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위 발표 □
"뭐야, 서양화 조교가 뭐라고 한 거야?"
임진만이 하우영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더, 더 열심히 하래요."
"뭔 소리야? 이 정도 그림이면 어디서든 먹힌다고!"
"형······"
하우영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만약 입시 미술이 인간이 되어서 두 발로 걸어 다닌다면 그게 바로 남동민일거에요. 제가 입시학원 어디 나온 지 아시죠? 거기 전임 강사셨어요."
"으잉? 너, 너······"
항상 당당하던 임진만도 이번엔 꽤 놀랐다.
서양화과 조교 나이도 많지 않아 보였는데······
하우영이 다닌 미술학원은 강남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학원이었다.
"형, 동민쌤이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하지만 우리 그림이 어때서? 완벽한데······"
"그게 우리와 동민쌤의 눈높이겠죠."
크읏.
제길.
이번엔 진짜 심혈을 기울였는데!
치사한 서양화과 놈들.
조교까지 등장해서 초를 치다니!
임진만은 주먹을 쥐고 이를 갈았다.
책의 판매는 3일 동안 이뤄졌다.
그리고 나와 김태민이 판매량을 집계하려 했지만······
* * *
회화 4 시간.
"흐흐흐, 자, 책 판매는 어떻게 됐지. 어이, 웃긴 놈. 앞에 나서서 결과를 발표해라!"
이준성이 걸걸한 목소리로 나를 지목했다.
그리고 내가 앞에 나가서 발표를 시작했다.
"이번 책만들기 과제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3일간의 판매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과제의 최종 1위는······"
나는 노련한 중년의 회귀자.
하지만 가끔 예상이 틀릴 때도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랬다.
과제를 낼 때, 전혀 예측 못한 결과가 나왔다.
"이번 과제의 최종 1위는 이수진, 한유나 조의 '조소과 살펴보기'입니다. 이수진, 한유나 조만이 2쇄까지 진행했고, 전부 완판 했습니다."
짝짝짝.
짧게 이어지는 박수.
두 사람은 조소과 부전공을 하면서 배운 지식들을 책으로 정리했다.
석고 뜨기의 요령.
용접 방법.
목공예.
플라스틱 폴리 배합하기 등등.
조소과 뿐만 아니라, 미대생 모두에게 유용한 지식을 수록했다.
그리고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미술 소책자의 재미도 잃지 않으려 했다.
예쁜 손글씨로 내용을 채웠고, 실용적 정보 사이에 둘이 겪었던 일상과 경험담도 넣었다.
재밌고 예쁜 책이었다.
'하지만 진짜 판매의 포인트는······'
바로 영화배우 이수진이었다.
이수진의 손글씨가 빼곡이 담긴 책.
'나는 한국대생은 연예인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지.'
아니었다.
관심 많았다.
3일 동안 진행된 판매.
이수진, 한유나 조의 '조소과 살펴보기'는 첫날 매진되었다.
그리고 둘째 날 급히 2쇄 공수.
둘째 날에는 미대생이 아닌 학생들까지 찾아와 책을 사갔다.
책이 모자라 다급히 '1인 1권 제한'까지 둬야 했다.
2쇄도 둘째 날 매진.
'만약 3쇄까지 진행했더라도 다 팔렸을 거야.'
하지만 둘째 날 이미 1위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굳이 3쇄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모두들 1위를 위해 필요 이상의 힘을 뺄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우리만 몰랐을 뿐, 1위는 처음부터 이수진, 한유나 조로 결정되어 있었다.
물론 책 만들기의 경험 자체가 학생들에게 공부가 되긴 했겠지만.
'참고로 책들에 관한 내 평가를 간단히 말하자면······'
김대성, 이정원 조는 너무 인터뷰에 치중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인터뷰 하는 이들의 얼굴을 드로잉으로 그리긴 했지만, 그냥 잘 그린 드로잉 정도.
인터뷰의 내용과 잘 버무려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서 아까웠다.
'다만 이준성 같은 미술가들의 인터뷰가 미대생에게 도움이 될 것 같긴 해.'
하지만 그 정도가 전부였다.
책 자체가 예술작품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형원 선배의 인터뷰 부분은 꽤 좋았다.
이정원이 정말 신경 쓴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과제의 최종 1위는 수진 선배 조가 아니라 형원 선배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둘은 아직까지는 잘 되어 가는 모양이다.
아무튼.
임진만, 하우영 조의 인체 소묘도 나쁘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든 나는 원래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임진만은 별로지만, 그래도 이 책을 열심히 만들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그런데 한 편으론 조소과와 서양화과가 정말 많이 다르구나, 그런 느낌도 받았다.
사실 서양화과는 그림의 기교나 정확성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1, 2학년 학생들이나 대단한 소묘 실력을 보고 감탄했을까.
사실 화가의 그림 실력은 원하는 대상을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서양화과 학생들은 오히려, 입시 때 배운 지식과 기교를 잊으려 애쓰지. 이 친구들, 헛다리를 짚었어.'
그래서 임진만의 책을 봐도 그리 큰 감흥이 오지 않았다.
'자기들 몸을 직접 찍어서 그림으로 그리다니. 자기들한테는 분명 도움이 됐을 거야. 그나저나 대둔근 파트는 아쉽군.'
엉덩이하면 이주원.
이주원하면 엉덩이인데.
'내 엉덩이의 위대함을 직접 보여줄 수도 없고······'
쩝.
한 권 사서 유나에게 선물할까?
유나가 이 책을 본다면 내 엉덩이의 우수성을 이제라도 새삼 깨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진 말자.
그리고 다시 강의실을 향해 외쳤다.
"그럼 재미삼아 이번 책 만들기의 꼴찌도 발표하겠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로!"
좀 잔인하긴 했지만.
"임진만, 하우영 조의 인체 소묘 이해입니다!"
책들은 미대 복도에서 판매되었다.
그래서 상당수가 지인 찬스를 거쳐 팔려 나갔다.
책을 쓴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친구들에게 자기 책을 팔았다.
'하지만 조소과 학생들은······'
창피해서 숨어버렸다.
임진만이 나름 책을 팔려고 애쓰긴 했지만, 책도 비쌌고 임진만 자체가 인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임진만의 친구들은 책을 만드는데 다 동원되었기 때문에, 책을 살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부분 발췌이긴 하지만, 같은 학교 남학생의 모습이 담긴 책을 사려는 여학생은 아무래도 없었다.
당연히 책을 사려는 남학생은 더더욱 없었다.
'책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국 기획부터 크게 잘못된 책이었다.
쾅, 쾅, 쾅.
"이번 과제 아주 맘에 들었다."
이준성이 칠판을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너희들이 만든 책이 마음에 들었다는 게 아니고! 이 과제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가끔 과제를 평가하다보면 아주 짜증나는 순간이 있다. 좋은 점수를 주고 싶지 않은데, 너무 열심히 해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그리고 이준성은 임진만, 하우영을 향해 징그럽게 웃었다.
"그런데 이번 과제는 책의 매출로 순위를 집계하니까 내가 짜증을 낼 필요가 없더군!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우하하. 그래, 조소과 부전공! 너희들 이야기다! 우하하하하!"
학생들을 놀리고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변태 교수 이준성.
'오늘만큼은 응원합니다. 교수님.'
나는 부들거리는 임진만을 즐겁게 감상했다.
"그리고 너희들 모두 내 인터뷰가 담긴 책을 다 샀겠지? 내 삼십년 미술 인생이 담겼으니, 모두 반드시 소장하도록!"
소장할 생각은 없고, 나중에 한 번 빌려서 봐야겠다.
그리고 이준성은 여섯 권의 책에 대해 자기가 느낀 점을 간략히 들려줬다.
"내가 제일 맘에 들었던 책은 고양이 책이다. 책 제목이 '고양이 책'이 뭐냐? 어쨌거나. 웃긴 놈. 넌 1학년 때도 내 수업을 들었지. 내가 생각하는 웃긴 놈의 단점은 너무 진지하고, 생각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힘을 빼고, 편하게 진행하려 노력한 점이 이 책에서 보였다. 그렇지. 3학년 쯤 되면 자기를 돌아보고, 고쳐갈 줄 알아야지."
역시 입은 거칠지만 보는 눈은 예리한 이준성 교수.
내가 고민했던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리고 칭찬까지 받으니 꽤 뿌듯했다.
"잘생긴 놈의 드로잉도 아주 좋았다. 이번엔 일부러 과장되게 그렸더군. 늘 잘했지만 이번에도 잘했다. 그래, 수고 많았다. 그럼 다음 과제는 누가 낼 거냐? 자발적으로 지원을 받겠다."
그때 임진만이 번쩍 손을 들었다.
"다음 과제는 저희가 내겠습니다!"
"오, 꼴찌 전문 조소과 놈들이구나."
크윽.
이준성 교수가 놀리자 임진만의 얼굴이 또 찌그러졌다.
보통 교수들은 학생들의 눈치를 봐가며 적당히 장난친다.
하지만 적당히가 없는 것이 이준성의 매력.
상대가 약 오르면 한 번 더 놀린다.
"조소과 놈들이 머리는 좋구나. 자기들이 과제를 내고, 자기들이 평가를 하면 꼴찌는 면할 테니까. 설마 뻔뻔하게 자기들한테 다짜고짜 1위를 주진 않겠지? 우하하하하!"
제길.
학생부터 시작해 조교까지.
이젠 교수까지.
'서양화과 놈들 두고 보자. 내 다음 과제는 반드시······'
임진만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 * *
유나를 데리고 사직동 건물로 갔다.
'카페가 완공될 때까지 비밀로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공동 재산이기도 하고, 수십억이 오가는 일이라 쉽지가 않았다.
물론 유나는 우리의 자산 관리는 전적으로 내게 맡기고 있긴 했다.
나는 유나를 데려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김덕진 사장에 대해서 설명했다.
"김덕진 사장도 여기가 마음에 든대.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 가봐. 그리고 우리한테도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 달래."
"으음······"
1층 액자집은 점포 정리 중이었고, 2층 서점은 책들은 그대로지만 사장 할아버지는 출근하지 않았다.
나는 가지고 있던 열쇠로 2층의 문을 열고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유나가 총총 나를 따라 들어왔다.
"1층과 2층 모두 카페로 리모델링 할 거야. 다만 2층에는 책꽃이와 진열대를 두고 책도 같이 판매할 거야. 책과 서점의 공존이 우리 가게의 컨셉이 될 거야."
"고마워, 주원아."
"응?"
"내가 좋아했던 공간을 지켜주려고 이렇게 일을 벌인 거잖아. 내 사소한 취향이나 기분을 소중히 생각해줘서 고마워."
물론 발단은 그게 맞다.
하지만 건물 자체가 가치가 빈약했거나, 사업성이 낮았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지금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지.'
"당연하지. 너한테는 사소한 기분이겠지만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니까······"
"치이."
입으로는 '치이'소리를 냈지만, 유나는 무척 좋아했다.
"그나저나 이 건물에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이 건물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주원아, 잘 했어."
한 명의 주부가 가족을 위해 꼼꼼히 신경 써서 지은 건물.
"신기한 게 김덕진 사장도 이 건물이 특별해 보인데. 건물의 외관 자체는 수수하고 흔한 건물인데 말이야. 진심이 담긴 사물이나 장소는 정말 특별해지나봐. 우리가 그리는 그림도 비슷하겠지?"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점 구석구석을 살폈다.
"나도 김덕진 사장님 만나볼래.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인테리어도 배우고."
"그래. 다음에 같이 만나자. 우린 이제까지 월세를 받을 수 있는 비싼 건물 위주로 매입했거든. 만약 이번 카페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다면, 앞으로는 가성비 좋은 땅을 골라서 구입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럼 더 효율적으로 자산을 관리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내 거창한 계획을 들려주자, 유나는 적응이 안 되는지 혀를 내밀며 웃었다.
"가만 보면, 너는 나를 관찰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걸로 사업을 벌이는 것 같아.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내가 원하던 걸 원 없이 갖게 되고. 옷도 그러더니, 이번엔 서점까지······"
분명 그런 측면이 있었다.
유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전생의 영웅이었던 김덕진 사장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유나라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뻔뻔하게 생색을 냈다.
"유능한 남자를 사귀는 여자만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랄까."
"요즘 다이아몬드가 끌려. 왠지 예쁜 보석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
"그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