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40화 (140/203)

■ 140. 이별 □

5DE의 런칭이 6개월이 지나면서 회사에 현금이 가득가득 쌓이고 있었다.

회사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이제는 회사의 동력원이 2개인 셈이니까.'

하이 유나는 부릉부릉 신나게 질주했다.

그리고 나는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다.

경매도 공부했고, 빌딩 투자와 재건축도 공부했다.

'쌓이고 있는 현금을 굴려야 하니까.'

물론 미래를 어느 정도는 아니까, 부동산 보다는 조금 더 공격적인 투자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이 유나는 공동 재산.

'특히 유나가 이쪽으로는 전혀 모르니까, 나중에 유나의 부모님한테 검사를 받아야 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자산을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어차피 하이 유나는 이제 너무 커져서 새로 사옥도 필요했다.

지금은 한 건물의 3층과 4층을 통째로 쓰고, 또 5DE의 사무실로 다른 건물의 한 층을 새로 임대했다.

사무실이 떨어져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은 내 희망사항이긴 하겠지만······'

하이 유나는 내게 결혼 지참금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건물처럼 눈에 보이는 자산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소박한 욕심도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공익 복무를 시작한 지 거의 1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 말은······'

이제 유나의 1년 휴학이 끝난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남자 친구고, 또 사업 파트너라고 해도 무작정 2년이나 휴학하면서 기다려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졸업전시를 같이 하는 게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유나의 1년도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유나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했다.

그런데 유나는 뜻밖에 제 3의 선택을 했다.

* * *

"나 어학연수 가면 어떨까?"

"어학연수?"

"응. 어차피 영어는 배워야 하잖아. 1년 정도 더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오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하이 유나도 이제는 내가 당분간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고."

보통 한국대를 졸업하고, 계속 미술을 업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거의 필수적으로 유학을 갔다.

한국대 졸업 후, 해외 학위 취득.

그게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자리를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다른 나라 미술계는 어떤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나라는 학벌이 정말 중요했다.

그러니 유나 역시 전부터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리 어학을 준비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괜찮은 생각 같은데?"

한국대는 사실 다양한 교환학생 제도를 지원했다.

교환학생을 가면 저렴한 학비로 유학을 갈 수도 있고, 학점도 인정 받는다.

하지만 제출해야 할 서류도 꽤 많고, 절차도 복잡하다.

그런데 어학연수라면······

어차피 유나의 사비로 떠나는 거니까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다.

물론 당연히, 지금의 우리에게 유학비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게다가 유나 말대로 하이 유나도 이제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애초에 내 목표가 유나를 하이 유나에서 놔주는 것이었다.

'분명 괜찮은 선택이야. 유나가 어학연수를 가면 같이 졸전도 할 수 있고, 또 유나의 미래를 생각해서도······'

다만 가슴이 쓰라려왔다.

'그럼 1년 가까이 떨어져 지내야 하는군. 게다가 외국 남자들이 유나한테 엄청 들이대겠지.'

이런······

이제는 여유를 아는 멋진 회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다.

난 여전히 한심한 이주원이었다.

'1년이면 잠깐이니까.'

웃으면서 보내줘야지.

유나를 위해 옳은 선택이니까.

"응. 좋은 생각 같아. 미리 봐 둔 학교는 있어?"

"몇 군데 찾아보긴 했는데, 결정은 못했어. 같이 알아봐 줄 거지?"

"당연하지."

유나는 항상 알아서 뚝딱뚝딱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든든한 모습이 유나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학연수조차 알아서 뚝딱뚝딱 잘 준비하니까 야속하게 느껴졌다.

마침 뉴욕의 한 예술대학에 예술 전공을 위한 부설 어학원을 운영하는 곳이 있었다.

유나의 연수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 * *

"오빠가 나를 따로 불러내다니. 설마?"

유미였다.

계획만으로는 내 미래의 처제.

난 유나 몰래 유미를 불러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 설마가 맞을 거야."

유나의 어학연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2학기 과정.

거의 아홉 달이 넘는, 1년에 가까운 코스였다.

그래서 유나가 떠나기 전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었다.

그 조언을 들으려고 유미를 불러낸 것이었다.

"선물이요? 당연히 커플링이죠. 왜 아직 커플링 안했어요? 수진 언니랑 태민 오빠는 벌써 했던데."

응? 커플링?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물론 나도 커플링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재의 영혼이라 나도 그 대상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커플링 같은 것은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해왔다.

'결혼반지도 불편한데 커플링은 왜 해? 애들은 참 별걸 다 하는구나.'

하지만 나도 애였던 것이다.

"유나도 커플링 하고 싶대? 그럼 나한테 진작 말하지.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

"그야 언니는 공식적으로는 오빠가 자기를 쫓아다녀서 사귀는 거라고 입장을 정해놨으니까요. 그러니까 언니가 자기 입으로 직접 커플링 하자고 말 못하죠."

아, 유나에게 그런 공식 입장이 있었구나.

오늘 참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는 날이었다.

"그럼 커플링은 어떻게 골라야 하지? 난 보석 같은 거 못 고르는데."

"안심해요, 오빠. 커플링은 그냥 언니랑 같이 가서 골라도 돼요. 손가락 사이즈도 재야 하니까. 오빠가 커플링 하자고 말만 꺼내면, 언니가 진짜 좋아할 거예요."

그렇군, 역시 유미를 불러서 조언을 들은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처제와 단둘이 만난 김에 커피도 한 잔 하면서 이것저것 안부도 물었다.

"그런데 넌 왜 남자 친구 안 사귀는 거야? 학교에 괜찮은 놈 없어?"

"없어요. 내가 하이 유나에서 알바하면서, 주원 오빠랑 태민 오빠 같은 사람만 봤더니 눈이 너무 높아졌나 봐요."

아...

가슴속 깊이 뿌듯함이 밀려왔다.

내가 어느새 김태민과 동급이 되었구나.

하긴 역시 남자는 능력이지.

이 나이에 벌써 탄탄한 회사를 두 개나 운영하고 있으니.

뭐, 내 얼굴이 많이 나쁜 것도 아니고.

후후후.

마치 김태민과 내가 콤비로 K대 수의대 남학생들을 모두 꺾은 기분이었다.

'물론 김태민과 수의대 남학생들은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반사적으로 주머니의 지갑에 손이 갔다.

그리고 들어있는 현금 대부분을 꺼내 유미에게 쥐어줬다.

역시 처제에겐 용돈이지.

"밤늦게 공부하면 꼭 택시 타고 다녀. 그리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돈 아끼지 말고 사먹고."

"네, 오빠. 고마워요."

유미는 거절도 안하고 냉큼 용돈을 챙겼다.

설마 용돈 받으려고 나한테 아첨을 한 건가?

뭐, 그래도 알고도 속아주는 회귀자 형부의 넉넉함.

원래 귀여운 처제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남자의 로망이다.

"그럼 주원 오빠. 용돈도 받은 김에 언니의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

"응? 뭔데?"

"예전에 언니가 제주도에 와서는 가방에서 악세사리를 한 움큼 꺼내는 거예요. 엄마랑 내 눈에는 별로 예뻐 보이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언니가 그걸 엄청 자랑하면서 혼자 뿌듯해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엄마랑 나는 눈치 챘어요. 언니가 좋아하는 남학생이 생겼구나."

이런.

그것은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1학년 때 유나에게 한 개 3천원씩 하는 반지와 귀걸이를 열 몇 개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선물을 고르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전부 바구니에 담은 것이었다.

"그때 언니 기분 좋으라고 나랑 엄마가 막 부러운 척 연기했거든요. 그리고 귀걸이 한 개씩만 달라고 졸랐어요. 그런데 언니가 안 된다면서 끝까지 버티는 거예요. 그때 진짜 웃겼었는데."

그랬었군.

그런 일이 있었군.

그때 내게 불현 듯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역시 이주원!

나는 아이디어의 남자였다.

"그럼 이건 어떨까?"

"뭐가요?"

"유나랑 나는 동대문에서 친해지기 시작했잖아. 그러니까 그걸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동대문에서 산 반지를 커플링으로 주는 거야. 비록 싸구려 반지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돈으로 따질 수 없겠지. 우리의 시작을 잊지 말자는 맹세니까."

그때 뭔가가 번쩍.

유미의 주먹이 내 옆구리에 꽂혔다.

으윽.

아무리 친해도 미래의 형부를 때리다니.

"어머! 나도 모르게 그만 주먹이 날아갔어요. 미안해요, 오빠. 너무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맞을 만한 생각인 것 같아요."

"그 정도야?"

"네. 한 번만 더 그 생각을 입 밖에 꺼내면 다음엔 명치를 때릴 거예요."

"그, 그래."

"내가 검색해서 괜찮은 가게들 문자로 보내줄 테니까, 거기에 언니 데려가서 직접 고르게 해요."

"그, 그럴게."

그렇게 유미의 도움으로 무사히 커플링도 맞췄다.

유미의 말대로 유나는 정말 좋아했다.

"이 가게는 어떻게 안 거야? 여기 반지들 진짜 다 예쁘다. 오올, 이주원. 많이 늘었어."

늘기는 뭐가 늘어.

전부 용돈의 힘이지.

유미 처제, 고마워.

그렇게 커플링도 맞추고, 유나는 척척 알아서 연수 준비를 해나갔다.

그 동안 몇 번 유나가 내 집으로 찾아오긴 했었다.

그래도 1년 가까이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같이 있어도 아쉬웠다.

더 힘든 것은 유나를 기분 좋게 보내줘야 한다는 것.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하게 굴었다.

"잘 다녀와."

"응, 그럼 다녀올게."

그렇게 유나는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 * *

[ 안녕하세요! 유나입니다. 저는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곳은······ ]

유나는 쇼핑몰 모델은 하지 않았지만, 유나's 다이어리에 꾸준히 자기 일상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뉴욕 여행기처럼.

고객들의 반응도 꽤 좋았다.

[ 어머? 이제 미국도 진출하는 건가요? ]

[ 세계로 뻗어가는 하이 유나!]

유나의 뉴욕 일기는 재미도 있고 볼 것도 많았다.

그리고 읽다보면 유나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나도 좋았다.

유나와는 거의 매일 전화 통화를 했다.

그런데 하루는······

"저기 그런데 한동안은 전화는 못할 것 같아."

"왜?"

"여기 선생님이 당분간 한국어를 끊고 지내래. 그게 과제야. 한국어 끊고 지내기. 한국 친구들끼리도 어울리지 말래."

"진짜?"

"응, 당분간 이메일만 보낼게. 이메일도 가능하면 영어로 쓸게. 괜찮지?"

나야 별 수 있나.

선생이 그렇다는데.

결국 유나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유나가 없는 것 빼고는 모든 게 괜찮았다.

"사장님, 중국어 홈페이지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최대한 하이 유나원래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중국인들이 원하는 느낌과 배색을 강조했습니다."

하이 유나를 찾는 중국 고객이 늘면서 중국어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나라마다 정서와 문화가 다르듯, 홈페이지도 다른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은 미국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매하게 되면 뭔가 어색함을 느낀다.

그래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아예 새로 홈페이지를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명동과 대학로에 각각 하나씩 하이 유나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개설했다.

매장의 매출보다는 하이 유나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옷보다는 5DE의 화장품을 전면에 배치했다.

"일부러 두 매장의 분위기를 다르게 꾸며봤습니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은 명동은 고급스런 분위기로. 그리고 하이 유나의 주 고객인 대학생들과 젊은 직장이 많이 찾는 대학로 매장은 모던하고 캐주얼한 느낌으로 꾸몄습니다."

두 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성공하면 매장을 더 늘릴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경매로 연남동의 낡은 3층 건물을 사들였다.

본격적인 부동산 투자 전에 연습 삼아 인수한 것이었다.

이제 이주원은 연습 삼아 건물을 사들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저기 이 사장님. 그런데 이 건물을 좀 그렇지 않나요? 연식도 오래되었고, 주택가라서 상가임대도 힘들텐데요. 사장님이 이 동네 분이라면 모르겠는데, 굳이 이 건물을 인수할 필요가 있으신가요?"

같이 건물을 둘러본 부동산 사장이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알지.

나중에 경의선 숲길이 조성되면, 이곳은 연트럴파크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그럼 이 건물의 값이 풀쩍 날아오를 것이다.

게다가 경매로 지금 시세보다도 싸게 샀으니까.

'연습 삼아 산 건물이니까, 소박하게 5억만 벌면 만족해야지.'

그렇게 나도 건물주의 대열에 합류했다.

물론 건물의 절반은 유나의 몫.

유나는 하이 유나로 벌어들인 자산의 관리를 내게 위임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쁘지 않구나.'

유나가 여기서 방방 뛰어야 하는데.

[ 이 건물이 정말 우리 거야? 대단하다! 우리가 건물주라니, 진짜 신기해. ]

그렇게 막 외치면서.

유나가 없으면 건물도, 경매대박도 아무 의미가 없구나.

이주원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다시 고독한 중년의 아재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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