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55화 (155/203)

■ 155. 첫 과제 □

2주 전.

이준성 교수의 회화 4 수업 시간.

첫 과제는 김대성과 이정원 조가 내기로 했다.

"그럼, 대성 오빠. 제가 발표할게요."

"그, 그래."

원래 항상 나서기 좋아하는 김대성.

하지만 이정원에게 발표를 양보했다.

이정원도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김대성이 요즘 힘이 빠지기도 했다.

'명퇴한 아버지들을 보는 것 같군.'

아무튼.

이정원이 앞에 나가 과제를 말했다.

"저희가 생각하는 첫 과제는요, 바로 첫 과제입니다."

응?

뭔 소리야.

"우리 모두 힘들게 입시를 치르고 미대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1학년, 첫 과제를 받을 때 그래서 모두 긴장하고 있었죠. 앞으로는 이제까지 배우던 입시미술을 부정하면서도, 이제까지 배우던 것을 바탕으로 진짜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까요. 또 처음 보는 교수님과 친구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기도 했고요. 돌이켜보면, 그때 제일 열심히 과제를 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였군.

가만 보자.

내 첫 과제는?

내 첫 과제는 포토 리얼리즘이었다.

나 역시 첫 과제를 받고 바짝 긴장했었다.

포토 리얼리즘은 사진처럼 그리기.

당시 그림에 자신이 없던 나는 괜찮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꽤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그러고 보니 전쟁처럼 살 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군. 이번 과제는 생각할 게 많아서 느낌이 좋구나.'

지금도 열심히 그리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자 친구도 생기고, 돈도 많이 벌고 나름 여유가 생겼다.

이정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 수업은 내년 졸전을 앞두고 마지막 회화 수업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는 의미로 각자 입학하고 나서 첫 과제에 대한 작품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반성도 좋고, 재현도 좋고, 어떤 해석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시간적인 의미의 첫 과제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처음'이라는 의미는 다양할 테니까요."

이정원이 들어가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성 교수가 다시 등장했다.

"자, 들었지? 첫 과제는 네놈들의 첫 과제다. 참고로 내 수업을 처음 듣는 놈들을 위해 한 번 더 말해주마. 최선을 다해서 과제를 준비해라. 그렇지 않으면 수업을 때려 치고 싶을 만큼 욕을 먹여주마. 그리고 과제의 평가도 김대성, 이정원이 한다. 나는 기말에 너희들이 매긴 순위를 조합해, 너희들 학점을 매기겠다. 남을 평가하는 것 역시 수업의 일부니까 최선을 다하도록."

그러자 임진만이 번쩍 손을 들었다.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뭐냐?"

"그럼 친한 사람이나 자기 작품에는 높은 순위를 매기고, 친하지 않은 사람 작품에 낮은 순위를 매기면 어떡합니까?"

흥.

이준성 교수는 짧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각자 예술가적 양심에 맡겨야지. 물론 작가적 양심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양심은 개똥같은 소리지. 누가 네 등수를 깎으면 너도 똑같이 복수해줘라. 그래도 안 되면 그냥 팔자려니 생각해. 3학년이나 된 놈들에게 내가 그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냐!"

이준성은 그러고 나가버렸다.

아무튼 우리의 회화4 과제도 스타트를 끊었다.

이 놈의 과제들.

3학년이 되어도 과제가 몰아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 * *

매일매일 노력코인을 쌓아가며 열심히 일했다.

과제도 해치우고, 일도 해치웠다.

유나에게 여러 번 속옷 특강을 배운 후, 자신감을 가지고 동대문 도매 시장인 디자이너 클럽을 찾아갔다.

디자이너 클럽의 지하에는 속옷이나 장신구를 파는 도매점이 따로 있었는데, 그 중 은성사 사장님이 소개해준 가게가 있었다.

나는 일부러 동대문 도매 시장이 끝날 무렵인 늦은 새벽에 맞춰 찾아갔다.

건물은 한산했고, 사장과 편하게 이야길 나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주원입니다."

"아이고, 어서 오십쇼.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재익입니다."

내가 찾아간 속옷 도매상의 사장도 남자였다.

나이는 30대 후반.

과연 가게에는 화려한 속옷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나는 가게에 걸린 속옷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며 제품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도 던졌다.

예전엔 남자라서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상품일 뿐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김재익이 감탄했다.

"젊은 남자분이 속옷을 자세히 아시네요."

나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요즘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그러자 김재익은 마치 동지를 만난 양 기뻐했다.

"속옷이 그냥 옷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습니다. 구조도 복잡하고, 장식도 화려하죠. 속옷은 과학입니다.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 흥미롭죠."

"네, 저도 그래서 앞으로도 꾸준히 공부할 생각입니다."

나는 가게에 진열된 속옷들을 전부 살펴본 후 김재익에게 물었다.

"전부 중국산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속옷은 공임도 비싸고, 원단도 비싸서 저희 같은 소규모 도매상이 가격을 맞추려면 중국산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전 세계 여성 속옷의 70%, 아니 80% 이상은 중국산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 점은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최근에 내가 속옷 도매시장을 조사하며 느낀 것은 중국산이라고 해서 무조건 품질이 나쁘진 않다는 것이었다.

시장도 넓고, 다양한 공장이 존재하는 만큼 일부 제품은 오히려 국산보다 뛰어났다.

다만 그 좋은 제품을 찾아내서 한국에 파는 게 쉽지 않았다.

또 이미 괜찮은 상품들은 다른 도매상이나 쇼핑몰들이 선점하고 있었다.

"그럼 100% 직접 중국에서 사입해 오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직접 디자인팀을 꾸려서 국내 생산을 시도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래봬도 패디과 출신이거든요. 하지만 역시 단가가 맞질 않더군요. 그래서 중국으로 가서 발품 팔아서 공장을 찾아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중국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원단, 부자재도 찾아서 제가 디자인한 속옷을 생산했죠. 처음엔 성공적이었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은 있었죠.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얼마 안가서 제 디자인과 똑같은 상품이 시장 여기, 저기서 풀리더군요. 우리나라 공장이면 찾아가서 항의라도 할 텐데, 멀리 있는 곳이고 말도 잘 안 통하고, 법도 우리 편이 아니고······.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더군요. 결국 지금은 자체 디자인은 포기하고, 사입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내 생산은 단가를 맞추기가 힘들고, 중국 생산은 공장을 관리하기가 힘들다, 이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국내 공장을 돌리려면 지속적으로 꾸준한 물량을 주문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기본 디자인, 잘 팔리는 디자인만 집중합니다. 결국 대기업 속옷들은 상표만 떼면 어느 회사 상품인지 구별이 안 될 만큼 개성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국산 속옷은 안 예쁜 속옷, 수입 속옷은 예쁜 속옷, 그런 인식이 소비자들에게 박혀 버렸죠."

으음.

물론 국내 중소기업 중에서도 틈새를 찾아 디자인 위주의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몇 군데 있었다.

다만 품질은 어느 정도 타협적인 편.

그리고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중소기업 속옷들은 대부분 이미 프랜차이즈 매장이나, 쇼핑몰이 존재했다.

일반 의류와 달리 속옷은 다양한 코디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하이 유나는 후발 주자.

그래서 다른 속옷 전문 쇼핑몰과 상품이 겹치는 것은 가능한 피해야 했다.

"다행히 화려한 속옷만 팔리는 게 아닙니다. 기본형 속옷도 필요하죠. 그리고 그런 기본형 속옷들은 중국산이 괜찮게 잘 나오는 편입니다. 생산 수량이 단위가 틀리기 때문이죠. 오히려 국산보다 나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니 기본형 속옷과 디자이너 속옷을 적당히 잘 배합해 상품을 구성하시면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그 점은 확실히 고무적이군요."

속옷 사업은 성공하면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겠지만, 진입장벽은 꽤 높은 분야였다.

대신 하이 유나는 이미 충성스러운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다만 그만큼, 고객들을 배신해서는 안 되겠지.'

충성스러운 고객들을 상대로 후발 주자로 속옷 시장에 진입하려면 가격과 품질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갖춰야 했다.

유나와 친구들의 이름을 걸고 하는 쇼핑몰인만큼 꼼수를 부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천천히 알아보시고, 신중히 결정하십시오. 혹시 그래도 이 쪽에 진출할 생각이 있으시면 최대한 돕겠습니다. 아는 디자이너들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속옷 디자인은 아주 까다로운 분야라 디자이너의 역량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공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장에 따라 기술 수준이 천차만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고 조언을 구하겠습니다."

"얼마든지요."

* * *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나는 집에 돌아가 노트북을 뒤졌다.

이제는 그림을 그릴 시간.

내가 처음 그린 금붕어 그림은 포항 어머니 댁에 걸려 있었다.

대신 그때 찍어둔 사진들은 내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었다.

'지금 다시 그린다면 훨씬 더 잘 그릴 수 있겠지.'

다만 기술적인 발전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사진과 똑같이 그리는 것은 일부 화가에게만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이제 미대 3학년이 되었으니 화가로서 자의식과 색채를 조금씩 가질 때가 되었다.

나는 이번에도 스케치 북을 꺼내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들을 스케치했다.

그림에 자신감이 생긴 만큼, 생각들도 다양하게 떠올랐다.

'원래는 단순히 미대에 입학하는 것이 목표였지.'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일이 점점 재미있어 지고 있었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저 전생에 배우고 싶었던 그림을 실컷 배우고 싶었다.

그림을 4년간 배우고 나면, 두 번째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많이 애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더 잘할 수 있진 않았을까?

치열하게 살긴 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유나였다.

"주원아. 나 과제 좀 도와주라."

"응? 무슨 과제?"

"회화 4."

유나의 첫 과제도 포토 리얼리즘일 것이다.

우린 거의 시간표가 겹쳤으니까.

그런데 그림 그리는 일에 내가 유나를 도울 일이 있나?

뭘 하길래 도와달란 걸까.

"어떻게 도와줄까?"

"너, 내 첫 과제 기억은 해?"

"당연하지. 깨진 소주병이었잖아."

유나는 소주병을 일부러 깨뜨려서 그렸다.

"응. 이번 과제가 1학년 때와 달라진 자신을 돌아보는 거잖아."

"그렇지."

"1학년 때는 소주를 싱크대에 버렸거든.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못 버리겠는 거야. 그 아까운 걸 어떻게 버려."

유나야.

너도 어느새 어른이 되었구나.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그때 소주는 버렸었구나.

오랜 비밀이 풀렸다.

"그림을 그리려면 빈병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말인데 나랑 소주 좀 같이 마셔주라."

하하하.

요 귀여운 녀석.

'결국 과제를 핑계로 나랑 놀고 싶었던 거군.'

요즘은 은근히 유나가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기분이 든다.

초미녀 유나도 반해버린 회귀자의 치명적인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

후후후.

"그래, 어서 건너 와. 김치찌개 끓일게."

"응. 두부 많이 넣고."

전화를 끊고 찌개를 끓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커다란 냉장고엔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와 유나 어머님이 보내주신 김치가 한 통씩 들어 있었다.

'정말 내 삶이 달라지긴 했구나.'

1학년 돌아보기 과제 덕에 오늘 하루 몇 번이나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1학년 때는 세상에 가족이 어머니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제주도에서 반찬을 보내주시는 어머니가 한 분 더 생겼다.

'두부, 돼지고기, 파······'

냉장고 재료들을 뒤져서 김치찌개를 끓였다.

찌개가 실컷 끓을 때 즈음, 유나가 소주 세 병을 들고 도착했다.

"세 병이나?"

"3학년이니까. 그리고 너랑 같이 마시려면 3병은 있어야지."

유나야.

단순한 어른을 넘어서 술꾼이 되었구나.

그렇게 식탁을 차릴 때 쯤, 유나의 핸드폰에 불이 들어왔다.

유나는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유미가 지금 집에 오고 있는데, 아직 저녁 안 먹었대. 불러도 돼?"

"당연하지."

그리고 나는 유미에게 차려줄 밥도 앉혔다.

쌀을 씻고, 처제니까 특별히 완두콩도 몇 알 같이 넣고 밥솥 버튼을 눌렀다.

유나는 자기 동생에게 차려줄 밥을 하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유나야."

"응?"

"대신 유미 오기 전까지는 여기 앉아서 마셔."

그리고 나는 내 허벅지를 두드렸다.

"우이씨."

유나는 언제나 입으로만 싫은 소리를 낸다.

"그런데 유현이는 요새 뭐해?"

"그 녀석 논다고 정신없나 봐."

유나는 포기한 듯 대답했다.

"주말에 오라 그래. 같이 밥 먹자고."

"안 올걸? 바쁘다고."

"내가 용돈 준다 그래."

"그럼 올 거야."

챙겨야 할 가족이 늘어났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유미를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소주를 마셨다.

유나와 같이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일이 즐거워서 무척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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