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유도탄 □
"우리 동네 보여줄게."
"그래."
"할머니, 저 주원이 데리고 나갔다 올게요."
"오긴 또 뭘 와. 친구 데리고 나가서 놀아."
그렇게 유나를 따라 나섰다.
안 그래도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좀 움직이고 싶었다.
나도 내가 자라던 곳을 유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유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유나가 살던 동네가 궁금했다.
그렇게 유나를 따라 식당을 나섰다.
우리는 한가롭게 걸으며, 유나의 동네를 구경했다.
너무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곳.
옛날식 낮은 돌담이 시멘트 도로 옆에 같이 서 있는 풍경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아직 겨울인데도 군데군데 녹색이 보였다.
문득 이준성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이준성 교수는 유나의 그림을 보고 다짜고짜 시골에서 올라왔냐고 물었었다.
[ 시골에서 자연을 보고 자란 놈들이 색감이 좋아. ]
나야, 이준성 교수처럼 통계를 낼 수 있을 만큼 학생들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자연이야말로 최고의 미술학원인 것 같다.
"저기가 내가 다닌 초등학교야."
유나는 멀리 적당히 낡은 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리고 우린 자연스럽게 학교 쪽으로 걸었다.
초등학교가 가까워질수록 길도 넓어지고, 문방구도 하나씩 나타났다.
아직 방학인데도 학교와 문방구 앞에는 아이들이 몇 명 보였다.
문방구 앞에는 작은 오락기도 몇 대 있었고, 뽑기 게임의 상품도 걸려 있고, 손바닥만한 해적판 만화책 책꽂이도 있었다.
"나 옛날에 저 뽑기 진짜 해보고 싶었는데. 엄마가 못된 아이들만 하는 거라고 해서 한 번도 못해봤어."
유나는 문방구 앞 좌판에 놓인 뽑기 게임판을 가리켰다.
그런데 나도 뽑기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다.
100원이나 50원에 한 장씩 뽑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어렸을 때 나는 주머니에 동전 하나 없었다.
"그럼 지금 해 보자."
1등 축구공
2등 에그고치
3등 프라모델
4등 핫팩
5등 남자 아이돌 그룹 사진
나는 뽑기의 상품을 읽어봤다.
내 목표는 에그고치.
아마도 다마고치의 한국판 짝퉁이겠지.
먼저 유나가 도전.
"으악. 6등이다."
6등 상품은 왕사탕.
그리고 내 차례.
나는 4등 핫팩이 걸렸다.
'운이 좋군.'
에그고치는 놓쳤지만, 유나보다 등수는 높았다.
'오늘 내 운이 유나보다 좋단 말이군. 그렇다면? 오늘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인가.'
우린 상품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왕사탕을 깨뜨려서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설탕과 화학 향신료의 냄새.
또 작은 핫팩을 흔들어서 유나의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 유나의 손을 잡고 내 야상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는 틈만 나면 손을 잡으려고 해."
"나도 손이 시려워서."
유나는 불평은 했지만, 딱히 손을 빼지는 않았다.
오늘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
김태민도 성공했는데, 나도 분발해야지.
그리고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 없는 조용한 운동장.
바람이 불면 삐걱이는 그네들.
운동화에 밟히는 사각사각 모래들.
내 주머니 안에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분위기가 참 좋구나.
제주도 전체가 나의 사랑을 응원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미술 선생님이잖아. 그런데 엄마는 별로 나한테 그림을 열심히 가르치지 않았거든."
유나가 소곤소곤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어렸을 때부터 그렸다며."
"응.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젊은 남자 선생님이 학교로 왔거든. 그래서 우리 담임 선생님이 되었어."
"남자?"
"응. 그런데 그 선생님이 거의 학교가 처음이었나 봐. 그래서 굉장히 의욕이 넘쳤거든."
"그래?"
"응. 그리고 미술 전공이었나 봐. 그래서 수업 마치고도 아이들을 모아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그림도 가르쳐주고 그랬거든."
"좋은 선생님이었네."
좋은 선생님이긴 한데 왜 슬슬 약이 오를까.
설마 유나의 첫사랑인가?
"응. 굉장히 좋은 선생님이었어. 그런데 그 선생님이 내 그림을 많이 칭찬해주셨어. 어린애들은 원래 그렇잖아. 칭찬 받으면 더 잘하고 싶잖아. 그래서 진짜 열심히 그렸어. 아마 그때 처음 생각했을 거야.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나를 특별하게 해주진 않을까?"
"어쩌면 어머니가 그림을 열심히 가르치지 않으신 이유도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네가 너무 어릴 때부터 자기 진로를 정해버리지 않길 바라셔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선생님 좋아했던 거야?"
내 뜬금없는 질문에 유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땐 선생님 칭찬 받으려고 혼자 그림 연구하고. 또 어른 되면 유명한 화가 돼서 선생님한테 시집가야지, 하고 혼자서 그런 상상했었는데."
빠지직.
안 돼.
냉정해지자.
이것은 유나의 도발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잘 지내셔? 요즘도 연락하고 지내?"
"몰라. 내가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인가, 우리 학교 여선생님이랑 결혼했는데. 아마 지금은 배 나온 아저씨가 되었겠지."
다행이군.
아니, 이걸 내가 왜 안심하는 걸까.
내 생각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는지 유나는 굉장히 재미있어 했다.
"그런데 너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말하면 그 선생님 생각났었어. 얼굴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뭐든 열심히 하려고 애쓰고, 살짝 어리버리하고, 얼굴도 까맣고. 내가 약간 그런 타입을 좋아하나보다."
그랬군.
이제야 미스터리가 풀렸다.
유나는 누가 봐도 나한테는 과분하게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 우리가 어떻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혼자 생각하곤 했었다.
'유나는 원래 나같은 타입을 좋아하는군.'
잠깐?
좋아한다고?
"카페에서 일할 땐 순진해서 귀여웠는데, 요즘은 진짜 능구렁이가 다 되었어."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일단 나는 순진하지가 않다.
순진해 보일진 몰라도, 한 번의 생을 살다가 온 회귀자였다.
물론 순진하다는 말이 멍청하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라면, 내가 좀 순진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귀엽다고?
그렇군.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내가 아무리 둔해도, 지금이 고백의 기회라는 건 캐치할 수 있었다.
"저기, 유나야."
"응?"
나는 내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유나의 손을 꼭 쥐었다.
'간단하게 요점만. 눈을 보고.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나는 김태민의 고백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유나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이게 쉽지가 않구나.'
또 한 번 김태민의 능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간단하게 고백하는 게 정말 어렵구나.
이걸 태연하게 해낸 김태민이 정말 대단하구나.
'역시 늘 나보다 한 발 앞서가는 녀석.'
괜히 현역 입대가 아니다.
"유나야, 저기, 그, 그게······"
"이주원."
"응?"
"심호흡하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 봐."
그래, 그래야 겠다.
난 유나가 시키는 대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의 용기를 긁어모아 말했다.
"유나야. 나랑 사귀자."
"그게 다야?"
아?
이렇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나?
사람마다 많이 다르구나.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세상이 빙빙 돌아갔다.
또 한 번 거절당하는 건가?
안 된다.
더 이상 물러설 순 없다.
그리고 생각나는 말들을 곧바로 외쳤다.
"유나야. 지금 널 좋아하는 마음을 평생 잘 지킬게."
다행히 유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또 평생이래. 겁나서 사귀겠냐."
다행히 말만 그렇게 하고, 싫어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우리 사귀는 거 맞지? 이제 사귀는 거다."
"아, 몰라."
날 놀릴 때는 언제고, 유나도 이제는 자기도 창피한지 내 시선을 피했다.
그래봤자, 어차피 유나의 손은 내가 내 주머니 안에서 꼭 쥐고 있었다.
"우리 이제 사귀는 거야."
"이제 다들 일어났겠다. 펜션에 돌아가자."
"너 이제 내 여자 친구다."
"식당 일, 저녁에는 안 도와도 될 거야. 우리 저녁에는 뭐 하지?"
유나는 자꾸 말을 돌렸지만, 어쨌든 이제 내 여자 친구다.
* * *
"뭐? 피씨방에 가자고? 제주도까지 와서?"
놀라서 묻는 내게 김태민이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어, 내 로망이 여자 친구 생기면 같이 게임하는 거였거든."
펜션에 도착하자 김태민이 피씨방에 가자고 했다.
그림 천재의 소원은 생각보다 소박하구나.
하긴.
남자들끼리 피씨방에서 게임하고 있으면, 여자 친구를 데려와 커플석에 앉은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특히 스타크래프트를 잘하는 여자는 무척 섹시했다.
나는 김태민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피씨방에 가고 싶었다.
유나랑 같이 게임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래, 피씨방 가자. 재미있겠다. 나도 유현이 게임하는 거 보면 정말 궁금했었거든."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유나도 피씨방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 태민이 이제 곧 군대도 가는데 이 정도 소원은 들어줘야지.
"좋아. 그럼 가자. 대신 커플 2:2 대결을 해서, 지는 쪽이 피씨방 요금을 내기로 하자."
나의 제안에 김태민이 차갑게 웃었다.
김태민이 좀 순둥순둥해서 그렇지 승부를 피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후후후. 우리 수진 누나는 1학년 때 피씨방에 빠져서 학점을 다 날려먹고, 우리랑 같이 다시 1학년 수업을 들었지. 게임이라면 절대 우리가 지지 않아."
"흥, 우리 유나야 말로, 한 번 내기를 시작하면, 이길 때까지 계속 물고 늘어지는 지독한 성격이지. 그 쪽이야말로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걸?"
그렇게 우린 각자의 여자 친구를 자랑하며 나머지 친구들도 데리고 피씨방으로 갔다.
우리의 첫 종목은 카트라이더.
피씨방을 안 와본 유나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게임이었다.
2:2 커플전도 하고.
한철, 형원, 정화 선배도 넣고 개인전도 했다.
"비켜라, 이주원. 부스터 추월이다. 바나나 껍질도 선물로 남겨주마."
게임을 처음 하는 유나는 신나서 그렇게 외쳐댔다.
그런데 유나는 너무 웃겼다.
내가 유도탄을 발사하면 카트를 조종하지 않고, 자기가 몸을 움직여 피했다.
물론 내 유도탄은 유나의 카트에 명중했다.
"으아악!"
그럼 유나는 처절한 비명까지 질렀다.
그런데 수진 선배랑, 정화 선배, 그리고 형원 선배도 마찬 가지.
셋 다 너무 몰입해서, 피씨방 의자를 들썩이며 카트를 운전했다.
그래봤자 1등은 수십 년 운전경력의 회귀자, 이주원이 차지했다.
그렇게 밤늦게 게임을 하고, 제주도 시내에 가서 흑돼지 삼겹살에 소주도 한 잔 했다.
"자, 이제 다 익었다."
고기 굽기는 자상한 남자친구인 내 몫.
고기가 다 익으면 다 같이 소주잔을 부딪혔다.
역시 제주도 돼지고기가 쫀득쫀득 맛있었다.
물론 피씨방 요금도, 흑돼지도 전부 내가 계산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우린 한라산에 갔다.
겨울 한라산은 아침부터 등반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지만, 문제는 전혀 없었다.
한라산이 등반이 어려운 산도 아니었고, 또 우린 전부 어려서 몸도 쌩쌩했다.
"아······"
한라산을 오르며 매순간 감탄했다.
설악산은 자주 가봤는데, 한라산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약간 외국 같은 느낌?'
하나의 산에 다양한 풍경이 있었다.
눈이 있는 곳도 있고, 아예 다른 계절처럼 느껴지는 곳도 있었다.
살짝 신비로울 정도였다.
그리고 산중턱의 산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줄이지?"
알고 봤더니 컵라면 물 받는 줄이었다.
제주도에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한라산에서 컵라면을?
하지만 모두 먹길래 우리도 같이 먹어봤다.
'아니, 이럴 수가.'
분명 늘 먹던 그 컵라면인데 갑자기 천상의 맛이 났다.
'이게 내가 알던 그 컵라면이 맞나?'
컵라면 국물을 들이키자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계속 한라산을 올랐다.
기분 좋게 땀이 흐르고, 추위는 이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라산은 너무 아름다웠고,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이제 유나와 사귀기로 한 이틀 차.
나는 눈을 감고, 기도 비슷한 것을 했다.
'한라산님. 유나랑 저랑 오래오래 계속 좋아하게 해주세요. 아이도 많이 낳게 해주시고요. 그리고 저, 나이 먹어도 배 안 나오게 해주세요.'
유나는 배 나온 아저씨를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유나에게는 계속 순진한 시골청년으로 남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