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인터뷰 □
나는 김덕진 사장에게 간단히 내 소개를 했다.
"아, 어렴풋이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텔레비전에도 나온 분이시죠? 예전에 본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영 아트는 오래전 방송이었다.
그리고 보는 사람만 본 프로그램이었다.
게다가 난 비중이 작게 다뤄져서 방송 중일 때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쩝.'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적다는 아니, 거의 없다는 게 일상에서는 훨씬 더 편하다.
아무튼.
그리고 우린 몇 가지 더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저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시는 게 아닐까요? 실은 얼마 전까지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습니다. 하지만 큰 손해만 보고 폐업했습니다. 제가 과연 이주원 사장님이 찾는 적합한 인재인지 모르겠군요. 조금 더 검증된 사람을 찾으시는 게······"
김덕진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겸손은 나를 떠보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최근 실패로 정말 자신감을 잃은 걸지도.'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커피에 관해서는, 아니 커피 사업에 관해서는 김덕진은 한국 최고다.
"사실은 청담동에 레스토랑을 열었다가 폐업하셨다는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네? 벌써요? 하긴 하도 크게 망했으니까 아는 분은 이미 알고 계시겠네요. 하하······."
"글쎄요. 저는 아직은 망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미 점포도 정리하고, 폐업신고까지 마쳤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가 단순한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는 더 큰 성공을 위한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청담동 레스토랑은 아직 진행형일 것입니다. 물론 단순한 말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인지, 조금 비싼 수업이었는지 결정 내리는 건, 김덕진 사장님 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 바라보는 김덕진 사장의 얼굴이 조금 편해졌다.
처음 손님으로 대했을 때는 친절했지만, 사업 이야기가 나오자 사업가 특유의 경계와 의심이 서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계가 많이 누그러졌다.
"사실 저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카페에 들어서 커피를 마시며 그 의문이 조금 풀렸습니다."
"어떤 의문 말씀이시죠?"
"김덕진 사장님이 왜 청담동에 뜬금없이 레스토랑을 열었을까?"
카페로사는 아직 대형 커피 체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좋은 원두를 공수해 여러 카페와 식당, 호텔에 납품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이미 아는 곳이었다.
"돈이 중요한 분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강릉 구석에서 카페를 시작하지 않으셨겠죠. 그랬던 분이 갑자기 서울 청담동에 식당을 개업했다? 왜였을까? 사장님은 음식이 아니라 커피를 팔고 싶으셨던 거죠. 아직 한국에는 고급 커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니까, 고급 레스토랑을 시작으로 더 좋은 커피를 팔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확실히 그런 계산이 있긴 했습니다. 호텔에도 커피를 납품했습니다만, 여러 손을 거치다 보니, 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비싼 커피를 팔려면, 그래서 고급 커피의 시장을 확대하려면, 레스토랑이 괜찮을 거라 믿었습니다. 물론 식당으로 돈도 벌고 싶었고요."
"이 카페에 들어오고 나서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잘 훈련된 직원이었습니다. 시골 카페에 남기엔 아까울 정도였죠."
"커피에 관해서는 언제나 최고를 지향합니다. 한 잔의 커피에는 맛과 향뿐만 아니라, 친절하고 솜씨 좋은 바리스타까지 포함되니까요. 직원 교육에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잘 훈련된 직원 하나는 또 다른 직원을 훈련시킬 수도 있죠. 이곳 커피도 마찬가지입니다."
김덕진은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아마 사장님께서 다양한 원두를 괜찮은 가격에 계속 들여오려면 수입하는 양을 지속적으로 늘려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 업체에 계속 납품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적자가 나는 구조겠죠. 그러니까 사실 카페로사는 사실 평범한 시골 카페가 아니라······ 성장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동시에, 생존을 위해 성장이 필수가 된 작은 무역회사란 말이겠죠."
내 말에 김덕진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젊으신 분이 대단하시군요. 이 카페를 보면 보통은 이렇게들 말씀하시죠. 나도 은퇴하면 시골에 이런 카페 하나 차려볼까. 하지만 카페로사는 그런 한가한 시골 카페가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사장님과 제가 서로 도울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최근 매입한 사직동 건물의 사진을 김덕진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김덕진과 인테리어와 리모델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미술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괜찮은 미술 관련 읽을거리들의 유통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독립 서점과 카페를 공존시켜서 사직동 고유의 색을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확실히 사직동이란 장소에 어울리는 발상입니다."
내게는 하이 유나를 통해 처분을 기다리는 거액의 현금이 매달 쌓이고 있었다.
만약 내가 전국의 좋은 땅을 사들이고, 그곳에 미래의 성공이 보장되는 카페로사 체인을 입점 시킨다면?
하지만 일단 시작은 소박하게.
"그럼 사직동 현장을 한 번 방문해주시겠습니까? 김덕진 사장님께서 현장을 검토하고, 리모델링의 책임자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예, 일단 사직동 건물을 제가 직접 확인하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김덕진 사장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나는 그가 내게 합류할 것을 확신했다.
일단 사직동 건물 자체가 나쁘지 않았다.
입지도, 건물도 카페로서 괜찮은 조건이었다.
김덕진 사장이 충분히 탐낼만했다.
그리고.
'김덕진은 지금 거액의 빚이 있지. 지금 상황을 타계하려면 뭐라도 해야 하는 처지야. 내 제안을 절대 거절할 수 없었을 거야.'
원래라면 김덕진은 은행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들에게 빚보증을 받는다.
그리고 갖은 노력 끝에 몇 년 후에야 빚을 청산하고, 카페로사 체인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나의 제안에 수락한다면 혼자 힘으로 빚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에겐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사직동 건물은 그렇게 좋은 출발을 끊었다.
* * *
서울 홍대의 예쁜 카페.
소곤소곤.
끄덕끄덕.
이형원과 이정원은 첫날 인터뷰를 사고 없이 잘 진행하고 있었다.
이정원은 이형원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노트북을 타이핑했다.
이정원은 인터뷰하기 전, 이주원에게 미리 물어봤다.
[ 주원 오빠, 그런데 제가 본격적인 인터뷰는 처음이라서요. 녹음기를 사야할까요? 인터넷에 얼핏 검색해보니까, 녹음기도 꽤 비싸던데······]
[ 녹음기는 안 사도 될 거야. 어차피 형원이 형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사실 말이 엄청 많은 사람이었다.) 네가 전문적으로 인터뷰 하는 것도 아닌데, 녹음기까지 사면 아깝잖아. 그냥 노트북을 가져가면 되지 않을까? 대신 노트북 화면만 보면 예의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미리 양해를 구하면 될 거야. 형원 형은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문제는 없을 거야. ]
[ 그렇군요, 오빠. 정말 주원 오빠한테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이형원 작가님은 이해심도 많은 분이군요. ]
그렇게 이정원은 이주원의 조언대로 양해를 구하고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타이핑 도중에도 이형원과 눈을 마주치며 리액션도 부지런히 했다.
무난하고 평범한 인터뷰.
하지만 평범하다는 자체가 이형원에겐 성공이었다.
이형원의 톡톡 튀는 발언은 제3자에겐 즐겁지만, 남자친구로서는 감점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제게 시간 내주시고, 또 제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인터뷰가 처음이라서 혹시 실수한 점은 없었나요? 말씀해주신다면 다음엔 꼭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정원이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형원이 평소 그답지 않게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바쁜 건 맞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이형원은 전혀 바쁘지 않았다.
이형원은 뻔뻔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인터뷰가 아니라, 잠시 자신을 돌아보며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휴식은커녕, 이형원은 이정원에게 잘 보이려고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이정원은 단발머리의 귀염귀염 예쁘장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오랜 솔로였던 이형원에겐 여신처럼 보였다.
"혹시 내가 실수한 점은 없었나요? 말해준다면 나도 다음 인터뷰에선 고치도록 할게요."
이형원은 이주원의 조언대로 이정원의 말들을 항상 그대로 되풀이했다.
"실수라니, 전혀요. 이렇게 말해주시다니, 너무 상냥하세요. 저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더 고맙죠."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마무리하려는 찰나.
이형원이 이정원의 노트북을 가리켰다.
[ 형, 정원이가 인터뷰에 노트북을 가져갈 거예요. 그리고 그 노트북엔 정원이가 이제까지 그린 그림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보여 달라고 하세요. ]
"혹시 그 노트북에 정원씨 그림도 저장되어 있나요? 주원인 항상 자기 그림들을 사진으로 찍어 저장해두던데."
"네, 저도요. 미대생들은 과제들을 전부 사진으로 만들어 저장해두거든요."
"저한테 보여주실 수 있나요? 너무 제 이야기만 한 기분이라서요. 정원씨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군요."
"창피하지만, 보여드릴게요! 작가님도 제 인터뷰에 응해주셨으니까요!"
이정원은 노트북 화면을 돌려 자기 그림들을 이형원에게 보여줬다.
[ 형, 최근 순서대로 말해줄게요. 그림을 보면 곧바로 분간할 수 있을 거예요. 세 점의 마블링은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예요. 순서대로 비발디, 라벨, 드뷔시예요. 그리고 물감을 뿌려 그린 그림은 잭슨 플록에게서 영감을 받았고요. 마지막 기타 줄이 끊어진 그림은 멈춰버린 시간을 표현한 거예요. 미리 감상을 준비해가면 될 거예요. ]
"생각보다 별로죠? 그럼 제 그림들을 설명 드릴게요."
"잠깐!"
"네?"
"제가 한 번 맞춰 볼게요."
"제 그림들을요?"
끄덕.
이형원이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물감을 뿌려 그린 것은 액션 페인팅인가요? 액션 페인팅이란 1950년대 미국에서 제안된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추상화죠. 이 그림은 얼핏 잭슨 플록이 떠오르네요. 잭슨 플록은 회화의 평면성과 비재현성을 완성해 그린버그에게 극찬 받았죠. 다만 플록의 그림이 야성적이라면, 정원씨의 그림은 도시적이고 여성적이네요."
"어머! 대단하세요. 미술에도 조예가 깊으시네요. 그리고 맞아요. 플록의 그림을 오마쥬하긴 했는데, 제 그림을 보고 플록을 떠올려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리고 다음 그림은 물 위에 유성 물감을 흘린 건가요?"
"네, 맞아요. 마블링이란 기법이에요. 단번에 알아보시다니, 진짜 대단하세요!"
"뭘요. 이 정도쯤이야. 원래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려면 여러 예술을 공부해야 하거든요. 저는 세 번째 마블링이 제일 마음에 드네요. 여름밤을 혼자서 산책하는 기분이랄까. 은은하고 평화롭네요. 계속 바라보고 싶은 그림입니다."
아아······
이정원이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기해라. 이 마블링은 드뷔시의 달빛을 듣고 표현한 그림이거든요. 달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숲속의 밤을 상상하며 그렸어요. 그런데 제 그림을 보고 여름밤을 떠올리다니! 방금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감동적이기도 하고."
이형원은 멋쩍게 웃었다.
"아마 정원씨 그림의 표현력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집어내지 못했어요!"
"그런가요? 우리가 통하는 구석이 있는 건가······"
이형원은 은근슬쩍 그렇게 말하며 다음 그림으로 화면을 넘겼다.
"이건 줄이 끊어진 기타군요."
"무얼 표현한 건지 맞춰 보세요!"
"뭔가 상징이 담겨있는 모양이군요. 음······끊어진 기타줄. 오후의 햇빛. 멈춰버린 음악. 이건 어렵네요. 잘 모르겠어요. 이건 기권입니다. 그냥 그림을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내 머릿속이 멈춰버렸네요. 이건 뭘 그린 거죠?"
이정원은 입을 쩍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원 오빠! 아니, 형원 작가님. 정말 감동이에요. 누군가 내 그림을 이렇게 깊이 이해해주는 건 처음이에요!"
"다행이군요. 저도 이번 인터뷰 내내 저를 이해하려는 정원씨의 노력이 계속 감동이었습니다."
"그럼 다음 인터뷰! 주원 오빠가 여러 번 인터뷰하면서 형원 작가님을 관찰하라고 했거든요!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이형원 작가님은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분이세요! 언제 시간이 가능하세요? 내일은 어떠세요?"
"내일은 조금 바쁘네요."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그는 전혀 바쁘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는 소설가는 상백수, 그 자체였다.
이형원은 컴퓨터에 다운로드 해둔 프리즌 브레이크와 CSI를 정주행 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남는다면 드래곤 볼과 북두신권 만화책도 처음부터 다시 읽을 생각이었다.
"모레는 가능할 것 같네요."
"그럼, 모레 다시 봬요. 그날은 제가 형원 작가님 소설들을 다시 조사해서 더 깊이 있는 질문을 하겠습니다!"
훗.
보고 있니, 주원아?
형의 짧은 인생동안, 나한테 이렇게 적극적인 여성분은 이 사람이 처음이구나.
형은 이 여자로 결정했다.
"아, 그런데 저도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실은 새 소설을 구상중입니다. 함정과 살인, 밀실과 음모에 관한 글이거든요."
"헐, 벌써부터 재밌어요."
"그래서 서울의 방탈출 카페들을 조사 중인데, 그런 곳들을 아무래도 혼자 가기엔 어려워서요. 혹시 괜찮으면 시간이 될 때, 같이 동행해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최선을 다할게요! 제가 작품에 도움 될 수 있다니 두근거려요!"
"방탈출 카페를 다 조사하면, 보드게임 카페도요. 보드게임을 연구하면 소설에서 쓸 트릭들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보드게임 카페도 같이 가요! 재미있는 보드게임들을 제가 미리 조사해서 오겠습니다!"
크으.
이형원은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공부까지 하고 오겠다니!
이형원 일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원아! 이 은혜는 두고두고 평생 갚고 또 갚으마! 한철아, 너도 파이팅이다! 이번 겨울은 반드시 우리 모두 커플로 맞이하자!'
그렇게 이형원은 오랜만에 알찬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