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다가오는 전쟁 □
"너희들이 날 좀 도와야겠다."
임진만과 하우영은 조소과에서 머리 좀 돌아간다는 남자 후배 다섯 명을 집합시켰다.
"사실 진만이 형과 내가 요즘 서양화과 부전공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형이 신나게 털리고 있다."
빠각.
임진만이 일단 하우영의 뒤통수를 한 대 올렸다.
"이 새키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한심해 보이잖아. 그리고 너도 조만간 털릴 거야.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임진만은 전화기를 들고, 중국집 번호를 눌렀다.
"여기 짜장면 곱빼기 일곱 개랑, 에이, 탕수육도 두 개 주세요."
"형, 저는 탕수육보다 양장피가 좋습니다."
"짜장 일곱 개랑, 탕수육 하나, 양장피 하나요."
임진만은 하우영을 노려보며 주문을 바꿨다.
그렇게 임진만은 통 크게 쏘고 난 후 천천히 현 상황을 브리핑했다.
"나와 우영이가 서양화과 부전공을 시작했다. 그런데 서양화과 놈들이 우리를 다구리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이유를 생각해봤지."
왜일까?
초롱초롱 조소과 후배들이 임진만을 쳐다봤다.
"사실 그림은 눈속임이다. 세상의 사물을 2차원 위에 실재처럼 보이게 그리는 거지.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의 조소는 3차원이다. 실재하는 세상이지. 그러니 조소가 그림보다 우월한 거야. 게다가 조소는 어렵지. 다양한 재료를 다뤄야 하고. 하지만 그림은 쉽다. 내 생각에 그래서 서양화과 놈들이 우리들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렇군요."
"역시 진만이 형, 일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진만이 형이랑 우영이 형은 그림 솜씨도 뛰어나니까 놈들이 위기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후배들의 아첨 비슷한 대답에 임진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조소과 학생들은 사회생활을 잘했다.
특히 임진만이 중국음식까지 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김태민과 이주원이 임진만을 타겟으로 삼은 것은 자기들의 여자 친구들을 추근댔기 때문이었다.
다만 임진만은 여자들에게 들이대는 게 워낙 일상이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대성이 자기를 공격하는 것은 임진만에게 당한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진만은 가해자.
지난 일에 대해서는 그냥 재밌는 장난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정원이 그를 공격하는 이유는······
그저 이정원의 크리틱 불나방 본능이 이주원에 의해 각성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무튼.
임진만은 연설을 시작했다.
"자, 짜장면 먹으면서 들어라. 우리 학교는 부전공이 필수지. 그러니 교칙이 바뀌지 않는 한 조소과는 계속 서양화과 수업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나와 우영이가 서양화한테 계속 두들겨 맞다 보면, 놈들이 우리 조소과를 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 이번 전쟁은 조소과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거야. 그래서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조소과의 집단 지성으로 서양화과 양아치들을 후들겨 패주는 것이다."
조소과 후배들은 짜장면을 후루룩 삼키며 '아, 또 귀찮은 일이 하나 늘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배가 까라면 까야지, 어쩔 수 없었다.
"자, 이번 과제는 '시간의 소거'다. 강영 교수는 심지어 우리 조소과의 선배이기도 하지. 제길, 우리 선배는 서양화과 교수자리까지 꿰 찼는데, 우리 후배들이 서양화과 놈들에게 두들겨 맞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그리고 임진만은 자기 크로키북과 노트북을 꺼내 다음 과제를 위한 구상을 보여줬다.
"너희들이 내 아이디어를 보고 보완할 점, 공격예상지점을 찾아내야 해. 자, 봐라. 나는 탁상시계의 바늘들을 잘라낼 거야. 그럼 시계는 계속 움직여도 눈에 보이는 시간은 소거되는 거지. 나는 그걸 영상으로 찍고, 정물화로도 그릴 거다. 남들보다 두 배로 과제를 하는 셈이지. 그리고 영상과 그림의 괴리에서 새로운 예술적 재미가 발생하겠지."
"오오, 형 참신한데요? 바늘이 없는 시계라니. 역설적이네요. 역시 조소과 에이스답게 아이디어가 좋습니다. 다만······"
"다만?"
짜장면을 먹던 후배 하나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형이 고른 플라스틱 탁상시계 말인데요. 정물화로 그릴 거면 조금 빈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그림인 만큼 엔틱한 느낌의 금속 시계가 낫지 않을까요?"
"맞는 말 같아요. 플라스틱보다 금속 소재를 그리면 그림의 보는 재미가 더 올라갈 겁니다."
"일 리가 있군."
임진만이 시침을 부러뜨려서 준비한 탁상시계는 12000원.
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찾아낸 엔틱 탁상시계는 69000원.
"형, 서둘러야 합니다. 그림도 그리고 영상도 찍으려면 3주도 빠듯해요."
"제길!"
임진만은 결국 69000원의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시계 앞에는 투명한 찻잔을 둘 거야. 찻잔 안에는 차가운 물과 홍차 티백이 들어있지. 차가운 물에 홍차가 천천히 번지는 것을 영상으로 찍으면 시간의 느린 흐름을 담을 수 있을 거야."
"오오! 역시 아이디어 박스! 진만이 형 대단합니다."
"역시 진만이 형은 조소과의 기둥이예요! 다만······"
"다만 또 뭐냐?"
"형이 지금 고른 민짜 유리잔은 엔틱 탁상시계에는 격이 맞지 않습니다."
"그, 그렇겠군. 일리 있는 지적이다."
임진만이 인터넷에서 다시 고른 크리스털 투명 잔은 39000원.
"무슨 유리잔이 이렇게 비싸!"
"형, 서둘러야 해요!"
제길.
임진만은 결국 결제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형,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다."
역시 한국대 조소과 일곱 명이 모인 만큼, 작품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 넘쳐났다.
"뭐냐, 또?"
"형이 테이블 위에 깐 체크무늬 식탁보 말입니다. 확실히 정물화의 배경에 무늬가 들어가면 그릴 것도 많고, 기교도 부릴 수 있죠. 다만 여기서는 시계와 투명 잔을 방해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좀 싸구려 느낌이고요. 좀 더 고풍스런 느낌으로 가는 게······"
"맞아요. 형. 저도 동의합니다. 형의 그림 실력이라면 조금 더 중후한 느낌의 배경 천이 더 어울릴지도······"
베이지 에스닉 린넨 블랭킷 58000원.
임진만.
예술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남자!
임진만은 또 한 번 눈물을 머금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고맙다. 동생들아. 걸작을 그려서 서양화과 놈들을 짓밟고 말겠다. 그림이 완성되면 다시 보여주마. 그럼 놈들이 공격할만한 곳을 너희들이 찾아주는 거다."
"알겠습니다! 형, 기대할게요!"
그렇게 임진만은 처절한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으음.
시간의 소거라······
'그런데 사실 모든 그림은 결국 시간의 소거가 아닐까?'
그림 속 모든 사물들은 정지해 있다.
시간이 멈춘 한 순간의 간직인 것이다.
'멈춰있는 한 순간을 담기 때문에 그림이 가치 있는 예술이 되는 것이겠지. 시간의 소거는 결국 말장난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에 잠겨 한국대를 걸었다.
'강영 교수는 시간의 소거를 자유롭게 해석해도 된다고 했지.'
나는 여러 가지 시간을 상징할 수 있는 사물들을 생각해봤다.
시계부터, 얼음, 연기 등등.
하지만 넓게 해석하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물이 시간을 담고 있어서 거의 무엇을 그리든 상관없었다.
그릴 것은 충분히 많았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재미있는 시간의 소거를 그려보고 싶었다.
'결국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때 그림 속 시간도 진짜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
영문과 부전공인 나는 미대 건물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때 건물 옆에 자전거 보관소가 눈에 띄었다.
자전거 보관소에는 여러 대의 알록달록한 자전거가 묶여 있었다.
그리고 한 편에는 주인이 찾아가지 않는 녹슨 자전거들이 쌓여 있었다.
한국대는 굉장히 넓은 학교였고, 그래서 많은 한국대 생이 자전거나 스쿠터를 애용하고 있었다.
'자전거? 둥근 바퀴와 강철 지지대. 다양한 구조들이 복잡한 건물처럼 엮여 있지. 그림으로 그리면 재미있을 거야. 게다가 자전거의 바퀴는 두 개. 자전거는 잠시라도 멈추면 옆으로 넘어지게 된다. 어쩌면 자전거로 시간의 극적인 연출이 가능할 지도 몰라.'
나는 자전거를 그리기로 결정했다.
* * *
"유나야."
"응?"
"스쿠터 사줄까? 요즘 학교에 스쿠터 타고 다니는 사람 많잖아. 너도 바쁘니까 꽤 도움 되지 않을까?"
"자전거도 못 타는데 스쿠터를 어떻게 타냐?"
유나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시골 출신에 뭐든 잘 해내는 유나였지만, 특이하게 자전거는 타지 못했다.
"내가 자전거 가르쳐줄까?"
"됐어. 다 늙어서."
"너도 무서워하는 게 있구나."
"무섭긴, 누가 무서워한다는 거야!"
이제 사귄 지 3년 반.
유나의 반응 패턴은 전부 내 예상 안에 있다.
"자전거 무서워서 안 배우는 거 아니었어?"
"무섭긴!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바빴으니까 안 배운 거지."
"자전거 금방 배워. 약간 운동 신경만 있으면. 아, 운동 신경은 없는 편인가?"
"무슨 소리야? 나 달리기 잘하거든? 다른 체육도 잘 했거든?"
이제 두 번쯤 승부욕을 자극했으면 한 번 칭찬해준다.
"그래? 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넌 다리도 길어서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 거야."
"내가 좀 다리가 길긴 하지."
이쯤 되면 거의 넘어왔다.
이제 유나의 또 다른 포인트인 책임감 같은 것도 슬쩍 자극해준다.
유나는 그림 같은 가족에 대한 환상이 있다.
"자전거 재밌어. 자전거 탈 줄 알면 시골집에 살면서 근처 슈퍼마켓으로 장보러 갈 수도 있고, 어린 아이들이랑 같이 소풍도 갈 수도 있고······"
"아이들이랑 소풍? 안, 안 위험하겠지?"
"위험하긴. 안 넘어지게 내가 뒤에서 잡아줄게. 너 정도면 금방 배울 거야."
그렇게 유나를 꼬드기는 데 성공했다.
자전거가게에서 예쁜 자전거도 샀다.
토요일 오전.
자전거를 가지고 학교의 운동장에 도착했다.
"카메라는 왜 가져왔어?"
유나가 내 목에 걸린 카메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기념할만한 날이잖아. 앞으로 네가 자전거를 타고 누릴 모든 행복한 순간들이 전부 오늘부터 시작되는 거잖아. 사진으로 남겨둬야지."
"치. 사진 찍느라고 한눈 팔지 말고 단단히 붙잡아."
그렇게 유나에게 자전거 교습을 시작했다.
과연 오래지 않아, 유나는 비틀비틀 혼자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촬영했다.
이제 우린 사귄지 3년 반.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이용할 수 있으면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예술가의 치열한 자세!
자전거는 계속 움직이는 동안만 서 있을 수 있다.
만약 자전거의 시간이 멈춘다면?
자전거는 옆으로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 넘어지는 순간을 그림에 담는다면?
'제법 다이나믹하고 긴장감 넘치는 그림이 될 지도 몰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전거와 끙끙대는 유나의 사진을 부지런히 찍었다.
"와! 나 이제 자전거 잘 탄다! 자전거 재밌다! 봐! 나 이제 한 손 놓고 탈 수도 있다!"
아직 잘 타는 것 같지는 않지만 유나는 신나서 소리쳤다.
"주원아, 자전거 가르쳐줘서 고마워! 이제 날씨도 시원하니까, 다음 주에 도시락 싸서 소풍가자. 같이 자전거 타고."
"내가 자전거 가르쳐줬으니까, 도시락은 네가 준비해."
"그럴게!"
오늘도 치밀한 중년 회귀자는 예술과 사랑, 도시락까지 모두 챙겼다.
* * *
그렇게 드디어 이번에도 어김없이 결전의 날이 밝았다.
강영 교수는 오늘도 쿨한 모습으로 강의실 앞에 섰다.
"지난 번 과제가 꽤 맘에 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기대가 되는군. 자, 오늘은 누구부터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