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32화 (132/203)

■ 132. 아파트 □

다시 두 달 전, 영 아트가 끝난 직후.

영 아트가 끝나도 나는 쉴 수 없다.

원래 대표는 그런 자리인 것 같다.

물론 다른 회사 대표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대표는 직원들보다 더 일해야 한다고.

'대표는 직원들보다 돈도 더 많이 받으니까.'

어차피 이번 생은 많이 고생하고 노력하기로 결심한 생이다.

그래서 고생을 피할 생각은 없다.

일단 팀 수진을 데리고 여행하려면 신상 업뎃을 끝마쳐야 한다.

'유나 등등이 휴식이 끝나면 곧바로 촬영할 수 있도록 내가 준비를 해야겠군.'

새로 직원도 채용해서 늘어난 주문을 빈틈없이 방어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제일 중요한 것.

영 아트를 찍느라 소홀했던 큰 거래처들을 돌면서 인사를 하고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이건 대표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먼저 은성사.

"그래, 우승까지 했단 말이군. 축하하네."

은성사 사장님은 입으론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눈은 뭔가를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역시 은성사 사장님은 푸근한 동네 아저씨 얼굴 뒤에 사업가가 숨어있었다.

은성사는 주로 중국 의류와 소품을 수입한다.

그리고 중국산 수입품들은 주문 수량에 따라 가격이 크게 달라진다.

어쩌면 팀 수진의 우승으로, 팀 수진 외에 가장 큰 수혜를 누리는 사람이 바로 은성사 사장님일 수도 있었다.

"결승 방송은 두 달 후에 나간단 말이지? 그렇다면 적어도 자네들은 두 달 후까지 계속 상승세겠군. 내가 또 중국에 다녀와야겠어. 아예, 유나랑 정화를 불러서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해서 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국 도매 시장은 진짜 거대하다.

동대문도 거대한 도매시장이지만, 중국의 도매시장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사실, 무엇이든 상상만 하면 거의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도라에몽 주머니를 열면 중국 도매시장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거대한 시장에서 좋은 물건을 잘 골라내는 것이 은성사 사장님의 능력이자, 동대문에 몇 채의 건물을 갖게 해 준 원동력일 것이다.

"어쩌면 말이야. 지금 자네는 인생에서 몇 번 오지 않을 기회를 잡은 걸 지도 몰라. 이럴 때 일수록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해. 알지?"

"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작은 부주의에도 복은 자네한테 실망하고 떠날 수도 있어. 그리고 항상 친구하고 가족한테도 신경 쓰고. 가족이랑 친구를 놓치면 돈을 벌 필요가 없는 거니까."

"네. 신경 쓰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이런 조언을 했다면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성사 사장님은 아무것도 없던 나와 유나를 알아봐 준 사람이다.

그리고 잔소리를 할 자격이 있는 동대문의 거상이었다.

게다가 날 정말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걸 알기 때문에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역시 언제나 진심은 힘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다음은 영화사 마당의 김제우 대표를 찾아갔다.

영화는 여러 분야의 일이 얽혀있다.

의상, 건축, 엔터, 금융 기타 등등등.

홈페이지가 필요한 거의 세상의 모든 분야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김제우 감독은 성격상 사람들을 엮기 좋아하는 마당발이다.

원 디자인의 VVIP 고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희가 우승까지 해버렸습니다."

"허허, 이것 참. 이사장이 감각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하군. 축하하네. 앞으로 더 바빠지는 거 아닌가? 얼굴은 좀 보고 지내자고."

"알겠습니다. 이제는 벌려 놓은 일과 학교에만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대표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하하하하. 자네 진짜 말투만 보면 오십 살 먹은 능구렁이 영업 상무 같아. 하긴 뱃속에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으니까 그 나이에 회사도 두 개나 가지고, 방송도 나가고 그랬겠지."

김제우 감독은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 툭 던졌다.

"그나저나, 그럼 수진 씨는 몸값이 더 오르겠군."

수진 선배 이름이 나오자 나도 궁금하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제가 들은 오디션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수진 선배를 많이 챙겨주셨다고 들었는데."

수진 선배는 별 준비 없이 오디션을 봤는데 잘 통과한 것 같다고 좋아했었다.

원래 영화에 큰 욕심이 없었는데, 오디션을 잘 치르더니, 요즘은 수진 선배도 의욕이 생긴 것 같았다.

"아니야, 우리가 챙기긴 무슨."

그리고 김제우 감독은 오디션에 대해 설명해줬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영화 감독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어. 감독들은 뭐든지 다 알고, 뭐든지 머릿속에 전부 들어있다고 믿지. 절대 그렇지 않아. 감독들도 각본을 받아들면 때론 막막하다네. 이 장면은 어떻게 풀어갈지, 이 배역은 어떻게 움직일지 보이지 않을 때도 많아. 그런데 수진씨 같은 사람이 한 자리를 맡아주면 말이야, 그 자리는 선명해지는 거야. 막연했던 배역이 색깔을 가지고 살아나는 거지."

알 듯 모를 듯 했다.

확실히 그림에서도 그림을 빛나게 해주는 모델이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어차피 분업이야. 결국 캐스팅되면 감독보다 배우가 배역에 더 밀접해지지. 배우가 자기 역할을 완전히 맡아서 해결해 줘야 한다네. 그런데 수진씨 같은 타입은 감독이나 각본가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쁘고 특별하니까, 뭐라 해야 하나. 나도 잘 모르겠군. 아무튼 영화를 풍성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수진 선배는 영화감독들을 매료시키는 어떤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아마 이번에 배감독 말고도 수진씨한테는 계속 러브콜이 들어올 거야. 계속 기회가 주어지겠지. 그 기회를 얼마나 잘 살리느냐는 본인한테 달렸겠지. 그런데 수진씨 연기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하긴, 감독이라고 해서 오디션 잠깐 보고 어떻게 전부 알겠나. 감독이 미리 다 알면 세상에 망하는 배역이 어디 있겠나."

"그렇군요."

영화사에서 보는 수진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긴 실제로도 수진 선배는 매력이 넘친다.

그 매력을 영화에 잘 담을 수 있다면 확실히 대단할 것이다.

수진 선배는 좋은 선배이자 친구였다.

그러니 수진 선배가 어떤 선택을 하든 힘 닿는데 까지 도울 생각이다.

수진 선배나 김태민처럼 착한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 * *

그렇게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포항에 내려갔다.

포항에 내려가서 곧바로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내가 찾아간 곳은 부동산.

어머니의 원룸을 계약했던 곳과 최근 들어 다시 연락하고 있었다.

부동산 아주머니는 나를 미리 약속한 집으로 데려갔다.

"좋군요."

"맞아요. 정말 좋은 집이에요. 이 아파트가 신축이라 믿음도 가고, 초등학교 근처라 집값도 안 떨어질 거예요. 나이든 분이 살기에 층도 적당하고."

나는 어머니가 이사할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었다.

인터넷 덕분인지, 아니면 포항이 지방이라 그런지.

시세가 빤히 나와 있어서, 아파트를 알아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영 아트에서 얻은 상금만 내 몫이 대략 3천.'

거기에 내가 모아둔 돈을 보태면 포항에 방 세 개짜리 아파트 정도는 구매할 수 있었다.

속전속결.

나는 몇 군데를 둘러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계약금까지 치러버렸다.

그렇게 집이 생겼다.

물론 어머니가 살 집이니까, 어머니가 고르는 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귀자의 안목도 믿을 만 하니까.'

실은 꼭 한 번 이렇게 어머니에게 깜짝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계약한 집으로 향했다.

"엄마, 드릴 게 있어요."

"또 뭘?"

"저기 보이는 저 집이요."

아직 사람이 사는 집이지만, 저녁에 한 번 더 오겠다고 미리 말해 뒀다.

그래서 어머니와 난 아파트 안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감격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셨고, 나는 물론 집주인까지도 같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집을 계약했다고?"

"네. 이제 어머니 집이예요."

어머니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셨다.

"내가 텔레비전에 나가서 상금 많이 받았잖아요. 꼭 엄마를 위해 쓰고 싶었어요."

영 아트가 없었더라도 집은 사드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더욱 거절하지 못 하시겠지.

처음 그림을 판 돈으로 여행을 보내드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곧바로 다시 일을 구하는 바람에 미뤄졌다.

그러니 여행대신 집을 사드려야지.

"그게, 내가 이런 거 워낙 잘 모르는데······이 집을 네 명의로 해 둬. 네가 번 돈이잖아. 그리고 나중에 어차피 네가 물려받아야 하는데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주원이 네 명의로 해."

"아녜요. 엄마 명의로 계약할 거예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면 돼요. 내가 집 물려받는 건 아주, 아주 나중 일이니까 지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머니는 아마 평생 자기 명의의 집을 가져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결혼하고 계속 남편 명의로 된 집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혼하고 나랑 같이 셋방을 전전했고.

지난 생엔 그렇게 돌아가실 때까지 집이 없으셨다.

평생 일했지만, 어머니의 저축은 모두 나를 위해 당연한 일처럼 내어놓으셨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어머니 이름으로 집을 사는데 두 번의 생이 걸렸구나. 이번 생에라도 집을 사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어머니를 데리고 집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이사하려면 몇 달 남았으니까, 어떤 가구를 살지, 어떻게 꾸밀지 천천히 고민해보세요. 그런 게 재미있잖아요."

"왜 나한테 돈을 써. 너 학교도 졸업해야 하고, 장가도 가야하고, 돈을 아껴야지."

"그러니까요. 내가 장가가려면 엄마가 먼저 집이 있어야죠."

어머니, 제가 손주들을 여럿 데려 오려면 더 넓은 집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유나가 너무 과하게 예쁘기 때문에 방 세 개짜리 집으로는 모자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이 몇 개가 있든, 방마다 손주들을 가득가득 채우겠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좋아하셨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니까, 나까지 설레는 기분이었다.

영 아트 상금에, 내 저축까지.

회귀하고 나서 가장 큰 돈을 쓴 날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 * *

"잘 다녀왔어?"

"응."

"어머니 많이 좋아하시지?"

유나는 내가 어머니 집을 사드린 것을 알고 있었다.

"응. 진짜 좋아하셨어."

"잘했어. 대견하다."

유나는 마치 잘 키운 아들을 보는 듯 한 눈빛으로 날 칭찬했다.

기분이 꽤 괜찮았다.

"그런데 실은 나도 부탁할게 있어."

유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내 몫의 상금이랑, 네가 맡아둔 내 하이 유나 수익금이랑 합치면 나도 서울에서 넓은 집 구할 수 있을까?"

유나의 부탁이란 다름 아닌 새 자취방 구하기였다.

다음 달이면 유나의 자취방 계약 기간이 끝난다.

어차피 유나의 자취방은 지금도 너무 비좁았다.

1인용 자취방인데, 수진 선배가 일주일에 3~4일은 머물렀다.

게다가 유미가 같이 지낼 때도 있고.

유미는 공부를 잘 한다.

이번에 한국대와 K대.

두 대학의 수의대에 시험을 쳤다.

유미의 실력이라면 분명 둘 중 한 곳은 합격할 것이다.

혹시나 합격하지 않더라도 워낙 사이좋은 자매들이라 자주 놀러올게 분명했다.

그러니 유미와 같이 지내려면 넓은 집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유나와 수진 선배 둘 다 쇼핑몰에서 일하다보니 옷이 장난 아니게 많았다.

그러니 더 일찍 유나의 집을 신경써주지 못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자주 놀러가진 못했지만, 유나의 자취방은 내 목표이자 마음의 고향이었다.

'내 영혼이 휴식을 취하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장소.'

나를 위해서라도 가깝고 안전한 곳에 아늑하고 편안한 최고의 집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영 아트 상금에 네 수익까지 더 하면 충분히 넓은 집을 전세로 구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가구도 괜찮은 걸로 넣고."

"같이 알아봐 줄 거지?"

"물론이지."

그리고 팀 수진의 여행 장소는 제주도로 정해졌다.

병역 미필 남학생이 셋이나 있고, 또 경비를 모두 내가 부담한다.

그리고 하이 유나를 오래 비울 수도 없다.

그러니 해외는 무리.

제주도 정도면 적당했다.

유나가 제주도를 잘 알기도 하고.

"우리 엄마 아빠가 곧 여행을 가셔서 챙겨주진 못하겠지만, 할머니가 반겨줄 거예요. 그리고 내가 가이드도 잘 해줄 수 있고. 무엇보다 겨울 제주도가 정말 예뻐요. 이제 별로 춥지도 않겠다."

팀 수진 멤버들은 모두 제주도에 대찬성했다.

사실 장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끼리 뭉치면 어디든 다 의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 전문가니까 내가 제안 하나 할게요."

응?

우리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유나를 바라봤다.

"비행기 말고 배를 타고 오세요. 부산에서 저녁에 출발하면 아침에 제주도에 도착해요. 하루 동안 밤바다를 가로질러서 오는데 정말 예쁘고 신비로워요."

우린 모두 유나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보다 며칠 일찍, 유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출발했다.

겨우 며칠이지만 늘 같이 지내던 유나 형제들이 없으니 꽤 허전했다.

'곧 바다를 건너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더 설레고, 내가 낭만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행이 이렇게 기다려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금은 겨울.

하지만 메말랐던 아재의 영혼에는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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