림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조소는 어떨까?'
조소를 선택한다면 나는 한 단계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조소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더 전망이 있지. 그림이야 대학 합격하고 나서 그려도 되니까.'
내 전략은 적중했다.
고 3이 되자 나는 한국대 반으로 옮겼고, 학원에서는 나를 특별대우까지 해줬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미술학원.
예쁜 여학생과 잘생긴 남학생이 모여드는 꿈과 낭만의 장소.
나 임진만은 그곳에서 주목받고 싶었다.
주목도 받고, 순정 만화 같은 알차고 달콤한 미술학원 청춘도 누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라고는 김대성 밖에 없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랑 닮은 녀석.
하지만 우리의 우정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난 한국대 합격이 보장된 엘리트 예술가. 하지만 넌 지방으로 가서 2류 예술 인생을 시작하겠지.'
그래도 그땐 친구가 김대성 밖에 없었다.
혼자 점심을 먹거나, 혼자 집에 가지 않으려면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하루는 김대성이 자기 비밀을 털어놨다.
학원에서 제일 예쁜 윤상미를 짝사랑한다고.
'웃기지 말라고······'
학원의 모든 남학생이 상미를 좋아하는데, 너한테 기회가 갈 줄 알아?
물론 나도 포함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심코 김대성의 코 푼 휴지 사건을 학원의 모두에게 알렸다.
학원 동기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나는 갑자기 학원 최고의 재미있는 녀석이 되었다.
'그때부터였지.'
나는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주목받는 기쁨도 같이 깨달았다.
그때부터 내 인생이 달라졌다.
'김대성, 너도 나름 내 인생에 쓸모가 있었어. 고마웠다, 친구야.'
그리고 나는 한국대 조소과에 합격했다.
당당히 한국 최고의 엘리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어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김대성이······
어리버리 김대성도 한국대에 합격한 것이다.
그것도 감히 내가 안전을 위해 포기했던 서양화과에······
'미친 놈, 주제도 모르고.'
그런데 겨울 방학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키가 자란 것.
'이것은 이제 엘리트의 삶을 누리라는 하늘의 뜻인가?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연합 엠티 날.
나는 모두에게 통하는 최고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알고 있었다.
바로 김대성의 코 푼 휴지 사건.
그날 김대성의 비밀을 한 번 더 공개했다.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고, 김대성은 군대로 떠났다.
조소과 선배들은 나를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불렀다.
술자리마다 부지런히 불려 다녔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점점.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했지.'
미술학원에서 인정받던 실력, 대학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나 임진만은 곧 조소과 에이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선배들, 특히 여자 선배들은 필요할 때마다 나를 제일 먼저 찾았다.
교수들도 마찬가지.
언제나 임진만이 1순위였다.
교수와 선배들이 나를 챙기니까, 후배들도 마찬가지.
나는 어느새 조소과 실세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 안녕하세요! 조소과 부전공을 시작한 이수진이라고 합니다! ]
강의에 앞선 자기소개.
교실에 울려 퍼지는 예쁜 목소리.
이수진은 예쁘다는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감동 그 자체였다.
세상에 저렇게 예쁜 여자가 또 있을까?
[ 안녕하세요! 저도 같이 조소과 부전공을 시작한 한유나라고 합니다. ]
있구나.
누군 이수진이 예쁘다고 하고, 누군 한유나가 더 예쁘다고 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둘 다 기적처럼 예뻤다.
물론 내가 한유나나 이수진과 사귀진 못할 것이다.
내가 봐도 두 사람은 진짜 격이 다르게 예쁘니까.
하지만 같이 웃고 떠들 순 있잖아?
내 시시한 농담에 두 사람이 웃을 땐 일주일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또 모르지.
'인생은 기니까.'
몇 년 후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유명 조각가가 되어 있다면?
지금 친해져 둔다면, 그때 다시 기회가 생길지도.
나는 결정했다.
서양화과 부전공을 하기로.
오래 전, 안전 입시를 위해 포기했던 화가의 꿈.
그림도 다시 배우고, 이수진, 한유나 두 명의 초미녀와 친해질 기회도 갖고.
1석 2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양화과 수업은 뜻밖의 시련의 시작이었다.
'김대성을 다시 만났을 때, 눈치 챘어야 했나?'
예전의 내 장난감이었던 김대성이 아니었다.
독이 단단히 올랐다.
하지만 김대성은 김대성일 뿐.
나 임진만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어린 싸가지는 뭐야?'
그녀의 이름은 이정원.
만약 이수진이나 한유나를 몰랐다면 꽤 귀엽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즈려밟아 줘야 할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김태민.
나쁜 놈.
이 놈은 그냥 생긴 것부터 용서가 안 된다.
'이 기생오래비가 이수진의 남친이라고?'
제길.
무조건 용서가 안 된다.
그리고 이주원.
제일 나쁜 놈.
김태민보다 더 나쁜 놈이다.
김태민은 잘생기기라도 했지.
이놈은 애매하다.
나랑 별 차이도 없는 것 같은데 감히 한유나와 사귀다니.
그리고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건다.
'넌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 나 임진만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란 말이다.'
별책부록으로 미친 교수 이준성까지.
그 사악한 입을 벌리고 폴리 가루를 한 움큼 먹이고 싶다.
나는 임진만이다.
내가 바로 조소과 에이스, 임진만이란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동안 당한 모든 것을 돌려줄 때가 되었다.
'폴리······'
폴리코트.
조소과 최고의 비밀 병기.
제일 편하고 제일 강력한 재료.
하지만 조각가의 수명을 대가로 받아가는 악마의 재료!
'아마 이번 과제로 내 수명이 조금은 줄었겠지. 석 달? 반년?'
하지만 상관없다.
놈들을 짓밟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악마와의 거래.
'예술의 신이여. 나 임진만이 그대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조금은 당겨졌겠군. 후후후.'
텅 빈 강의실의 어둠 속.
혼자 의자에 앉아있던 임진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영아, 가자. 작품 챙겨라."
"예, 형."
* * *
나 하우영.
내가 지금 임진만과 왜 이러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았다.
집도 강남에서 잘 살았고, 학교도 강남에서 다녔고, 학원도 강남에서 다녔고, 심지어 대학도 한국대를 다닌다.
그런데 임진만 이 자식.
선배라고 맨날 뒤통수를 올린다.
나도 나름 잘나가는 하우영인데.
'그래도 별 수 있나.'
실력도 있는 선배라 내가 어쩔 수 없다.
힘들고 괴로운 조소과 수업.
힐링을 위해 서양화과 부전공을 선택했다.
즐거운 그림 수업.
예쁜 누나들.
어? 어라?
그런데 임진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조소과를 잊고 싶어 서양화과 수업을 들었는데······
조소과 최고의 빌런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양화과 수업.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서양화과 수업은 쾌적하고 즐거웠다.
'조소과 수업? 으으······'
알고 봤더니 조소과 수업은 노동 그 자체였다.
거긴 미대가 아니었다.
진짜 미대는 이곳 서양화과였다.
어쨌거나 3학년 2학기.
마지막 서양화과 수업.
그런데 최강의 악마를 만났다.
이제는 임진만이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미친 교수 이준성.'
이준성은 말끝마다 나를 꼴찌 전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서양화과 놈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임진만 때문이었다.
모든 문제의 근원 임진만.
서양화과 놈들은 임진만을 노렸는데, 나까지 같이 도매로 두들겨 맞은 것이다.
어쨌거나 이 짓도 이제 끝이다.
오늘 수업만 끝나면 미친 교수도 끝이고, 임진상과의 조별과제도 끝이다.
전부 끝이다.
나 하우영은 오늘만 지나면 자유가 된다.
그 자유를 위해 지난 몇 주간 발암물질 폴리가루도 뒤집어썼다.
"우영아, 가자. 작품 챙겨라."
개자식.
마지막 날까지 부려먹는다.
"예, 형."
어쨌거나 마지막이다.
오늘만 지나면 나는 자유를 얻는다.
그렇게 오늘도 결전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