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길고양이 □
최근 사직동 건물에 매진하느라 나답지 않게 과제가 조금 느려졌다.
"할 수 없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밤을 새자."
김태민이 내게 제안했다.
'그런데 과제보다는 살짝······그저 친구를 집에 불러 놀고 싶어 하는 느낌이······'
증거가 많았다.
일단 나야 일 때문에 늦어진 것이지만, 김태민은 딱히 별 이유도 없이 내게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두 번 째 증거.
과제를 위해서라면 나만 부르면 되는데 수진 선배와 유나까지 자기 집에 초대했다.
'이 녀석 분명······과제를 핑계로 자기 집에 초대해서 밤새 놀고 싶은 거야. 고양이 자랑도 하고······'
그런데 어차피 고양이 책을 완성하려면 김태민네 고양이 3마리를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림으로 너무 많이 봐서, 굳이 안 봐도 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이 없었다.
유나와 수진 선배가 김태민의 초대에 열렬히 응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결정하면 나는 그냥 따라가야 했다.
'어째 김태민 집에 가면 하루만큼 과제가 더 늦어질 것 같은 기분이······'
그래도 뭐 별 수 있나.
그리고 나도 궁금했다.
잘 사는 친구 집도 궁금했고, 친구 집에 놀러가는 기분도 궁금했다.
전생의 나는 집에 친구를 부를 형편도 안 됐고, 누군가의 집에 맘 편히 놀러가 본 적도 없었다.
어떤 느낌일까?
진심으로 환영받는 것은?
나를 베프라고 불러줄 만큼 친했지만, 김태민의 집이 학교에서 멀어서 좀처럼 가볼 기회가 없었다.
다만 아쉽게도 세계를 누비는 김용철 작가님은 오늘 집에 안 계시다고 했다.
"어서 들어와."
수진 선배, 유나와 함께 김태민의 집에 도착했다.
야옹, 야옹, 야옹.
내가 다가서면 도망가던 길고양이들과는 달리, 세 마리 고양이가 다가와 몸을 부벼 댔다.
특히 수진 선배한테.
'수진 선배는 태민이 집에 많이 놀러왔었구나.'
아무튼.
화려하고 넓은 건물.
김태민은 층 하나를 전부 자기가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집이니까 당연하겠지만, 김태민은 너무 자연스럽고 편하게 행동했다.
'부자는 공기가 다르구나.'
나도 월세를 받는 48평 아파트가 있다.
그 집은 내장재도 고급스럽고, 장식도 제법 괜찮다.
하지만 내가 그 집 안에 들어가면 살짝 겉도는 느낌?
나는 그 아파트의 주인이긴 하지만, 그곳에 속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김태민은 달랐다.
자기가 사는 공간과 너무 잘 어울렸다.
'부자가 되는 건 어렵구나. 나는 아직 마음은 가난하구나.'
야옹, 야옹.
김태민의 고양이들은 털도 길고 잘 손질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김태민은 집에서 기르는 귀족 고양이고, 나는 길을 떠도는 길냥이구나.'
열등감 같은 건 아니고, 뭐라 해야 하나······
사람마다 살아온 방식이 다르니까.
'길냥이에게도 길냥이만의 멋이 있겠지.'
우리 네 사람은 각자 노트북과 드로잉북을 꺼내서 책 만들기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어머, 태민이가 친구들 데려왔다고?"
퇴근 시간이 되자, 산양 미술관의 관장인 김태민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아마도 김태민도 집에 공식적으로 친구를 데려오는 일은 아주 드문 것 같았다.
물론 수진 선배는 자주 간 모양이지만.
어쨌든 김태민의 어머니도 함께 무척 신나신 것 같았다.
"어서들 와요. 뭐라도 좀 먹었어?"
"아주머니가 과일이랑 간식 챙겨주셨어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저녁 만들어 줄게."
'저분이 태민이 어머니시구나.'
김태민의 어머니를 보자 반갑기도 했지만, 조금 서글픈 느낌도 들었다.
우리 어머니와 동갑인 것으로 아는데, 여유와 기품, 아름다움이 넘치셨다.
우리 엄마는 지금은 좀 편해지셨지만, 누가 봐도 얼굴에 젊은 시절의 고생이 새겨져 있다.
'내가 가난한 것은 괜찮은데, 가족이 가난한 것은 슬픈 일이구나.'
베프의 어머니를 뵙는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어머니의 환대 속에 맛있는 저녁까지 먹었다.
그날 밤.
'이 자식, 밤새 과제하자더니······'
저녁 먹고 9시가 조금 넘자 김태민은 소파에서 고양이를 안고 잠들어버렸다.
우에에엥. 야오옹.
김태민에게 안긴 고양이가 온갖 소리를 지르며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김태민은 아랑곳 않고 계속 잤다.
"배부르니까 졸린다. 나도 조금만 쉬었다 할게."
다음 차례는 수진 선배.
수진 선배는 너무 익숙하게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김태민의 방에 들어가 침대에서 잠들었다.
유나와 나만 거실 탁자에 마주보고 앉아 과제를 했지만, 남은 고양이 한 마리가 계속 방해했다.
"이 집은 과제를 하기에 안 좋은 곳이었어. 계속 놀고 싶어지는 장소잖아."
김태민의 게으름엔 전부 이유가 있었다.
"공부하고 싶어지는 장소도 있냐?"
유나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네는 무슨 책이야? 설명 좀 해줘."
"응. 내가 맡은 부분은 고양이 기초 입문이야. 나는 고양이에 관한 상식과 우리 집 근처의 길냥이 관찰 일지를 수록했어."
"너무 맥락이 없는 거 아니야?"
"그게 포인트야. 일부러 형식적인 책을 피하려고, 어수선하게 구성했어. 마치 생각나는 대로 뱉는 잡담처럼."
유나는 피식 웃으며 내가 그린 책을 넘겼다.
"우리가 자주 가는 마트네. 나도 이 얼룩이 알아."
"응. 맞아. 걔야. 회색 얼룩이는 손님들에게 애교 부리면 간식이 생긴다는 걸 알아서 손님들만 보면 달라붙어. 그런데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을 분간 못해서, 가끔 발로 차여. 그리고 여기 뚱뚱한 놈은 주공 아파트에 낮잠 포인트가 있고, 여기 땟국물 고양이는 원래 흰색 품종묘인데, 아마 자기 집을 탈출한 고양이일거래. 태민이가 그랬어."
내 설명을 들으며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가 이 책 좋아하겠다. 나도 한 권 살게."
내가 만든 책을 직접 팔아보니 정말 뿌듯했다.
내가 제안한 과제이긴 했지만, 미대생에게 정말 유용한 작업 같았다.
"맞다. 너 아까 관장님 보면서 어머니 생각했지?"
"어? 어떻게 알았어?"
"우리가 몇 년을 사귀었는데, 이제 눈빛만 봐도 알지. 이번에 과제들 다 정리되면 포항에 같이 다녀오자. 어머니 가을 옷 챙겨서."
고마운 녀석.
어머니가 정말 좋아하실 거다.
어머니는 유나를 너무 좋아하신다.
그래서 유나가 포항에 같이 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가을 옷까지 챙겨서 가자니.
나는 유나가 챙겨주기 전엔,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옷을 좋아하는 분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지난 생 내내 어머니가 수수하고 검소한 분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인생을 헛 산거야.'
물론 상당히 고맙긴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눈빛만 봐도 안다고? 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많이 속냐?'
아무튼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유나의 손을 꼭 잡았다.
어쩌면 나를 진짜 부자로 만들어주는 존재는 내 재산이 아니라, 유나인지도 모른다.
유나가 내 삶을 자연스럽고 편한 것으로 만들어줬다.
* * *
"난 강영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 깨달았어. 서양화과 놈들을 이기려면 놈들을 내 과제에 먼저 끌어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번엔 놈들의 방식으로 간다!"
임진만의 연설을 들으며 후배들은 생각했다.
'대체 왜 우리가 서양화과와 싸워야 하는 걸까?'
조소과는 미대 중에는 남학생의 비율이 제일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서양화과는 여학생들이 예쁘기로 소문났다.
원래 디자인과, 도예과, 서양화과가 서로 미모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수진을 필두로 서양화과가 압승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소과 남학생들은 모두 서양화과와 사이좋게 지내길 원했다.
하지만 뭐 별 수 있나.
실세 선배인 임진만이 짜장면까지 사주면서 협박하는데, 같이 과제를 해야 했다.
"그래서 형, 이번 작전은 뭐죠?"
"인체다!"
"인체요?"
"인간의 몸은 수많은 근육과 뼈로 이루어져있지. 인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모든 예술가의 평생의 숙제다. 특히 우리 조소과는 인체에 관해서는 다른 어떤 전공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조소과는 당연히 인체를 입체로 만든다.
입체는 모든 방향에서 관찰할 수 있고,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에게서 숨거나 요령을 피울 수가 없다.
덕분에 조소과 학생들은 인체에 대해 정확하고 심도 있게 공부했다.
끄덕끄덕.
후배들은 왜 자기들이 임진만의 과제를 같이 해야 하는지는 끝가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체'라는 주제 선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그 인체를 소묘로 그리는 거다. 책의 제목은 '인체 소묘 이해'. 서양화과 놈들에게 그들의 가장 기본인 소묘로 싸움을 걸어서 압살해주는 것이다."
"음. 알겠습니다. 그럼 모델은요? 누드모델을 섭외할 건가요? 아니면 괜찮은 화보를 한 권 구할까요? 인체를 세밀하게 찍은 예술용 화보를······"
"아니, 절대! 모델은 바로 우리가 직접 한다!"
"예?"
하우영을 비롯해 다섯 명의 후배들이 임진만에게 되물었다.
"일부러 몸을 만든 모델은 근육이 너무 잘 드러나서 현실감이 없다. 그리고 외국 화보의 모델들은 우리가 접하는 동양인들과 신체 비율이 조금씩 다르지. 그러니 그렇게 배운 인체는 막상 써먹으려면 언제나 괴리가 있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긴 있었다.
조소과 남학생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니 우린 우리가 직접 모델을 한다. 생생하게 우리의 몸을 관찰하고 우리가 직접 그리는 거다. 바로 배워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던 최고의 소묘 교재를 만드는 거다!"
뭔가 그럴듯하면서도 더욱 하기 싫어지는 기분.
하지만 임진만이 밀어붙이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크읏.
조소과 남학생들은 임진만의 자취방에 모여 옷을 벗었다.
찰칵. 찰칵.
그리고 서로의 몸을 관찰하고 사진으로 촬영했다.
"야, 임마. 근육이 그래도 최소한으론 보여야 하는데, 넌 어째 하나도 없냐! 할 수 없지. 팔굽혀 펴기 스무 개만 해라."
"스, 스무 개나요? 제가 스무 개를 할 수 있으면 근육이 원래 있었지 않았을까요?"
"시끄러 임마. 하라면 해!"
크읏.
곧 팬티만 입은 후배 하나가 푸쉬업 스무 개를 했다.
"넌 복근이 없으니까 프랭크 5분을 해라!"
"우영이 넌 앉았다 일어나기 30회! 넌 승마자세 5분!"
그리 넓지 않은 임진만의 자취방.
곧 임진만의 자취방엔 팬티만 입고 땀을 흘리는 남학생들로 가득 찼다.
심지어 그 중 몇몇은 팬티까지 벗어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촬영을 마치자, 모두 오기가 생겼다.
하기 싫었던 과제였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설프게 마칠 순 없었다.
"제길!"
분노에 가득 찬 조소과 남학생들.
그들은 서로의 누드 사진을 뚫어져라 관찰하며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다.
"다시 그려! 다시!"
"고쳐! 다시 그려!"
"이건 사진부터 글렀군! 재촬영이다. 발가벗고 푸쉬업 서른 개, 실시! 서둘러!"
크읏.
왜 자기들이 서양화과 과제를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분노의 조소과 과제는 차근차근 완성되어 갔다.
누군가는 예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속삭이고.
누군가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과제를 하고.
누군가는 발가벗은 남자들이 함께 땀 흘리며, 서로의 벗은 몸을 관찰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 한국대의 미대생들은 오늘도 열심히 과제를 했다.
그렇게 또 한 번.
오늘도 결전의 날이 밝았다.
* * *
미대 본관 건물 2층에 설치된 판매대.
총 6권의 책.
미대생들은 전공을 떠나 서로서로 대강 아는 사이다.
그러니 1쇄는 거의 다 팔릴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2쇄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만약 모두 2쇄를 포기한다면 책값이 가장 비싼 쪽의 승리.'
그리고 책의 가격은 임진만, 하우영 조의 '인체소묘이해'가 제일 비쌌다.
많은 사람이 동원된 만큼 페이지도 많았고, 내용도 방대했다.
모두 똑같이 1쇄만 팔아치운다면 임진만, 하우영 조가 우승하게 된다.
이준성 교수의 인터뷰를 다룬 이정원, 김대성 조의 인터뷰도 강력한 우승 후보.
일단 이준성 교수의 인터뷰를 담았으니 서양화과 학생들이 구매할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인기작가 이형원의 인터뷰도 실렸다.
귀여운 고양이 그림으로 가득 찬 이주원, 김태민 조도 다크호스.
고양이 그림은 언제나 수요가 있다.
거기에 책의 저자인 서양화과 훈남 2인조는 은근 인기가 많았다.
2인조가 아니라, 김태민 혼자였다면 더 인기가 많았을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둘은 제법 인기가 많았다.
그렇다면 과연 우승은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인가?
책의 판매대가 설치되고, 회화 4의 수업을 듣는 3학년 학생들이 주위에 모여 섰다.
복도에 판매대가 설치되자 하나 둘 미대생들이 모여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머, 고양이 좀 봐."
"와아. 잘 그렸다."
책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은 편.
그때였다.
"어, 동민이형!"
"조교님!"
학생들 사이에서 조교 남동민이 등장했다.
남동민이 등장하자 학생들이 모두 인사를 건넸다.
학부 시절엔 딱히 인기가 없었던 남동민.
하지만 조교는 언제나 인기가 좋은 법!
최근 남동민은 인기인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어? 니들이 만든 책이야?"
"네, 조교님. 한권씩 사주세요!"
학생들이 붙잡자 못이기는 척 책을 살펴보는 남동민.
그 중 남동민의 시선을 붙잡는 한 권이 있었다.
[인체 소묘 이해]
[저자 임진만, 하우영]
소묘의 달인 남동민.
그에게 [인체 소묘 이해]라는 제목은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그때 하우영은 판매대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임진만은 막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참이었다.
남동민은 판매대에 꽂힌 인체소묘이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촤르르.
책을 넘겼다.
"클클클클."
그리고 남동민은 자기도 모르게 조지 클루니 웃음을 흘렸다.
이것이 원조의 위엄!
듣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도, 동민쌤."
"우영이냐. 네가 그린 거냐?"
"예, 저랑 같은 과 형이 함께 그렸습니다."
그랬다.
하우영은 남동민의 제자였던 것이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크큭."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그렸습니다."
"그래? 그런데 더 열심히 했어야지. 내가 말했지? 소묘는 매일 연습해야 된다고."
"예, 열심히 했지만,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야. 이 정도면 잘 한 거야. 수고 많았다. 클클클."
남동민이 묘한 웃음을 흘리자, 옆에서 [인체 소묘 이해] 책을 구경하던 학생들이 하나 둘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동민은 복도 끝으로 홀연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