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원장선생님 □
와글와글.
번개 한옥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다.
그리고 전시 5일 째.
전시장 관람객을 안내하던 내게 한성일이 어떤 여자를 데려왔다.
"저기, 주원씨? 이 분 좀······"
여자는 자기를 성북구 공무원이라고 소개했다.
"흥미로운 전시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저희는 성북소리라고 성북구 소식지를 맡고 있거든요. 여기 이 전시 소식을 실으면 어떨까 싶어서요. 혹시 인터뷰 가능하세요? 예전에 방송에 나온 분 맞으시죠?"
아, 인터뷰까지······
나는 잠시 생각한 후 수락했다.
"인터뷰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성북구 소식지라면, 저희보다 이 공간에 초점을 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희는 어차피 이번 전시가 끝나면 성북구를 떠나겠지만, 번개 한옥은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요. 저희 역시 번개 한옥을 찾아서 왔고요."
내 말을 듣고, 공무원들은 자기들끼리 잠시 의논을 했다.
"그게 맞겠네요. 번개 한옥 운영자님들과의 인터뷰도 같이 싣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인터뷰까지 했다.
"이번 전시에서 성북동의 가족을 묘사하셨는데, 성북동의 인상은 어땠나요?"
"여러 계층과 시대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 전시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자리가 옛날식 한옥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 관해서는 쇼핑몰이나 영 아트에 관한 이야기는 전부 빼고, 단순히 대학생의 전시라고 적기로 합의했다.
이제 더 이상의 불필요한 관심은 사양이었다.
그리고 영 아트에서 만났던 강우 크루 형님들까지 전시장을 찾았다.
"좋은데요? 왜 이런 전시를 하면서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조금 섭섭하네요."
"죄송합니다. 민망해서 아는 분들을 초대하기엔 좀 그랬습니다."
영화배우 유인호가 전시장을 찾았을 땐 전시의 관람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유인호는 수수하게 야구 모자를 쓰고 자기 팀과 함께 전시를 찾았다.
"아, 이게 수진씨 그림이군요. 역시 느낌이 있네요. 혹시 판매도 하나요? 수진씨 그림 사고 싶은데······ 다른 그림들도 맘에 들고요."
"아니요. 판매는 하지 않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판다는 것은 화가에게는 여러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번엔 가능한 자유롭게 전시하고 싶었고, 또 가격을 측정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모두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영화배우 유인호 뿐 아니라, 관람객들은 계속 판매 여부를 물어왔다.
"이 고양이들은 얼마죠?"
"스티커가 없는 그림은 아직 판매 전인 거죠?"
역시 문의가 제일 많은 그림은 수진 선배 그림.
수진 선배가 배우라서 플러스알파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김태민의 고양이, 그리고 유나의 상장 순서.
그림의 우열보다는 고양이가 더 귀여워서 그런 듯 했다.
다만 내 작품에 대한 판매 문의는 없었다.
하긴 내 작품은 그림도 아니고, 판매하기엔 좀 부적합했다.
그래도 마음이 서글펐다.
"제가 보기에 개념적 깊이는 주원씨 작품이 제일 뛰어난 것 같습니다. 주원씨 작품이 개념적으로 이 전시의 모든 작품을 품어주기 때문에 이 전시가 완성되고, 그래서 다른 그림들이 돋보이지 않나······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성일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지만, 별로 위로가 되진 않았다.
그리고 전시가 진행될수록 한성일과 김선영의 표정은 나날이 더 밝아졌다.
"오늘도 전시 예약이 들어왔어요! 전부 주원씨랑 여러분 덕분입니다! 당분간 적자는 면하겠어요!"
그러더니 우리의 전시가 끝날 즈음엔.
"죄송합니다. 벌써 4개월치 일정이 잡혀 있어서요. 가볍게 여는 전시라는 저희의 컨셉상 그 이상의 일정은 잡을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나중에 다시 연락주시겠어요?"
번개 한옥은 이제 전시 신청을 거절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날.
길고 길었던 한 달이 끝났다.
전시 반응은 너무 좋았지만, 이제는 다음 전시도 잡혔으니 우리는 물러나야 했다.
우린 벽에서 그림을 내려 차에 실었다.
비어가는 전시장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막연히 아쉽고,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 느낌.
"그냥 그림들 팔 걸 그랬나? 홀가분하게."
"그러게. 그림을 팔아보는 것도 꽤 공부가 됐을 텐데."
유나와 내 이야기를 듣고 수진 선배가 끼어들었다.
"난 아냐. 나는 내 그림들을 팔 자신이 없어. 이번 작품들을 보완해서 다음에는 더 제대로 만들어볼 생각이야."
오올.
수진 선배가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확실히 이번 전시로 우리 모두 성장한 느낌이었다.
그때 헐레벌떡 한성일과 김선영이 달려왔다.
"받았어요!"
"네?"
"저희가 받았어요!"
"숨을 고르고, 알아듣도록 천천히 이야기해보세요."
"아······그게. 성북예술창작터라고 성북구에서 운영하는 문화재단이 있거든요! 거기에서 우리를 지원하고 싶다고, 우리를 지원 사업에 추천하고 싶대요! 저희가 추천 받았어요!"
"여러분 덕분입니다!"
"어떻게 지원해주길래 이렇게 좋아하시죠?"
"지원도 지원이지만, 인정받은 거잖아요! 우리의 실험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거잖아요! 아무도 몰라줄 땐 진짜 서러웠거든요!"
남동민의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얼싸 안고 좋아서 방방 뛰었다.
그동안 정말 힘들고 외로웠나보다.
우리들 자신을 위해 준비한 소박한 전시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 * *
전시 덕분에 방학이 한 달간 미뤄진 셈이었다.
이제 전시도 끝났고, 나는 모처럼 느긋하게 출근해 회사 일들을 점검했다.
"유미가 제주도 내려가서 푹 쉬고 오겠데. 학교 공부가 많이 힘든 가봐. 엄마 밥과 힐링이 필요하대."
같이 사무실에서 일하던 유나가 툭 던지듯 말했다.
유미가 제주도로 내려갔다고?
그 말은?
후후후.
'유나도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어.'
참 유나도 후훗.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그냥 유미가 없으니 이주원과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렇게 까놓고 말하면 될 걸 가지고, 굳이 이렇게 빙빙 둘러 이야기한다.
벌써 사귄지 3년이 넘었건만, 아직 부끄럽나보다.
'후후후. 귀엽군.'
참고로 유현이도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서울에 산다.
하지만 다행히 유현이는 가능한 누나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최고의 처남이라 할 수 있지.'
역시 유현이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그런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소진? 누구지?'
내 전화기에는 내가 저장한 번호만 받도록 설정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에는 모르는 이름이 떴다.
누구지?
"여보세요?"
"주원아! 큰일 났어. 원장선생님이!"
원장선생님이란 말을 듣는 순간 김소진이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몇 년 전 포항 고등학생 모임을 가졌을 때 만난 적 있는 같이 미술학원을 다녔던 여학생이었다.
'입시 때 내가 비싸게 굴었다고 불평했었지. 말 걸어도 대답도 안했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누구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원장선생님이 왜?"
"교통사고를 당하셨대. 지금 입원하셨대!"
이런.
원장선생님은 미대 입시 때 내게 큰 도움을 준 분이었다.
특히 아버지나 형이 없는 내게 심적으로도 크게 의지가 되는 분이었다.
다만 선물을 사서 찾아가면 야단맞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지금은 가끔 전화나 드리는 게 전부였다.
"유나야. 나 지금 바로 포항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 * *
다른 사람들도 많이 다녀갔는지, 병실엔 음료수 상자가 여럿 보였다.
"여긴 뭐 하러 왔냐, 임마. 설마 서울에서 내려온 건 아니지?"
원장선생님은 침대에 누워서 또 한소리를 하셨다.
병실엔 사모님도 같이 계셨는데, 사모님은 학원에서 수채화를 담당하셨다.
학원장이 강사를 꼬신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사모님께 배운 적도 있고,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수업 마치고 봉고차로 학생들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음주운전 차량이랑······"
사모님이 원장선생님 대신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일단 목이랑 허리를 다치셔서 3주는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 대."
다행히 많이 다치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지금 고3 입시 특강 중 아니세요?"
"맞아."
내 질문에 사모님이 크게 한숨을 쉬며 대신 대답했다.
미술 학원과 입시생들에게 방학은 중요했다.
방학동안 학생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학원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학생들에겐 실력이 가장 많이 느는 시기이고, 또 학원에게는 1년 수입의 대부분을 거두는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3주나 입원이라니.
"그럼 학원은 어떡해요?"
"뭐, 방법이 있겠지."
원장선생님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이번에도 사모님이 대신 설명했다.
"한 달 간 학원을 맡아줄 강사를 찾고 있어. 여기저기 전화 중이긴 한데, 쉽지가 않아. 괜찮은 강사도 드물고, 또 채용 기간도 애매하니까. 그래서 정 안 되면 고 3 애들만이라도 다른 학원들에게 부탁할까 생각 중이야."
고 3 녀석들에겐 하루하루가 소중하니까.
입시반 아이들을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을 다른 학원에 보내면 문제가 커진다.
돈도 돈이지만, 올해의 입시 성과는 내년 학원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국대 서양화과잖아?'
어쩌면 이것은 은혜를 오지게 갚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원장 선생님. 제가 가르치면 어떨까요?"
못된 생각이긴 하지만 원장선생님의 사고가 방학 중에 일어나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도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넌 안 돼."
"왜요?"
"너 한국대 들어가고 입시학원 강사 한 적은 있냐?"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 돼. 직접 그리는 거랑 가르치는 건 또 달라."
"하지만 저 이주원입니다. 저 열심히 하는 건 제일 잘 아시잖아요. 한 달 정도라면 충분히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안 돼. 학생들 입장에서 생각해야지. 자기들 인생이 걸린 고 3인데, 너 같으면 초짜에게 맡기고 싶겠냐?"
그런데 단호하게 거절하는 원장선생님과 달리, 사모님은 무척 반기는 느낌이었다.
"여보, 주원이 말대로 해요. 네? 주원이 정도 실력이면 포항에서 절대 못 구하는 강사예요!"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단호했다.
평소엔 그런 부분을 존경했지만, 오늘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원장 선생님.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강사는 계속 찾아보시죠. 저보다 괜찮은 강사를 구할 때까지만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그건 괜찮죠?"
결국 원장선생님은 못 이기는 척 내 제안을 수락했다.
원장 선생님 역시 가장이니까, 가정의 수입도 중요하다.
그러니 본인도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저기 사모님."
"응?"
나는 병실 밖으로 사모님을 불러냈다.
"학원 열쇠를 저한테 주시죠."
"학원 열쇠는 왜?"
"밤에 가서 손 좀 풀어두면 아무래도 내일 가르칠 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아, 그래. 고맙다. 주원아. 정말 고마워."
그렇게 밤에 학원으로 향했다.
예전에 입시를 칠 때도 매일 밤 늦게 학원에 남아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학원에 밤늦게 남아서 그리도록 허락해 주신 것도 원장선생님이었다.
'이 학원은 내가 지킨다. 사나이 이주원, 은혜는 꼭 갚는다.'
그리고 사실 내겐 비밀무기가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꺼내 단축 번호를 꾸욱 눌렀다.
따르르릉.
"어, 주원아. 안그래도 내가 술 한 잔 사려고 했는데. 마침 네가 전화를 줬구나. 친구들이 너한테 고맙다고 난리······"
"형, 술보다 다른 부탁이 있어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남동민이었다.
"형, 요즘 주말에 뭐하세요?"
"응? 주말엔 보통 대학원 작업실에 있는데?"
"형, 한 달 정도만 주말에 아르바이트 해주실래요? 제가 교통비, 숙소, 보수까지 넉넉하게 지급하겠습니다."
남동민은 강남 대형 미술학원의 1타 전임 강사였다.
조교가 되고 그만두긴 했지만, 그 실력만큼은 오히려 원장 선생님을 아득히 넘어설 것이다.
조교로 일하니까 평일엔 무리겠지만, 주말 특강을 맡아준다면 어떨까?
내 제안을 들은 남동민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 일이라면 꼭 해야지! 걱정 말라고!"
운이 좋았다.
마침 남동민이 주말에 시간이 있었고, 또 남동민에게 미리 호의를 베풀었던 게 컸다.
그리고 새벽까지 나는 나대로 그림 연습을 했다.
'오랜만에 이 자리에 앉아보는군.'
익숙하게 [노력상점]을 호출했다.
그리고 파바박!
연필 가루를 휘날리며, 나는 상점의 힘을 빌어, 상상 못할 속도로 감을 되찾아갔다.
'오랜만에 그리니 입시 미술도 재밌군.'
다음 날.
드디어 나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난 너희들 선배 이주원이다. 솔직히 말할게. 강사는 처음이다. 하지만 너희들도 들었다시피 내가 그림은 죽도록 그렸다. 내가 최선을 다해 봐줄게. 그러니 너희들은 안심하고 그려라!"
"와아아아!"
원장선생님의 걱정과 달리 이주원은 학원의 전설이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좋았고, 난 무리 없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사모님도 무척 안도하는 눈치.
그때였다.
끼이이익.
학원문이 열리고 내 첫 번째 조력자가 들어왔다.
"안녕, 애들아~"
바로 유나였다.
"와아! 유나 언니다!"
당연히 학원엔 여학생도 많았고, 그중엔 유나를 알아보는 학생도 있었다.
특히 하이 유나를 잘 아는 학생들은 보자마자 유나를 '유나 언니'라고 불렀다.
유나는 내가 부른 보험이었다.
'나 혼자라면 못 미더울 수 있지. 하지만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이 둘이라면 어떨까? 게다가 그 학생이 쇼핑몰 여신이라면?'
"와아아아아아!"
학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언니, 제 그림 좀 봐주세요!"
"그 다음은 저요!"
여학생들은 열광적으로 유나를 호출했다.
"여기 연필로 그린 후에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주면 자연스럽게 표면 질감이 살아나지?"
"오오올!"
현역 한국대생 유나의 입시 꿀팁 강좌.
그리고 쓰윽쓰윽.
유나는 학생들의 그림을 자신있게 고쳐줬다.
6년 넘게 입시미술을 한 유나의 솜씨는 확실히 놀라웠다.
그런데 유나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학생들은 그저 유나면 충분한 게 아닐까?'
그리고 당연히 초미녀 유나의 인기는 여학생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유나 선생님! 다음은 제 그림을 봐주십시오!"
얼굴 시커먼 남학생 하나가 유나를 향해 번쩍 손을 들었다.
난 놈의 뒤로 다가가 녀석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꼬마야. 네 그림은 형이 봐 주마. 후후후."
그렇게 원장선생님의 걱정과 달리, 유나와 나는 무사히 입시반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의 불만은 0.
며칠 째 원장선생님이 학원에 출근하지 못했지만, 학원을 빠지는 학생도 없었고, 항의하는 학부모도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토요일이 되었다.
학원엔 이미 학생들이 모두 나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와 유나, 심지어 사모님까지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끼이이익.
학원 문이 열리고 드디어 그가 등장했다.
3수, 3년 동안 오직 입시 미술만 파서 한국대 서양화과에 마침내 합격!
그리고 20대에 강남 학원의 전임강사가 된 입시 미술의 달인!
전설의 남자, 바로 남동민이었다.
"클클클. 포항은 처음이라 조금 늦었네. 일찍 오려고 했었는데."
유나와 나는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저 인간이 원래 이런 이미지였나? 평소와 많이 다른 것 같아.'
'그치? 웃음소리부터 이상해······'
학교에서 남동민은 지기 싫어하는 악바리 늙은 형이었다.
하지만 미술학원에 들어서는 순간, 남동민에겐 조지 클루니같은 여유와 푸근함이 흘렀다.
그 여유가 지나쳐서 웃음소리엔 살짝 광기마저 느껴졌다.
"오늘은 첫 수업이니까, 간단하게 먼저 시범을 보이도록 할게. 시작은 역시 기본 중의 기본, 아그리파다."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말.
남동민은 어리둥절한 학생들 사이를 지나쳐 마치 자기 집인 양 익숙하게 이젤과 화판을 설치했다.
그리고 쓰윽.
남동민의 손이 한 학생의 필통 위를 스쳤다.
그러자 어느새 그의 손에는 4B연필 세 자루와 커터칼이 들려 있었다.
과연 귀신같은 손놀림!
"난 항상 그림을 그리기 전 연필 세 자루를 깎아두지. 속도를 내서 그림을 그릴 때, 잘 준비된 연필이 없으면 짜증이 나거든."
왠지 남동민이 짜증내지 않도록 모두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남동민이 칼을 연필에 가져대자, 촤르륵.
순식간에 세 자루의 연필이 자동으로 깎여버렸다.
이것이 강남 전임 강사의 경지!
우린 모두 눈을 뜨고 있었지만, 커터칼의 움직임을 놓쳐 버렸다.
꿀꺽.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시반 학생들이 일제히 침을 삼켰다.
나와 유나, 심지어 사모님도 같이 침을 삼켰다.
끼이이익.
남동민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이젤의 높이를 조절했다.
"자, 모두 잘 지켜보도록."
남동민이 자리에 앉자, 입시반 학생들이 그의 등 뒤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1, 2 학년 예비반, 중학생반, 심지어 취미반까지 자연스레 남동민의 등 뒤에 섰다.
모두들 마치 오징어배 전등에 홀린 오징어 같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클클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