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71화 (171/203)

■ 171. 중간 점검 □

시간의 시각화.

미대는 끊임없는 과제의 연속.

오늘도 강영 교수는 새로운 과제를 준비해왔다.

"시간에 관해서 들여다보면, 세상엔 오직 현재만 있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현재의 나열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단순한데 복잡하다.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다음 생엔 물리학을 배워야겠다.

물리학이 맞긴 한가?

시간에 대해 알려면 뭘 배워야 하는 거지?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과거와 미래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현상 대부분을 차지하고,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과거와 미래의 교차. 과거의 미래의 병행. 과거와 미래의 융합. 이번 과제는 과거와 미래를 한 작품 내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음······

이번에도 어려운 주제다.

과제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이 찌푸려졌다.

"단!"

하지만 강영 교수가 한 번 더 외쳤다.

"단, 이번에는 직접 과제를 제출하지 않는다."

또 무슨 소릴까?

"이번에는 과제 대신 과제의 계획만을 제출한다. 시간, 특히 미래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모두 한 번 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실천에 옮기기 위한 계획과 계획을 위한 계획에는 괴리가 크다는 것을."

외국에서 학위를 따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영 교수.

외국에서는 항상 이렇게 복잡하게 배우는 걸까?

"그래서 이번엔 오직 작품에 대한 구상과 계획만을 발표한다. 대신, 실제 제작을 염두에 두지 않은 계획이니, 더 자유롭고 기발한 작품을 구상하도록. 다양한 작품을 구상해보고, 그것을 현실에 옮길 때의 문제점까지 스스로 돌아보도록. 정리해주마. 이번 과제는 과거와 미래의 교차. 그리고 작품의 구상만 발표한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과제가 주어졌다.

* * *

그리고 오랜만에 유나와 외식을 하기로 했다.

김덕진 사장이 내게 말했다.

"세계를 돌면서 맛있는 커피를 찾아다녔습니다. 퇴직금을 아껴 써야 하니까, 밥은 싸고 맛있는 식당만 찾아가서 먹었죠. 하지만 나중에 청담동 레스토랑을 말아먹으면서 반성했습니다. 사업가가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구나. 그 자체가 공부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싼 밥을 많이 먹어둘 것을······"

나도 그랬다.

언제나 아끼고 아꼈다.

항상 가성비를 따졌고, 비싼 음식이 먹고 싶으면 재료를 사서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대형 카페 체인을 갖길 원했다.

그러니 틈틈이 공부해둘 필요가 있었다.

"유나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금요일에 근사한 식당에 가서 저녁 먹지 않을래?"

유나는 당연히 찬성.

그리고 청담동의 재즈바를 예약했다.

밴드가 라이브로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며, 식사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전생에서 꼭 한 번 재즈바에 가보고 싶었지. 그냥 몇 시간만 내면 되는 건데, 왜 그걸 못했을까?'

아마 시간도 없었겠지만,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서 안 해봤으니까, 유나와 같이 처음으로 해볼 수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시간에 맞춰 유나의 집으로 갔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차려입은 유나가 문을 열어줬다.

"나 어때? 나도 그런 곳엔 처음이라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몰라서······"

유나는 하이 유나에서 81000원에 팔고 있는 원피스를 입었다.

도나 카란의 드레스를 흉내 내어 만든 동대문 원피스인데, 우리가 들여오는 값은 45000원이었다.

머리엔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꽂았는데, 역시 우리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동대문의 누존 악세사리 상가에서 8000원, 남대문에서 30개 단위로 사면 4500원이었다.

우리 사이트에서는 14400원을 받았다.

이것도 직업병이라고 해야 하나.

옷을 하도 팔았더니, 옷을 보자 원가와 판매가가 같이 보였다.

"어때? 머리는 유미가 만져줬어."

"오셨어요! 오빠!"

방에서 공부하던 유미는 자기 이름이 나오자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유나는 자기 모습이 어색한지 계속 거울을 봤다.

"예뻐, 진짜."

"정말?"

사귄지 3년 반.

다행히 아직도 내 칭찬이 먹히는지 유나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리고 구두를 꺼내 신고 나갈 준비를 했다.

검은 리본 수제 단화.

원가 85000원.

판매가 150000원.

옷장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우리나라 수제화는 정말 좋다는 것.

"15만원이하로 꾸민 여자 중에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야. 장담해."

"그거 칭찬 맞아?"

아무튼.

우리는 택시를 타고 곧 청담동 재즈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어두운 식당.

라이브 밴드는 악기를 만지며 무대를 준비했다.

우린 스테이크와 치즈 리조또, 새우를 곁들인 도미구이와 포도주도 주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카페 사업을 시킬 걸."

유나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나는 그동안 유나가 내게 맞춰주고 있었음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젊은 육체를 얻었지만, 습관이 된 피곤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래서 외출보다는 집이 더 편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유나는 아직 어리다.

그리고 젊은 시절은 단 한 번뿐일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곳 부지런히 찾아 다니자."

"치이. 일이나 좀 줄이고 나서 말해."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늦은 가을.

재즈랑 잘 어울리는 시기였다.

'이 맘 때쯤일까?'

난 제대로 늙기 전에 죽었다.

어쩌면 내 영혼의 시간도 늦은 가을쯤에 멈춰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래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 당신도 알겠죠.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어디든 같이 있고 싶다는 걸.

난 이 사랑을 더 분명히 하고 싶어요.

더 오래. 더 강하게.

언제나 우리가 함께 하길 바라요.

삶이 우리를 떨어뜨려 놓아도,

당신은 내 머릿속 전부예요. ]

"노랫말이 정확히 지금 내 생각과 일치해."

내가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유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오늘 왜 그래? 아직 밥도 먹기 전인데 벌써 체한 거야?"

나름 분위기를 잡고 말한 건데, 유나에게 먹히지 않았다.

와인을 더 먹여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시작된 저녁 식사.

크림소스가 뿌려진 새우와 도미구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대파와 무를 넣은 맑은 국물 도미탕을 먹고 싶었다.

새우도 초장에 찍어 먹고 싶었다.

그리고 치즈 리조또······

이것도 나쁘진 않았는데, 김치도 같이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분위기 잡고 식사하는 것도 쉽지가 않구나.'

그래도 유나가 좋아하니까.

결국 사랑도 노력인 것이다.

이주원은 언제나 노력해야지.

이제 배도 부르고, 와인도 꽤 마셨다.

그리고 재즈 밴드의 노래도 몇 번이나 바뀌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인가?

"유나야.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응? 뭔데?"

"실은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긴데······ 오늘은 꼭 말하고 싶어."

유나는 살짝 긴장한 느낌.

와인 덕분인지 볼도 발그레했다.

"유나야. 우리가 1학년 때 처음 만났지. 그때 기억해?"

꼴깍.

평소라면 시간 끌지 말라고 소리 질렀을 텐데 유나는 가만히 침만 삼켰다.

"우리 1학년 때 기억해? 너 나한테 내기 져서 소원권 두 개 뺏겼잖아. 이제 그 소원권을 쓰고 싶은데."

유나가 찌를 것처럼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뭘 시키려고! 치사하게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이 쫌생아!"

유나가 갑자기 소리치자 옆 테이블에서 슬쩍 쳐다봤다.

훗.

그래, 마음껏 욕해라 유나야.

욕은 잠깐이지만, 소원은 영원하다.

나는 이주원.

치사하고 쫌스러운 중년 회귀자.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주원 사전에 포기는 없다.'

우린 사귄지 3년도 넘었다.

그동안은 얼굴만 봐도 행복했다.

그래서 따로 소원권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3년은 긴 시간.

이제 슬슬 변화를 줘도 괜찮을 것 같다.

강렬한 자극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후후후후."

"징그럽게 웃지 마!"

"이제 곧 겨울 방학이잖아. 그리고 방학 끝나면 4학년이고."

"그래서? 생각 잘 해. 자칫하면 겨울 방학을 혼자 보내게 될 수도 있으니까!"

훗.

나는 강력한 회귀자.

3년 묵은 소원권이니까 이 정도 저항은 예상했다.

"내 첫 번째 소원은······ 우리 겨울 방학에 같이 여행 가자. 유럽 쪽으로. 졸전 앞두고, 유명한 화가들 그림도 직접 보고. 너 좋아한다던 영화 촬영지도 가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근사한 호텔에도 묵어 보고. 기차도 타보고······"

유나의 얼굴에 강한 의혹이 서렸다.

"그게 다야?"

"응? 뭘 생각했길래? 너랑 여행 가고 싶어. 시간 걱정, 돈 걱정 없이 느긋하게 쉬고 오자. 한 달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면 충분할 거야."

"하······"

그제야 유나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그래, 여행 정도는. 그게 정 네 소원이라면 같이 가줄게."

단순한 안도를 넘어서 유나도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았다.

후후훗.

하지만 이것 역시 나의 노림수.

소원권은 나의 정당한 권리.

하지만 뜬금없이 3년 만에 쓰겠다면 유나가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첫 장에 순한 맛 소원을 쓴다면?

'그렇다면 두 번 째는 매운 맛 소원을 빌어도 거절하지 못하겠지.'

이것이야말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자칫 욕심을 부려서 2장 다 강렬한 소원을 빈다면 두 장 다 날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한 장을 포기한다면?

소원권 한 장은 건질 수 있는 것이다!

유나는 나의 시커먼 속내도 모르고 와인을 홀짝이며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나랑 그렇게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거야? 그래, 가자. 대신 일정 잘 짜둬. 맛집도 미리 알아두고, 회화도 공부해두고. 알겠지?"

후후후.

그래, 유나야.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렴.

'내가 두 번째 소원을 말할 때에도 네가 웃을 수 있기를.'

그렇게 근사한 저녁을 즐기고, 우린 집 근처에서 택시를 내려 잠시 걸었다.

"주원아."

"응?"

"우리 집에 잠시 들렀다 가. 엄마가 열무김치 보내주셨어. 강된장 끓여서 밥 비벼줄게. 저녁 내내 힘들었지?"

아······

열무김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리조또와 크림소스의 기억이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유나야, 사랑해."

나도 모르게 외치자, 유나가 깔깔대며 웃었다.

* * *

그리고 형원 선배와 한철이를 다시 만났다.

일종의 중간 점검이었다.

사전 세팅부터, 특강에 중간 점검까지······

노련한 회귀자는 소개팅도 철저하다.

"주원아!"

"우리 주원이 왔구나!"

'잘 되고 있구나.'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둘의 얼굴이 확실히 밝아졌다.

"자, 중간 상황 보고 해 봐."

먼저 한철이.

"응. 난 이제까지 운동을 가르칠 때, 내가 아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가르쳐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이젠 생각을 바꾸려고. 상미 누나가 운동을 즐기는 게 먼저인 것 같아. 그래서 조금씩 가르치고 있어. 상미 누나도 잘 따라오고."

"잘 하고 있군!"

한철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다시 운동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만난다기 보다는 정말 인간 윤상미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려고. 그러니까 긴장도 덜 되고, 나도 재밌는 것 같아."

한철아, 어른이 되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철이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형은요?"

"나도 많이 반성했어. 난 항상 기발하고 특별하려고 애썼거든. 언제나 웃기려고 했고. 그런데 이제는 딱히 애쓰지 않으려고. 아직까지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아."

"그래요. 형. 정원이랑 둘이 잘 어울려요. 잘 될 거예요."

그렇게 우린 셋이서 축배를 들었다.

그런데 맥주를 몇 잔 마신 후, 형원 선배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주원아. 과거와 미래를 교차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네?"

그건 우리 서양화과 과제인데, 왜 형원 선배가 고민하고 있는 거죠?

그러자 내 대신 한철이가 대답했다.

"저는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방금 전까지 들었던 음악의 잔상이 귀에 남아서, 앞으로 들릴 음악과 이어지잖아요."

"음악은 안 돼. 그건 정원이가 벌써 두 번이나 써 먹었어. 식상할 거야."

아니, 왜 당신들이 우리 과 과제를 신경 쓰냐고.

"아, 우리 정원이가 꽤 고민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하하하, 상미 누나도 엄청 고민하더라고요. 나도 힘이 되주고 싶어서······"

지인들끼리 소개팅을 해주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그나저나 우리 정원이라니.

"키스는 어떨까요? 지나간 키스의 감각이 남아있는데, 다음 행동을 원하게 되니까······"

"안 돼. 아직 본격적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키스 이야기를 하면 성급해 보일 거야."

"그렇겠군요. 키스는 아직 안 되겠네요."

한철이와 형원 선배의 진지한 토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이 두 사람과 미술을 토론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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