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만세!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약속대로 김태민의 면회를 자주 갔다.
수진 선배와 유나를 데리고.
김태민은 내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면회를 가는 시간이 나도 꽤 즐거웠다.
"잘 지냈어?"
"나야 항상 잘 지내지."
환하게 웃는 김태민.
'이 녀석은 머리가 짧아도 잘생겼구나.'
햇볕에 적당히 그을려서 더 건강해보였다.
예전의 김태민은 키도 크고, 어깨도 넓으면서도 뭔가 여리여리한 맛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김태민은 듬직한 남자 이미지.
물론 외모만 그렇다.
김태민은 우리가 찾아가면 정말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 말고 다른 필요한 건 없어? 책 같은 건? 아니면 크로키북이랑 4B연필은?"
"책은 아버지랑 수진 누나가 알아서 챙겨주고 있어. 크로키북이나 화구는 필요 없어. 오히려 그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내니까 홀가분하고 행복한 느낌이야."
"그래?"
"응, 완전 잊고 지내니까 더 그림 그리고 싶고, 또 이것저것 생각들도 많이 떠올라. 너도 잠시 그림 그리지 말고 지내 봐. 느낌이 색다르니까."
큰일 날 소리.
김태민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혼자 진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럼 안 된다.
하루라도 그림 연습을 소홀히 하면 손이 굳을 것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부지런히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김태민과 수진 선배는 태민이가 상병을 달 때 까지도 변함 없이 사귀고 있었다.
'하긴 이 커플은 오래 갈 거야. 어쩌면 정말 결혼까지 갈지도 모르겠다.'
둘 다 너무 착한 사람들이라 상대한테 상처를 주는 짓은 절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상대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기가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수진 선배가 김태민을 기다릴 것이란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다음은 형원 선배.
영 아트에서 활약하고, 수린 문학상까지 수상하며 형원 선배는 정말 유명해졌다.
책도 꽤 팔렸고, 여러 방송에 패널로도 출연했다.
형원 선배는 톡톡 튀는 발언을 잘 해서 방송국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형원 선배가 날 찾아왔다.
"나는 방송 체질이 아닌 것 같아."
"네? 완전 방송 체질인 줄 알고 있었는데요."
"아니야, 절대. 방송은 너무 답답해. 해서는 안 되는 말도 많고. 여러 사람 눈치도 봐야 하고. 이제 방송 다 접고 글이나 쓰려고."
형원 선배는 그렇게 몇 달 만에 방송을 모두 다 접었다.
그리고 작가의 생활로 돌아갔다.
"이제까지는 공모전 수상을 목표로 하고, 기한을 정해두고 글을 썼거든. 이젠 목표도 없고, 기한도 없이, 순전히 나를 위해 편하게 쓰고 싶어."
"와, 형. 진짜 부러워요. 세상 예술가 중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을 것 같아요."
"말 해 놓고 보니까 좀 그러네. 내가 멋있네."
그리고 형원 선배는 최근에는 신작 소식이 없다.
글을 쓰고는 있는 것 같긴 한데, 따로 물어보지도 않았다.
순전히 자기를 위해 쓰겠다고 했으니까.
가끔 한철이와 셋이서 만나 소주를 마시고, 예전처럼 시시한 농담이나 하며 낄낄대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요즘 조금씩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형원 선배가 예전에 들려주던 여자들 사귀는 방법이나, 여러 경험담들······ 사실은 전부 지어낸 게 아닐까?'
형원 선배의 소설 재능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형원 선배도 약간 여자를 책으로 배운 느낌이야.'
예전에는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유나를 사귀고, 살아있는 여자와 같이 지내다 보니, 형원 선배의 흥미로운 경험담들이 조금씩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굳이 진실을 확인하지 않는 법.
그리고 순진하게 전부 믿고, 형원 선배를 존경하는 한철이를 위해 가만히 입 다물기로 했다.
한철이는 순조롭게 학년이 올라갔다.
빠른 졸업이 목표니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한철이는 정말 한국대 학생 같아.'
물론 몸매가 터프한 것만 빼고.
한철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대 학생들처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정화 선배.
5DE의 성공으로 매출이 급격히 늘고, 회사의 자산과 직원들도 급격히 불어났다.
그래서 난 정화 선배와 조용히 면담을 가졌다.
"누나, 할 말이 있어요."
"뭔데?"
"누나가 회사 일을 더 많이 맡아줬으면 좋겠어요. 회계부터, 세금이랑. 그리고 다른 일들도 전부. 누나는 머리도 좋고, 성격도 꼼꼼하고. 또 하이 유나 설립 때부터 함께 했잖아요. 누나만한 적임자가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유나의 역할은 옷 선정이나 코디, 그리고 모델로 한정하고 싶었다.
그마저도 요즘은 스타일리스트와 전문 모델을 고용해 유나의 비중이 많이 줄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
공익 복무가 끝나면 미대에 집중하고 싶었다.
물론 미대를 졸업하면 또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그림을 열심히 배우는 것은 회귀하고 나서, 나의 첫 목표였다.
그래서 회사를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외부에서도 경력직 직원들을 뽑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에서 사람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겠지.'
그리고 나는 정화 선배에게 인상된 연봉과 근무 조건을 제시했다.
정화 선배는 이제 3학년.
미대는 4학년이 되면 졸전으로 바빠진다.
그러니 지금부터 느긋하게 경영 수업을 시작하면 졸업할 때 즈음해서는 꽤 잘하게 되지 않을까?
정화 선배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해볼게!"
정화 선배가 원래 하이 유나에 강하게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제시한 후한 조건을 확인하고 정화 선배는 곧바로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나는 하이 유나 사업을 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익 복무 이후까지 준비했다.
정화 선배가 회사 경영에 나서 준다면 나와 유나는 학교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 * *
그리고 유나.
나는 일만 열심히 한 게 아니었다.
다른 것도 열심히 했다.
유미라는 감시자가 있어서 결코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수의대 공부가 꽤 힘든 모양이었다.
유미는 종종 시험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수의대 교수님들 만세!'
유미가 공부 때문에 집에 못 들어오는 날에는 유나가 밤에 나의 집으로 놀러왔다.
김태민이 군대로 떠나고 혼자 남은 나의 작은 빌라.
'김태민 만세! 대한민국 군대 만세!'
나는 원래 방에 요와 이불을 깔고 잤다.
하지만 가끔 찾아오는 유나를 위해 고급 침대를 주문했다.
그리고 가볍고 뽀송뽀송한 고급 이불과 베개 세트도 주문했다.
'많이 버니까. 이 정도 사치는 누려도 되잖아?"
아마 회귀하고 나서, 나를 위해 돈을 쓴 건 이게 거의 처음일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절반은 유나를 위해서다.
아무튼.
유나가 밤에 놀러오면 우리는 평범한 대학생 커플처럼 지냈다.
장을 봐서 작은 요리를 만들고.
식탁에 앉아 마주보며 이야기하면서 술도 한 잔 했다.
평소엔 사납고, 어색한 것은 못 견디는 유나였지만.
술이 한 잔 들어가고, 또 부엌 조명을 야시시 흐릿하게 켜 놓으면, 유나도 조금 순해졌다.
타닥타닥타닥.
향초의 나무 심지가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술에 취해 유나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그럼 유나도 꽤 적극적이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귀 만세!'
나는 경험이 없는 것처럼 다시 서툴러졌다.
그리고 새로 경험하는 것처럼 너무 행복해졌다.
쌔근쌔근.
늦은 밤.
도시가 잠든 시간.
조용히 들려오는 유나의 숨소리.
나는 노력상점의 [압축잠]이 있으니까 새벽까지 잠들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발견을 했다!
노력 상점의 [전신 스트레칭]을 사용하면 유나에게 팔베개를 해주고도 팔이 저리지 않았다.
'노력상점 만세!'
그렇게 유나를 내 팔 위에 눕히고. 혼자 밤늦게 깨어 있곤 했다.
'유나가 뱉어낸 공기가 지금 내 방에 떠다니고 있겠지.'
유나의 숨소리를 들으며, 이것저것 떠오르는 상념에 젖어 있는 시간이 최근 내가 찾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유미가 없을 때 유나가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게 당연해질 무렵.
하루는 아침에 유나에게 물어봤다.
"유나야, 나랑 자는 거 어때?"
무심코 던진 질문에 유나는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떻긴 뭐가 어때? 네가 자꾸 매달리니까 나는 그냥 어쩔 수 없이 ······"
"아, 오해하게 말해서 미안."
나는 이제 더 이상 한심한 이주원이 아니다.
이제는 멋과 여유를 아는 중년의 회귀자.
그래서 느긋하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해하게 말해서 미안. 그러니까 그것을 지칭하는 잠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잠 말이야. 물론 그것도 어땠는지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내가 궁금한 건, 나랑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자고, 같이 일어나고, 같은 방에서 지내는 생활이 너한테는 어떤지 갑자기 궁금해서."
나는 원래 남과 같이 지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외가 생기기 시작했다.
첫 예외는 한철이와 형원 선배였다.
'그땐 돈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참고 지내자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지낼만했다.
지낼만 한 걸 넘어서 나중에는, 나랑 같이 방을 써 준 사실에 형원 선배와 한철이에게 감사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예외는 김태민.
'아마도 태민이가 워낙 순해서 그렇겠지.'
그리고 김태민에게는 내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도 있다.
나는 김태민의 그림 앞에서는 겸손해지니까.
아무튼.
김태민과 같이 지내는 것도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은 유현이.
유현이한테는 내가 객관적일 수가 없다.
'유현이한테는 무조건 잘 보여야겠다고 결심했었지.'
그래서 유현이와 같이 지내는 것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한유현도 예외였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예외가 참 많이 생겼구나.'
내 인생은 예외가 생길수록 더 행복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예술이란 인생을 예외로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또 한 번 아무튼.
그래서 나는 문득 유나의 생각이 궁금했다.
나랑 같이 지내고, 같이 잠을 자는 생활이 유나에게는 어떤지 알고 싶었다.
"정말 그게 궁금한 거야? 순수하게?"
"응."
유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도 꽤 좋은 것 같아."
"정말?"
"응. 아침에 눈 뜨면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면서 네가 아침을 만들고 있잖아."
나는 보통 유나보다 일찍 일어난다.
물론 노력상점 덕분이다.
그리고 내가 밤에 유나를 피곤하게 했으니까.
'후후. 좀 많이 피곤하게 굴었지.'
스무 한 살의 육체는 꽤 쓸 만했다.
'또 한 번 회귀 만세!'
그래서 먼저 조용히 일어나 아침을 만들곤 했다.
특별히 유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유나가 푹 자는 게 좋았다.
그리고 유나를 기다리면서 아침을 요리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무튼.
유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아침 만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는 것도 좋아. 그리고 화장실에 네 칫솔 옆에 내 칫솔이 있는 것도 좋고. 밤에 이 집에 들어오면 네가 미리 향초 켜두는 것도 좋아. 가끔은 우리 집보다 이곳이 더 진짜 내 집처럼 여겨져."
그렇군.
유나가 이 집을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유미 다음 시험은 언젠데?"
"글쎄. 무슨 교수가 또 쪽지시험 친다고 짜증내던데. 유미 다이어리 몰래 찾아보고 날짜 알아서 문자 줄게."
크으.
장하다, 이주원.
우리 집에서 제발 자고 가라고, 유나에게 매달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유나가 자발적으로 이렇게 내게 협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나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가끔은 아침 만들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늦잠 잤으면 좋겠어."
"그래? 다음엔 꼭 그럴게."
그 정도쯤이야.
그게 뭐 그리 어려운 부탁이라고.
중년 회귀자의 행복 게이지가 정수리까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