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파니니 □
"제가 그린 그림은······"
드디어 내 차례.
내 첫 과제는 포토 리얼리즘 금붕어였다.
그땐 꽤 잘 그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너무 힘이 들어갔다.
너무 잘 하려고 애썼고,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걱정했었다.
과제를 위해 그린 그림.
그런데 이제 난 더 잘할 수 있다.
'지난 몇 년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노력은 언제나 나를 당당하게 만든다.
물론 내 노력은 노력 상점이라는 사기적인 도움을 받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저는 이번에도 금붕어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그림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이주원의 그림'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림 속에 나를 넣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단순하게 정말 나를 넣어 보았습니다."
나는 당시 물고기 가게 창문에서, 금붕어의 사진을 찍었었다.
그리고 그때의 사진들이 아직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진을 찍을 때 창문에 비친 나도 같이 그렸다.
카메라를 들고 흐리게 유리에 맺힌 나.
전에는 포토 리얼리즘이었지만, 이번에는 가볍게 그렸다.
어쩌면 이 그림에서 예술적인 큰 의미는 찾기 힘들 지도 모른다.
'그래도 색감도 나아지고, 형체감도 나아졌어. 유리 너머의 물고기와 유리에 비친 내가 같은 평면에 존재하는 것도 구도적으로 재밌고. 또 대상과 화가가 카메라로 경계 지어진 것도 나쁘지 않고.'
그러니 그럭저럭 시각적으로 재미있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슬쩍 임진만을 봤더니 이번에도 딱히 공격할 틈은 못 찾는 것 같았다.
'어이, 힘내라고.'
하긴 화가가 뭔가 거창한 시도를 해야 공격할 틈새도 생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가벼운 마음으로 그린 게 빤히 눈에 보이니까, 공격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럭저럭 칭찬들.
"잘 봤다. 웃긴 놈, 네 놈의 장점은 너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이다. 분명 미술은 유희적인 활동이지. 고민이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관객이 접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재미나 쾌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많이 발전했다."
그렇게 이준성 교수의 칭찬도 듣고 내 발표가 끝났다.
그리고 몇 번의 발표가 끝나고 드디어 김대성, 이정원의 차례가 되었다.
"그럼, 제가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오올. 김대성.
김대성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갔다.
과연 이번에는 임진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과제를 제대로 했을까?
"1학년 1학기 때, 의욕적으로 몇 가지 수업을 듣긴 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과제는 없었습니다.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 틈에 끼어서 자신도 없었고요, 그래서 재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1학기가 끝날 무렵 평면조형 교수님이 야외 수업을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수업을 갔던 장소는 미술관이 아니라······"
찰칵.
그리고 스크린에 김대성이 준비한 사진이 떠올랐다.
을지로 세운상가의 사진이었다.
"교수님이 우릴 데려간 곳은 바로 세운상가였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혹은 졸업하고도 예술가는 계속 새로운 소재를 찾아야 하고, 그래서 예술가는 세운상가를 잘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교수님은 세운 상가를 세세히 안내해주셨습니다."
찰칵.
찰칵.
스크린의 사진들이 계속 바뀌면서 세운 상가의 구석구석이 화면에 떠올랐다.
확실히 요즘 화가들은 사운드 아트도 하고, 가구도 만들어야 하고, 굿즈도 만들어 팔아야 하고······
할 게 참 많아졌다.
물론 할 수 있는 게 많아진 것은 예술가로서는 행운일 지도 모른다.
김대성의 발표가 계속 이어졌다.
"그날 수업에서 밖을 돌아다니며 모처럼 재미있게 수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움츠려있던 제가, 세운 상가 상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김대성에게 사람을 상대하는 재능?
과연?
"그래서 저는 이번에 세운상가의 지도를 만들어봤습니다. 요즘 후배들은 세운상가나 혹은 다른 재료 상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선배로서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마침 제가 디자인과 복수 전공이라서 디자인적으로 접근해보았습니다."
찰칵.
그리고 스크린에는 김대성이 제작한 세운 상가일대의 지도가 떠올랐다.
김대성은 마우스를 움직여 지도의 이모저모를 확대해 보여줬다.
지도도 제법 쓸모 있어 보였고, 시각적으로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김대성도 나름 애썼군.'
이번에는 너무 오버하지도 않았고, 정말 쓸모 있는 것을 만든 것 같아 김대성이 조금 대견했다.
하지만 수업 시간 내내 누군가를 공격할 틈새를 노리던 임진만이 드디어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시죠."
"그런데 너무 열심히 만든 것 아닙니까? 손이 많이 갔을 텐데, 노력의 낭비 아닌가요? 세운 상가 정도면 그냥 선배랑 우르르, 몇 번 다니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건데, 그걸 굳이 지도까지 만들었다고요? 후배들이랑 친해지려고 너무 애쓰는 거 아닙니까?"
"아, 그건······. 네. 맞는 것 같습니다."
"네?"
"후배들이랑 친해지려고 애쓴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김대성이 솔직하게 수긍하자, 놀리려고 질문을 했던 임진만이 오히려 당황했다.
"이제 3학년 쯤 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있더군요. 사실 3학년도 아니죠. 디자인과 복수 전공까지 더하면 4학년이나, 5학년 쯤 됩니다. 아무튼요. 학교를 오래 다니다보니······"
그리고 김대성은 뜻밖에 나를 쳐다봤다.
"학교를 오래 다니니까, 선배들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만능 선배. 아니면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 미남 선배."
당연히 미남 선배라고 할 땐, 내 대신 김태민을 봤다.
'그런데 왜 마음이 쓰라리지?'
이왕이면 나도 미남 선배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인기가 많은 선배들을 보면 질투도 나고, 또 이런저런 반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만능도 아니고, 미남도 아니니까 후배들과 친하게 지내려면 이런 짓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성은 가끔 오글거리는 자기 반성을 수업시간에 공개적으로 한다.
놀리려고 말을 꺼냈던 임진만은 오글거려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요! 질문 있습니다."
지도를 보던 수진 선배가 번쩍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시죠."
"안 그래도 제가 조소과 과제 때문에 곧 세운 상가 갈 일이 있었거든요. 혹시 제 메일로 오빠가 만든 지도를 보내주실 수 있나요?"
"다, 당연합니다. 그러기 위해 만든 거니까요."
"고맙습니다! 헤헤."
수진 선배가 웃으며 외치자 김대성의 얼굴이 일시에 밝아졌다.
"오빠, 저도요."
김대성 옆에 서 있던 이정원도 요청하자 김대성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김대성이 저렇게 좋아하니 나도 분위기 정도는 맞춰줘야겠다.
그래서 손을 들었다.
"저요! 저도 보내주세요. 인쇄해서 세운상가에 가져가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보물찾기 느낌도 나고."
그러자 옆에서 눈치를 보던 김태민도 같이 손을 들었다.
"형, 저도요. 저도 지도가 필요합니다."
뜻밖에 좋은 반응.
이게 뭐라고, 김대성은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반장. 너도 가끔은 쓸모 있는 짓을 하는 구나. 다시 봤다. 나한테도 지도를 보내라. 대신 지도에 틀린 내용이 있다면 점수를 깎겠다."
그렇게 드디어 김대성이 순전히 자기 힘으로 이준성 교수의 칭찬까지 받아냈다.
다음은 이정원의 차례.
이정원의 발표는 간단했다.
"제 첫 과제는 다름 아닌······액션 페인팅이었습니다."
액션 페인팅은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으려하는, 일종의 추상화였다.
가장 대표적인 기법은 캔버스 위에 물감 뿌리기.
대표적인 작가는 잭슨 폴록이었다.
"당시 1학년이었던 저는 그림 그리기에 질려서, 쉬운 방법을 찾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액션 페인팅에 도전해봤습니다. 그런데 막상 액션 페인팅을 해 보니까, 추상화가 오히려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정원은 이번에도 액션 페인팅 비슷한 것을 그려서 냈다.
다만 정말 액션 페인팅 작품처럼 강렬하진 않았고, 그럭저럭 볼만한 정도였다.
"이번에 다시 도전하면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일단 추상화를 그리려면 개인 작업실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뭘 그리는 중이냐고, 자꾸 주위에서 물어보거든요. 당사자인 나도 모르겠는데, 그걸 남에게 설명해주는 일이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 개인 작업실을 구하긴 쉽지가 않죠. 그래서 말인데요."
이정원은 슬쩍 웃음 지었다.
"그래서 개인 작업실을 못 구하겠다면, 남자 친구라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추상화는 화가 자신도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작업이니까요, 그럴 때 든든한 남자 친구라도 있으면 그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림도 잘 그리면서 남자 친구도 있는 선배 언니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수업만 해도 정말 바쁜데, 언니들은 대체 비결이 뭘까요?"
이정원은 발표 도중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그림에 관한 공격을 차단하는 새로운 전략인가?'
그런데 잠시 후, 유나의 무심한 대답이 들렸다.
"남자 친구요? 그냥 생기던데요?"
그냥이라니.
내가 그냥 생겼군.
살짝 억울했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이건 내가 어떻게 항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발표가 모두 끝났다.
"그럼 저희가 매긴 조별 과제 순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이정원이 심사표를 들고 외쳤다.
"먼저 1위는 김태민, 이주원 조입니다. 태민 오빠의 그림은 수업도 잊고, 계속 보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주원 오빠 그림도 근사했고요. 누구도 부정 못할 1위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뿌듯했다.
좋은 출발이었다.
다만 김태민과 한 조라서 단순한 1등은 다소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2위는 바로 저희 조! 김대성과 이정원입니다. 특히 대성 오빠의 지도는 강의실 전체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 뻔뻔한 사람들.
자기들한테 2등을 주다니.
등수를 들으니 김대성한테 호응해줬던 사실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나쁘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다음 발표는 제가 하겠습니다!"
김대성이 이정원이 들고 있던 심사표를 받았다.
"그리고 6위, 다시 말해 꼴찌는 바로 임진만, 하우영 조입니다. 작품들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관객을 기만하려다 발각된 사실이 감점 요인입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복수했다.
물론 임진만이 파편을 재배치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예술적 허용 범위 안에 든다.
게다가 두 사람의 그림들 자체는 정말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등수 평가는 김대성의 권리니까.
임진만과 하우영이 억울한 표정으로 부들거렸다.
솔직히, 나도 재미있었다.
"그럼 오늘 평가 1위 놈들은 다음 주까지 다음 과제를 생각해오도록."
이준성이 그렇게 외치고 회화 4의 첫 크리틱이 끝났다.
역시 3학년은 다른지, 생각보다 욕은 적게 먹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준성은 언제 욕으로 치고 들어올지 모르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 * *
강의실에서 모두 나가고, 임진만과 하우영은 잠시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우영아. 오늘 수업 느낌이 어떠냐?"
"탈탈 털린 것 같네요."
빠각.
임진만이 하우영의 뒤통수를 올렸다.
"이 새키야. 너도 날 같이 깠잖아. 파편을 재배치한 것에 동의한다고."
"아, 그건 얼떨결에 그만······"
임진만은 분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넌 좀 덜 까였지. 그리고 이 수업은 너랑 둘이니까 그나마 괜찮은 거야. 강영 교수 시간엔 이 놈들이 작정하고 나만 다구리 친다고. 그 수업은 너도 없는데."
"다 같이 형을 공격한다고요? 서양화과 놈들 완전 양아치네요."
"그렇다니까. 우리도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 너도 정신 차려. 남 통수 칠 생각이나 하지 말고. 내가 꼴찌라니······ 임진만 역사상 처음이야, 임마!"
"정말요?"
"이 새키가!"
빠각.
하우영은 기어코 한 대 더 맞았다.
* * *
이제는 날씨도 많이 시원해졌다.
유나와 나는 커피와 파니니를 사서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았다.
이른 저녁이었다.
학교 식당까지 가서 밥을 먹으면 너무 오래 걸리니까 파니니로 대충 때우려는 것이었다.
커피는 어차피 필요했고.
"아홉시까지는 조소과 작업실에 있을 거야."
4학년인 내년엔 졸전이 있다.
그래서 부전공은 3학년에 마무리 짓기 위해 유나는 조소과 수업을 많이 신청했다.
그러니 과제가 많을 수밖에.
"9시에 데리러 갈까?"
"아니, 너도 바쁘잖아. 9시에 사무실에 있을 거지? 거기서 만나."
그렇게 말하며 유나는 파니니를 부지런히 먹었다.
"배고프면 내 것도 먹어. 조소과 작업하려면 많이 먹어 둬야지."
유나는 정말 좋아하며, 내 파니니도 건네받았다.
이렇게 자상한데 그냥 생겨난 남자친구라니.
"그런데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응? 뭔데?"
유나는 소매를 걷고 내게 손등을 보여줬다.
거기엔 조그만 빨간 상처가 두 개 나 있었다.
"용접하다 불똥 튀었어. 나 이제 전기 용접 진짜 잘 해. 졸전 때 용접할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보호 장갑 없이 용접 한 거야?"
"아냐, 보호 장갑 착용해도 가끔 불꽃이 튀어 들어가."
넌 그런 것도 모르냐는 투로, 유나가 씩씩하게 설명했다.
나는 살짝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이렇게 조금씩 다쳐야만 가능할 지도 몰랐다.
유나가 직접 선택한 공부고, 또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응원해줘야지.
나도 이제 제법 노련한 남자친구다.
물론 그냥 생긴 남친이긴 하지만.
"조심해. 용접할 때 마스크랑 보호 장갑 꼭 착용하고. 그라인더 만질 때도 정신 바짝 차리고."
"그럴게."
이제 3학년 2학기.
우리는 잘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