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약점 □
2학기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거리엔 낙엽이 흩날리고, 해는 일찍 떨어진다.
어두운 자취방.
임진만은 혼자 고독하게 앉아 지난 학기를 돌아봤다.
조소과 에이스 임진만.
시끄러운 목소리와 더러운 성격.
그리고 실력까지.
덕분에 학교에서 웬만하면 존중받았다.
여자 친구가 없는 게 아쉬웠지만, 나름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였다.
하지만!
이번 학기는 꼬여버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똑똑똑.
그때 그의 자취방을 두드리는 소리.
"우영이냐? 문 열려 있다."
그리고 두 남자는 어두운 자취방에, 더 어두운 얼굴로 마주했다.
하우영.
역시 나쁘지 않은 실력.
그는 임진만 만큼 성격이 나쁘지 않아서 제법 인기도 있었다.
누나와 동기들, 여학우들과도 잘 지냈다.
학교생활이 즐거워서 군대도 미루고 3학년을 맞았다.
그런데 어쩌다······
임진만과 꼬여서 이번 학기가 같이 고달퍼졌다.
하우영은 원래 임진만처럼 서양화과를 미워하진 않았다.
하지만.
[ 우하하하! 꼴찌 전문 조소과놈들아! ]
이준성의 목소리가 귀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학생들을 욕하고 약 올려서 창작혼을 끝까지 뽑아먹는 사악한 교수 이준성.
하우영은 이준성의 수법에 제대로 걸린 것이었다.
"형, 이번이 마지막 기회겠죠?"
"그렇다고 봐야지."
임진만, 하우영 조는 이준성의 시간에 연거푸 꼴찌를 했다.
그리고 이번엔 두 사람이 과제를 내기로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니 이번에 뒤집지 못한 다면, 학기가 끝날 때까지 꼴찌 전문으로 낙인찍힐 게 분명했다.
"형,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어설프게 우리한테 높은 점수를 주면 그 미친 교수한테 더 놀림당할 거 같아요."
미친 교수······
적당한 표현이라 생각하며, 임진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비겁하게 이길 생각은 없었어. 나 임진만은 그런 치사한 놈이 아니거든."
"······"
하우영은 임진만이 제법 치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한 건 가져왔냐?"
"예. 서양화과에 같은 학원을 다닌 친구가 있어서······그런데 이 두 놈 장난 아니에요. 특히 김태민이요."
종종 실기 수업이 끝나고 다른 학생들의 작품을 공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하우영은 어렵지 않게 이주원과 김태민의 작품 파일 몇 개를 구할 수 있었다.
임진만은 하우영이 가져온 USB를 노트북에 꽂고 김태민의 그림을 꺼냈다.
"서양화과 수석에, 아버지는 김용철. 확실히 대단한 실력이군."
임진만이 김태민의 그림을 보며 중얼거렸다.
"동민쌤도 김태민이랑 수업들을 땐 한 수 접고 들어갔대요."
"우영아."
"네, 형."
"나, 임진만이야.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라고. 그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난 물러서지 않아."
자기 딴에는 멋있게 보이려고 한 말이겠지만, 하우영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슬금슬금 불안이 차올랐다.
하지만 임진만이 옳다.
둘에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3학년 2학기가 끝나면 내년엔 졸전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부전공 수업은 듣지 않고, 졸전 준비에 매진할 것이다.
그 말은!
이번에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으면 평생 서양화과 꼴찌로 남는다는 뜻이었다.
임진만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승산이 있어."
"정말요?"
"밤새 영 아트를 다시 봤지. 놈들의 모든 것을 다 파악했다. 그리고 네가 가져온 파일들을 보며 내 분석이 옳았다는 걸 확신했지. 이번 승리로 놈들을 짓밟고, 이제까지의 패배를 만회하는 거다."
임진만은 김태민의 그림을 가리켰다.
"김태민이 실기 담당. 그림 실력이 탁월하지. 그리고 이주원이 주둥이 담당. 영 아트 때부터 기발한 아이디어는 모두 저 놈이 냈을 거야. 저때가 1학년이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호흡을 맞췄으니 당연히 손발이 잘 맞겠지. 우리의 패인은 놈들을 너무 얕본 거야. 문제는 우리한테 있다."
"그렇다면?"
"그래. 우리도 방심만 하지 않으면 해볼 만 해. 게다가 이번 과제는 우리가 낸다. 그리고 나는 이미 놈들의 약점을 찾아냈어."
"약점이요? 저 둘한테 약점이 있어요?"
하우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양화과 수석이라는 김태민.
치사하게 얼굴도 잘생겼다.
그리고 유나 선배와 같이 쇼핑몰을 운영하는 이주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직원만 거의 백 명이라고 했다.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긴 서양화과 최강 2인조.
둘에게 약점이 있다고?
"일단 저 두 놈은 시간이 없어. 김태민 저 녀석은 교직을 이수한다더군. 교직이 공부할 게 좀 많냐? 그리고 이주원은 쇼핑몰도 한다며? 그러니 두 놈 다 시간이 없어."
"그, 그렇군요. 그럴 듯해요. 그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제를 내면 되겠군요!"
"그리고 두 번째."
"두 번째 약점도 있어요?"
"흥. 당연하지. 두 번째 약점은 둘 다 그림만 판다는 것! 잘 봐. 김태민은 모든 실기과제를 그림으로 때웠어. 요즘 서양화과에선 드문 일이지. 그리고 이주원은 부전공이 영문과래. 역시 주둥이 전문이라 부전공도 문과로 간 거야. 그러니까, 이 두 놈은 그림 외에는 실기가 취약할 거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림만 못 그리게 하면 승산이 있겠군요."
하지만 어떻게?
서양화과 수업에서 어떻게 해야 그림을 못 그리게 할 수 있을까?
"하나 더!"
"또 있어요? 형, 대단해요!"
세 가지 약점이나 찾아내다니!
순간 하우영은 불안을 떨쳐내고 임진만이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놈들을 이길 수 있을 지도!
"김태민 저 놈은 고양이 밖에 그릴 줄 모른다. 저 놈한테 고양이를 못 그리게 하면 되는 거야."
"그, 그렇군요. 확실히 그래요. 김태민의 그림이 절반, 아니 거의 다가 고양이네요!"
"나를 봐, 우영아. 임진만은 절대 물러서지 않아.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냉철하게 살펴보면 약점을 찾아내지. 그리고 그 약점을 쥐고 흔들면, 어떤 적이라도 이길 수 있다. 흐흐흐."
"형,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꼭 악당 같네요. 흐흐흐."
빠각.
임진만이 하우영의 뒤통수를 올렸다.
악당이라니.
악당은 서양화과 놈들이다.
다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힘을 빼고 때렸다.
"다른 과에서 온 손님들을 환대해주진 못할망정, 다구리를 치다니. 서양화과 놈들에게 우리가 예절을 가르쳐주자. 흐흐흐."
"그러죠. 크크크"
임진만, 하우영 VS 이주원, 김태민.
그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그렇게 다시 이준성의 회화4 수업이 시작되었다.
강영 교수의 '과거와 미래의 교차' 발표는 평온하게 넘어갔다.
구상과 개념만을 발표하는 수업이라서 치고받고 싸울 건덕지가 없었다.
특히 이정원과 윤상미의 발표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내용들이라······
그래서 약간 개운하지 못한 느낌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준성의 수업에 기대가 컸다.
오늘은 또 어떤 성가신 과제가 주어지려나······
'가만있어보자. 이번 과제는 임진만이 내기로 했지.'
뭔가 찝찝하면서도 기대가 되는 묘한 느낌.
드르륵.
콰앙.
오늘도 이준성이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일 저렇게 열고 닫으면, 이준성 집의 문은 멀쩡할까? 아니면 자기 집 문은 얌전하게 다룰까.'
어쨌든 수업은 시작된다.
"자, 누구였지? 아, 그래. 네놈들. 조소과 패배자들. 네놈들이 과제를 내기로 했지. 흐흐흐흐. 그래, 앞으로 나와서 과제를 내도록. 강의실 전부가 너희들보다 모두 우수한 학생이지만 주눅들 필요는 없다. 우하하하!"
끼이익.
임진만이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강의실 앞에 서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과제를 내기 전, 먼저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조소과입니다. 하지만 서양화과 수업을 듣다보니, 다른 분야 예술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 무척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냐? 서양화과 학생들의 시선으로는 네놈들이 꼴찌지. 흐흐흐."
부글부글.
임진만이 분노를 누르며 발표를 이어갔다.
"그래서 저희가 겪은 경험을 여러분 모두에게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이번 과제는 이겁니다. 하나의 대상을 두 가지 매체로 표현하기!"
으아아아악!
임진만의 제안에 학생들이 일제히 싫은 소리를 냈다.
하나의 대상을 두 가지 매체로 표현하려면, 당연히 과제를 두 배로 하게 된다.
"크크크크."
반대로 이준성 교수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학생들이 고생할수록 즐거운 것이었다.
"저희는 그림을 배우러 온 조소과 학생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림과 입체. 두 방식으로 대상을 표현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자유입니다. 동일한 대상을 두 가지 재료와 방법으로 표현해서, 그 차이와 관련성을 탐구하는 것이 이번 과제의 목적입니다!"
"흐흐흐흐. 꼴찌 놈들이 과제는 제법 그럴듯한 걸로 가져왔구나."
이준성이 칭찬 비슷한 것을 던지자, 임진만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하나 더!"
으아아악! 우우우우우!
'하나 더'란 말에 학생들이 또 한 번 야유를 보냈다.
이미 두 배의 과제를 내어놓고는 하나 더 추가라니!
"어떤 소재를 골라야 두 가지 매체로 표현할 때, 그 의미가 극대화 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소재를 찾았습니다. 이번 과제는 매체의 선정은 자유지만, 소재는 하나로 통일할 생각입니다. 그건 바로 '식물'입니다!"
식물?
이준성과 나를 포함해 강의실 사람들 얼굴 전부에 궁금증이 맺혔다.
"식물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들은 마치 사물처럼 소리 없이 멈춰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가지고 아주 느리게 자기 모습을 바꿔갑니다. 성장을 하기도 하죠. 또 어떤 식물들은 단순한 색과 모양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물들은 화려하고, 향기를 뿜고, 심지어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식물의 양면성을, 두 가지 매체에 담아내면 더욱 의미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하하, 좋구나. 꼴찌 놈들답지 않게 머리 좀 썼구나."
이준성이 한 번 더 힘을 실어줬다.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과제는 식물 중 하나를 선택해서, 두 가지 매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순위는 크리틱으로 매기도록 하겠습니다."
"자, 모두 다 들었지? 나, 이준성 욕할 때는 욕하지만, 인정할 때는 인정해준다. 조소과 놈들, 잘 했다. 좋은 과제를 가져왔구나. 식물은 여러 화가들에게 사랑받는 소재다. 꼴찌놈 말 대로,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지. 양면성? 다면성이라고 해야 할 거다. 아무튼 식물이라면 여러 관점으로 다뤄볼 수 있다. 이번에도 시간은 넉넉하게 주마. 학기 마지막 과제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그렇게 또 한 번 과제가 내려졌다.
으음.
식물이라.
그리고 두 가지 매체라.
어떤 방식을 골라야 하는 거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번에도 꽤 어려운 주제라는 것.
하지만 나는 노련한 회귀자.
김태민과 함께라면 패배는 없다.
* * *
새 과제를 위해 김태민과 회의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오후에 회사에 출근해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자료를 검색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아, 감독님. 잘 지내셨습니까?"
영화사 마당의 김제우 감독.
원 디자인의 VIP고객이었다.
"조만간 볼 수 있을까? 우리 사무실에 한 번 와주게. 많이 바쁘면 내가 가도 좋고."
"당연히 제가 가야죠. 찾아뵙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수진씨 때문이야. 수진씨 일로 의논할 게 있어서 그렇다네."
수진 선배는 몇 편 영화를 찍긴 했지만, 졸업할 때까지 연예인 활동은 자제하는 중이었다.
힘들게 들어온 학교이니 만큼, 얼마 남지 않은 학창시절에 충실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남자친구에게도······'
그래서 매니지를 본격적으로 받지 않고, 김제우 감독의 지인이 경영하는 소속사에 느슨하게 속해 있었다.
'수진 선배 일을 나한테 의논한다고?'
수진 선배는 이제까지 학교와 영화를 잘 병행해 왔다.
학교에선 살짝 게으른 사람이지만, 영화 쪽 일은 영리하게 잘 처신했다.
그리고 수진 선배 부모님도 계신데, 굳이 나한테 의논을?
하지만 김제우 감독도 바쁜 사람이니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 그럼 찾아뵙겠습니다."
다음 날.
나는 파주 영화사 마당의 신사옥으로 직접 찾아갔다.
"어서 오게. 앉게."
내가 찾아가자 김제우 감독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수진 선배 일로 제게 의논이라면······대체 무슨 일인가요?"
"하하, 내가 너무 겁을 줬나 보군. 안 좋은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게. 실은 수진씨랑 계속 새 작품을 검토 중이었다네. 수진씨도 졸업 전에 한 작품을 더 찍어보고 싶다고 적극적이었고. 이제까지 크지 않은 배역만 맡았지만, 아직 화제성이 있는 사람이라 원하는 곳도 많았다네."
"그렇군요."
수진 선배가 적극적이었다는 말에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야. 수진씨가 작품마다 줄줄이 다 퇴짜를 놓고 있어. 자기랑 안 맞을 것 같다고. 원래는 겨울 방학 전에 촬영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을 찾겠다고 했는데······ 다 퇴짜를 놓으니까 계속 미뤄지고 있어."
"그런데 자기가 하기 싫다면 저도 딱히 방법이······"
"그렇긴 하지. 그런데 퇴짜를 놓은 작품 중에 괜찮은 작품들도 있어서 말이야. 감독으로서 아까운 작품도 보이고. 어떤 작품들은 정말 흥행이 될 것 같고, 어떤 작품들은 다른 배우들이 노리고 있고······. 그런데 수진씨가 다 싫다고 하니까 내가 아까워서 그래. 그리고 정작 수진씨 본인은 제작도 안 들어갈 엉뚱한 시나리오나 보고 있다고!"
그래서 나를 불렀구나.
"수진씨를 좀 설득해 주게. 자네 말이라면 들을 것 아닌가?"
음.
수진 선배가 은근 고집이 있어서 내 말도 안들을 수도 있었다.
"일단 수진 선배가 거절한 영화들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러지."
김제우 감독은 시나리오 뭉치 세 개를 내게 건냈다.
"세 편이나요?"
"그렇다니까. 그 중에 한 편은 영화배우 이경헌이 남주로 확정되었어. 특히 이경헌이 수진씨를 여주로 추천했대. 수진씨도 이제 졸업인데, 언제까지나 조연만 할 수는 없잖아.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게 잘 나왔는데, 대체 왜 거절하는지······"
세 편 중에 두 편이나 내가 아는 영화였다.
크게 흥행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걸 다 거절했다고? 수진 선배 살아있네.'
원래 김제우 감독의 편을 들어 수진 선배를 설득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 영화들이라면 수진 선배를 설득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수진 선배가 엉뚱한 시나리오를 보고 있다는 건 무슨 말이죠?"
"아, 자기 그림에 연구하고 싶다고 해서 시나리오들을 구해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회사에 뒹구는 시나리오들을 챙겨줬지. 공부하는 배우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그런데 그 중에 대부분은 영화화될 예정이 없단 말이야. 영화가 되는 시나리오는 아주 소수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 중에 하나에 꽂힌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