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44화 (144/203)

■ 144. 전시 오픈 □

우리의 작품들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멋진데요?"

가끔 번개 한옥을 둘러보러 온 한성일과 김선영이 우리 작품들을 칭찬했다.

하지만 솔직히 두 사람의 칭찬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둘은 장소의 제공자.

그래서 그들의 칭찬은 100% 신뢰할 수 없다.

'우린 진짜 칭찬이 고파.'

우린 역시 화가 지망생.

사실 모든 예술가는 어느 정도 관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화가들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저질러 버릴까?"

내 질문에 셋의 얼굴에 갈등이 비쳤다.

셋 다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유나's 다이어리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잠깐! 나도 홍보하는 건 찬성이야. 하지만 시간이 더 필요해."

유나가 소리쳤다.

"맞아! 나도! 며칠만 더 말미를 줘!"

수진 선배도 같이 외쳤다.

그리고 둘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의 첫 컨셉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전시'라며,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전시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완벽주의자 유나는 그림을 다시 그려야 했다.

그리고 수진 선배.

'의외로 수진 선배의 작업이 이번 전시에서 제일 재미있을 지도.'

내가 알기로 수진 선배는 정말 학생다운 그림을 그렸다.

그럭저럭 귀염귀염 깨끗한 그림들.

전형적인 입시 미술을 거쳐서 무난하게 성장하는 흔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참신했다.

'지문으로 표현된 그림'

100% 지문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고, 가벼운 연필 드로잉 사이사이에 수진 선배가 연극의 지문처럼 글을 적어 넣었다.

아이디어도 재미있었고, 그림이나 글귀도 괜찮았다.

'재미있는 소녀랑 대화하는 느낌?'

자기에게 맞는 소재나 분위기를 찾을 때, 화가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된다.

그리고 이번에 수진 선배가 그랬던 것 같다.

수진 선배의 작업들이 생각보다 괜찮게 나오자, 그게 유나를 자극했다.

수진 선배 본인도 더 욕심이 났을 테고.

유나가 드로잉을 다시 시작하자, 얼떨결에 김태민도 고양이 그림들을 추가해야 했다.

"얼룩이랑 제니는 원래 이 집에서 기르던 녀석들인데, 얘들이 목청이 아주 커. 그래서 길고양이들을 불러서 자기 밥을 나눠주는 거야."

"그새 이름도 지어준 거야?"

셋이 다시 작품을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나도 작업을 보완해야 했다.

'세 사람은 집안에서 편하게 그리면 되지만······'

나는 혼자 6월의 땡볕 속에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성북동을 돌아다녀야 했다.

'왜 계속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첫 전시.

그러니 이 정도 고생은 괜찮다.

그리고 노력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얼굴이 더 까매지고 있어.'

난 원래 촌놈스러운 까만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제 겉잡을 수 없이 더 까매지고 있었다.

내 작품은 지도와 사진들로 이뤄져 있다.

번개 한옥이 지도의 중앙에 있다.

그리고 약국, 마트, 학교, 지하철역까지의 거리와 걸리는 시간을 기록했다.

나는 앞에서 말한 장소들의 사진들도 같이 배치했다.

사진들은 컬러도 있고, 흑백도 있다.

흑백 사진을 넣은 이유는 번개 한옥과 성북동의 오래된 나이를 담기 위해서.

전부 흑백 사진으로 하지 않은 이유는.

'전부 흑백으로 하면 밋밋하니까.'

그런 이유도 있고 또.

성북동은 오래 된 동네이긴 하지만 분명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동네기도 하니까.

그래서 흑백과 컬러 사진을 섞어서 썼다.

그리고 내가 지어낸 이야기도 적어 넣었다.

[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는 농협 H마트와 뉴그린 마트. 그린 마트는 이름처럼 야채가 싼 편이다. H마트는 정기적으로 소고기 할인 판매를 하는데, 그 날은 가족이 포식하는 날이다. 첫째가 포도맛 젤리를 좋아해서 세 봉지 묶음을 자주 사곤 한다. ]

[ 정기적으로 약상자를 살펴보고 감기약이나 두통약, 상처 밴드를 채워둔다. 약상자가 여전히 채워져 있으면 그 동안 가족들이 아프지 않았다는 뜻이다. 번개 한옥에서 제일 가까운 약국은 동구 약국. 오전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영업한다. ]

내가 지도에 적어 넣은 글들은 직접 탐문해서 얻은 지식인 동시에, 나와 어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물론 우리는 소고기 포식을 한 적은 없지만.'

약상자를 채워두는 것은 어머니의 습관이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국 그림은 화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유나와 수진 선배, 김태민도 각각 그리는 대상은 다르지만, 사실은 성북동의 가족을 그리며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유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수진 선배도 자기 가족 이야기를.

김태민은······

아마도 자기가 기르고 싶었던 고양이들을.

아무튼.

'그럼 관객들은 어떨까?'

성북동 가족 A에 감춰진 우리들의 이야기를 눈치 챌까?

아니면 관객들 자신의 가족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될까?

전시는 단순히 화가의 그림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화가의 실험이 완성되는 곳인 것 같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또 많은 걸 배우는 것 같았다.

'역시 도전해보기를 잘 했어.'

물론 그 도전 때문에 가장 고생하는 것은 나였지만.

* * *

전시는 소소히 손이 많이 갔다.

'세상에 간단한 전시는 절대 없구나.'

소중한 교훈을 하나 더 얻었다.

우린 번개 한옥 대문에 세워둘 배너도 만들었다.

그리고 관람객들에게 나눠줄 전시 리플릿도 디자인했다.

유나, 나, 김태민, 수진 선배.

네 명이 하이 유나 스튜디오에서 리플릿용 단체 사진도 찍었다.

사진은 정화 선배가 찍어줬다.

"자, 전시~"

"전시~"

찰칵.

"그런데 기분이 묘하다. 나만 빼고 너희들끼리 하다니."

졸업해서 일을 시작한 정화 선배는 조금 착잡한 모양.

나는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누나. 장난으로 시작한 전시인데 일이 커졌어요. 나중에 팀 수진 다 모여서 같이 전시해요."

"그래도 다행이다. 유나's 다이어리 콘텐츠 걱정했었는데. 이걸로 몇 편은 써먹을 수 있겠다."

유나's 다이어리는 하이 유나의 정체성이다.

수진, 정화, 유나는 이제 거의 모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게시판을 통해서라도 고객과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5DE 화장품 라인도 사실상 유나's 다이어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니 우린 꽤 공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거의 4년이나 지속되다 보니, 우린 모두 다이어리에 채울 내용으로 골치가 아팠다.

"안녕하세요. 유나에요. 실은 저랑 수진 언니, 오랫동안 안 보였던 멤버 태민이, 그리고 얼굴 까만 주원이까지 넷이서 이번에 간단한 전시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유나가 사진과 함께 우리의 전시 소식을 다이어리에 올렸다.

"절대 대단한 전시는 아니고요. 정신없이 보냈던 지난 3년을 친구들과 함께 돌아보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근처에 사는 분이나, 혹은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시면 가벼운 마음으로 들러주세요! 전시 제목은 '성북동 가족 A'입니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흔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우린 전시를 찾는 관람객에게 줄 선물도 포장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쇼핑몰 사은품용 그림엽서들.

그리고 5DE의 샘플 세트들.

엽서와 샘플들을 폴리백에 담아 손님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그런데 몇 개나 준비하지? 50개? 100개?"

"글쎄, 얼마나 올까?"

두근두근.

이 전시가 뭐 대단한 일이라고.

우린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전시 첫날을 맞았다.

* * *

보통 전시 첫날엔 지인들을 부르고 다과도 준비한다.

그리고 작가가 직접 전시와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패스하기로 했다.

물론 이젠 더 이상 절대 가볍게 준비한 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식 오픈까지 하면 열심히 마련한 전시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아무튼 수상한 기미는 오전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전시관을 열기 전부터 몇몇 여학생이 밖에서 기웃거렸다.

번개 한옥의 운영자인 한성일이 출근했을 때, 여학생 하나가 그를 붙잡았다.

"저기, 여기 몇 시부터 열어요?"

"열시 반부터요."

"그럼 조금만 일찍 열어주시면 안 돼요? 학교 가기 전에 잠깐 들른 건데. 보고 갔으면 좋겠는데."

이곳이 정식 갤러리라면 말도 안 되는 부탁이겠지만, 번개 한옥은 외관부터 허술해서 학생들이 그런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게, 제가 작가가 아니라서요. 작가님들이 아직 오지 않아서 불가능합니다. 죄송해요."

우린 간과하고 있었는데, 성북동 번개 한옥 주위엔 학교가 많았다.

그리고 여중, 여고, 여대까지 있었다.

그들은 하이 유나의 고객층과 정확히 일치했다.

"어? 이수진이다!"

수진 선배와 유나가 번개 한옥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 서 있던 이삼십 명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살짝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몰려든 손님들에게 에워싸여 정신없이 전시를 오픈했다.

우르르.

"하하하. 첫 전시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내가 웃으며 말을 건네자 한성일과 김선영이 고개를 저었다.

"저흰 전시를 몇 번 했지만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적은 없었어요."

곧 번개 한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 너무 재밌어요! 신기해요! 너무 색달라요! 그리고 언니, 사인해주세요!"

교복을 입은 여학생부터 근처 여대의 학생들까지.

그리고 화장품 선물을 건네받은 여학생들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다.

"여기, 성북동인데, 빨리 와! 모델들 진짜 있어. 그리고 사은품도 줘!"

전시를 관람한 학생들은 번개 한옥 마당에서 곧바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람객이 많은 건 좋지만, 이제 슬슬 살짝 불안해질 정도였다.

참고로 수진 선배는 조연으로 두 편 영화를 찍었을 뿐이었다.

원래 욕심이 없는 성격이기도 했고, 또 나름 학교에 애착도 있어서였다.

하긴 수진 선배도 힘들게 고생해서 들어온 학교일 테니까.

그래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영화를 많이 찍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예쁜 얼굴과 빠지지 않는 연기로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영화를 찍는 모습이 신중하게 작품을 고르는 것으로 비쳐서 감독들은 더 열광했다.

아무튼.

번개 한옥은 열자마자 사람들로 붐볐고, 재잘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우리는 뜨거운 반응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분이 좋기도 좋았다.

특히 남동민의 친구들은 자기 전시도 아니면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그냥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헐, 이거 진짜 대박이네요. 대박이야. 첫날부터 사람이 엄청 많네요. 이런 일은 처음이예요."

한성일이 감탄해서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첫날이라 많을 거예요."

유나가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 나한테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사은품 200개 준비했는데, 내일은 넉넉하게 500개를 준비하자."

유나도 은근 두 얼굴의 여자다.

그리고 저녁엔 남동민과 이정원, 김대성 등등도 찾아왔다.

"여기서 전시를 열어줘서 고마워.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오니까, 소개한 내가 뿌듯하네."

남동민이야 이 장소를 소개해준 사람이니까 당연히 와야 했다.

그리고 이정원.

나보다 두 학번 아래인 여학생인데 우리와 같은 학년이다.

그런데 이정원은 유난히 내게 친한 척을 했다.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보통 여후배들은 유나나 수진 선배, 아니면 김태민한테 친한 척을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얜 왜 이러지? 내가 만만한가?'

하지만 나 역시 인간.

귀여운 여자 후배가 친하게 굴면 흐뭇한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이정원은 꽃다발까지 가져왔다.

"주원 오빠, 유나 언니. 전시 너무 재미있어요! 근사해요!"

그리고 내게 따로 말했다.

"아, 나도 두 살만 더 나이 많았으면 오빠랑 같이 전시 하는 건데! 두 살 어린 게 죄예요! 나도 두 살만 더 많았으면! 너무 아까워요!"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유나의 표정을 탐색했다.

다행히 유나는 내 쪽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야, 내 후배들이 이렇게 멋진 전시를 하니까 뿌듯하네. 나도 분발해야겠어!"

김대성은 딱히 부르지 않았지만, 자기가 알아서 남동민을 따라온 것이었다.

김대성은 디자인과 복수 전공이었다.

그래서 디자인과 수업을 따라가느라, 학년이 늦어져 서양화과 수업은 우리와 같이 듣게 되었다.

아마 서양화과 졸전도 우리와 같이 하게 될 것 같았다.

"여어, 이 놈들. 애썼구나."

"어? 교수님! 여긴 웬일로?"

뜻밖의 인물, 이준성 교수도 등장했다.

"내가 말씀드렸어."

조교인 남동민이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 전시를 학교에 적극적으로 홍보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우린 학교 쪽엔 입 다물고 있었다.

교수나 동기들에게 알리기엔 부담스러웠기 때문.

하지만 남동민의 뜻하지 않은 사명감 탓에 다 소문이 나 버렸다.

"어떠냐? 전시를 해보니까? 일이 많지?"

"네, 교수님. 전시가 이렇게 복잡한 건지 몰랐습니다."

심지어 우린 정식 전시가 아니라 생각하고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

그럼에도 꽤 준비할 게 많았고, 또 준비하면서 많은 걸 배우기도 했다.

"그래. 전시가 원래 그런 거야. 전시를 많이 해야 화가도 실력이 늘지. 그래서 이런 공간이 더 많아져야 해. 아무튼 잘 했다. 자발적으로 전시를 열다니. 수고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 잔 할까?"

"저희는 내일 전시도 준비 해야 해서······"

한 잔은 이준성 교수 보내고 우리끼리 조용히 할 생각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첫날이 지나고, 유나의 예상대로 둘째 날은 사람이 더 많아졌다.

둘째 날부터 유나와 수진 선배는 전시장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도 붙잡고 싸인과 사진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진 선배를 보러 온 남자 관객도 꽤 많았다.

그래서 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둘은 이제 전시장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우린 넉넉히 사은품들을 준비했다.

날씨가 더우니까 보냉물통을 가져와 커피와 아이스티도 제공했고, 마당엔 파라솔과 의자도 설치했다.

그리고 유나's 다이어리엔 전시장이 주택가에 있는 만큼 조용히 관람해달라고 공지까지 띄웠다.

우린 이미 이 정도 관객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전시 소식은 싸이월드와 블로그, 입소문을 통해 계속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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