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명탐정 이주원 □
"음."
이준성이 한 마디 하려는지 시동을 걸었다.
"제주도 촌놈 맞지? 벌써 오래전이군. 네가 내 수업을 들은 게 1학년 2학기 때였나? 그럼 저 그림은 1학기 때 그린 건가?"
"그렇습니다."
유나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래. 좋군. 성장이란 게 언제나 더 나은 한 점을 향할 필요는 없다. 항상 변화하고, 자기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으면 충분하지. 난 예전의 네 그림도 좋고, 지금 네 그림도 맘에 든다. 응원하겠다."
"감사합니다."
칭찬에 인색한 이준성의 응원에 유나도 기분 좋게 웃었다.
"그나저나 그게 몇 년 전이지? 그땐 꼬맹이였던 것 같은데, 벌써 네가 3학년이 되었군. 시간이 많이 흘렀어. 그런 의미에서 수업 마치고 다 같이 한잔 하면서 지난 이야기를······"
어째 이 놈의 수업은 교수나 학생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다.
유나는 그냥 한 번 웃고는 그림을 챙겨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한테는 곧장 주먹을 날리면서도 조소과 선배들한테도, 교수한테도 유나는 사회생활을 잘 참았다.
이정원이 낭랑한 목소리로 크리틱을 진행했다.
"네. 훌륭한 그림들 잘 봤습니다. 그럼 다음 조 준비해주세요."
드디어 조소과 멸치와 덩치의 차례가 되었다.
하우영과 임진만은 잠깐 의논 후, 먼저 임진만이 나서기로 했다.
커다란 덩치의 임진만이 건들거리며 걸어 나와 이젤에 자신의 작품을 걸었다.
이번에 그가 가져온 것은 스케치북이었다.
임진만의 작품은 연필 소묘였다.
"제가 생각한 제 첫 수업은 자소상 만들기입니다. 1학년 1학기 때의 수업이었죠. 그러니까 보자, 몇 년 전이지······"
임진만은 과제에 자신이 있는지 여유가 넘쳤다.
"아마 여기 분들 다 비슷할 겁니다. 석고 소묘로 입시 미술을 시작했거나, 그게 아니라도 대부분 한 번 씩은 그려봤을 겁니다.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렇게 남의 얼굴만 실컷 그리다가 드디어 학교에 와서 직접 제 얼굴을 석고로 뜨게 된 것입니다."
펼쳐진 스케치북에 그려진 소묘는 임진만의 얼굴을 그린 것이었다.
하지만 멀쩡한 얼굴이 아니라, 산산조각 난 자소상의 파편을 그린 것이었다.
"그런데 자소상을 채점하기 직전 그만 실수로 놓쳐서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와장창, 점수는 날아갔지만 그때 머릿속에서 뭔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가두고 있던 단단한 틀에서 벗어나는 기분?"
그리고 자기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언제나 석고상을 똑같이, 있는 그대로 잘 그리는 것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대학생.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산산조각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때의 깨달음과 흥분을 잊고 싶지 않아서, 바닥의 파편을 사진으로 찍어뒀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그려보았습니다."
으음.
이번에도 나는 유심히 임진만의 연필 소묘를 관찰했다.
'상당한 소묘 실력이군.'
온전한 얼굴이 아니라, 땅에 흩어진 파편인데도 파편들 틈에서 임진만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조소과라서 조소만 할 것 같은데, 의외로 조소과 중에도 그림 실력이 상당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임진만도 그 중 하나인 듯 했다.
나 외에 다른 서양화과 학생들도 임진만의 소묘를 보면서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만들었던 양초도 꽤 완성도가 있었지.'
임진만은 의외로 실력파였다.
실력이 있으니, 자기 과에서도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크리틱에서도 여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다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나와 수진 선배에게 크리틱 도중에 농담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내 오랜 철학.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찾으면 깔 곳이 나온다.'
나는 눈알이 빠져라 임진만의 그림을 노려봤다.
[ 왜? 이번에도 또 시비 걸게?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임진만의 마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김태민도 같이 그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태민아. 너라면 뭔가를 찾아낼 수 있겠지.'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하지.
엄호를 부탁한다.
나는 가만히 손을 들었다.
"네, 주원 오빠. 말씀하시죠."
"먼저 소묘 실력을 칭찬하고 싶군요. 탄탄한 기본기가 느껴지네요."
"하하하하. 서양화과 학생에게 그림 실력을 칭찬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아마도 입체를 계속 만들다보니 입체에 관한 이해도가 쌓인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다고?
이제 그 기분을 망쳐주지.
두 마디 욕을 하기 위한 한 마디 칭찬이었을 뿐.
그럼 이제 본 게임을 시작하지.
"다만 한 가지가 아쉽군요."
"네?"
"석고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산산조각 부서진 석고상을 보며 더 이상 형체의 재현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입니까?"
"그, 그렇습니다만?"
임진만이 전의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역시 만만한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 역시 물러서지 않고, 회귀자의 차가운 미소를 지어줬다.
"굳이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다면 모르고 넘어갈 뻔 했습니다."
"뭐, 뭘 말입니까?"
"이 그림을 자세히 보시죠. 바닥에 떨어뜨려 박살난 석고상. 하지만 눈, 코, 입. 이 석고상이 누구인지 인지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소들은 모두 위를 향하고 놓여 있습니다. 심지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말입니다. 마치 인위적으로 그렇게 배치한 것처럼 말입니다. 관객을 기만하듯, 노골적으로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이 장면은 바닥에 떨어진 석고상을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까? 아니면 인위적으로 파편들을 재배치한 것입니까?"
"그, 그것은······"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객이 의심한 순간, 이미 진실은 의미가 없으니까요. 임진만씨는 형체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구속에서 벗어났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임을 설명하기 위해 파편을 재배치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구속에서 벗어난 것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이것은 임진만의 얼굴이다, 이것이 임진만의 소묘 실력이다!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그, 그것은······"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다그침에 임진만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신 얼굴만 벌개졌다.
너무 억지를 부린 것 같아 속으로 웃음이 났지만, 내 표정은 진지했다.
크리틱은 기세의 싸움.
물러서면 지는 것이다.
그때 내 뒤에서 고요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잘 들었습니다. 저도 이주원씨의 말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끼이익.
김태민이 책상을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태민은 매사 귀찮고 낯가림이 심한 성격.
그래서 나, 유나, 수진 선배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크리틱에 나서지 않았다.
3년 2학기 만에 드디어 싸우기 위해 크리틱에 나선 남자.
그는 바로 김태민이었다.
'친구여. 뒤를 부탁하지.'
얼굴이 벌개진 임진만은 이번에는 입술을 악물고 김태민을 쳐다봤다.
"하얀색 바닥에 놓인 하얀색 석고 파편들. 사실 연필 소묘로 묘사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요소들이었습니다. 다만 모두 흰색인 만큼, 저라면 빛을 강조해서 대비를 더 극적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얼굴이란 소재의 드라마틱한 맛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파편들의 모양과 배치. 앞서 우리는 한유나씨의 깨진 소주병 그림을 봤습니다."
찰칵, 찰칵.
이정원이 재빨리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유나의 옛날 그림을 스크린에 띄웠다.
"얼핏 임진만씨의 그림만 봤다면 모르고 넘어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유나씨의 그림과 비교해본다면 같은 파편의 나열이라도 이쪽은 구도에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그림은 얼굴의 세부 묘사에 치중해, 그림 전체의 완성도를 놓친 것입니다. 이왕 파편을 재배치하는 김에 더 세련된 구도를 썼더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더 좋은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는 아쉬움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끼이이익.
그러자 이번에는 하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방금 지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도 이 그림이 파편을 인위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우영의 발언에 임진만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하지만 소묘 실력만큼은 진만이형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김태민이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대답을 흘리며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렇군요. 사람들마다 기대치는 전부 다를 테니까요."
아······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더라면 어땠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태민이 그 말을 하자, 서양화과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심지어 이준성 교수까지.
적어도 그림의 기술에 관한 한, 김태민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허세도 아니었고, 잘난 체도 아니었고, 그저 사실일 뿐이었다.
김태민이 상대를 해주지 않자, 하우영은 혼자 뻘쭘하게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았다.
흠흠.
"내가 한 마디 하지."
이준성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사실 파편을 재배치해서 그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화가라면 석고 파편 뿐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이든 재배치해도 된다. 그것은 화가뿐만 아니라 조각가도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그림 뒤의 이야기도 똑같다. 네놈이 석고상을 깨뜨리고 흥분을 느꼈던, 오줌을 쌌던 아무 상관없다.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으면 얼마든지 지어내도 된다. 다만!"
이준성이 크게 외치자, 임진만은 이준성을 찔끔 쳐다봤다.
그나저나 강의실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임진만이 파편을 재배치해서 그린 것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어쨌든 이준성 교수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퍼졌다.
"다만! 그렇게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끝까지 우겨야한다. 너는 석고상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땅에 떨어진 파편을 그대로 사진 찍은 것이다. 그리고 파편은 우연히 얼굴 조각 전부가 하늘을 향하도록 놓인 것이다. 백만분의 일의 확률일 지라도, 예술의 신이 너를 도왔겠지! 그렇게 우겼어야지!"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 능구렁이 놈의 수작에 넘어가서 쩔쩔매면 안 되었다는 뜻이다. 조소과 부전공! 네놈의 패배다!"
이준성이 그렇게 외치자, 으윽!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임진만은 정말 대단한 패배라도 당한 양 또 한 번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잠시 후.
이정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재미있는 시도였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던 임진만씨의 그림 잘 봤습니다. 다음은 하우영씨. 작품을 보여주시죠."
크윽.
임진만이 분한 얼굴로 퇴장하고, 이번엔 하우영이 자신의 캔버스를 걸었다.
"제 첫 수업은 인체 조소였습니다. 누드모델을 직접 관찰하고, 흙으로 빚는 수업이었습니다. 서양화과 학생들도 누드크로키는 해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소로 만드는 일은 또 달랐습니다. 실재하는 사람을 실재하는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조각을 하듯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1학년 때 들었던 생각인데, 드디어 실행에 옮겨보았습니다."
하우영의 그림은 정물화였다.
다만 사물의 형태와 색이 조각 작품처럼 모두 단순화 되어 있었다.
꽤 흥미로운 그림.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겠지만, 서양화과 학생의 그림이라 해도 괜찮을 만큼 괜찮은 그림이었다.
'확실히 조소과 둘 다 실력이 있는 놈들이야. 괜히 서양화과 부전공을 선택한 게 아니었어.'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
또 하우영은 임진만의 졸개1 같은 느낌이라 이번에는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그들의 발표가 끝나고, 몇 번의 차례를 지나 우리 조의 순서가 되었다.
"그럼 서양화과의 두 오빠들, 발표를 준비해주세요."
이정원의 다정하고 편파적인 진행에 맞춰 김태민이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걸었다.
이어지는 짤막한 그림 소개.
"저는 고양이가 있는 풍경을 그렸습니다."
그게 다였다.
'역시 고수는 긴 말이 필요 없는 법.'
하지만 그 순간 강의실안에 낮게 울리는 감탄.
이준성 교수마저 김태민의 그림을 말없이 바라봤다.
겨우 반바지 차림의 허벅지만 드러났지만, 아름답고 은은한 인체.
가볍고 한가하면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고양이들.
그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구도.
거칠게 그렸지만, 온화하고.
아닌 듯 시치미를 떼지만 고양이를 묘사한 기교도 드러났다.
역시 크리틱 최강의 무기는 작품 그 자체였다.
크윽.
임진만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아마도 반격하려고 벼르고 있었던 모양인데,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렇군요. 사람들마다 기대치는 전부 다를 테니까요.]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었음을.
김태민은 자기 그림으로 간단하게 증명한 것이다.
'봤냐? 내 친구다.'
그나저나 김태민과 한 조라서 안 좋은 점도 있었다.
그것은 김태민 바로 뒤에 내 그림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