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66화 (166/203)

■ 166. 회귀자의 연애 특강 □

"책이라는 포맷의 재미를 최대한 살리는 게 이번 과제의 관건인 것 같아."

김태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올.

우리 태민이.

역시 머리가 좋은 친구다.

평소엔 빠져서 그림으로 대충 때워서 그렇지, 머리를 쓰기 시작하면 빠르게 본질을 잡아내는 능력이 있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그래서 생각한 건데,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던 책의 제목들을 이용하면 어떨까 싶어."

김태민은 고양이 전문가.

세 마리 고양이를 키우면서 지식도 해박하다.

난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을 좋아하지만 길러보진 않았다.

애완동물도 여유가 있어야 기를 수 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리의 책을 두 파트로 나누는 거야. 넌 고양이 전문가니까, 제목을 고양이 심화과정으로. 나는 고양이 초보니까 고양이 기초입문으로."

"재밌는데? 입문과 심화 과정으로 구성하면 전에 네가 말했던 기승전결 구도도 반영할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우리는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사이좋은 조별 과제의 좋은 예시 그 자체였다.

"나는 고양이를 잘 모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본 고양이. 그러니까 형태의 재현에 집중할게. 일상에서 보는 길냥이, 친구 집 고양이 등등. 그리고 나 같은 입문자들이 알아두면 좋은 고양이 상식들을 텍스트로 적을게."

"그럼 난 고양이의 표정, 언어를 심도 있게 다룰게. 나는 그림도 형태의 재현보다는 반추상을 시도해볼까?"

작업 시간과 인쇄비용과 고려해 그림은 흑백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내가 쓴 파트는 김태민이 감수하고, 김태민의 파트는 내가 감수하기로 했다.

그림천재 김태민과의 조별 과제인 만큼, 그림도 신경 써서 그렸다.

고치고 그리고 또 고치고.

찰칵. 찰칵.

평소에 신경 쓰지 않을 땐 그렇게 많이 보이던 길고양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자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더 돌아다니고 잠복할 수 밖에.

'도시에 적응하는 동물의 모습도 무척 흥미롭구나. 오늘은 과제의 일부일 뿐이지만, 길고양이 그 자체도 제대로 다뤄볼 만 한 흥미있는 주제인 것 같아.'

그렇게 뚝딱, 뚝딱.

부지런히 과제를 진행해갔다.

* * *

나는 노력천재.

과제만 한 것은 아니다.

일도 열심히 했다.

먼저 사직동 건물의 주변 시세를 검토했다.

그리고 비슷한 연령대의 건물들의 가격과 활용, 재건축 사례와 기대 수익도 뽑았다.

"자리가 좋군요. 미술관도 많고, 유동 인구도 많으면서, 젊은 층의 호응도 좋은 장소입니다. 서점 사장님이 제안한 가격도 꽤 합리적이군요. 오히려 토지의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는 싸게 매겨진 가격입니다."

"다른 투자가는 모텔을 지으려고 하더군요."

"모텔이라고요? 탁월한 선택이네요. 그리 넓다고는 볼 수 없지만, 층마다 방을 두세 개만 넣어도 충분히 수익이 발생할겁니다. 요즘은 모텔 관리 대행업체도 많습니다. 이주원 사장님은 모텔 건물만 지어놔도 임대료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거둘 겁니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부동산 전문가들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들 건물매입을 긍정적으로 봤다.

다만 하나같이 건물을 헐고 다시 짓기를 권했다.

'모텔이라······'

모텔도 나쁘진 않다.

돈을 버는 영리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귀자라면 적어도 그것보단 나은 선택을 해야 한다.

'검토는 이제 끝났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사직동 서점 건물을 매수했다.

이제는 제법 노련한 사업가.

신중할 때는 신중하지만, 빠르게 움직일 때는 망설이지 않는다.

"허어, 참. 젊은 분이 이렇게 자산가일 줄은 미처 몰랐네요.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면 흥정이다 뭐다 골치 아팠을 텐데, 깔끔하게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약 당일.

부동산 관계자를 동반하고 서점 사장과 만났다.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손에 쥔 사장님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자리도 좋았고, 사장님이 생각하신 가격도 적당했습니다. 제가 오히려 운 좋게 좋은 기회를 찾은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너무 무리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네?"

"이 건물은 제게 둘째 아들 같은 놈입니다. 그러니 가능한 헐리지 않고 오래오래 남기를 바라기는 합니다. 하지만 수십 억짜리 건물이고, 기회비용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건물을 헐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서점을 좋아해주시는 분께 팔렸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됩니다."

"그렇군요."

물론 모텔은 짓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보다 더 큰 사업가가 되고 싶다.

그러니 굳이 모텔을 운영한 이력을 남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 역시 이 건물로 수익을 창출할 다른 방법이 없다면, 망설이지 않고 철거할 것이다.

다만.

'이제는 사업가로서 내 역량을 스스로 증명할 때가 되었어.'

물론 나는 지금까지도 잘해 왔다.

하지만 하이 유나는 솔직히 유나와 팀 수진의 미모에 크게 의존했다.

'영 아트라는 행운도 있었고.'

5DE와 란제리 사업도 성공 시켰다.

하지만 그건 솔직히 하이 유나의 후광이 컸다.

하이 유나라는 초 인기 사이트가 없었다면 내 능력만으로는 지금 같은 성공은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졸업 전에 객관적으로 내 능력을 측정해보자.'

가능한 사직동 서점 건물을 헐지 않고 수익을 창출해볼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유나가 좋아하는 그늘 서점도 지키면서.

꽤 힘든 도전이겠지만, 묘하게 설레기도 했다.

'그나저나 나도 대단하군.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장소를 지키기 위해서 수십억을 쓰다니.'

고급 아파트에 살거나 명품을 수집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나도 서서히 돈에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 * *

한국대 근처의 작은 스터디 카페.

나는 화이트보드까지 있는 작은 룸을 빌렸다.

그리고 문제의 두 명을 불렀다.

바로 이형원과 김한철.

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했다.

"좁은 공간에 이렇게 셋이 모이니까, 몇 년 전 기숙사에서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는 군요."

"그, 그렇군."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 시골 꼬마였다.

그땐 4학년 형원 선배가 높은 산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형원 선배는 연전연패.

후배에게 소개팅을 애원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초초초 겁나 예쁜 쇼핑몰 여신 한유나와 3년 넘게 사귀고 있다.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보일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을 불러 모은 이유는······ 아시다시피 두 분의 소개팅이 잡혔습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게 소개팅인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크윽.

형원 선배와 한철이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미 자존감이 바닥을 친 상태.

그래서 상대가 소개팅인 것을 모르고 나온다는 사실도 조금의 불만 없이 전적으로 수용했다.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의 상태가 이렇다는 것에 나도 역시 깊은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먼저 확실히 해둘게 있습니다."

"뭐, 뭘 말이지?"

"지금부터 제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 주십시오."

"그, 그럴게. 뭐든지 물어봐."

지금 이 순간.

나는 두 사람에게 슈퍼 갑이었다.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데, 쩔쩔매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살짝 쾌감도 느껴졌다.

"먼저 형원이 형. 제 질문에 답해 주십시오. 형원이 형, 국문과에 여학생이 많습니까? 남학생이 많습니까?"

"여, 여학생이 많아."

"그리고 형. 출판사에 여직원이 많습니까, 남직원이 많습니까?"

"여, 여직원이 아주 조금 더 많은 것 같아."

"심야 라디오에도 고정 패널로 출연했고,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고, 팬 사인회도 했죠?"

"그, 그렇지."

"자, 다음은 한철이."

"어, 어?"

"네가 다닌 과학고, 남녀 공학이었지?"

"응."

"컴공과에도 분명 여학생은 존재했지?"

"몇 명 있긴 했었어. 얼굴은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있긴 있었어."

"학교 다닐 땐, 다른 과랑 연합해서 프로젝트도 많이 했지? 그리고 조인 상대는 주로 디자인과였지?"

"맞아. 디자인과가 디자인을 하고, 나는 코딩을 했지."

"그리고 지금은 대기업에 다니지. 사내 헬스클럽도 이용하고, 회사 등산모임도 나가지."

"그, 그래."

쾅! 쾅! 쾅!

나는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이 말은! 두 사람은 이제까지 여자를 만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형원이 형의 특성상 마주치는 거의 모든 여자에게 추파를 던졌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크,크윽.

나의 잔인한 팩트 폭력에 형원 선배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만큼은 내가 슈퍼 갑.

"그럼 두 분께 또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두 분이 이제까지 여자 친구가 없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 글쎄······"

형원 선배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역시 외모가 아닐까. 일단 얼굴이······"

"형은 형이 못생겼다고 생각해요?"

"못 생긴 건 아닌데, 뭐라 해야 하나. 내가 태민이처럼 생겼더라면······"

"형. 제 얼굴을 봐요. 나도 유나랑 사귑니다."

"억!"

나의 발언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과격한 감탄사를 뱉었다.

"역시 이주원! 이렇게 명료하게 가르쳐주다니! 곧바로 이해가 돼!"

"그랬구나. 내가 여친이 없는 건 절대 얼굴 탓이 아니었어!"

이 사람들이······

"혹시 얼굴 탓이더라도, 이미 그렇게 생겨버린 것.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시 사업가 이주원. 결단력이 있구나."

"맞아요. 냉철하네."

쾅, 쾅.

다시 화이트보드를 두드려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돈했다.

"어쨌든 얼굴 탓은 아닙니다. 그럼 진짜 이유를 찾아보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예, 아니오로 대답해주십시오. 형원이 형!"

"어? 응?"

형원 선배가 마치 죄인처럼 불쌍하게 대답했다.

"혹시 여자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상대에게 자기가 베스트셀러 작가인 것을 어필했습니까?"

"그게, 어필이라기보다는······"

"예, 아니오로 대답하세요!"

"예. 그랬습니다."

"혹시 썸녀와 의견이 충돌할 때, 어떻게든 상대를 이기려고 궤변과 논법을 사용해 바락바락 우기진 않았습니까?"

"굳이 상대를 이기려고 그랬다기 보다는······"

"예, 아니오!"

"예."

"그리고 한철이!"

"어, 응?"

"마음에 드는 여성 앞을 지날 때, 의도적으로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은 적이 있습니까?"

"그게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예! 아니오!"

"예."

"호감이 가는 이성에게 운동을 가르칠 때, 첫날부터 풀세트를 시켰습니까? 나와 태민이를 가르쳤을 때처럼?"

"그게, 원래 운동이 처음 배울 때 습관이 계속······"

"예! 아니오!"

"예, 그랬습니다."

쾅, 쾅, 쾅!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상대를 배려해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위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연애란 누군가를 자기의 삶에 초대하는 것! 언제나 상대의 시선으로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배려야 말로 연애의 시작!"

하지만 형원 선배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흥! 말이 쉽지! 배려를 해야 여자 친구가 생긴다, 누가 그 말을 못 해? 하지만 여자를 제대로 만나 봐야 배려가 뭔지 알지. 배려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배려를 하라는 거야!"

"맞아! 나도 상대를 배려해서 운동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라고 풀세트를 시킨 거였어!"

이 사람들이······

"형원이 형. 그리고 한철아. 배려는 절대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절대 손해도 아닙니다. 일단 저를 보십시오."

"너?"

"유나가 저를 어떻게 대하죠? 말끝마다 나를 바보라고 부르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주먹으로 때리고. 옷도 자기가 골라준 것만 입게 합니다."

크윽.

내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어색하거나 오글거리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 유난히 더 사납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나랑 친한 사람들은 모두들 한 번씩 본 장면이었다.

"하지만 저는 유나가 마음대로 하도록 그냥 놔둡니다. 유나는 제가 자기의 통제 하에 있다고 믿겠죠. 배려는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게 바로 배려입니다."

나의 배려학 개론에 두 사람은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러나?"

"분명 유나는 자기가 나를 이긴다고 믿을 겁니다. 하지만 큰 그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주원이 한유나를 사귄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가 이주원의 승리인 것입니다!"

아아······

좁은 스터디룸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대, 대단하다. 발상의 전환이야!"

"크읏. 배려! 이런 게 배려였어!"

"윽, 난 왜 배려를 하지 못했던 거지? 내 생각이 짧았어. 리스펙트다, 주원아!"

나의 배려학 개론에 두 사람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훗.

나는 그들에게 승자의 미소를 날려줬다.

물론 유나는 사람들 앞에서만 사납게 군다.

단 둘이 있을 땐 다정하고 친절하다.

특히 요즘은 발도 원없이 만지게 해준다.

'그럼 됐지. 그거면 충분하지.'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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