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시간의 소거 □
정화 선배, 속옷 도매상 사장인 김재익, 은성사 사장님.
이렇게 3명과 함께 중국 출장을 떠났다.
금요일 오후에 출발해 화요일 밤에 귀국하는 코스였다.
환생하고 나서 첫 해외 출장이었다.
'하이 유나의 매출 규모를 생각해보면, 솔직히 조금 늦은 감이 있어. 진작 중국에 다녀와야 했어.'
중국은 세계 최대의 의류 생산 시장이자 도매 시장.
그리고 하이 유나의 미래의 최대의 판매처이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중국을 잘 알아야 했다.
'그나저나 첫 땡땡이군.'
금요일 오후 수업부터, 화요일 수업까지 어쩔 수 없이 모두 빠져야 했다.
열심히 사는 것이 내 두 번째 인생의 목표였다.
그래서 땡땡이 역시 회귀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뿌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영혼이 자유로와야 하는 미대생치고는 학교를 너무 열심히 다녔어. 내가 땡땡이도 치다니. 예술가로서 또 한 걸음 성장했구나.'
아무튼 그렇게 우리 네 사람은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다.
보통은 통역이나 전문 중개인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김재익과 은성사 사장님이 둘 다 중국어에 능통했다.
특히 마음 좋은 동네 아저씨 느낌의 은성사 사장님이 쏼라쏼라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땐,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다.
"먹고 살려면 별 수 있나. 그리고 자네 두 사람도 배워야해. 옷장사를 크게 하려면 중국어는 필수지."
그리고 도착한 도매 시장.
나와 정화 선배는 중국의 스케일에 얼어붙고 말았다.
난 이제까지 동대문 도매 시장이 넓은 줄 알았다.
동대문은 거의 한국 전체를 커버할 만큼 큰 시장이다.
그런데 광저우에는 동대문보다 더 큰 시장이 여러 개 있었다.
"여길 어떻게 다 둘러보죠?"
"다 못 보지. 제대로 다 보려면 한 시즌이 끝날 거야. 그럼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하고, 그러다보면 평생 봐도 다 못 보지."
그리고 김재익은 우릴 한 도매 건물로 안내했다.
그 건물엔 지하부터 맨 위층까지 여자 속옷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만 제대로 봐도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여자 속옷은 더 꼼꼼히 봐야 하니까요."
이번 출장에 내가 할애한 시간은 주말까지 껴서 4일 반.
나름 땡땡이까지 치면서 최대한 시간을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턱없이 모자랐다.
"서두르셔야 해요. 이 시장을 다 둘러보면 제가 거래하는 공장을 보러 갈 겁니다. 어설프게 수입하면, 주문한 상품과 들어온 상품이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장과 공장.
4일 동안 정신없이 지냈다.
매일 아침에 출발해서 녹초가 되어 새벽에 호텔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노력상점]의 노력코인들을 원 없이 퍼부어 겨우 버텼다.
다 똑같아 보이는 속옷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가격도 점검하고, 머릿속으로 판매 전략까지 짜야 했다.
나야 사기 능력이라도 있지, 그런데 정화 선배는 맨몸으로 꿋꿋하게 버텼다.
"누나, 안 힘들어요?"
"힘든데, 재미있어. 그리고 내가 제안한 일인데, 더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정화 선배는 역시 사업 쪽으로 타고난 부분이 있었다.
"확실히 제대로 살펴보니, 중국 제품도 괜찮은 게 많군요."
"맞아. 워낙 큰 시장이니까, 안 좋은 제품도 많은 만큼, 좋은 제품도 많지."
내 말에 은성사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현장 답사 후, 중국 속옷 수입에 관한 대강 전략이 수립되었다.
'이미 괜찮은 중국산 속옷들은 다른 한국 업자들이 수입하고 있어.'
그들은 대량으로 수입해, 다른 한국 도매상에 납품하거나 아니면 직접 오픈 마켓으로 판매한다.
그들의 무기는 가격!
하이 유나가 국내 손꼽히는 쇼핑몰이긴 하지만 그들과 당장 수량으로 싸울 순 없다.
하지만 김재익, 은성사와 3각 편대를 이룬다면?
김재익은 동대문의 전문 속옷 도매상.
은성사는 아직까진 속옷을 다루진 않는다.
하지만 화려한 속옷이 아니라 기본 아이템이라면 다룰 수도 있다.
게다가 은성사는 자기 가게 외에도 다른 매장과 연결해줄 수 있다.
거기에 하이 유나까지.
우리 셋이 함께 뭉친다면 좋은 상품을 좋은 가격에 지속적으로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럼 셋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일단 첫 중국 출장은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중국은 앞으로도 계속 다녀야 할 것 같아요. 정화 누나, 각오해요."
"그, 그럴게."
우리의 대화를 김재익과 은성사 사장님이 재밌다는 듯 쳐다봤다.
"그런데 중국에 온 사장들 중에, 정말 일만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오랜만에 보네요."
"네?"
내가 몰라서 되묻자 김재익이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가 아무래도 한국보다 물가도 싸고, 또 동대문 상인들은 돈이 많잖아요. 게다가 중국에서 거래는 접대가 중요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여긴 유흥도 발달했거든요. 전부는 아니겠지만, 많은 동대문 상인들이 여기 와서 흥청망청 놀기도 해요. 아예, 한국인들이 건너와서 한국식 유흥업소를 차리기도 할 정도죠."
"그, 그렇군요."
유흥이라니.
난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우리를 은성사 사장님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동대문 밥 오래 먹으면서, 돈 쓰는 재미에 빠져서 사업 망한 젊은 사장들 많이 봤지. 그런데 이 친구들은 정말 달라. 젊고 똑똑한데, 검소하고 부지런하기까지 하지. 앞으로도 더 크게 될 친구들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며칠 같이 지내보니 역시 사장님이 그렇게 칭찬하신 이유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칭찬받으니까, 앞으로도 영영 중국에 올 땐 일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정말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아무튼 칭찬까지 들으니 며칠 동안의 고생이 조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 * *
한국에 와서도 부지런히 뛰었다.
난 속옷에 확신이 있었다.
하이 유나라면, 품질만 좋다면 확실하게 판매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좋은 상품을 지속적으로 공급 받는 게 중요해.'
거기에 적당한 차별성까지 갖추어야 한다.
'그럼 도매상의 물건은 적합하지 않겠군.'
속옷 도매상의 제품들은 이미 시장에 많이 풀렸다.
게다가 도매상의 마진도 붙으니 가격 경쟁력도 약하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자체 생산도 아직은 무리였다.
대규모 주문도 문제지만, 속옷 디자인은 전문성이 중요한 부분이다.
우린 아직 그만한 디자인 역량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도매상을 건너뛰고 공장들과 직거래를 하면 어떨까?'
규모가 있는 속옷 공장들은 디자인실까지 직접 갖추고 속옷을 생산했다.
그걸 도매상들이 받아서 시장에 풀고 있었다.
하이 유나라면 웬만한 도매상 못지않은 수량을 소화할 수 있다.
우리가 수량만 소화한다면 품질과 디자인에 최대한 개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좋은 공장을 찾아서 좋은 계약을 맺는 것.'
결국 나는 이번에도 발품을 팔았다.
괜찮은 속옷 전문 생산 업체들의 리스트를 뽑고, 일일이 직접 찾아갔다.
처음 찾아간 곳은 '블레인'이라는 속옷 공장.
'이상하게 속옷 회사 이름들은 다들 하나같이 국적불명의 외국 여자 이름이야.'
직원이 마흔 명이 넘었는데, 동대문 속옷 공장 중에는 손꼽히는 규모라고 했다.
"원래 나는 속옷과 의류 전문 대기업에서 20년을 일했소. 부장까지 올랐지. 하지만 윗대가리들이 무리하게 리조트도 만들고, 골프장도 만들면서 회사가 휘청였소. 결국 부도났고, 이리저리 매각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피 본 것은 전부 중소 거래처랑 회사 직원들이었지. 내가 더러워서, 직접 만든 회사가 여기외다. 내가 속옷만 30년을 팠고, 또 우리 직원 모두 대기업 출신이라 품질도 동대문 최고라고 자부하오."
품질은 나이든 사장 말대로 확실히 우수했다.
'다만 디자인이 조금 아줌마 느낌이야.'
물론 다양한 제품 중에 하이 유나에서 판매 가능한 젊은 디자인도 꽤 있긴 했다.
이제 나도 나름 속옷 전문가로 보는 눈이 생겼다.
다음 찾아간 곳은 '앤 프린세스'.
"저도 동대문 속옷 도매상에서 시작했습니다. 마누라가 안목이 있었는지 장사가 꽤 잘 됐고, 이젠 직접 디자인도 하고, 공장도 돌립니다."
앤 프린세스는 꽤 큰 규모였다.
그리고 자체 매장도 여럿 있고, 인터넷 거래처도 많았다.
제품도 다양하고, 디자인 취향도 하이 유나의 고객대와 잘 맞았다.
'다만 전형적인 동대문 의류야. 가격대비 괜찮긴 하지만 품질까지 일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팔기 위해서는 가격을 더 깎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찾아간 업체는 '도나'.
이번에도 꽤 큰 업체로 기능성 속옷이나 잠옷, 요가복 등을 생산하는 업체였다.
디자인이 다채롭다고 할 순 없었지만, 제품 완성도만큼은 꽤 훌륭했다.
'중국산에 비해 가격이나 품질에 큰 메리트는 없지만, 공장이 국내에 있는 만큼 빠른 생산과 공급이 가능하겠군.'
그렇게 철저히 공부하고, 시장까지 조사한 다음 나는 곧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먼저 정화 선배와 기존 하이 유나 디자이너, 그리소 란제리 담당 신규 직원을 포함해 팀을 구성했다.
별도의 사이트는 만들지 않았지만, 속옷 카테고리는 배경 디자인까지 변경해 다른 카테고리와 차별시켰다.
그리고 기본, 인기 아이템 위주로 은성사, 김재익과 협력해 중국에서 수입을 시작했다.
두 번째로 속옷 팀 직원들을 내가 방문했던 공장들에 파견해 우리에게 맞는 제품들을 고르고, 대규모 주문을 넣었다.
우리에게 납품되는 모든 속옷엔 '유나 걸스'라는 라벨도 달았다.
속옷 전문 모델들도 채용했다.
원래 속옷 모델들이 더 비쌌다.
하지만 우린 그 중에서도 A급 모델들과 장기간 일하길 원했고, 그래서 최고의 조건을 제시했다.
역시 돈을 푸니까, 괜찮은 모델도 구해졌다.
'꽤 대규모 투자를 한 김에······'
제품들이 갖춰진 후, 나는 각종 검색 사이트에 키워드 광고까지 시작했다.
대규모로 수입하고, 주문한 만큼 확실히 가격 경쟁력은 있었다.
5DE의 경우, 무리하게 가격을 낮추지 않고 최대한 품질에 투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정적인 시장 진입이 목표.
가격도 공격적으로 측정하고, 키워드 광고에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동안 많이 벌었으니까, 이번에는 돈의 위력을 최대한 누려보자.'
그렇게 아낌없이 퍼부었다.
과연 검색 광고의 위력은 대단했다.
신규 고객이 물밀 듯 유입되었다.
거기다 원래 가지고 있던 충성고객까지.
그리고 내가 몇 달간 공부하고 발품 팔아 찾아낸 좋은 품질의 제품들까지 더해졌다.
'이것은 더 이상 실패할 수 없는 조합.'
과연 유나 걸스의 속옷들은 순조롭게 팔려나갔다.
고객들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
'좋은 속옷을 싸게 팔았으니까 당연한 이야기인가?'
의류만큼 마진이 높지도 않았고, 5DE만큼 폭발적인 성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은 앞의 두 건이 워낙 말도 안 되는 대성공이었을 뿐이었다.
속옷 카테고리도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단한 큰 성공이었다.
'거기에 더 고무적인 것은······'
유나 걸스로 인한 새로운 고객 유입으로 의류와 5DE의 매출까지 동반 상승한 것이었다.
이미 규모가 있어서, 성장세가 완만해지던 의류와 5DE에 새로운 강력한 지원군이 생긴 것이었다.
* * *
속옷 팀의 책임자를 맡은 정화 선배는 정신없이 일하면서도 표정은 밝아보였다.
"누나, 많이 바쁘죠?"
"바빠도 신나. 주원아, 고마워. 네가 이렇게 큰 규모로 확실하게 밀어주지 않았으면 이 프로젝트는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속옷 런칭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결국 나일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정화 선배는 내게 고마워했다.
돈 보다는 자신의 제안이 직접 실현된 것이 더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누나. 누나 아이디어가 좋았죠. 그리고 이제 시작이에요. 속옷 담당 직원도 더 뽑아야 하고, 제품 수도 늘려야 해요. 나중엔 자체 디자인도 하고요. 누나가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아요."
"그래. 어휴."
정화 선배는 기분 좋은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끝도 없이 배송을 위해 포장되는 속옷 박스들을 보자 뿌듯함이 밀려왔다.
매출이 크게 늘자, 유나도 무척 들떴다.
"우와, 역시 우리 주원이. 속옷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꼬마였는데.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다니."
유나가 대견하다는 투로 말했다.
훗.
유나야, 꼬마라니.
난 이제 어제의 이주원이 아니다.
여성의류부터 화장품, 속옷까지.
이젠 거침없는 청년 기업인인 것이다.
'이렇게 일을 잘 하니까, 유나가 나한테 안 반하고 배기나?'
역시 남자는 능력인 것이다.
* * *
나는야 일도 열심이지만, 공부도 열심인 노력천재.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에 갔다.
오늘 수업은 강영 교수의 '시간의 시각화'.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교수 강영에게 시간에 관해 배운다.
이 수업에는 내 팬인 이정원과 내 취미 생활인 임진만이 있어서, 수업이 무척 다이나믹하다.
"나는 이번 주제를 '시간의 소거'라고 이름 붙이겠다. 사실 시간은 광범위한 주제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 시간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시간은 모든 예술 작품을 맛있게 만들어주는 최고급 조미료인 것 같다.
어떤 작품이든 시간이 더해지면 맛이 깊어지고, 새로워진다.
아무튼 오늘도 강영 교수가 포스 넘치는 목소리로 과제를 설명했다.
"그래서 너희들이 앞으로 3주 동안 준비해야 할 과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