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31화 (131/203)

■ 131. 나쁜 놈 □

최성진은 한참동안 자신의 패배가 믿어지지 않았다.

"아쉽긴 하지만, 수고 많았어요."

윤상희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런 바보 같은······'

윤상희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최성진은 마음속으로 그런 윤상희를 비웃었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예술은 치열한 세계다.

이기고 살아남는 사람만이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겨우 그런 사소한 자존심을 내세워 어린 상대에게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다니.

'자기가 멍청하게 굴어놓고는 예술가라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겠지. 한심한 사람들.'

그래도 최성진은 미소를 띠고 윤상희와 악수를 나눴다.

겨우 한 번의 패배일 뿐이었다.

예술가의 삶은 기니까,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두루두루 모두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윤상희씨, 고생 많았습니다.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영 아트.

이 바보 같은 쇼에서 우승은 못했지만, 지난 몇 주간 텔레비전에 나왔고, 심사위원들은 그를 찬양했다.

우승은 놓쳤지만 최성진 역시 충분히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니 좋은 이미지로 마무리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최성진은 팀 수진 쪽으로 걸어가 김태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김태민의 그림이 제일 강렬했고, 또 그는 김용철 작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김태민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김태민을 향해 손을 내민 것이었다.

"수고 많았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작품들이었습니다. 함께 출연하게 되어서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몇 달 간 한국에서 지낼 계획입니다. 친한 형처럼 생각하고 서로 연락하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같이 전시도 하고, 또 미국에 올 일이 있다면 제가 도울 수도 있고요."

"아, 그런데 저는 이제 곧 군대에 가야 해서요."

서로 연락하고 지내잔 말에, 김태민은 솔직히 말했을 뿐이었다.

사실 김태민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최성진에게는.

빠지직.

'굳이 내가 당신과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을까요?'

김태민의 대답이 이렇게 들렸다.

'그래, 아들이고 아버지고 전부 비싸게 군다 이거지. 오늘은 내가 졌지만, 두고 보자. 나중에 훨씬 높은 곳에 올라서 너희를 내려봐주마.'

그렇게 최성진은 쓴웃음을 삼키며 돌아섰다.

* * *

시끌벅적 녹화가 끝나고, 우린 스튜디오에서 심사위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여러 PD와 작가들, 방송 스태프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미우나 고우나 지난 몇 달간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기 차례를 한참 기다려 김수희 작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내가 팀 수진 찾아낸 거 알죠? 영 아트 찍으면서 내가 제일 잘한 일이, 바로 팀 수진을 섭외한 거예요."

김수희 작가가 그렇게 생색 아닌 생색을 냈다.

어쩌면 정말 김수희 작가 덕분일 지도 모른다.

그 동안 정도 많이 들었으니 우린 김수희 작가와도 뜨겁게 악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수희 작가가 형원 선배에게 말했다.

"이제 영 아트 끝났으니까, 개인적으로 볼 수 있겠네요. 전에 말했던 소설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요."

형원 선배는 전에 김수희 작가에게 자기 공모전 소설을 읽어달라고 작업을 걸었었다.

하지만 그때는 영 아트 촬영 중이라서 김수희 작가에게 거절당했다.

"아, 그 소설요? 벌써 공모전 제출해 버렸는데, 으악!"

형원 선배가 대답하는 도중에 유나, 수진, 정화 선배 셋이 동시에 형원 선배의 등을 꼬집었다.

셋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형원 선배는 정신을 차렸다.

"그 소설은 공모전에 내버렸지만, 어차피 소설은 계속 써야 하니까요. 다른 이야기도 많아요."

"그래요? 궁금하네요."

"그럼 제가 맥주를 살 테니까, 맥주 한 잔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죠."

"나는 맥주 배불러서 싫은데."

"그럼 소주요."

술이면 되지.

맥주든 소주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렇게 형원 선배는 김수희 작가와 약속을 잡았다.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하는 젊은 예술가의 표상이었다.

그리고도 끝이 아니었다.

상금과 상품 수령, 향후 매니지먼트 등등으로 서명할 게 많았다.

평소라면 피곤했겠지만, 오늘이라면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우승자는 TJ 대준문화재단을 통해 전시와 레지던시 등의 후원을 받는다.

레지던시란 일종의 작업실을 말한다.

젊은 작가에겐 작업실도 꽤 중요한 요소라서 레지던시 제공은 아주 큰 혜택이다.

특히 대준재단의 레지던시라면 입주하고 있는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도 가능하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젊은 작가들이 꿈꾸는 기회였다.

그 외에도 유학 지원과 3억원의 상금도 있는데 유학의 경우엔 우린 아직 학생이라 일정의 조율이 필요했다.

하지만 뭐, 일정이야 얼마든지 조정하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공짜니까.

이번 영 아트 코리아는 어찌 됐든 혜택 하나는 정말 최고였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우리 여섯 명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형, 누나들, 그리고 태민이와 유나 모두 고생 많았어요. 일단 오늘은 각자 집에 돌아가서 며칠 푹 쉬죠. 그리고 쉬면서 이거 하나만 고민해주세요."

응?

내 말에 모두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태민이랑 저도 입대고, 형원이 형도 졸업이잖아요. 그래서 다 같이 여행이라도 갔으면 싶어서요. 가고 싶은 곳 생각 좀 해주세요. 물론 경비는 제가 다 낼게요."

"와아아아! 우리 사장님 최고!"

"역시 주원이!"

나의 선언에 모두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화끈하게 쏴야지.

어차피 모두들 덕분에 내가 제일 많이 벌었으니까.

우린 한참 후에 컬처온 방송국을 겨우 빠져 나왔다.

그리고 각자 자기집 방향으로 향하는 택시를 붙잡았다.

"그럼, 전화해. 태민아."

"형, 고생 많았어요."

"정화 선배 잘 들어가요."

그렇게 모두 기분 좋게 헤어졌다.

마지막에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유나였다.

나와 유나는 집이 같은 방향이다.

그러니 우린 같은 택시를 탈 테고.

난 아마 차 안에서 유나의 손을 만지작거리겠지.

유현이와 유미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너무 오래 붙잡아둘 순 없을 것이다.

택시에서 내리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 근처를 잠깐 산책해야지.

그리고 유미 간식을 사서 들려 보내야겠다.

그런 사소한 계획만으로 벌써 행복해졌다.

그렇게 우리의 길고 길었던 영 아트의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 * *

며칠 후.

TJ 미디어 실장이자, 컬처온 영 아트의 책임 기획자인 이미연.

그녀는 자신의 집 거실에 앉아, 이기호 CP가 제출한 보고서와 영상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비싼 와인도 한 잔 했다.

'모든 게 완벽해.'

특히 영 아트의 마지막 두 번의 경연.

김태민의 눈부신 활약으로 팀 수진은 이름난 예술가들을 상대로 대역전을 펼쳤다.

그리고 심사위원으로 섭외한 여러 미술계 권위자들은 김태민을 향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원래 천재 예술가 뒤에는 나처럼 앞날을 내다보는 후원자가 있는 법이지.'

고흐에겐 동생 테오가 있었고, 피카소에게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있었다.

이제 또 다른 후원자인 이미연이 미술사에 등장할 것이다.

김태민처럼 순박한 그림 천재에겐 자기처럼 강한 행동력을 지닌 지원자가 더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곧바로 군대에 가야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방송과 미디어를 통해 더욱 띄워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영 아트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김태민은 어리니까,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때였다.

똑똑똑.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등장한 사람은 김태민이었다.

"누나, 300만원 가져왔어요. 주원이랑 유나 그림 제가 살 게요."

"돈은 어떻게 구한 거야? 벌써 상금 지급 된 거야?"

"아뇨, 이건 제가 쇼핑몰에서 알바해서 모은 돈이에요."

이미연은 피식 웃었다.

귀여운 녀석.

자기의 재능은 돈으로 따질 수도 없는 것인데, 고작 300만원을 벌겠다고 아르바이트를 하다니.

"미안, 태민아. 생각이 바뀌었어."

"네?"

"네 친구들 그림 말이야. 그땐 몰랐는데, 계속 봤더니 생각보다 꽤 좋은 것 같아. 내가 성급했어. 네 친구들 그림 함부로 말한 거 사과할게."

"정말요?"

"응. 진심이야. 그래서 내가 계속 가지고 있어 보려고."

김태민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졌다.

"누나, 탁월한 선택이에요. 주원이랑 유나, 둘 다 멋진 친구들이예요. 앞으로 계속 좋은 그림을 그릴 거고, 더 유명해질 거예요."

이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원과 한유나의 그림이 다시 보인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영 아트의 호평덕분에 기분이 좋아서 이미연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관대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누나. 내 친구들 그림 잘 보관해주세요. 믿고 맡길게요."

"그래."

"아, 맞다. 누나."

"응?"

"아버지랑 어머니가 누나하고 밥 먹고 싶대요. 그래서 언제 시간 되는 지 물어보랬어요. 누나가 아버지한테 전화해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아저씨가?"

"네."

훗.

이미연은 또 한 번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용철 아저씨도 내게 감사 인사를 하려는군. 역시, 용철 아저씨도 이제 나의 필요성을 인정하시는 거야.'

이미연은 세상 친절한 천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태민아. 내가 아저씨한테 전화 드릴게. 너도 영 아트 출연하느라,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누나. 나도 재미있었어요."

후후후.

김용철 작가는 물론, 당사자인 김태민조차 이렇게 만족하다니.

'이보다 더 완벽한 해피 엔딩이 있을까?'

이미연은 영 아트를 기획하고 밀어붙인 보람을 느꼈다.

* * *

그리고 두 달 후.

영 아트의 마지막 회가 컬처온을 통해 방송되었다.

특히 김태민의 그림, '화장하는 수진누나'가 압권이었다.

김태민의 그림 앞에서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눈을 떼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이미연은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돌려봤다.

'후후후, 태민이 녀석.'

이렇게 대견할 수가.

영 아트 초반에는 김태민이 그림을 그리지 않아 걱정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김태민의 그림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화려하고 강렬해졌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평가.

"어떻게 어린 나이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죠?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후후후.

심사위원의 평론이 이미연을 즐겁게 했다.

'벌써 그렇게 놀라면 곤란하지. 우리 태민이는 이제 시작이라고.'

그렇게 김태민이 화려하게 주목받으며 영 아트 마지막화가 끝났다.

'내일 신문과 방송에서 어떻게 말할지 벌써 궁금하군.'

이미연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연의 책상에는 팀 수진의 파일이 있었다.

이제 TJ대준문화재단에서 그들을 후원해야 하니까 한 번 쯤 봐둘 필요가 있었다.

'어디보자. 수진이, 유나, 정화. 참 귀엽기도 하다.'

처음엔 짜증이 나서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제 영 아트가 성공하자,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쩜 셋 다 이렇게 예쁜지.

'그리고 이주원.'

처음엔 이주원이 얄미웠다.

하지만 이젠 이주원도 귀엽다.

'요 영리한 꼬마 덕분에 태민이가 더 돋보였어. 수고 많았다. 누나가 네 공로도 잊지 않으마.'

그리고 마지막 이형원.

'후후후. 이 촉새 같은 녀석.'

이형원은 처음부터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형원만 미술 전공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외모도 평범했고.

하지만 이형원 역시 화려한 언변으로 김태민이 주목 받는 것에 한몫했다.

'팀 수진, 꽤 좋은 팀이었어.'

원래 이미연은 김태민에게 시드를 배정하고, 유능한 팀을 붙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태민은 대학생 아마추어들과 함께 우승했다.

어쩌면 그녀의 본래 계획보다 더 근사하게 풀린 것일 수도 있었다.

이미연은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미연은 비서가 가져온 신문들을 확인했다.

"어? 어? 어? 이······이게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미연은 경악했다.

[ 제 16회 수린문학상 발표. 수상자는 한국대 이형원 ]

[ 영 아트 시청자의 혼을 빼놓은 화려한 언변, 다 이유가 있었네. 알고 봤더니 수린문학상 대상]

[ 미술계를 뒤흔든 문학 천재, 혜성처럼 등장한 이형원군 ]

[ 문학 천재가 쏘아올린 작은 감동,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어. 직접 증명하다. ]

[ 미술과 문학을 동시에 석권한 한국대 출신 엄친아 천재, 문학계의 기대 한 몸에 받아]

[ 이형원군, 잉크 위를 뒹굴며 시청자에게 감동 선사. 알고 봤더니 탁월한 소설가. 좋은 글의 비결은 바로 용기. 용기를 복돋아 준 친구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해. ]

[ 그림, 누구나 그릴 수 있어. 겸손하게 말하는 문학 천재, 이형원]

[ 문학과 미술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일. '예술가는 모두 한 식구' 이형원 인터뷰 독점 수록 ]

이미연은 곧바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기사도 검색했다.

오늘은 영 아트의 마지막화가 방송된 다음날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이형원의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태민이는? 김태민은?'

김태민의 기사는 구석에 고작 몇 줄이 전부였다.

세상은 온통 이형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영 아트에 얼마나 많은 걸 쏟아 부었는데! 왜 엉뚱한 놈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미연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솟구쳤다.

이미연은 사무실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으아아아아! 야, 이 나쁜 놈들아! 으아아아! 으아아아!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으아아아아!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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