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64화 (164/203)

■ 164. 회귀자는 절대 당황하지 않는다. □

이준성 교수의 회화4.

다음 과제를 정하도록 나와 김태민이 지목받았다.

과제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우리가 하고 싶은 과제를 정하고, 그것을 강의실에 공유해야 한다.

그래서 김태민과 회의를 가졌다.

"음, 일단 고······"

"단순한 고양이는 안 돼."

나는 단호하게 김태민의 말을 잘라버렸다.

"윽."

김태민의 장점이자 단점.

김태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김태민의 그림엔 묘한 여운이나 신비감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김태민의 본능은 언제나 고양이를 향한다.

요즘 종종 수진 선배한테 향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것은 조별 과제.

타인과 부대끼며 서로의 장점을 배우는 과제다.

과제가 하기 싫은 것은 회귀자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왕 하는 과제라면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러니 진정한 친구라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넌 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고양이를 그렸어. 이젠 안 돼. 고양이에서 완전 벗어나거나, 아니면 완전 새로운 방법으로 고양이를 다루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으윽."

나의 단호한 선언에 김태민은 고통스러워했다.

"고양이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아. 그렇다면 고양이를 다룰 새로운 방법을 고민해보자."

"으음······"

"난 항상 고양이를 그리기만 했어. 고양이를 입체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아, 그건 안 되겠군."

김태민이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했다.

고양이를 입체로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만과 하우영이 있지.'

그리고 그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체를 만드는 것은 너무 단순한 발상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 고양이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는 거야. 그리고 과제로 '책 만들기'를 내는 거야."

"책?"

"응. 책은 그림과 비슷하면서도 달라."

요새 유나와 부지런히 독립 서점에 다녔다.

독립 서점에는 미술가들이 만든 소규모 출판물도 많았다.

그런 책들은 책인 동시에 하나하나가 각각 예술작품이기도 했다.

감각적인 그림들.

작가들의 소소하고 자유로운 생각들.

그리고 가끔 유용하고 세세한 정보들.

"책이라면 네가 원하는 고양이도 실컷 그릴 수 있어. 게다가 책에는 페이지의 순서가 있으니까, 기승전결의 구성도 가능하고, 반전을 넣을 수도 있어. 우리가 직접 텍스트를 적어 넣을 수도 있고."

"역시 이주원!"

내 제안을 들은 김태민의 표정이 단번에 환해졌다.

"이번에도 네가 멋진 생각을 해낼 줄 알았어! '책 만들기'로 가자! 그리고 우린 고양이에 관한 책을 만들자! 고양이 책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역시 김태민.

아무래도 우리 둘이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김태민도 나와 마찬가지로 수업시간에 '그들'을 철저히 짓밟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화4 수업 시간이 되었다.

내가 강의실 앞에 나가서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다.

"이번 과제는 '책 만들기'입니다. 책이라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책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으아아아!

서양화과 3학년이면 책 만들기 비슷한 과제를 한 번 쯤은 해 봤을 것이다.

그래서 결코 간단한 과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다들 알고 있었다.

덕분에 과제가 내려지자 원망의 함성이 피어났다.

'하지만 나는 노력천재 회귀자.'

과제를 할 땐 꾀부리지 않는다.

그러니 다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책 만들기는 힘든 과제니까, 2인 1조로 한 권의 책을 만들면 됩니다. 물론 주제는 알아서 정하면 됩니다. 그럼 평가 방식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정성을 위해 저희가 직접 평가하지 않겠습니다. 미대 복도에 판매대를 세우고, 미대 학생들을 상대로 우리가 만든 책을 판매하는 겁니다."

으아아아악!

다시 한 번 원망의 함성이 피어났다.

판매를 전제로 하는 책을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책마다 만든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 가격도 다르겠죠. 그래서 판매가 끝난 이후, 매출의 순서대로 등수를 매기겠습니다. 아마도 이번 수업에서 가장 공정한 심사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확신합니다."

"흐흐흐흐."

나의 과제 선언이 끝나자 이준성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곧바로 따라 나왔다.

"책이라······빡센 과제를 선택했군. 흐흐흐. 학생들 스스로 과제를 내기.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도입한 방식인데, 아주 좋군. 학생들 스스로 빡센 과제를 내다니. 흐흐흐. 모두 괜찮은 책을 만들도록. 마음에 드는 책은 나도 구매하겠다!"

이준성 교수의 선언으로 우리의 '책 만들기'과제는 확정되어 버렸다.

이준성 교수는 만족했지만, 학생들의 얼굴은 원망으로 가득 찼다.

"책 만들기는 어려운 과제인 만큼 시간을 넉넉히 주겠다. 원래는 이번 학기에 6조 모두가 돌아가며 과제를 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희들이 스스로 빡센 과제를 내는 덕에, 끝에 몇 조는 잘리게 될 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다음부터는 과제를 내고 싶은 놈들은 자발적으로 지원하도록."

그렇게 이번에도 새로운 과제가 시작되었다.

* * *

"형."

하우영이 진지한 사색에 잠긴 임진만을 불렀다.

원래는 실력파 에이스였던 임진만.

그는 언제나 즐겁게 조소과 과제를 뚝딱뚝딱 해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예쁜 후배들을 추근거리며 마음껏 즐거운 대학 생활을 만끽했다.

하지만 어쩌다 서양화과 악마들에게 표적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임진만은 뜻하지 않게 진지하고 치열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뭐냐?"

"책 만들기 말입니다. 제가 좋은 생각이 났어요."

"무슨 생각이지?"

임진만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우영을 바라봤다.

마치 좋은 생각이 아니라면 곧바로 뒤통수로 손바닥이 날아올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꿀꺽.

하우영은 침을 삼키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

"우리 조소과에 대한 책을 만드는 겁니다. 조소과는 다양한 재료를 다루고, 재료마다 복잡한 기법이 있죠. 그것들을 책으로 정리하는 겁니다. 그럼 다른 과 학생들에게도 무척 요긴할 테고, 또 우리 과 후배들한테도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당연히 그만큼 많이 팔리겠죠. 서양화과 양아치들을 압도하고 1위가 될 지도 몰라요."

어떻습니까? 선배?

괜찮은 의견이지요?

하우영이 의견을 말하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임진만의 표정은 단호했다.

"안 돼."

"으윽, 왜 안 된다는 말이죠?"

임진만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이번에 강영 교수의 수업을 겪으며 깨달았다. 단순히 좋은 과제로는 절대 놈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좋은 과제로 이길 수 없다고요? 그, 그게 무슨 말이죠?"

"단순히 좋은 과제로는 부족하다! 서양화과 놈들을 도발하고, 우리의 과제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해. 놈들을 열 받게 해야 하고, 놈들이 함정으로 달려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 대체 과제가 왜 그래야 하는 거죠?"

"시끄러! 이건 전쟁이야! 이건 더 이상 과제가 아니라고!"

크윽.

하우영의 마음속에선 억울함이 피어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후배 위계가 뚜렷한 조소과.

거기다 임진만은 실력도 있고, 성격도 더러운 실세 선배였다.

임진만이 그렇게 우긴다면 하우영은 따를 수밖에,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길!

하우영은 불만을 억누르며 혼자 조소과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조소과 학생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한유나와 이수진이 보였다.

"여어, 누나들!"

"아, 우영이구나."

"누나들 뭐해요? 무슨 이야기했어요?"

넉살 좋은 하우영이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 이번 과제 시작했거든. 책 만들기."

이수진이 늘 하던 대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무슨 책 만드는 데요?"

"응. 제목은 일단 '다른 과 학생이 배우는 조소과'로 정했어. 조소과는 재료도 다양하고 기법도 많잖아. 그래서 조소과 수업을 듣는 타과 학생은 헤매게 되거든. 그런 학생들을 위해 안내 책자를 만들 거야."

어라?

이건 내 아이디어랑 비슷하잖아?

순간 하우영의 가슴 속에 쎄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하우영은 한유나와 이수진을 잘 알았다.

'철저한 유나 누나가 선택했다면 괜찮은 주제란 말이었잖아! 역시 우리가 이걸로 먼저 밀어붙였어야 했어! 제길, 진만이 형,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하지만 하우영의 불만에 찬 속도 모르고 상냥한 이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영아, 그래서 책 만들려고 조소과 사람들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거든. 우영아, 너도 우리 많이 도와줘야 해."

"네, 그럴게요. 누나."

그렇게 모두 각자의 책만들기 과제에 돌입했다.

* * *

룰루랄라.

일도 과제도 순조로와서 중년 회귀자는 요즘 사는 게 즐거웠다.

건강한 어머니.

지금 이 순간에도 차곡차곡 쌓이는 계좌.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친구까지.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회귀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미대 복도를 걸었다.

"왜 그렇게 신났어요?"

그런데 누가 날 불렀다.

고개를 돌려봤더니 이정원이었다.

"아, 정원이구나. 과제는 잘 돼가?"

"아, 죽겠어요. 전부 오빠 때문이에요. 책을 만들라니! 표지부터, 제본, 인쇄까지.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돈은 돈대로 많이 들고."

이정원이 툴툴거렸다.

"그래도 작가로 생활하려면 배워두면 좋아. 그래서 너랑 대성이 형은 어떤 책을 만들기로 했는데?"

"인터뷰요."

"인터뷰?"

"네. 우리 과 교수님들은 대부분 유명한 작가잖아요. 잘나가는 선배들도 제법 있고. 그래서 그 분들을 직접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는 거예요. 미대생으로 필요한 이야기도 듣고. 또 인터뷰에는 사진도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사진 대신 우리가 드로잉을 하는 거예요. 그분들에게 받은 인상이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거죠."

인터뷰?

띠딩!

순간 머릿속에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노련한 회귀자는 언제나 포커페이스.

절대 본마음을 들키지 않는다.

"그림을 넣은 인터뷰? 재밌겠는데?"

"그쵸? 우리 책 나오면 오빠도 한 권 사줘야 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음, 일단 대성 오빠가 이준성 교수님을 인터뷰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저는 강영 교수님을 맡고요. 그 외에도 인터뷰 가능한 선배나 교수님들을 물색하고 있어요."

"음, 정원아. 그런데 강영 교수는 제외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왜죠?"

"이번에 조교수 자리를 두고 강영 교수와 이준성 교수가 접전을 펼쳤다는 소문이 있잖아.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이준성 교수 입장에서는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역시 주원 오빠. 오빠한테 말하길 잘했네요. 그런데 그럼 어떡하죠? 강영 교수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려고 했었는데, 누굴 대신 채워 넣지?"

이정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래서 나도 같이 고민하는 척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으으, 있잖아.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누구죠? 누군데요?"

"그런데 그 사람이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라서 아주 바빠. 그리고 성격이 뭐라 해야 할까······"

"어떤 데요?"

"조금 고독한 사람이라고 할까? 그래서 인터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아······"

이정원이 힘 빠지는 소리를 뱉었다.

"하지만 내가 아끼는 후배라고 간곡히 부탁하면 만나는 줄 거야."

"정말요?"

"대신 인터뷰를 신경써서 잘 해야 해. 그 사람의 책도 미리 읽어보고, 그 사람의 좋은 점도 찾아내려 애쓰고, 여러 번 만나면서 그 사람 이야기도 귀 기울여 잘 듣고······알지? 인터뷰는 상대에게 애정을 갖고 공을 들일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오잖아."

"그럴게요! 꼭 그럴게요! 최선을 다할게요! 그런데 책을 쓰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바쁘다면서 절 여러 번 만나준대요?"

역시 크리틱 꿈나무.

짧은 대화에서도 내 말꼬리를 붙잡고 오류를 공격해온다.

하지만 지금 다급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정원이다.

회귀자는 절대 당황하지 않는다.

"이형원이라고······알아?"

"알죠! 우리 학교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잖아요! 오빠랑 같이 영 아트도 나갔고! 슈퍼스타잖아요! 대박! 이형원 작가님 인터뷰를 주선해주신다고요! 오빠, 최고예요! 이 은혜 잊지 않을 게요!"

"잘 기억해. 내가 말한 규칙들."

"책을 미리 읽어보기! 좋은 점 찾아내기! 여러 번 만나면서 이야기 잘 들어보기!"

"그래, 꽤 힘들긴 하겠지만, 너는 내가 아끼는 후배니까 특별히, 어떻게든 인터뷰를 주선해줄게."

"오빠! 고마워요! 진짜 오빠밖에 없어요!"

후후훗.

역시 나는 이주원이다.

일과 사랑.

공부와 예술.

이제는 소개팅 주선까지.

대체 내가 못하는 게 뭘까?

"클클클클."

"억, 오빠. 갑자기 왜 이상하게 웃어요?"

아차!

너무 자아도취해서 나도 모르게 남동민식 죠지 클루니 웃음을 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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