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46화 (146/203)

■ 146. 꽃등심 □

"2단계 형태 뜨기. 아그리파는 얼굴 근육과 숨겨진 표정이 많다. 그래서 기본 석고인 동시에 실력차가 가장 많이 드러나는 소재지. 초보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눈앞에 보이는 잔근육들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아그리파의 본질은 얼굴의 근육이 아니라, 아저씨의 퉁퉁한 얼굴 그 자체! 바로 양감이다."

그러니까 대충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라는 이야기.

남동민은 설명하는 동시에도 현란하게 손을 움직였다.

"4단계! 명암나누기!"

휘리릭.

"6단계! 반사광 표현!"

남동민의 손이 지나간 자리엔 석고상이 불쑥불쑥 솟아났고, 학생들은 모두 숨죽여 지켜보았다.

"8단계 질감표현!"

보통 입시 석고상 소묘는 3시간 안팎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제 겨우 1시간이 지났는데, 남동민의 석고상은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입으로 설명까지 하면서 그리는데도, 망설이지도 않았고 수정도 필요 없으니 시간이 크게 단축된 것이었다.

"자! 이제부터 진짜다! 그림에 완성은 없다. 계속 고치고, 고쳐서 솜씨를 끼얹어 점수를 뽑아낸다! 모두 긴장을 풀지 마라! 내가 하는 걸 잘 봐라!"

이제부터는 진짜 입시 팁의 영역.

사실 지방 미술학원이나 서울 미술학원이나 기본기는 똑같다.

하지만 서울은 많은 학원들이 경쟁하는 만큼, 점수로 이어지는 다양한 요령과 공식도 같이 가르친다.

그리고 그 그림 공식들의 살아있는 집대성이 바로 남동민이었다.

촤르르륵.

남동민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입시의 신세계!

학생들은 이제 거의 모두 집단 최면에 빠졌다.

"내가 오늘 KTX를 타고 왔는데, 기차에서 김밥을 팔더군. 크크큭."

"꺄르르르."

"우하하하!"

학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남동민은 시범작을 그리며 농담이나 경험담을 풀어놓기도 했다.

노련한 전임강사의 노하우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의 반응.

남동민의 솜씨에 매료된 학생들은 남동민이 농담 비슷한 것만 던져도 빵빵 터져댔다.

'KTX에서 김밥을 파는 게 대체 왜 웃긴 거지?'

난 무심코 옆을 쳐다봤다.

이럴 수가!

유나마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남동민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남동민이 이상한 농담을 하면 같이 웃어댔다.

'정신 차려, 유나야!'

나는 찰싹!

유나의 등을 때려 유나를 깨웠다.

그리고 문득 옛날 동화 '피리 부는 남자'가 떠올랐다.

'남자가 피리를 불자, 아이들이 춤을 추며 남자를 따라갔지. 어쩌면 그 동화는 정말 실화일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마침내 남동민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자, 시범작은 여기까지다. 물론 나는 더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거기까지 배울 준비가 안 되었다. 10분간 휴식 후, 오늘 본 것을 바탕으로 너희들도 아그리파를 그린다. 그럼 내가 돌아다니며 고쳐주겠다."

"와아아아!"

마치 가수의 콘서트가 끝난 것처럼 학생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심지어 사모님과 취미반 아주머니들도 같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내일은 줄리앙을 그려보겠다. 줄리앙은 강렬한 동세가 돋보이는 석고상이다. 줄리앙의 동세를 이해할 수 있으면 다른 그림에도 그 동세를 이용해 생동감을 줄 수 있다. 그러니 내일 수업은 중요하다!"

과연 강남 1타의 노련함!

기대감을 주고 마무리하는 일일 연속극처럼 남동민은 예고편까지 방송했다.

그렇게 첫날 수업 마무리.

그런데 다음날 곧바로······

* * *

"안녕하세요······"

"어? 어떻게 왔어요?"

일요일은 입시반 학생들만 학원에 나온다.

그래서 다른 날에 비해 학원이 조용하다.

그런데 오늘 못 보던 학생들 네 명이 가방까지 매고 학원을 찾아온 것이었다.

사모님은 학생들이 왜 왔는지 물어보았다.

"그게······저희는 아름 미술학원 다니는 학생들인데요. 여기 다니는 친구가 특강이 좋다고 자랑해서······학원을 옮기려고요."

3학년이 입시학원을 옮기는 것은 좀처럼 드문 일.

사모님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일단 받아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음 날.

"여기 한국대 선생님이 강의하는 게 사실인가요?"

"하긴 하는데, 임시로 하는 거예요. 그 분들은 방학 끝나면 서울로 올라가실 거예요."

학원에는 계속 문의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중에 몇 명은 남동민과 내가 임시 강사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등록까지 해버렸다.

따르릉.

"저기, 나 아름 원장인데, 거기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결국 사모님은 다른 미술 학원의 항의 전화까지 받고 말았다.

서울이라면 절대 상상도 못할 일.

경쟁을 해서 학생을 뺏어 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곳은 포항.

학생들 수가 많지도 않고, 학원도 몇 개뿐이다.

그래서 원장들끼리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이.

대부분 아는 사람 한둘 건너 모두 선후배지간이었다.

당황한 사모님은 하는 수 없이 병실의 원장 선생님과 의논해서, 입시생들은 모두 거절하기로 했다.

하지만 1, 2학년 학생들은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다시 토요일.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된 남동민의 특강.

"자, 오늘은 인체를 그리겠다. 인체를 그릴 때 포인트는 욕심 내지 않는 것이다. 인체는 어려운 주제다! 그래서 미대생은 물론, 강사들까지도 쉽지 않지. 그러니 입시생은 욕심내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도록 한다!"

마치 락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남동민의 현란한 솜씨 자랑.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근처의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리고 간식들을 큰 봉지에 가득 긁어 담았다.

'남동민만큼 테크닉이 없다면 돈을 쓰면 되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

그것은 돈!

이것은 불변의 진리.

뜨거운 박수와 함께 남동민의 시범이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때맞춰 등장한 나의 간식!

"와아아아!"

"주원 선배님 최고!"

학생들은 연이어 열광했다.

그렇게 신나게 간식을 먹고, 모두들 다시 그림에 몰입.

노련한 회귀자는 학생들이 원장 선생님의 부재를 불평할 아주 작은 틈새도 원천봉쇄했다.

덕분에 사모님은 이제 새 강사를 구할 생각을 아예 접으신 듯 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끼이이익.

또 다시 학원 문이 열렸다.

그리고 빼꼼.

얼굴이 뽀얀 젊은 여자가 머리를 내밀었다.

"애들아, 안녕~"

이번엔 수진 선배였다.

그리고 그 뒤엔 김태민도 서 있었다.

"와아아아아!"

김태민과 수진 선배를 본 학생들은 자기들조차 영문도 모르고 그냥 반사적으로 환호했다.

그것도 이제까지 본 적 없는 가장 뜨거운 환호였다.

남동민은 현란한 솜씨를 선보였고, 나는 간식을 사서 바쳐야 했다.

하지만 김태민과 수진 선배는 그저 등장만으로 충분했다.

"언니! 왔군요!"

"응, 너희들 보러 왔지. 동민 오빠도 여기 있다며?"

유나가 달려가 두 사람을 맞았다.

그렇게 그날은 우리 다섯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사실 입시 미술 학원에서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은 프리미엄이 있다.

한국대라는 이름이 먹어주기도 했고, 또 한국대 서양화과가 학생이 워낙 적기도 했다.

보통 미술학원은 강사를 뽑을 때, 간단한 실력 테스트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국대 서양화과는?'

그냥 학생증만 보여주면 곧바로 채용된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실력 테스트를 하자고 하면 자존심이 조금 상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지방의 작은 미술학원에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이 다섯이나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지금은 한국의 입시 미술 역사에 기억될만한 재미있는 순간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드디어 3주가 끝났다.

끼이이익.

또 다시 학원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목에 깁스를 한 원장선생님이 서 있었다.

"이게 뭐야. 대체······"

학원이 학생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3학년 입시반은 더 이상 받지 못했지만, 입소문은 꾸준히 퍼졌다.

그래서 1, 2학년과 중학생들이 새로 많이 들어왔다.

"오셨군요. 원장 선생님."

난 일부러 원장 선생님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달 더 입원할 걸 그랬나."

원장 선생님은 표정이 복잡했다.

좋으면서도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착잡한 표정.

미덥지 않던 내가 겨우 3주 만에 학원을 더 키워 버린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았다.

* * *

"형, 많이 먹어요."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바닷가 펜션이었다.

난 원래 특강 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남동민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호텔을 잡아줬다.

남동민은 토요일 오전에 내려와 포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일요일 밤에 올라가곤 했다.

나는 포항 구경도 시켜주고, 밥도 같이 먹으며 최대한 극진히 대접했다.

'남동민은 그럴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그리고 나를 위해서 곧바로 달려와 준 게 고마워서였다.

따지고 보면 남동민도 의리파였다.

'나를 도와준 것도 그렇고, 자기 친구들을 챙기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오늘은 김태민과 수진 선배도 왔으니까 특별히 포항 바닷가의 펜션을 빌렸다.

그리고 등심과 안심을 넉넉히 준비했다.

"네 사람 모두 날 도와주기 위해 온 거니까, 오늘은 내가 고기를 구울게요. 네 사람은 그저 편하게 먹기만 해요."

김태민과 수진 선배는 내일로를 이용해 전국 여행 중이었다.

여행 하다가 우리 소식을 듣고 포항에서 내린 것이었다.

"방학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그냥 한국 일주를 하기로 했어. 그런데 진짜 좋아. 한국이 생각보다 훨씬 예쁜 곳이란 걸 알게 되었어. 유나야, 너도 내일로 꼭 해."

내일로는 34세 이하를 위한 철도 무제한 이용권이었다.

'전생에선 이런 게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지. 그래서 나이 제한에 걸렸었는데······'

수진 선배의 추천을 듣고 유나도 무척 끌리는 모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담에 시간 되면 같이 가야지. 다만 오늘은······'

솔로인 남동민이 같이 있으니 염장질은 자제해야겠다.

오늘의 주인공은 남동민이니까.

나중에 유나와 단 둘이 있을 때 의논해 봐야지.

그리고 김태민은 자기 스케치 노트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줬다.

전국 일주를 하며 본 것들.

그리고 포즈를 취한 수진 선배를 즉석에서 스케치 한 것이었다.

"이야, 괜찮은데?"

남동민이 김태민의 스케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남동민은 학원을 벗어나면 조지 클루니에서 벗어나서 원래의 늙은 형이 되었다.

"형, 나는 지금 모습이 훨씬 더 좋아요."

"응? 뭐라고?"

"아니에요. 고기 드세요. 소고기라서 금방 익어요."

"오빠. 주원이 고기 정말 잘 굽죠?"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수업시간에 그렇게 치고 박고 싸웠던 남동민에게 내가 이렇게 큰 신세를 질 줄이야.

남동민은 자기와 내가 서로 도와서 이제 쌤쌤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성북동 전시는 내게 그저 가벼운 놀이였다.

그런데 원장 선생님께 은혜 갚기는 내 평생의 숙제였다.

그러니 내게는 절대 쌤쌤이 아니라, 내가 남동민에게 큰 신세를 진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크리틱에서도 항상 조심해야겠다. 사람 앞날은 모르니까. 한 번 죽고 나서도 이주원은 아직 지혜로워지긴 멀었구나.'

그리고 유나.

남동민도 고마웠지만, 유나도 고마웠다.

도와달라는 나의 말에,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곧바로 포항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한 달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단 둘이 있을 때 해야지'

대신 제일 예쁜 꽃등심을 집중해서 완벽하게 구워냈다.

그리고 슬쩍 유나의 밥그릇 위에 올려줬다.

내 생각을 아는지 유나는 배시시 웃고는 고기를 냉큼 입안에 집어 넣었다.

유나는 기름으로 반들거리는 입술로 오물오물 고기를 씹었다.

'우린 벌써 3년 넘었는데.'

사랑의 유통기한이 3년이란 건 거짓말 같다.

아니면 유나가 유독 예뻐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두 번째 삶이라 그런 건지.

난 아직 유나가 변함없이 너무 좋았다.

"자, 모두 고기 한 점씩 들고, 술잔도 들어주세요! 네 사람 모두 저 때문에 이번 방학을 애매하게 써버렸네요."

전시로 한 달.

학원으로 한 달.

그러다보니 여름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모두 정말 고맙습니다! 같이 짠!"

아직 아재 본능이 강하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건배를 해야 뭔가 말한 것 같고, 술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모두 배불리 먹이고, 벤치에 앉아서 느긋하게 김태민의 스케치 노트를 살펴봤다.

사진을 보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

때론 사진보다도 더 생생한 느낌.

"여자 친구랑 여행 하니까 정말 좋아. 누굴 좋아하는 게 그림을 그리는 큰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

김태민이 옆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러게."

확실히 수진 선배를 담은 스케치들은 정말 근사하고 부러웠다.

안 그래도 잘 그리던 김태민이 강력한 엔진도 얻었구나.

하지만 내 엔진도 빠지지 않지.

유나 엔진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그려야겠다.

역시 김태민은 언제나 내게 동기를 부여한다.

"주원아! 일어나! 강아지 산책 시키자. 펜션 사장님이 허락해주셨어!"

수진 선배와 유나가 펜션에서 기르는 개를 데리고 우리를 불렀다.

김태민과 나는 마주보고 웃었다.

"다음 학기도 잘 부탁해."

"나야 말로."

나는 김태민과 맥주잔을 부딪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동민은 혼자서 불판에 달라붙은 소고기를 긁어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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