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54화 (154/203)

■ 154. 미술치료 □

서양화과에는 재미있는 교양과목도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미술치료.

미술치료는 내담자가 그린 그림으로 내담자의 내면을 유추하는 상담 방식이다.

미술치료를 배워 그림 속에 담긴 여러 심리적 상징을 배울 수도 있고, 다양한 치료 사례도 배울 수 있다.

미술가에겐 여러모로 유용한 과목.

다만 미술치료 역시 인기 과목이라 수강 경쟁이 치열했다.

나는 예전부터 궁금해서 수강을 신청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수강 운이 좋았는지 곧바로 성공!

김태민도 성공했다.

'특히 김태민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하니까.'

더 유용할지도.

다만 유나와 수진 선배는 조소과 수업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이 제대로 배워서 우리한테도 가르쳐줘!"

두 사람은 무척 아쉬워했다.

김태민과 나는 안 그래도 수업은 열심히 듣는다.

난 모든 과목을 열심히 듣고, 김태민은 마음에 드는 과목만 열심히 듣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여자 친구들의 명령으로 더욱 집중해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주원이형!"

"안녕하세요, 오빠! 태민오빠도 이 수업 들어요?"

"와, 훈남 콤비 오빠들이다!"

김태민과 내가 미술치료 강의실에 들어서자, 후배들이 우리를 반겼다.

환영받는 느낌은 언제든 흐뭇하다.

게다가 훈남 콤비라니.

김태민과 같이 다니니까, 뜻밖의 좋은 점도 있구나.

그리고 교수님이 들어왔다.

"미술치료를 맡게 된 권성은입니다. 이 학교에서만 벌써 10년째 미술치료를 가르치게 되었네요."

권성은 교수는 무척 우아한 분위기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정신과 의사 느낌?

"참고로 나도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했어요. 하지만 화가로서는 한계를 느끼고, 도중에 진로를 미술 상담으로 바꿨죠. 다행히 흥미롭기도 하고, 또 그림으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였습니다. 여러분도 화가 외에도 다양한 직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도록 하세요."

권성은 교수는 수업 시작 전에 우리에게 준비해온 종이와 연필을 꺼내게 했다.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가볍게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종이를 꺼내세요. 그리고 종이를 세로로 놓으세요."

나와 김태민은 권성은 교수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첫 번째 지시가 주어졌다.

"먼저 사람을 한 명 그리세요. 가능한 자세히, 전신을 그리도록 하세요."

으음.

사람이라.

그런데 마침 그때가 강영 교수에게 '시간'에 관한 과제를 받은 직후였다.

그리고 전생의 나를 그리면 어떨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전생의 나에게 한창 정신이 팔려 있던 시기였다.

'그럼 연습 삼아 한 번 전생의 나를 그려볼까?'

쓱쓱.

나는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중년의 나를 그렸다.

'머리는 짧고 단정했지. 지금보다 숱도 많이 줄었지. 이번 생은 머리숱을 미리미리 관리하자.'

딱딱한 구두, 피곤에 절은 눈매도 그렸다.

역시 미대생이다 보니, 그리면 그릴수록 자꾸 디테일을 살리고 싶어졌다.

"자, 이제 사람을 다 그렸으면 새 종이를 꺼내세요. 이번에는 나무를 그릴 겁니다.."

권성은 교수가 다음 지시를 내렸다.

"종이를 세로로 하고, 나무를 한 그루 그리세요. 어떤 나무든 상관없습니다. 나무의 종류와 특성까지 상상하며 구체적으로 그리세요."

나무라······

방금 전에는 피곤에 지친 중년 남자를 그렸다.

그래서 지친 나에게 편한 쉼터를 선물하고 싶었다.

잎이 우거진 커다란 나무.

나무 밑에 누워서 쉴 수 있도록 베개로 쓰기 좋은 굵은 뿌리도 그려 넣었다.

'나무는 역시 유실수지.'

회사를 경영해서 그런지 이왕이면 열매가 있는 나무가 좋았다.

나무 밑에 누워서 손을 뻗어 사과도 따먹을 수 있게 가지를 아래로 늘여서 사과도 잔뜩 그렸다.

'나무 밑에서 푹 자야겠어.'

나는 피식 웃으며 새들도 여러 마리 그렸다.

눈을 감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야지.

전생에서 누리지 못한 여유.

그림 속에서라도 마음껏 누리자.

'담요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담요처럼 포근해 보이는 커다란 꼬리를 가진 다람쥐도 한 마리 그려 넣었다.

그리고 나무 중간에는 다람쥐가 쉴 수 있도록 옹이구멍도 그려 넣었다.

'전생의 내가 가난해서 집장만 하는데 힘들었지. 다람쥐도 집은 있어야지. 옛다. 다람쥐야, 집 선물이다.'

그렇게 나무 그림도 다 그렸다.

"자, 이번에는 새 종이에 집을 그리세요. 이번에도 구체적으로 자세히 그리도록 하세요."

집이라······

이왕 전생을 그린 것, 전생 특집으로 달리기로 했다.

그래서 집도 전생의 아파트를 그렸다.

'뼈 빠지게 일해서 40대에 겨우 융자를 다 갚은, 내 작은 아파트.'

그나마 아이가 없어서 저축할 수 있었다.

'아이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다니······'

내 전생은 이래저래 우울했구나.

다행히 이번 생은 벌써 건물이 여러 채다.

'절대 내가 잘나서 얻은 재산이 아니야. 그러니까 이번 생에 얻은 재산은 의미 있게 쓰도록 하자.'

나는 그렇게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내 전생의 작은 아파트를 그렸다.

'나의 내면도 많이 굳건해졌구나. 남을 위해 살 생각도 다 하고. 대견하다, 이주원.'

그렇게 나는 미술치료 첫 시간에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혼자 뿌듯해했다.

"자, 이제 세 장의 그림을 자신의 옆 사람에게 건네도록 하세요. 지금 그린 그림은 HTP 테스트라고 부르는 미술치료의 가장 기본인 테스트입니다. 이제부터 HTP의 이론과 분석 사례를 배우게 될 겁니다. 지금 받은 옆사람의 그림을 분석해서 제출하는 것이 첫 과제입니다."

그랬군.

나는 내가 그린 3장의 그림을 김태민에게 건넸다.

그리고 김태민의 그림을 내가 받았다.

김태민의 심리 분석이라······

그림을 안 봐도 대강 알 것 같았다.

'초건강 초건전 모드겠지.'

이번 과제는 생각보다 재미없겠군.

그리고 본격적인 미술치료 수업이 시작되었다.

"HTP 테스트란 말 그대로 HOUSE, TREE, PERSON. 그러니까 집, 나무, 사람을 그려서 내담자의 내면을 유추하는 테스트입니다. 그럼 왜 하필, 집, 나무, 사람일까요?"

내가 손을 들고 대답했다.

"아마도 미술치료는 언어가 미숙하거나, 의사소통에 불편을 겪는 사람에게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런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소재가 집, 나무,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아주 정확해요. 이주원 학생 맞죠? 아주 훌륭한 답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장 자주 접하는 소재. 그러니 그만큼 정확하게 내담자의 내면이 투영되어 있겠죠."

그렇게 이번에도 칭찬을 들으며 기분 좋게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살짝 뭔가 이상하기 시작했다.

"그럼 먼저 사람의 그림을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찰칵.

스크린에는 권성은 교수가 상담했던 다른 내담자의 그림과 분석 사례가 비춰졌다.

"이 그림은 폭력적인 가정환경에 노출되었던 남자 초등학생의 그림입니다. 사람을 그릴 경우 대부분, 자신과 동성이나 동년배의 사람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성범죄자, 알콜 중독자 혹은 다른 종류의 정신 장애자들이 주로 이성이나 다른 연령대의 사람을 먼저 그린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런.

난 중년의 아저씨를 그렸다.

뭐,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그리고 머리카락, 혹은 체모는 성적인 욕망의 발산이나 억압을 상징합니다. 이 그림은 사춘기 10대 소년의 신체 변화와 강요된 폭력성향이 진한 필압으로 묘사되었는데요. 반대로 머리카락이나 체모의 묘사가 소극적이라면 결여된 성적 에너지나 수동적 성향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런.

난 그저 중년 남자의 단정하고 숱없는 머리카락을 그렸을 뿐이다.

"그리고 넥타이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합니다. 과장된 크기나 화려한 무늬는 성적인 욕망과 공격성을 뜻합니다. 단단히 묶였거나 폭이 좁은 넥타이는 반대로 성적 억압을 말합니다. 넥타이와 유사한 장치는 신발을 꼽을 수 있습니다. 신발 역시 성적 욕망과 성기를 상징합니다."

나도 넥타이를 그렸다.

단지 전생에서 애용했던 커다랗고 촌스런 파란색 줄무늬 넥타이를 그렸을 뿐이다.

그리고 커다란 검정색 구두.

그게 내 그것을 상징한다고?

그런 줄 알았으면 더 귀엽게 그릴 걸 그랬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내 성적 에너지는 아무 문제없다고.'

유나와의 관계도 능동적으로 잘 이끌고 있다.

'이게 심리테스트인 줄 알았으면 그림에 전생을 담지 말 걸 그랬어.'

'시간의 시각화' 과제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다소 엉뚱한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나무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나무의 뿌리는 내적인 안정감을 뜻합니다. 나무뿌리가 빈약하거나 생략되었다면 불안감을 뜻합니다. 반대로 나무뿌리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표현되었다면 굴절된 자의식이나 지나친 자기애, 혹은 과도한 보상심리, 때로는 변태 성욕을 뜻하기도 합니다."

나는 나무 밑에 누워서 잠자고 있는 나를 생각했다.

그래서 베개로 써도 될 만큼 굵은 뿌리를 그렸을 뿐이었다.

절대 자기애나 변태성욕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

"나무에 그려진 사과와 새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상징합니다. 사과와 새가 지나치게 많이 그려졌다면 가족에게 방치된 상황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땅에 닿을 정도로 늘어진 가지는 정신적 좌절감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니라고!

사랑은 유나한테 충분히 받고 있다고!

정신적 좌절 같은 건 절대 없다고!

이번 생은 극히 만족하고 있다.

"특히 나무에 그려진 옹이구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합니다. 만약 그 옹이구멍 안에 동물이 그려져 있다면 바로 내담자 자신을 투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자궁회귀본능이나 정신적 퇴행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나는 다람쥐 털처럼 보드라운 담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람쥐 꼬리를 덮고 잠자는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발상이라며 나를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친절한 배려로 다람쥐에게 집을 마련해준 것 뿐.

우리 어머니는 포항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셨다.

난 이때쯤 포기했다.

나와 HTP 테스트는 인연이 없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집을 살펴보겠습니다. 문은 외부와 내면의 연결 통로를 뜻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크기에 손잡이가 그려진 문일수록 외부와 건전한 관계를 형성한 자아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문의 크기가 비정상적이거나, 혹은 생략되었다면 외부와 단절된 상황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파트를 그렸다.

보통 아파트의 현관문은 보이지 않는 곳에 따로 존재한다.

그래서 당연히 문은 생략했다.

나는 나름 좋은 친구들과 문제없이 사귀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질문했다.

"교수님. 그런데 저희는 미대생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조절할 수도 있고, 또 그림 속 상징이나 은유에 대해서 배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 같은 미대생이 그린 그림도 HTP의 분석 방식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까?"

"좋은 질문이네요. 물론 일괄적인 적용은 안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미대생이 아닌 모든 경우에 해당됩니다. HTP 테스트는 모든 사람, 모든 경우가 특수하다는 전제로 내담자 한명, 한명의 상황을 세심히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찰칵. 찰칵.

교수가 프리젠테이션 몇 장을 건너뛰어 그림 한 장을 띄웠다.

그러자 화면에는 이빨과 손톱이 괴이하게 그려진 소름끼치는 그림이 떠올랐다.

"이건 다른 학교에서 강의할 때, 한 디자인과 학생이 그린 그림입니다. 분명 미술 교육을 받은 학생이었죠. 그런데 저는 이 그림에서 과잉 방어와 분노를 발견하고, 학생과 깊이 있는 상담을 나눴습니다. 교양 수업 시간에 우연히 한 학생의 문제적 상황을 개선하게 된 거죠. 보시다시피 미대생이라도, 훈련으로 바꿀 수 없는 부분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미술 치료 수업은 마쳤다.

내가 좀 엉뚱한 그림들을 그려내긴 했지만, 어차피 교양 수업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다.

하지만 그때부터였다.

나와 단둘이 있게 되면 김태민이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 이상한 말도 하곤 했다.

"요즘 회사는 잘 돌아가? 혹시 고민이 있으면 내게 말해 봐."

"응? 웬 고민?"

"내가 못 미더우면 학교에서도 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대."

"네가 왜 못 미더워?"

한번은 영화 티켓을 준 적도 있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영화래. 유나랑 같이 보러 가. 아니면 나랑 같이 가도 되고."

"내가 너랑 둘이서 영화를?"

굳이?

각자 여자 친구가 있는데?

"나랑 영화 보기 싫으면 같이 술 한 잔 해도 되고. 우리 옛날엔 같이 많이 마셨는데, 여자 친구가 생겨서 너한테 내가 많이 소홀해진 기분이야. 하하하. 미안하다, 친구야."

그렇게 말하면서 어색하게 웃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미안.

내가 좀 바빠서 유나랑 보낼 시간도 부족하거든?

계속 적당히 소홀해주라.

우리 예전엔 거의 같이 살았잖아.

그걸로 충분하지 않니?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유나가 내게 의문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너 요즘 김태민이랑 무슨 일 있어?"

"아니. 전혀. 왜?"

"태민이가 나한테 엉뚱한 말을 하더라고."

"무슨 말?"

"너랑 나 사이에 무슨 일 있으면 자기한테 말해도 된데. 자기 베프는 분명 주원이 너지만, 나도 엄연히 자기 친구라고."

태민아······

베프라고 불러줘서 고맙긴 하구나.

그런데 대체 무슨 걱정을 하는 거니?

나랑 유나는 아무 문제없다고.

유나가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어. 자기한테 말하기 민망한 이야기면 수진 언니한테 말해도 된데. 그리고 나보고 너한테 잘해주래."

"그, 그래?"

"그리고 자기는 언제나 우리 두 사람의 친구래. 얘 갑자기 왜 이래?"

태민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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