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불나방 □
그리고 다시 며칠을 정신없이 보냈다.
부지런함은 중독 같다.
경력직 직원들을 뽑고, 정화 선배에게도 일을 맡겼지만 나의 근무 시간은 점차 다시 예전 대로 돌아갔다.
다만, 반복 업무의 시간은 크게 줄긴 했다.
하이 유나 홍대 플래그십 매장 건설 현장에도 들렀고, 명동점 직원 회식에도 참석했다.
두 번째 생인만큼, 나는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특별한 카리스마도 없고, 두뇌가 비상하지 않다면 부지런히 발로 뛰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회사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나를 위해서기도 했다.
보고 또 살펴보고, 확인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일이 끝나면 학교 작업실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어? 태민아. 이 시간에 아직 있었어?"
이준성 교수의 첫 과제가 주어지고, 밤늦은 시간에 작업실에서 김태민을 만났다.
김태민은 마치 칭찬이라도 받은 양,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늦게까지 남아서 그린 사실이 스스로도 대견했나 보다.
"어. 교직 과목들이 은근히 공부할게 많더라고. 그래서 도서관에 있다가 나도 방금 도착했어. 집에서 그리면 게을러질까 봐."
나는 김태민의 그림을 슬쩍 살펴봤다.
"가만 보자. 네 첫 과제도 포토 리얼리즘이었지? 고양이 그렸었나?"
"어, 맞아. 기억하고 있었네."
기억나긴 했다.
그런데 김태민 그림의 절반 이상이 고양이이기 때문에 대강 말하면 얼추 들어맞는다.
한 번 보자.
이번에도 고양이였다.
다만 포토 리얼리즘은 아니었다.
기간도 짧았고, 세세한 묘사는 김태민 스타일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세 마리 고양이.
배경은 김태민의 집인 듯 했다.
두 마리는 한가롭게 거실을 거닐고, 한 마리는 소파에 앉아있는 젊은 여자의 허벅지에 누워 있었다.
"수진 누나야?"
"응. 우리 집 놀러 왔을 때. 신기한 게 고양이들이 바로 누나한테 안기더라고. 우리 집 고양이들은 낯을 많이 가리거든."
그것은 그냥 우연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고양이의 변덕일 것이다.
하지만 김태민은 그런 사소한 상황에도 자기와 수진 선배를 어떻게든 엮으려는 것 같았다.
'귀여운 녀석.'
이 커플도 3년이 넘었건만, 김태민은 아직 지극 정성이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그림은 한가롭고 편안했다.
마치 수진 선배의 성격을 보는 것처럼.
과장되게 말하면 수진 선배의 다리만 그리고도 수진 선배 전부를 담아낸 것 같기도 했다.
'고양이와 수진 선배. 김태민의 능력은 어쩌면 자기가 좋아하는 걸 그릴 때 극대화 되는 게 아닐까?'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할머니처럼 김태민은 계속 다른 그림을 보여줬다.
살짝 신비롭고, 다시 살펴보게 되는 궁금함이 김태민 그림의 매력이었다.
매번 다른 것들을 그리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일관적인지.
"나도 열심히 그려야겠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아, 내 그림을 그렸다.
쓱싹쓱싹.
내 그림을 스케치하며 이런 생각도 했다.
'이번 과제는 자아성찰 같은 느낌이라, 크리틱으로 치고받지는 못하겠다. 이번 주는 임진만 괴롭히기는 패스해야 겠군. 그 녀석에게도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일 테니까. 다음에 더 괴롭히기 위한 비축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아니, 이번엔 좀 온화하게 과제 발표의 날로 해야겠다.
* * *
쿵, 쾅, 흐흐흐.
이준성 교수가 일부러 시끄럽게 들어와서 징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원래 시끄러운 양반인데, 크리틱 날에는 더 시끄럽게 들어온다.
마치 자기 작업 하다 받은 스트레스를 수업 시간에 풀고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자, 오늘 수업은 반장 조가 진행한다. 두 놈이 알아서 순서를 정하고, 등수도 매기고, 크리틱도 진행해라. 그리고 점수는 조별로 매겨진다. 한 놈이 아무리 잘해봤자, 나머지 놈이 망하면 둘이 같이 망하는 거다. 그래야 더 열심히 하겠지. 물론 그렇게 하면 억울한 놈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건 네놈들 사정이지. 내 알 바 아니다."
이런 대놓고 악질인 교수를 봤나.
하지만 이런 인간인지 모르고 온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 파트너는 자그마치 김태민이다.
'결국 나도 알 바 아니다.'
나 역시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자, 반장! 시작해라."
김대성과 이정원은 앞으로 나가서 잠시 의논했다.
그리고 이정원이 강의실을 향해 말했다.
"그럼 크리틱을 시작하겠습니다. 크리틱의 순서는 출석부 뒤쪽부터 하겠습니다. 첫 발표는 한유나, 유나 언니와 수진 언니네요. 그리고 두 번째는 하우영씨, 하우영씨와 진만 오빠 조가 발표하겠습니다. 등수는 작품과 크리틱 참여도까지 종합해서 저희를 포함해 1등부터 6등까지 매기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하우영은 조소과 멸치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크리틱.
유나와 수진 선배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수진 선배가 먼저, 자기 작품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발표하려니 조금 떨리네요. 헤헤헤."
수진 선배가 귀엽게 웃으며 발표를 시작했다.
이준성으로 인해 생겨난 강의실의 더러운 분위기가 깨끗이 씻겨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와아아아!
조소과 하우영과 임진만은 요란하게 박수까지 쳐댔다.
'조소과는 원래 저렇게 시끄럽게 노는 건가? 천박하군.'
나는 서양화과답게 우아하게 다시 수진 선배의 발표에 집중했다.
"제 1학년 첫 과제는 평면조형이었습니다. 학교 풍경 그리기였는데요. 그때 저는 제가 한국대 들어온 사실이 너무 신나서, 한국대와 사랑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과제를 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했었죠. 그래서 온 학교를 다 헤집고 다녔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멋진 풍경을 찾으려고요."
찰칵.
그리고 수진 선배는 자기의 옛날 그림을 스크린에 띄웠다.
"그래서 제가 그린 풍경은 바로 도서관이었습니다. 책들이 내용과 제목으로 분류되어 끝도 없이 꽂혀 있는 도서관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책을 펼치면 그 안에 여러 풍경이 또 들어있을 텐데, 그 많은 풍경들이 잘 정돈되어서 펼쳐진······뭐라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수진 선배는 자기가 가져온 그림을 앞에 걸었다.
"이건 요즘 제가 밀고 있는 스타일인데요. 글과 그림을 섞어봤습니다. 책꽂이에 책을 그리는 대신, 책의 제목들을 직접 적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마다 일일이 연극의 지문처럼 묘사를 적어 넣었습니다."
으음.
꽤 재미있는 그림.
수진 선배가 너무 순진하고 예뻐서 그런 쪽만 부각 돼서 그렇지, 수진 선배의 그림도 나름 근사했다.
보고 있으면 슬며시 웃음이 지어지는 즐거운 그림이었다.
"저요!"
"말씀하시죠."
하우영이 손을 번쩍 들고, 이정원에게 지목받았다.
"참신한 발상 같습니다. 글과 그림을 조형적으로 같이 배치하는 방식을 좀 더 고민하면 더 훌륭한 작품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작품도 나쁘지 않지만, 다른 가능성도 많아 보여 더 기대됩니다. 작품이 수진 선배를 닮아서 예쁘네요."
"저도요!"
이번에는 임진만.
"왜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필체는 주인을 닮는다고. 그림도 예쁘고 서정적이지만, 글씨도 수진이처럼 예쁘고 귀여워서, 관객들은 작가가 더 궁금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우영이 말처럼 이 작품에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글씨체는 정말 수진 선배처럼 귀염귀염했다.
작품의 분위기도 너무 무겁지 않았고, 앞으로 더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빠지직.
하우영과 임진만이 예쁘고 귀엽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자 김태민의 이마에 또 힘줄이 돋았다.
'어이, 친구. 진정하라고. 이 정도에 일일이 대응하면 안 되지. 좋게 생각하라고.'
김태민도 은근 질투심이 강한 남자였다.
그렇게 몇 번 더 칭찬이 이어지고 유나의 차례가 되었다.
찰칵.
스크린에는 옛날에 유나가 그렸던 깨어진 소주병 포토 리얼리즘 그림이 등장했다.
오오.
슬쩍 살펴봤더니, 이준성이 살짝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나까지 뿌듯해지는 측면이 있었다.
당시 저 그림을 그렸을 때, 유나는 겨우 스무 살.
아무리 봐도 막 고3을 끝낸 어린 학생의 그림이 아니었다.
'이준성 교수님 어떻습니까? 제 여자 친굽니다.'
유나보다 오히려 내가 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유나가 설명을 시작했다.
"제 첫 과제는 포토 리얼리즘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깨진 유리병을 그렸습니다. 이 과제를 위해 몇 년 전 그림을 다시 봤더니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유나는 강의실 앞의 이젤에 오늘 가져온 그림을 걸었다.
유나가 가져온 그림은 뚜껑을 연 소주병 세 개가 있었다.
그 중 두 병은 비워졌고, 한 병은 반 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소주병 뒤로 초점 없이 흐릿하게 안주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바로 며칠 전 우리 집 식탁이었다.
그날 유미까지 셋이서 두 병 반을 겨우 마시고, 식탁 위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었다.
유나는 예전 그림과 오늘 그림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그때는 제가 어리기도 했었고요. 포토 리얼리즘, 너무 어려운 과제라 긴장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잘하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당시엔 일부러 깨진 소주병을 그렸습니다. 그게 관객의 시선을 끌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이제 3학년이 되었고, 저도 그만큼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날카롭고 위험한 그림으로 억지로 관객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
나도 유나를 따라 미소가 지어졌다.
확실히 유나는 어른스러워졌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그림까지도.
김태민도 유나도 착실히 화가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경쟁자로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편한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소주병을 깨뜨리지도 않았고, 색도 편하게 써 보았습니다. 안주도 같이 그렸고요. 정말 술자리의 즐거운 기분이 전해지도록. 그래서 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휴식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정원이 손을 들었다.
"네?"
"유나 언니는 예전 그림과 지금 그림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세요?"
"으음······"
갑작스런 이정원의 질문에 유나는 잠깐 생각하고 대답했다.
"이번 그림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예전 그림이 훨씬 더 열심히 그리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이번 그림이 더 마음에 듭니다."
유나의 대답을 듣고 이정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자기 의견을 말했다.
"글쎄요, 저는 언니의 예전 그림이 더 특별해 보이는데요. 3학년이 되어서 더 어른스러워졌다고 하셨는데요. 같은 3학년이지만 제가 두 살이나 더 어려서 그런지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예전 그림이 표현도 더 밀도가 있고, 또 깨진 소주병이란 발상도 참신하고, 위협적입니다. 발상은 예전 그림이 더 성숙한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그림으로 관객에게 휴식을 주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관객이 그림에서 얻는 걸 화가가 마음대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림으로 휴식을 준다는 발상 자체가 깨진 소주병보다는 훨씬 덜 참신한 것 같습니다."
으음.
이준성 교수가 대답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유나를 바라봤다.
마치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정원아.
네가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유나는 건드리면 안 되는 거야.
친절하고 예쁜 얼굴에 속으면 안 돼.
나는 이정원이 똑똑하고 활기찬 크리틱 꿈나무인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봤더니 앞뒤 안 가리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크리틱 불나방이었다.
'정원아. 우리가 힘을 모아 임진만을 괴롭히긴 했지만, 유나가 상대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없잖아.'
다행히 강의실에 유나의 상냥한 답변이 울려 퍼졌다.
"그런가요? 제가 1학년 때 그린 그림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 그린, 제 눈에는 유치해 보이는 그림인데, 정원씨에겐 성숙하게 느껴진다니 그것도 나름 뿌듯하네요."
유나는 별로 진지하게 싸울 생각이 없는지 대강 웃어 넘겼다.
정원아, 운이 좋았구나.
유나를 적으로 돌리면 안 돼.
싸우고 싶다면 임진만이나 공격하라고.
"저요!"
응?
임진만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자기 의견을 말했다.
"설마 저 소주 세 병을 직접 드신 건가요? 안주도 같이 그려진 것 같은데, 안주를 흐릿하게 그린 건, 당시의 술에 취한 흐릿한 시점을 묘사한 건가요? 하하하하."
임진만이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웃자, 하우영도 큰소리로 따라 웃었다.
"한유나씨의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역시, 예술가는 술을 많이 마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보니 한유나씨도 한 알코올 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조만간 또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요? 더 큰 사이즈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소주도 안주도 넉넉히 준비하겠습니다. 하하하하."
"좋은 생각이군. 하하하하."
이준성 교수까지 끼어들어 임진만과 같이 웃어댔다.
빠지직.
임진만, 재밌냐?
조소과 개강파티 때도 내가 한 번 양보했건만, 너는 입만 열면 술이냐?
크리틱에는 원래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
예술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정이니까.
하지만 회귀자의 여자 친구를 상대로 그러면 안 된다.
나는 분명 이번 과제는 조용히 넘어가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