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결전 □
영 아트의 방송은 당연히 녹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아직 결승에 오른 두 팀을 모른다.
그래서 3일간의 전시에는 미리 섭외된 소수의 관객들만 초대 되었다.
이번 전시는 작품을 완성한다는 의미도 있었고, 또 관객들의 반응을 조사하는 의미도 있었다.
초대된 관객들 중엔 미대생들도 있고, 미술 애호가들도 있고, 미술과는 별 관계없는 일반인들도 있었다.
첫째 날.
초대된 관객들은 최성진의 그림부터 시작해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단 아직은, 방송 중인 팀 수진 보다는 그래도 시드를 배정받은 젊은 예술가 최성진이 훨씬 유명했다.
윤상희도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한 작가였다.
그리고 최성진의 작품들은 일단 특이하고 눈에 띄었다.
관객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최성진의 작품을 관람했다.
그리고 팀 수진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팀 수진 쪽에서 관객들의 걸음속도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관객들을 붙잡은 것은 역시 김태민의 그림.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이요? 그 화장대 그림이요. 일단 그림이 크고 예쁘잖아요. 갑자기 그 그림이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특히 그림 속 주인공이요. 방송에서 봐서 예쁜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림으로 보고, 한 번 더 놀랐어요. 너무 예뻐서 그림 앞에 한참 서 있었어요."
전시를 관람한 관객들을 상대로 VJ들이 질문을 던졌다.
그 중 가장 많이 언급된 작품은 뜻밖에 최성진이 아니라 김태민의 그림이었다.
"저도요. 팀 수진 쪽이 좋았어요. 팀 수진이 결국 결승까지 올라갔구나. 뭐라 해야 하나. 시트콤 코미디를 오래보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내 친구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제가 미대생이라 더 그런지, 팀 수진의 그림 속 인물들이 제 친구들처럼 느껴졌어요."
물론 최성진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액자에 그림을 그린 거잖아요. 신선했어요. 역시 미국에서 미술을 배워서 그런지 발상이 자유로운 것 같아요."
하지만 팀 수진만큼 뜨거운 반응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둘째 날에도 비슷했다.
섭외된 관객들은 대부분 최성진과 윤상희를 먼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시장 앞에서 그들의 상대가 팀 수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조금씩 놀라곤 했다.
"시드 예술가들을 꺾고 팀 수진이 결승까지 갔구나. 대단하네."
하지만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어느새 발걸음이 정체되고, 사람들은 팀 수진 쪽으로 모여들었다.
"저는 그 그림이 좋았어요. 심야버스요. 누구나 다 한 번씩 경험해 보는 일이잖아요. 밤에 버스를 타고, 도시로 돌아오는 길. 그때의 느낌을 잘 포착한 것 같아요. 내가 직접 겪었던 일상을 예술 작품 속에서 다시 만나니까 기분이 색달랐어요."
"나는 그 카페 그림이 좋았습니다. 동화책 일러스트 같기도 하고, 책 표지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따뜻한 햇빛과 한가로운 카페의 풍경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마지막 날에도 마찬가지.
관객들은 팀 수진의 그림 앞에서 웅성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팀 수진과 최성진, 윤상희 작가들도 전시장을 찾아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작가들이 전시장에 등장하자, 점잖게 그림을 관람하던 관객들은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소리까지 질렀다.
"원래 화가들은 다 잘생긴 건가요? 최성진 작가가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팀 수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림들이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림은 정직했어요."
"나는 무슨 모델인 줄 알았어요. 아, 모델 맞구나."
3일간의 전시.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전시장에서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 밖이었다.
원래는 최성진이 훨씬 유명했지만, 그림을 본 후, 관객들의 반응은 팀 수진 쪽이 더 열렬했다.
"너무 좋았어요.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했고요. 이렇게 작은 전시로 잠깐만 봐서 너무 아쉬웠어요. 응원할게요,, 팀 수진!"
그리고 그 반응은 작가들 자신부터 방송국 관계자들까지, 그리고 심사위원들도 모두 실감할 수 있었다.
전시의 마지막 날.
관객들의 따뜻한 반응을 보고 팀 수진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충분히 노력해서 만족한다고 말했지만, 역시 경쟁에 임하면 이기고 싶은 게 당연한 심리였다.
덕분에 모두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날 전시도 끝나갈 무렵.
"어?"
이형원이 뜻밖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형원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 쪽에는 바로 강현민, 우정용 강우 크루 두 사람이 와 있었다.
"전시 소식 듣고 궁금해서 왔습니다. 정말 멋졌어요."
"정말요?"
"정말입니다. 계속 기억날 것 같은 그림들입니다.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격려까지 듣고, 이수진이 꾸벅 배꼽인사를 했다.
그렇게 팀 수진은 자신감을 가득 충전하고, 3일 간의 전시가 마무리 되었다.
* * *
컬처온의 영 아트 메인 스튜디오.
촬영 사인이 떨어지기 전에 정경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마지막 녹화네요. 그래서 평소보다 좀 길게 찍을 예정입니다. 긴장되고 힘들겠지만, 오늘도 끝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우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 촬영만 몇 달을 했다.
덕분에 우리도 이제 나름 준 방송인쯤은 된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최성진이야 원래 방송을 많이 했으니 괜찮을 테고.
우린 본격적인 녹화 전에 심사위원들과도 미리 인사를 나눴다.
유명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학교의 전공 교수님들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린 별 긴장 없이, 모두 최상의 컨디션으로 마지막 녹화에 임했다.
스튜디오에는 잠시, 우리의 일주일간 작업 영상과 3일간의 전시까지 간략하게 편집되어 상영되었다.
[ 실제 방송에서는 더 긴 영상으로 나갈 겁니다. 이건 녹화를 위해 편집된 영상이고요. 그리고 심사위원 분들 역시 정식 영상으로 사전에 미리 충분히 봐두셨습니다. ]
그렇게 설명까지 들었기 때문에 이제 방송의 흐름은 잘 알고 있다.
진행자인 정경아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여섯 분의 심사위원들은 미리 여러분들의 작품을 감상하셨습니다. 아마 각자 마음속으로 누구를 영 아트의 우승자로 꼽을지 이미 결정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여섯 분들은 서로 의견을 모으지 않았고,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정경아는 두 팀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
"아직 승부를 뒤집을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결승전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특이하고 재미있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먼저 두 팀에게 자신들의 작품을 설명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차례.
우리의 설명 담당은 형원 선배다.
언제부터 그렇게 정해져 버렸다.
본인도 그렇게 알고 있는 듯.
형원 선배는 마이크를 쥐고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보시다시피, 친구들을 그렸습니다. 바로 팀 수진의 동료들이죠. 영 아트 이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고, 영 아트를 촬영하는 동안 거의 가족처럼 함께 지내며 어려운 과제들을, 힘을 모아 풀어나갔습니다."
형원 선배의 말을 듣자, 새삼 지난 몇 달간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사실 친구라는 단어는 요즘 아주 흔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별 무게 없이 남용되는 단어죠. 그리고 팀 수진 역시 사실은 알고 지낸지 겨우 1년 남짓, 우연히 학교에서 만나 같이 지냈을 뿐입니다. 우린 어립니다. 겨우 스물한 살, 스물두 살. 그러니 우리가 서로에게 진짜 친구라고 선언할 수 있을 만큼, 인생을 충분히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형원 선배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중년의 회귀자.
긴 인생을 살다보니 정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내 경우엔 한 명도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형원 선배는 발표를 이어갔다.
"그래서 저는 지난 일주일간 우리가 그리고 있는 '친구'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물론 저는 실크스크린으로 찍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린 친구들은 대체 뭘까요? 저는 일주일간 관찰하고,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친구란 바로 오늘, 우리들 자신의 거울입니다. 우린 친구들을 통해 스스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린 예술가 지망생들입니다. 남들보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가장 정확한 척도가 되어주는 이들이 바로 친구들일 것입니다. 결국 우린 친구를 그리며, 자화상을 그렸고, 예술가의 의지를 그렸으며, 미래를 향한 다짐을 그린 것입니다."
형원 선배는 오늘도 우리를 멋있게 포장했다.
형원 선배의 짧은 연설이 먹혔는지, 심사위원들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좀 많이 포장하긴 했지만, 형원 선배의 말은 분명 맞는 것 같았다.
우린 겨우 1~2학년의 대학생.
지금의 친구들이야 말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형원 선배한테 우리까지 넘어갈 것 같았다.
우린 그냥 친구들을 그렸을 뿐이다.
아무튼.
최성진 역시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액자 유리에 제가 그린 그림은 관객들이 윤상희 작가의 사진에 다가서는 걸 가로막습니다. 그 방해를 통해, 관객들은 어쩌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윤상희 작가의 작품에 다가서려 할지 모릅니다."
최성진 역시 언변이 화려했다.
최성진의 작품 설명이 끝난 후, 정경아가 다시 영 아트를 진행했다.
"앞서 말씀드렸듯 오늘은 결승전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직접 상대팀의 작품을 평가하고 공격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상대의 작품에 대해 의견과 질문을 말하고, 또 거기에 답하면 됩니다. 물론 자기 작품을 자랑해도 됩니다. 그리고 시작은······"
정경아는 잠시 두 팀을 살펴보고는 최성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최성진 작가님이 선배니까, 최성진 작가님께 먼저 부탁드리겠습니다."
일종의 크리틱인 셈이었다.
사실 한국에선 작가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공격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최성진은 미국인이다.
그래서 별 거부감도 없는 것 같았다.
거부감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벼르고 있던 것처럼 최성진은 마이크를 들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일단 팀 수진의 작품들, 흥미롭게 봤습니다. 정말 훌륭한 그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멋지게 그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이걸로 충분하냐고. 흔히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회화는 이제 죽었다.' 너무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서 이제는 어떤 그림이 나와도 더 새로울 게 없다는 뜻이죠. 그래서 저는 모험을 했습니다. 사진 위에 유리를 두고, 유리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드문 일이고, 또 특별한 시도였습니다."
역시 최성진.
말을 참 잘한다.
우리를 공격하다가 부드럽게 자기 칭찬까지 하다니.
그리고 다시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결승이지만, 저는 새로운 작품을 위해 모험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팀 수진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이죠. 어떻습니까?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죠? 본인들이 결정이 젊은 예술가를 뽑는 '영 아트'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형원 선배가 얼굴을 찡그리고 답변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마이크를 붙잡았다.
형원 선배만큼 화려한 말발은 없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답변도 있었다.
나는 마이크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충분히 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험을 한 쪽은 오히려 우리라고. '회화는 죽었다.' 자극적이지만 흔히 쓰이는 말이죠.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미 죽어버린 회화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보는 쪽이 모험일까요? 아니면 회화는 죽었으니까, 그림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식을 찾는 쪽이 모험일까요?"
나도 은근 말을 잘하는 것 같다.
나는 심사위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회화가 죽든 살았든, 자기가 마음 끌리는 대로 하는 것이 진정한 모험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게 젊은 예술가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직 회화는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한국의 미대생들이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회화는 언제까지고 죽지 않을 겁니다."
내 답변이 먹혔는지 심사위원들은 또 다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학생들이 싸우면 교수들은 좋아한다.
그리고 난 머뭇거리는 최성진을 향해 반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윤상희 작가님과 최성진 작가님. 두 분의 협업을 즐겁게 봤습니다. 특히 윤상희 작가님은 감동적인 인물사진으로 유명하시죠."
윤상희 작가는 처음엔 연예인들의 사진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나중엔 일반인들의 사진을 찍어서 예술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최성진의 설명처럼 마치 사진이 아닌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윤상희 작가의 매력이었다.
윤상희는 나름 인정받는 사진작가였다.
다만 최성진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는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이번 영 아트에서 언제나 최성진의 들러리 취급을 당했다.
그 점을 파고 들면 어떨까?
나는 그래서 지난 며칠간 윤상희 작가를 조사했다.
"윤상희 작가님의 사진은 인물의 클로즈업, 피사체와의 가까운 거리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윤상희 작가님은 인물 외에는 불필요한 배경이나 소품은 다 치워버리는 것으로 유명하시죠. 하지만 이번 협업에서 의도적으로 유리에 그림을 그려서 사진을 가렸습니다. 관객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서라는데, 윤상희 작가님은 거기에 공감하십니까? 저는 이 협업의 결과물에 대해 그림만 돋보이고, 사진은 그 장점을 잃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윤상희 작가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작가님은 이번 협업의 결과물에 만족하십니까?"
윤상희는 살짝 웃으며 잠시 대답을 생각했다.
내가 윤상희 작가를 지목해서 질문했기 때문에 최성진은 끼어들 수 없어 꽤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곧, 윤상희가 대답했다.
"네, 그럭저럭 만족합니다. 어차피 협업이란 어느 정도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과정이니까요. 다행히 덕분에 꽤 재미있는 작업들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한 번 더 묻겠습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온다면 또 한 번 이것과 똑같은 작업에 참여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윤상희는 살짝 고민했다.
큰 상금이 걸린 대회니, 보통은 좋게좋게 답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상희는 이미 꽤 알려진 예술가.
때론 자존심이 승부보다 더 중요할 지도 몰랐다.
잠시 후, 윤상희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 질문엔 답하지 않겠습니다."
윤상희의 솔직한 대답에 최성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