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51화 (151/203)

■ 151. 특강 □

일하는 시간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가능한 매일 출근해서 직접 회사의 상황을 점검하려 애썼다.

직원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는 사장이 직접 챙길수록 더 나아진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정화 선배가 직접 면담을 신청했다.

"네, 누나. 10분 후에 사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화 선배는 적극적으로 회사 일을 맡아주었다.

덕분에 나와 유나는 학교에 더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고.

어떻게 보면 나와 유나의 학업의 은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가능한 정화 선배가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똑똑.

"들어와요."

정화 선배는 두툼한 종이 뭉치와 노트북까지 끼고 사장실로 들어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했을까?

"살짝 긴장되는데요?"

"아니야. 편하게 들어."

참고로 나는 정화 선배에게 회사에서 항상 반말을 하라고 부탁했다.

정화 선배는 단순히 내 지인이 아니라, 회사의 설립 멤버니까 어느 정도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는 젊은 회사.

복잡한 격식이나 남들의 이목 같은 것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은근 예술가의 기질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갑자기 1:1 면담을 요청해서 아까부터 긴장하고 있었어요. 문제 있는 건 아니죠?"

"문제는 무슨. 오히려 반대야. 회사에 너무 만족해서 새 사업을 벌여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거든."

"새 사업이요?"

그렇군.

하이 유나는 순항 중이었고, 5DE 역시 매일 새로운 매출 기록을 갱신 중이었다.

그 성공에 너무 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새롭게 돈을 벌 분야는 얼마든지 더 있는데.

"실은 괜찮은 분야가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이것저것 조사를 시작했거든. 그런데 막상 알아보기 시작하니까,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닌 거야. 남들이 안하는 일은 다 안하는 이유가 있더라고. 그래도 포기하기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아서. 그래서 너한테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넌 항상 기발한 방법으로 어떤 일이든 성공시키잖아. 너라면 해법을 알 것 같아서."

으음.

내가 그런 이미지였군.

회귀자의 치트키는 너무 강력하다.

"한 번 들어보죠."

정화 선배가 가져왔다는 새 아이템이 너무 기대되었다.

그리고 정화 선배가 문제점에 직면했다는 사실이 더 고무적으로 들렸다.

보통 새 일을 시작할 때는 그 가능성이나 보상에 매료되어 실패의 위험을 간과하기 일쑤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 냉정하게 볼 수 있다는 자체가 정화 선배가 얼마나 유능한 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한 아이템은 바로 속옷이야. 란제리."

"속옷이요?"

"응. 팬티, 브라, 수영복, 잠옷 기타 등등."

역시 내가 촌놈인지 살짝 민망했다.

하지만 정화 선배는 아무렇지 않은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내갔다.

"여자한테 속옷은 화장품이랑 비슷해. 매일 필요하고, 또 가능한 비싸고 좋은 것을 쓰고 싶고, 언제나 항상 신경 쓰이는 분야야."

"그렇군요."

"또 생각보다 비싸고, 나이에 맞는 제품이 필요하고, 자기에게 맞는 제품을 찾는 게 어려운 것도 화장품이랑 닮았어. 대신 그만큼 한 번 여자를 만족시키면 강력한 충성 고객이 생겨나는 거지."

으음.

난 정화 선배의 말을 진지하게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여자의 속옷에 대해 조금도 몰랐다.

심지어 남자의 속옷에도 거의 무관심했다.

'여자에게는 속옷이 그런 깊은 의미가 있었구나.'

남자에게 팬티란?

그저 남들 다 입으니까 나도 입는 것.

그 이상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나는 왜 팬티를 입는 걸까? 내일부터 그냥 입지 말까?'

25살 인생.

아니, 전생까지 더하면.

거의 100년에서 조금 빠지는 기간 동안 나는 한 번도 내 팬티에 의문을 갖지 않았었다.

'남자랑 여자는 정말 많이 다른 생물이구나.'

회귀자는 오늘도 소소한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일로 돌아가서.

여자 속옷에 관해서는 전생에 신문 기사를 몇 개 읽은 적이 있다.

'보정속옷이랑 기능속옷 시장이 미친 듯이 확대되고 있다는 이야기였지.'

그 말은?

지금 속옷 사업에 뛰어든다면 그 미칠 듯한 성장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괜찮은 이야기 같아요. 우린 옷과 화장품도 이미 팔고 있으니까 속옷까지 다룬다면 충분히 시너지도 있을 테고요. 그런데 누나가 발견한 문제란 게 대체 뭐죠?"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일단 모델."

"모델이요?"

"응. 하이 유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중 제일 큰 요소는 모델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우리 나이대의 옷을 입으려고 했어. 그리고 손님들이 우리를 동생이나 언니처럼 대해줬어. 그래서 우리 사이트에 대해 애착도 강했고,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해졌고, 장점에 대해서는 격하게 칭찬해줬지."

"맞아요. 누나나 수진 누나, 유나에 대한 지지가 엄청 났어요. 그리고 그 믿음이 화장품에까지 이어져서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죠."

요즘 세 사람은 아주 가끔 피팅 모델을 하는 정도.

대신 비슷한 느낌의 직업 모델을 구해서 가능한 바꾸지 않고 오래 채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린 쾌적한 환경과 넉넉한 보수를 제공했다.

그리고 하이 유나의 평판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서 모델들도 가능한 우리와 오래 일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런 가족 같은 모델들에게 속옷을 입게 하면 고객의 반발이 꽤 있을 거야. 그리고 지금 모델들도 속옷 모델을 꺼릴 테고. 당장 나만 해도 속옷 모델은 자신이 없어."

"으음. 확실히 쇼핑몰에서 속옷을 판매하는 것은 그런 문제점이 있겠군요."

"다른 사이트들은 외국 모델을 쓰기도 하고, 얼굴을 지우는 곳도 있어. 그것도 나름 방법이긴 하겠지만, 우리 사이트의 운영 방식과는 맞지 않지. 물론 얼굴을 가리지 않고, 꾸준하게 한 모델을 써서 어느 정도 성공한 쇼핑몰도 있어. 그런 경우는 보통 사장이 직접 모델을 해서 운영하는 곳이야. 그리고 처음부터 속옷 전문 쇼핑몰로 시작했고."

으음.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적합한 모델이야 구하면 된다.

결국 돈의 문제.

다만 그 비용을 지불해도 괜찮을 지의 사업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다른 문제도 있어."

"어떤 문제요?"

"동대문에도 지금 당장 우리가 사입해서 판매할 수 있는 속옷이 꽤 있어. 그 중엔 제법 예쁘고 괜찮은 것도 많아."

"그렇군요. 한 번 날 잡아서 같이 가 봐요."

"그래야겠지. 그런데······"

"그런데요?"

"내가 말했지? 속옷은 화장품과 비슷하다고. 여자들은 가능한 믿을 수 있는 속옷을 입고 싶어 하지."

"그렇겠죠."

"그런데 동대문에서 디자인이나 가격 경쟁력을 갖춘 상품은 대부분 중국산이야. 특히 속옷은 제조 공임도 비싸고, 원단도 중요하니까 가격 경쟁력을 갖추려면 중국 생산이 필수였을 거야. 물론 중국산이 항상 나쁜 건 아니야. 하지만, 지금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국산 화장품을 고집하고 있어. 그런 우리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을 거야."

나도 정화 선배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우리의 이미지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5DE의 경우, 명품 화장품 못지않은 품질을 제공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의 이름을 걸고 팔기에 중국산 속옷은 다소 적합하지 않았다.

"으음. 정말 그렇겠네요."

"이것 말고도 소소한 문제들은 끝도 없어."

"그 자료들은?"

"응, 이것저것 다른 업체 매출이랑, 현 상황들. 인기 상품들의 가격대, 등등. 구할 수 있는 건 다 가져와 봤어."

"두고 가세요. 제가 꼼꼼히 읽어볼게요. 속옷은 확실히 괜찮은 아이템인 것 같아요. 한 번 자세히 알아봐야겠어요."

"고마워.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줘서 인정받는 기분이야."

"에이. 왜 그래요. 좋은 아이템을 가져왔으니 내가 고맙죠."

그렇게 정화 선배를 보내고, 정화 선배가 가져온 자료들을 꼼꼼히 체크했다.

* * *

시간을 많이 끌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속옷은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나는 그날 밤 동대문에 가서 은성사 사장님을 만났다.

"속옷을 알아보고 있다고?"

"네. 그래서 제일 먼저 사장님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 속옷도 수입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동대문의 거의 대부분 중국산 제품들을 다 다뤄보셨잖아요."

"생각은 해 본 적 있지. 그런데 쉽지가 않았어."

"어떤 점들이요?"

"일단 속옷은 치수가 다양해. 여자 속옷 사이즈가 몇 가지 인 줄 아나? 거기다 같은 사이즈라도 입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전부 다를 수도 있거든. 그리고 색깔도 다양해. 그러니 한 두 개만 수입해도 수량이 얼마나 많겠나?"

"그렇겠군요."

솔직히 여자 속옷 사이즈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은성사 사장님 설명만으로도 벌써 질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속옷은 따로 팔아야 해. 일반 도매 매장에 속옷을 같이 팔 순 없어. 속옷 도매상을 따로 차리고, 거기에 상품들을 제대로 갖춰 넣으면······ 나도 쉽게 손댈 수 없는 규모가 되겠지."

"그렇겠군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수입보다는 자체 생산에 더 끌립니다."

"속옷을 국내에서 생산하겠다고?"

"네, 그게 품질도 확실하고, 또 손님들에게 신뢰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흐흐흐.

은성사 사장님은 내 말을 듣고 웃어버렸다.

비웃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정말 순간적으로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자네들 일반 옷 자체 생산은 해 봤지?"

"넵."

"일반 옷은 샘플이 나오면 평화 시장에서 원단을 사서 공장에 보내줬을 거야."

"그랬습니다."

"속옷은 원단이 중요해. 살에 닿는 부위니까. 원단에 따라서 제품의 등급이 천차만별로 달라지지. 그래서 속옷의 원단은 평화시장에서 사는 게 아니야. 직접 원단 공장에 가서 주문을 넣어야 해. 생각해보게. 그럼 대체 얼마나 일이 커지겠나?"

"음. 그렇군요."

다만 일이 커지는 것이 단점만은 아니었다.

남들이 쉽게 시작할 수 없는 분야라면 오히려 승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총알이라면 넉넉히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충성스러운 하이 유나 고객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은성사 사장은 겁을 주려 한 이야기겠지만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나는 눈이 반짝였다.

은성사 사장님은 그런 내 표정을 순식간에 캐치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네."

"그게 뭐죠?"

"자네 여자 속옷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꿀꺽.

뭔가 핵심을 지적당한 것 같았다.

"거의 모릅니다."

"그거야. 자기가 잘 알고, 좋아하는 분야. 그런 확신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런데 속옷에 대해 거의 모르면서 돈이 될 것 같으니까 일단 뛰어들겠다고? 자네, 요 몇 년간 손대는 사업마다 다 성공했지. 그래서 감이 둔해진 게 아닌가? 알만한 친구가 왜 이러나. 정신 차리게. 잘 될 때일수록 더 조심하고 긴장해야지."

은성사 사장님은 최대한 온화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가슴이 철컹 내려앉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성사 사장님이 야단치지 않았더라면 나도 모르게 성공에 취해 내 주제를 잊을 뻔했다.

그리고 나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하이 유나는 친구들과 함께 만든 회사.

조심해서 경영해야 한다.

그리고 하이 유나와 원 디자인은 이미 여러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었다.

그러니 나의 오만으로 회사를 어렵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속옷 사업을 포기하란 말은 아니야. 분명 괜찮은 사업이야. 다만 잘 알아보고 신중하게 접근해. 잠깐 기다려보게."

은성사 사장은 장부를 뒤지더니 낡은 명함 하나를 찾았다.

"디자이너 클럽에서 매장을 하는 사장인데, 꽤 젊어. 한 번 만나보게. 중국에서 란제리 수입하는 친군데, 나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사무실에 돌아온 나는 정화 선배가 건넨 자료를 다시 자세히 살펴봤다.

속옷은 확실히 끌리는 아이템.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접근해야 할 것이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유나가 들어왔다.

내 사무실에 노크 없이 들어오는 사람은 유나뿐이었다.

"할 일 많아? 퇴근 안 해?"

최근 오빠 사건으로 살짝 냉전을 치르긴 했지만 그건 그때 뿐.

유나는 언제나 살뜰히 나를 챙겨준다.

"응. 같이 들어가자."

"살펴볼 자료가 많아? 일이 잘 안 돼?"

"그런 건 아니고."

유나도 정화 선배가 속옷 사업을 제안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괜찮은 사업 같기도 하고, 또 정화 선배를 위해서도 꼭 진행하고 싶은데······ 그런데 은성사 사장님한테 야단맞았어."

"정말?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은성사 사장님이 널 야단 쳤다고?"

유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긴 상상이 잘 안 될 것이다.

은성사 사장님 내외는 유나가 찾아갈 때마다 '우리 예쁜이' 왔냐며 극진히 대접해주니까.

"내가 욕심이 생겨서 잘 알지도 모르는 분야를 서둘러 뛰어든다고."

"음. 그런데 넌 여자 옷도 하나도 몰랐잖아. 그때는 어떻게 도전 했어?"

"그때는 일단 너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어. 내가 몰라도 유나가 잘 아니까 상관없겠지,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리고 나도 공부도 열심히 했지. 일단 옷은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속옷은 내가 직접 볼 기회도 적고, 공부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어. 인터넷을 찾아봐도 이게 왜 잘 팔리는 건지, 어디가 예쁜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와."

유나는 이마를 긁으며 잠깐 인상을 썼다.

"저기 말이야. 나도 네 집에 놀러갈 땐, 속옷에 꽤 신경을 썼던 것 같은데, 넌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거야?"

아차.

전혀 몰랐다.

심지어 유나가 어떤 속옷을 입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황한 내 얼굴을 유나가 신기하다는 듯 한참 쳐다봤다.

그리고 유나가 내게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

"내가 가진 속옷들 중 제일 예쁜 것만 골라서 이따 저녁에 네 집에 가는 거야. 그리고 내가 하나씩 갈아입으면서 그 옷들이 어디가 예쁘고, 어디가 특별한지, 어디가 구매 포인트인지를 자세하게 가르쳐주는 거야."

"네가 직접?"

"응."

으음.

왜지?

내가 아는 한유나는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지는 않는다.

노리는 게 뭘까?

역시 유나는 생글거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저것은 뭔가 장난을 꾸밀 때의 표정이다.

"대신!"

"대신?"

과연 유나는 조건을 걸었다.

"네가 날 누나라고 불러야 해."

"누나?"

나는 눈을 찡그리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훗.

후후훗.

'남자랑 여자는 정말 다르구나.'

유나에겐 자존심이 중요해서,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게 힘들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자.

지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친구가 직접 속옷 특강을 해주겠다는데, 자존심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나는 무슨. 원한다면 이모라고도 불러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노련한 회귀자.

절대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다.

"누, 누나라고 부르라고?"

"후후후. 하얀 내 살결을 덮은 빨간 색 레이스 장미를 상상해 봐."

으윽.

"꼭 누나라고 불러야 해?"

"싫으면 관두던가."

나는 최대한 괴롭고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유나는 그런 내 표정을 맘껏 즐겼다.

그리고 유나는 또 한 번 선언했다.

"잠깐. 생각이 바뀌었어."

"응? 무슨 소리야?"

"한 번은 너무 약해. 날 세 번 누나라고 불러."

겨우 세 번?

백만 번이라도 부를 수도 있다.

"세 번이나? 대신 더 이상은 올리면 안 돼."

"하하하하. 꼴좋다. 역시 넌 나한테 안 돼. 어디 감히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누나는 속옷 챙겨서 한 시간 후에 너네 집으로 갈게. 이따 봐."

유나는 호탕하게 승자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들고 의기양양 사무실을 나갔다.

귀여운 녀석.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진정한 승자는 바로 나다.

유나가 직접 들려주는 특강!

그렇게 부지런한 회귀자는 오늘도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했다.

* * *

유나와 함께 새 아이템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시간의 시각화.

첫 크리틱의 날이 온 것이다.

과연 강영 교수는 내 그림을 보고 어떤 평가를 내릴까?

그리고 임진만은 어떤 작품을 가져왔을까?

그리고 김대성은?

나는 비장한 각오로 그림을 챙겨서 강의실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