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60화 (160/203)

■ 160. 뽈뽈 □

"사실 모든 사물에는 시간이 깃들어 있다. 시간이 관여해 사물의 속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시간을 소거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사물의 의미와 이미지가 달라지고 우린 새로운 대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림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다."

으음.

강영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시간을 소거한다고?

많은 의미를 지닌 말 같았다.

수업의 주제를 '시간'으로 한정 지었으면서도 생각할 것은 오히려 더 많아진 느낌이었다.

대학에서 그림을 배운다는 일은 결국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영 교수의 수업은 내게 무척 유익한 것 같았다.

"물론 사물에 따라 시간의 소거가 의미 없는 대상도 있을 것이고, 더욱 변화가 큰 대상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소거한다는 개념도 각자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 예를 들어보자."

강영 교수는 자기 가방을 열고 안에서 신문을 꺼냈다.

'비싸 보이는 가방, 한 사오십 하겠군.'

이것은 옷장사의 직업병.

이제는 옷이나 소품을 보면 대강 가격이 떠오른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면 반사적으로 55인지 66인지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무튼.

다시 수업으로 돌아가서.

강영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신문이 있다. 어떻게 본다면 단순한 종이와 잉크의 조합물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을 염두에 두고 바라본다면? 신문의 맨 윗줄엔 날짜가 적혀 있다. 날짜는 이 신문이 갖는 존재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안에 적힌 수많은 기사들. 대부분 '어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이 신문에서 '어제'를 소거해버린다면? 그럼 이 신문에서 상당수의 글자와 사진도 같이 삭제해야 할 것이다. 다시 회색의 종이로 돌아가겠지."

강영 교수는 신문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과제를 던졌다.

"이번에도 3주를 주겠다. 시간을 넉넉히 주는 것은 그만큼 좋은 과제를 가져오라는 뜻이다. 주위를 관찰하고, 시간에 종속된 사물을 발견해라. 모든 미술의 시작은 언제나 관찰이다. 그리고 시간을 소거하고 달라진 사물을 작품으로 만들어서 가져와라. 시간, 소거.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상관없다. 그려도 되고, 만들어도 된다. 너희들은 자유롭다."

그렇게 과제가 주어지고, 수업이 끝났다.

나는 그대로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강영 교수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3학년······'

자유로운 과제가 더 힘들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 * *

며칠을 고민했지만, 딱히 재미있는 소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교수의 말대로 시간은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다.

그래서 그릴 것들은 많았다.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뭔가 강한 느낌이 오는 소재를 잡아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리는 나도 재미있고, 교수들도 칭찬해준다.

'그런데 그 느낌이 쉽게 오지 않는군.'

그래서 학교든, 사무실이든 나는 틈만 나면 눈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깊은 밤.

사무실.

이제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에도 나는 사무실에 출근해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보고 받은 사항들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면 맘이 놓인다.

그리고 내일 배송을 위해 준비된 옷과 상자를 보면 자연스레 힐링도 되었다.

그렇게 사무실에 앉아 하루 일을 정리하면, 유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도 같이 출근해, 내 앞에서 뽈뽈 거리며 자기도 뭔가를 하곤 했다.

'일과 그림을 고민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여자 친구가 보인다면?'

게다가 그 여자 친구가 무척 귀엽다면?

그렇다면 덫을 놓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유나야."

나는 친절한 목소리로 유나를 불렀다.

"응?"

"여기, 이리 와서 앉아 봐."

나는 사장실의 책상 앞을 가리켰다.

유나는 내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의자를 끌어다 내 책상 앞에 앉았다.

"왜 그래?"

똘망똘망 커다란 눈동자.

나는 유나 앞에 종이와 연필을 밀었다.

"전에 나한테 미술 치료 가르쳐 달라고 했었잖아."

"응. 그랬지."

"요즘 재미있는 테스트를 배웠는데, 한 번 해보지 않을래? 내가 네 내면을 분석해볼게."

"진짜? 나, 할래. 재밌겠다."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유나야. 마음 편하게 갖고. 연필을 잡아. 너무 잘 그릴 필요도 없고, 그냥 어린 친구한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면 돼."

심리 테스트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유나는 의욕적으로 연필을 붙잡았다.

"머릿속에 새 둥지를 떠올려봐."

"새 둥지? 새들의 집 말이야?"

"응.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그 둥지를 그리는 거야."

"새도 그려?"

"응. 그냥 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그려도 상관없어."

"알겠어."

유나는 쓱싹쓱싹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미대생답게 대강대강 그려도 제법 그림이 나왔다.

"자, 다음은 비 오는 날을 그릴 거야. 편하게 지금 떠오르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을 그려봐.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도 같이 그려봐."

"비 오는 날? 알겠어. 제주도는 비가 오면 더 예쁘지."

유나는 이번에도 쓱싹쓱싹 근사한 그림을 그려냈다.

"잘 그리네."

"당연하지."

유나는 내 칭찬을 듣고 꽤 뿌듯했다.

미술치료 교수가 말했다.

[ 아이들에게 미술치료를 위한 그림을 그리게 할 때는 가능한 편한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칭찬을 자주해서 아이들의 참여 의욕을 고취해야 합니다. ]

'교수의 말이 스물다섯 살 유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군.'

유나는 명문대 생에 공부도 잘 하고, 일도 야무진 똑순이였다.

하지만 노련한 중년 회귀자 앞에서는 똑순이도 다 부질없는 법!

"자, 이번엔 가족을 그려봐. 어머님이랑, 아버지, 유미랑 유현이. 네 가족의 평범한 한 풍경을 떠올리고, 그걸 그려봐."

"우리 가족? 무슨 테스트지?"

유나는 흥얼흥얼 콧노래도 부르며 신나게 그림을 그렸다.

잠시 후.

나는 유나가 그린 세 장의 그림을 진지한 표정을 관찰했다.

"어때? 이주원, 빨리 말해."

내가 한참 말이 없자, 유나가 다그쳤다.

나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세 장의 그림의 순서를 재배치했다.

"그래, 유나야. 이제부터 시작할게. 너도 모르던 내면에 관한 이야기니까, 어색할 수도 있어. 그리고 나도 전문 치료사도 아니고, 수업시간에 배운 것뿐이니까 너무 믿을 필요도 없어."

"뜸 그만 들여."

"그리고 의자를 끌어서 이리 내 앞으로 와. 내면에 관한 대화니까, 가까이서 얼굴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

드르륵.

유나는 바퀴달린 의자를 밀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먼저 비 오는 날의 풍경."

나는 유나가 그린 그림을 유나에게 내밀며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그림은 지금 네가 겪는 스트레스를 보여준대. 내리는 비의 양과 모양이 너의 스트레스래."

"진짜?"

비는 제법 내리고 있었다.

유나는 요즘 적당히 스트레스 받고 있다는 증거.

"하지만 스트레스가 항상 나쁜 건 아니야.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긴장을 유지하지. 게다가 넌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니까, 조소과 부전공에 회사까지. 스트레스가 없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런가?"

"봐. 대신 빗방울의 모양이 또렷하지? 이건 네가 스트레스의 대상을 분명 인지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림 속의 사람은 우산과 장화를 가지고 있어. 이 말은 스트레스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야. 넌 지금 잘 하고 있는 거야."

"응, 그렇구나. 신기하다."

유나는 잘 하고 있단 말이 뿌듯한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림 속에 이야기가 있는 거야?"

유나가 그린 그림 속에는 어린 여자 아이가 우산을 쓰고, 다른 한 손에는 또 접은 우산을 쥐고 있었다.

"응. 이 아이가 나야. 어렸을 때 나는 준비성이 철저해서 흐린 날엔 항상 우산을 챙겨서 학교에 갔거든. 근데 유현이는 언제나 비 맞고 다니니까. 그래서 아예 다음부터는 흐린 날에는 우산을 2개씩 가지고 다녔어."

"착한 누나였네."

"아, 무지 귀찮았어. 우산이 무겁기도 하고. 내가 유현이 짐 안 챙겼으면 키가 3cm는 더 자랐을 거야. 내가 유미보다 작은 이유가 있다니까."

딱히 유나의 키에 불만이 없던 나는 다음 그림을 가리켰다.

이번엔 유나가 그린 새 둥지 그림.

크기가 다른 새 세 마리가 둥지에 앉아 있었다.

"새 둥지 그림은 네가 얼마나 마음에 안정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준데. 잘 봐. 견고한 나뭇가지 위에 조밀하게 지어진 새 둥지가 보이지? 이 그림이 정확히 언제를 상징하는지 모르겠는데, 넌 자신이 굉장히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는 거야."

"그래?"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유나는 부족함이 없는 가정에서 자랐고, 좋은 학교를 다니다, 이십대 초반에 큰 부자가 되었다.

'물론 거기엔 유능한 남친이 한몫 했지.'

그리고 유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려진 새들이 다들 크기가 다르네. 제일 큰 새가 어미 새야?"

"아니, 세 마리는 형제들이야. 엄마 새랑 아빠 새는 벌레를 잡으러 갔어. 새들은 지금 배가 고파서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봐. 그림엔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투영된데. 아기 새가 세 마리인 것은 네 동생이 2명인 거랑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

"그렇네. 신기하다. 난 무심코 당연히 세 마리를 그렸는데."

"그리고 잘 봐. 보통 아기 새라면 크기를 비슷하게 그릴 거야. 상식적으로도 새들은 한 번에 낳은 알에서 태어나니까. 그런데 새들이 크기가 다 다르지? 이 말은 이 새들이 너희 세 남매를 뜻한다는 뜻일 거야."

"그, 그래?"

"그런데 봐. 아마 제일 큰 새가 너일 거야. 그런데 실제로는 유미가 너보다 키가 더 크지. 그럼 이 말은 새의 크기는 육체의 키 외에 다른 것. 첫째로서의 너의 역할이나 의무감을 뜻하는 게 아닐까?"

"아······"

내 분석을 듣고 유나는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리고 어미 새 두 마리가 안 보이잖아. 둥지가 견고하니까, 가정의 불화 보다는 단순히 맞벌이인 부모님들의 부재를 뜻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이 그림은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네가 느끼는 책임감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어."

내 지적에 유나는 뭔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림 속 새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 마지막으로 네가 그린 가족의 그림을 보자.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 줄래?"

유나가 그린 그림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남자 아이, 여자 아이, 남자 어른.

그리고 부엌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여자 어른과 여자 아이 한 명이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집 안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냐면, 우리 집에서 매일 겪던 일과야. 엄마, 아빠가 퇴근하면 둘 다 피곤하잖아. 그럼 엄마가 이렇게 말해. '당신은 하루 종일 식당에서 일했으니까, 밥 하는 거 지긋지긋 하잖아. 저녁은 내가 만들게.' 그럼 아빠는 유현이랑 같이 놀아줘. 그리고 유미는 그 옆에 누워서 텔레비전 보고."

"넌?"

"엄마 혼자 저녁 지으면 힘드니까, 난 엄마 도와주지."

"여기 부엌에 서 있는 게 너구나."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봐. 가족들 간의 거리는 유대감을 뜻 해. 그림 속 여자 아이는 거리는 어머니랑 더 가깝지만, 눈은 아버지 쪽을 보고 있지. 너는 언제나 아버지, 어머니의 위치를 파악하고, 둘의 기분을 신경 쓰고 있는 거야."

"내, 내가?"

"응. 잘 봐. 유현이는 아버지랑 착 달라붙어서 놀고 있지. 유미는 누워서 쉬고 있고. 그런데 넌 엄마를 도와 저녁을 짓고 있지. 아마, 넌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구성원으로 네 책임을 다하려고 했던 거야."

"내가 좀 그러긴 했지."

유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넌 그림을 그리잖아. 그건 미술 선생님인 어머니를 닮은 거고. 그런데 요리도 열심히 배웠어. 그건 네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이 내심 아버지한테 미안해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그, 그랬나? 난 그냥 요리가 재밌어서 그런 거라고 믿었는데······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도 좋고."

"어쩌면 다른 이유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넌 책임감이 강했고, 맞벌이 부모님이 집에 늦게 오시니까 동생들한테 음식을 먹이려고 요리를 배운 걸 수도 있어."

"그, 그랬나? 내가 동생들을 잘 챙기긴 했지."

"여길 봐. 두 마리 동생 새들은 부리를 벌리고 있는데, 제일 큰 새는 한 걸음 물러나서 부리를 다물고 있어. 이 그림 역시 항상 어른처럼 굴려는 너를 뜻하는 게 아닐까?"

"아······"

유나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애잔한 감탄사를 뱉었다.

"내 생각에 넌 언제나 최선을 다하려는 성격인 것 같아. 그래서 언제나 좋은 딸이 되려고 애썼고, 좋은 언니나 누나가 되려고 너무 애쓴 것 같아. 그래야 네가 마음이 놓이긴 했겠지만, 그래도 이제 조금은 내려놔도 될 것 같아."

유나는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고마워, 주원아. 심리 테스트 신기하고 재밌다."

"아냐. 아직 다 안 끝났어."

"응? 또 남은 거야?"

"자, 유나야.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뱉어봐."

후우.

심리테스트 결과를 완전히 믿은 유나는 잠자코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자, 날 따라서 말 해봐. 나는 이제 더는 부지런한 딸이 아니다."

"더는 부지런한 딸이 아니다."

"나는 이제 더는 착한 누나가 아니다."

"더는 착한 누나가 아니다."

"나는 이제 더는 잔소리쟁이 언니가 아니다."

"잔소리쟁이 언니가 아니다."

"나는 이제 첫째가 아니라 막내다."

"나는 이제 막내다."

"그래, 잘했어. 유나야. 그럼 날 오빠라고 불러봐."

"옵······우이씨!"

유나는 눈을 부릅뜨고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우이씨! 난 진짜로 했는데, 장난이나 치고! 나빴어!"

아깝다.

거의 다 성공했는데.

처음 몇 번은 주먹을 피했지만, 분노에 찬 공격을 전부 막을 순 없었다.

결국 주먹을 진정시키기 위해 유나를 덥썩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진짜 미안. 미안. 너 찜닭 먹고 싶다고 했지. 내가 만들어줄게. 앞으로 일주일동안 모든 요리 내가 하고, 설거지도 내가 할게. 진짜 미안."

그렇게 겨우 분노를 진정시켰다.

"우이씨. 두 마리 만들어! 유미도 먹이게. 당면이랑 고구마도 많이 넣고."

"그래, 그럴게."

다행히 유나가 배가 고팠는지, 오늘은 그렇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은 성과였어.'

성공을 못해 아쉽긴 하지만, 순간적인 함정 치고는 꽤 훌륭했다.

유나의 분노가 가라앉으려면 조금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쿨타임이 다 차면, 다시 도전해서 다음에는 꼭 오빠를 듣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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