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33화 (133/203)

■ 133. 고백의 달인 □

정말 오랜만에 맞는 긴 휴가.

길어봤자 겨우 며칠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 생, 지난 생 모두 다 더해도 이렇게 맘 편히 떠난 여행은 처음인 것 같다.

물론 나는 하루 6시간이라는 노력 상점의 제약이 있다.

살짝 불편하긴 하지만, 얻는 이익이 너무 많으니까.

내가 불평할 입장이 아니다.

새벽 일찍 쇼핑몰로 출근해 하루의 업무를 검토하고, 몇 개의 업무 지시를 메모했다.

참고로 원 디자인은 거의 김승희씨가 업무를 총괄했다.

방송 전부터도 그랬고, 이제 나는 며칠에 한 번씩 회사 일을 보고 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하이 유나 역시 마찬가지.

경력직 직원들을 다수 채용해 일이 많이 수월해졌다.

그래서 며칠 휴가를 떠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참고로 불평하는 직원도 전혀 없었다.

"푹 쉬고 오세요. 대표님은 진짜 좀 쉬셔야 해요."

얼마나 진심이 담긴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직원들은 모두 나의 휴가를 응원했다.

그리고 기차에서 읽을 몇 권의 책도 챙겼다.

꼼꼼한 독서 역시 노력한 시간으로 포함되기 때문에 하루 6시간 채우기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어쩌면 휴가도 연습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군.'

앞으로도 나는 여행이나 휴가를 종종 맞게 될 것이다.

그러니 휴가 속에 6시간의 노력을 채우는 연습도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친구들과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드디어 도착한 부산.

'부산이라······ 정말 오랜만이다.'

전생에서는 포항과 서울만 반복했던 것 같다.

부산에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부산은 늘 잠시 스쳐가는 도시.

오늘도 스쳐 지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이렇게 편한 기분으로 부산에 온 것은 분명 처음이었다.

'지난 생의 나는 이룬 것도 없으면서 뭘 그렇게 바쁘고 힘들게 살았는지.'

제주행 배는 저녁 7시에 출발한다.

그래서 친구들과 짧은 부산 관광을 했다.

시장도 구경하고, 여기 저기 거리도 걸어보고.

부산 사람들은 무척 활기차고 시끄러웠다.

그런데 사람뿐만 아니라 도시의 풍경도 그런 것 같았다.

'어지러운 것 같으면서도 참 예쁘구나. 어쩌면 도시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

지난 생은 정신없이 살았으니까.

이번 생은 예술가의 눈으로 실컷 세상을 관찰하고 싶다.

'두 번째 삶이니까.'

남들과 다른 눈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곳들을 찾아내는 것이 내 의무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유명하다는 돼지국밥도 먹었다.

"어떻게 먹으면 되지?"

돼지국밥의 살짝 터프한 비주얼에 수진, 정화 선배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미대생들은 뭐든 잘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용접도 해야 하고, 톱질도 해야 하고, 진흙 덩어리도 날라야 하고, 더럽고 끈적이는 물감과 페인트도 만질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은 미대생들이 곱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니 내장고기, 머리고기, 순대 등등 음식도 뭐든지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도전!"

수진, 정화 선배는 용감하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어? 맛있다!"

그리고 씩씩하게 열심히 퍼먹었다.

과연 둘은 대한민국 미대생의 자격이 있었다.

그렇게 짧은 부산 관광을 마치고 우린 드디어 배에 올랐다.

정말 커다란 배.

호화로운 유람선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시끌벅적 시장 같은 배.

우리들은 모두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배 위를 구경했다.

다행히 배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 위주라서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으, 드디어 출발한다."

친구들이 어린 아이들처럼 신나서 방방 뛰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

지금 이 순간은 아재든, 회귀자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배 안의 다른 나이 많은 어른들도 다 같이 들뜬 얼굴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배가 부산을 출발했다.

'아, 이래서 유나가 배를 타고 오라고 했구나.'

부산을 출발하고 몇 시간 후.

육지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까맣게 겨울밤이 되었다.

주위에 빛이라고는 배에서 나오는 빛과 별빛 정도.

마치 우주를 떠도는 우주선을 탄 기분이었다.

겨울바람이 꽤 추운데도 여러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밤바다를 지켜봤다.

그러다 가끔 멀리서 오징어 배 불빛이 보이면 무척 반가웠다.

'따지고 보면 전혀 남남인데.'

불빛과 사람의 흔적이 마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오징어잡이 배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전기등을 켜 둔 모습이 꼭 사막을 가로지르는 상인들의 행렬 같았다.

물론 사막의 상인들을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때였다.

"주원아."

"네?"

정화 선배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쉿."

그리고 나보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사실 살짝 짐작이 갔다.

정화 선배가 이렇게 나를 부른다면 아마 수진 선배의 일일 것이다.

정화 선배를 따라간 곳은 배의 카페.

카페의 작은 탁자에 김태민과 수진 선배가 마주 보고앉아서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추운 곳에서 밤바다를 보고 있었는데, 둘은 따뜻한 곳에서 오붓하게 앉아있었구나.'

어쨌든 정화 선배와 나는 몰래 다가가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배의 카페는 사람들이 분주히 다녀서 어수선했다.

또 김태민과 수진 선배는 서로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몰래 접근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정화 선배는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으로.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된 막내 동생을 응원하는 심정으로.

솔직히 너무 재미있었다.

"누나, 이번에 누나 그리게 해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방송인데. 오히려 예쁘게 그려줘서 내가 고맙지."

"아니에요. 내 그림보다 누나가 훨씬 더 예뻐요."

어쭈, 요 녀석 봐라?

김태민도 역시 할 때는 하는 남자.

솜씨가 제법이었다.

그리고 또 김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저, 실은 할 말이 있어요."

"응? 뭔데?"

뭐지?

나와 정화 선배도 같이 긴장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사실 누나 좋아해요. 누나, 저랑 사귀어주세요."

이런.

이렇게 다짜고짜 돌직구를 날려버리다니.

'안 돼, 태민아. 그럼 안 돼."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내가 좀 가르쳐둘 걸 그랬나.'

원래의 이주원은 고백이 능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유나에게 수십 번 거절당하며 수없이 연습했다.

'어이, 그렇게 다짜고짜 고백을 꽂아버리면 안 되지. 자고로 좋은 고백에는 기승전결이 있는 법.'

먼저 예쁘다는 칭찬이나 엉뚱한 유머로 분위기를 가볍게 띄워야 한다.

'그래야 고백할 때 어색하지도 않고, 거절당했을 때 도망칠 구석도 생긴다고.'

바람직한 프로 고백러라면 차일 때를 대비해 탈출할 길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백의 시작.

그리고 고백의 보상도 있어야 한다.

나랑 사귀어주었을 때, 상대가 얻게 되는 이점과 혜택, 생활의 변화를 나열해서 기대감을 가득 안겨줘야 한다.

'후후후. 고백도 역시 일종의 거래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고백의 마무리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멘트가 필요하다.

왜냐면 고백의 순간은 오래오래 기억될 소중한 추억이 될 테니까.

두 사람의 행복했던 기억과 연관이 있다면 더욱 좋고,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의 명대사를 인용하는 것도 괜찮다.

'후후, 이 소중한 지식들을 결코 쉽게 얻은 게 아니지.'

유나에게 수없이 거절당하며, 또 놀림 당했던 지난 시절들이 떠올라 잠시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은 나는 이제 거의 고백의 마스터가 되어, 한 명의 남자로 당당히 서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이, 김태민군.

'저랑 사귀어주세요.' 라니······

그럼 안 된다고.

그런 멋없는 고백으로 절대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수진 선배는 착해서 분명 기회를 더 줄 거야.'

그러니 태민아.

오늘의 아픔은 훌훌 털어버리고, 나에게 고백 특강을 받도록 하자.

내가 고백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주마.

하나씩 배워나가면 너도 나처럼 멋지게 고백할 수 있을 거야.

'요즘은 내가 그냥 입만 벙긋하면 유나가 자동으로 감동하지.'

그리고 수진 선배의 대답이 들렸다.

상처받을 김태민을 생각하니 엿듣는 나까지 괴로웠다.

"그래, 사귀자."

"군대 가기 전에 고백해서 미안해요."

"아니야. 좋아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응?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어?

둘이 사귄다고?

거기다 고백해서 고맙다고?

배 엔진이 시끄러워서 내 귀가 이상해진 것일까?

아니야, 아니야.

이럴 순 없다.

저런 기본도 안 된 고백으로······

이 고백은 내가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잠시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곧 고통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고백이 원래 이렇게 간단한 거였나?'

길고 긴 지난 시간, 내 모든 반성과 분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대체 여긴 어디인가?

난 그동안 무얼 했던 것일까?

고백의 기승전결과 내가 외우고 계획했던 수많은 멘트들.

그 모든 것들이 전부 허무하게 파도에 쓸려 사라졌다.

'그냥 눈을 바라보면서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거였구나.'

고개를 돌려 정화 선배를 바라봤다.

정화 선배는 마치 자기가 고백을 받은 것처럼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친구의 성공을 같이 기뻐하고 싶었지만, 후회의 눈물도 같이 흘렀다.

그렇게 유나가 제안한 제주행 배 여행.

결국 김태민 좋은 일만 시키고 아침에 우린 제주도에 도착했다.

* * *

"어서 와요. 멀리서 와서 피곤하겠다."

유나와 유나의 할머니가 우릴 맞아줬다.

유나를 다시 보니 반갑기도 했지만, 속이 쓰리기도 했다.

'유나야, 저기 두 사람 사귄대.'

그렇게 마음속으로 일러바쳤다.

유나의 할머니는 흰머리를 감추지 않으신, 무척 친절한 분이셨다.

점잖게 나이든 우아한 얼굴 안에서 장난스런 유나의 얼굴이 살짝 보이는 것 같아 재밌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가족을 만나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전생의 나는 왜 이런 기분을 몰랐을까.

떨리면서도 신기하고, 또 반갑고.

유나가 우리 엄마를 만났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할머니의 곱게 나이 드신 모습을 보고 전생의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했다.

내 기억 속 어머니는 이렇게 보기 좋도록 늙지 못하셨다.

'이번 생은 다를 거야.'

어머니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아껴주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건강하게 나이들 것이다.

"배 타고 오느라 많이 피곤하겠다. 어서 숙소에 가서 좀 쉬도록 해요."

우린 며칠 간 유나 집 근처의 펜션에서 머물기로 했다.

원래 펜션의 체크인은 오후부터지만, 이곳은 유나의 아버지랑 아는 곳.

그래서 아침부터 우릴 받아주기로 했다.

참고로 유나의 부모님은 지금 제주도에 안계셨다.

"엄마가 선생님이라서 쉴 수 있는 날이 정해져 있거든. 그래서 친구들 못 만나고 여행 간다고 무척 아쉬워하셨어."

우린 모두 숙소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첫날은 자유 여행을 하기로 했다.

우린 배에서 침대칸을 빌렸지만, 밤새 노느라 제대로 잠을 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모두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나는 예외.

노력 상점 덕분에 쌩쌩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기회를 허무하게 날릴 순 없었다.

고백은 김태민에게 졌지만, 역전의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먼저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신 할머니의 마음부터 접수해보실까?'

나는 유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갔다.

원래는 유나의 아버지와 직원 세 분이 같이 운영하는 식당.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가 여행을 가시고 유나의 할머니가 대신 나와 계셨다.

'할머니가 아무리 건강하셔도 오랜만에 일하기엔 분명 힘드시겠지.'

그리고 점심 장사는 꽤 바쁜 모양인지, 유나도 도울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나도 도와야지.

"할머니, 친구의 일은 곧 저의 일. 저도 오늘 같이 식당일을 돕겠습니다."

"돕긴 뭘 도와. 피곤할 텐데. 제주도 구경이나 해요."

"아닙니다. 밤새 배에 있었더니, 몸을 좀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유나가 잘 압니다. 저, 서빙 진짜 잘합니다!"

나는 씩씩하게 외쳤다.

그리고 곧바로 식당 점심 장사에 뛰어들었다.

알바라면 이번 생 카페 경험도 있고, 지난 생에도 질리도록 많이 했다.

그래서 나의 솜씨는 완벽했다.

"어서 오십쇼!"

일단 홀 알바의 기본은 씩씩한 인사.

그리고 동선관리.

'이렇게 오래 된 식당이라면······'

직원들 간의 역할 분담이 분명하고, 또 효율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식탁 치우기나 신발 정리, 쓰레기 버리기 등 단순한 노동에 치중해야 한다.

이렇게 회귀자의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종횡무진 점심시간의 식당을 누비고 다녔다.

크지 않은 식당이라더니, 제법 바쁜 곳이었다.

아무튼.

"아이고, 주원이 학생은 어쩜 이렇게 기운도 좋고, 인사도 잘하고."

"진짜 손이 야무지네. 일을 많이 해 본 솜씨네."

식당의 직원 아주머니들은 갑자기 등장한 능숙한 알바생에 열렬한 환호를 보내셨다.

걱정하던 할머니도 곧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주원 학생 덕분에 점심 장사는 힘든 지도 모르고 지나갔네요. 내가 미안해서 어떡해. 대신 점심은 내가 맛있게 차려줄게요."

하하하.

가족끼리 미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정식 가족은 아니지만, 마음은 이미 가족입니다.

그리고 오후 세시의 직원 점심시간.

유나의 할머니는 정말 약속대로, 고기찜부터 게장까지 온갖 음식을 한상 가득 차려주셨다.

"어이구, 주원 학생 덕분에 우리까지 호강하네."

"이 사람 좀 보게. 내가 언제 먹는 거 소홀히 해준 적 있었나?"

와구와구.

나는 씩씩하게 공깃밥을 세 그릇이나 맛있게 비웠고, 할머니는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유나의 할머니와 식당 아주머니들의 마음까지 확실히 사로잡았다.

"야, 물도 좀 마시면서 먹어. 아니다, 사이다 줄까?"

유나도 옆에서 흐뭇한 얼굴로 나를 챙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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