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26화 (126/203)

■ 126. 성장 □

친구들 서로를 그리기.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지만, 진짜 괜찮은 생각 같았다.

의미도 있고, 풋풋하고, 그릴 것도 많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즐거웠다.

'그게 제일 중요하겠지.'

스케치를 시작하면서 슬쩍 친구들의 그림을 살펴봤다.

먼저 수진 선배.

수진 선배는 종이를 오리고 있는 정화 선배를 스케치했다.

아마 얼마 전 팝업을 만들 때 같았다.

스케치 속 정화 선배는 날카로운 가위를 들고 자기가 오릴 종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채색이 들어가지 않아 그림의 느낌은 아직 선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은 생각 같은데?'

날카로운 가위를 들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뭐라 해야 하나······

평소 정확하고 가끔 신경질도 낼 줄 아는 정화 선배를 잘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오랜 우정의 힘인가.'

생각보다 멋진 그림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화 선배.

정화 선배는 연극 무대를 만들 때의 형원 선배를 스케치했다.

형원 선배는 일을 하다가도 문득 좋은 글귀가 생각나면 노트북을 열고 메모하곤 했다.

'평소엔 살짝 실없는 사람이지만.'

형원 선배는 글 쓸 때는 진지하다.

그 진지한 한 장면.

그런데 형원 선배의 신체 비율을 정화 선배가 살짝 조절해준 것 같았다.

원래 인물화는 그대로 그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당사자가 기분 좋도록 배려 보정을 해주기도 한다.

물론 보정도 실력이 있어야 해줄 수 있다.

새삼, 정화 선배가 친절한 사람이라는 게 다시 느껴졌다.

그리고 김태민.

'아······'

김태민은 스케치는 대강 하고, 곧바로 물감으로 밑그림에 들어갔다.

그런데 밑그림만 봐도 벌써 실력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장면인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늘 보던 풍경.

바로 우리 하이 유나 사무실의 분장실이었다.

인물화지만 수진 선배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그려졌고, 배경 소품도 많았다.

그래서 일부러 김태민이 커다란 100호 캔버스를 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속으면 안 되지.'

인물화에서 배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배경들 전부가 다시 주인공을 묘사하는 장치이다.

그만큼 김태민은 수진 선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이다.

'넌 처음부터 어떤 장면을 그릴지 다 계획이 있었구나.'

내가 인물화, 그 중 수진 선배로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섭섭해 할 뻔 했다.

아무튼.

화장대 거울 앞에 수진 선배가 앉아있고, 누군가가 수진 선배의 머리를 만져 주고 있었다.

그리고 방안은 소품들로 지저분하고.

거울에는 수진 선배가 흐리게 비치고 있었다.

수진 선배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옛날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의 낭만적인 초상화들이 떠올랐다.

'그만 봐야겠다.'

더 이상 김태민의 그림을 봤다가는 심란해져서 내 그림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남에게 흔들리지 않고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구나.'

그러니 내 그림을 위해서, 김태민의 그림은 잠시 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유나.

유나의 그림도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유나의 그림도 심란해져서 내 그림에 집중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이번엔 유나가 나를 그려준다.

그러니까 선물을 받듯, 그림이 완성된 후에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나.

'그리고 내가 뭘 그릴 생각이냐면······'

최근에 꼭 그려보고 싶은 장면이 생겼다.

바로 얼마 전, 유나와 함께 심야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던 순간.

어두운 버스 안.

붉은 색, 고요하고 신비로운 버스의 실내등.

그리고 창밖으로 비치는 고속도로의 차가운 풍경.

차창에 비치는 버스의 실내.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유나의 옆얼굴.

난 그 순간을 꼭 그려보고 싶었다.

가끔 내가 진짜 미대생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만족스러운 순간을 만났을 때, 지금을 그리고 싶다고 느낄 때.'

어떤 사람들은 그 순간을 글로 묘사할 테고, 어떤 사람들은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꼭 그 순간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전에도 말했듯 나는 유나의 얼굴을 그리기가 무섭다.

하지만 옆얼굴이라면?

보이는 거라곤 눈썹과 코의 끝, 볼살, 그리고 입꼬리 조금.

귀도 있다.

'이 정도 얼굴이라면 내가 그릴 수 있겠지.'

나는 쓱싹쓱싹 스케치를 시작했다.

하루를 걸어다니느라 피곤한 공기.

버스 의자에 눌려 헝클어진 머리카락.

마치 사진을 찍어둔 것처럼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길고 하얀 목.

유나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서 담요처럼 덮었다.

'저 외투 안에는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왔겠지.'

그런 잡생각도 조금 하면서.

'나중에 유나랑 사귀게 되면, 꼭 밥 잔뜩 먹이고 배 만져 봐야지.'

나는 굳게 다짐했다.

내가 엉큼해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화가는 모름지기 육체의 구조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육체를 더 자세히 알수록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유나의 배가 궁금한 것은 미대생의 학구열이자, 예술가의 진지한 사명감이었다.

절대 나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었다.

전부 대한민국 미술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옛날 고전 걸작을 그린 화가들은 어땠을까? 그 사람들도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 잡생각들을 조금씩 했을까? 아니면 끝까지 진지하고 엄숙하게 임했을까?'

으음.

가끔 이런 것들이 궁금할 땐 나 자신이 재밌다.

참고로 나는 입시 그림을 그릴 땐 [잡생각 제거]를 사용했다.

하지만 학교 과제를 할 때는 더 이상 [잡생각 제거]를 쓰지 않는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무수한 잡답들.

그 잡념들이 다음 그림을 위한 자산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잡생각 제거]는 쓰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친구들이 있지.'

친구들 모두 사기 능력 없이 그림을 그리니까, 나도 힘을 내 볼 생각이다.

대신 [숲속산책], [바다산책], [알래스카 얼음 호수 산책]등의 산책 아이템은 아끼지 않고 쓸 생각이다.

물론 [환기] 역시 마찬가지.

[환기]는 공기를 맑게 해주고, 친구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잉크와 기름 냄새 자욱한 미술 작업실에 아주, 아주 유용한 능력이었다.

* * *

그렇게 우린 전쟁 모드에 돌입했다.

'이건 마치 미술 작업실이 아니라 야전 사령부의 풍경.'

군대는 간 적 없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우린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또 그렸다.

나는 오후에 2~3시간 사무실에 출근해 일을 보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미리 적어온 음식들을 한아름 사서 들어갔다.

내가 작업실을 나가기 전부터 각자 자기들이 먹고 싶은 걸 내게 적어준 것이다.

"닭발 3인분이랑 매운 곱창 3인분 포장해주세요."

여자들은 왜 그렇게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지.

수진 선배가 유나 입맛 다 버려 놨다.

그렇게 음식들을 포장하고 있으면 그 시간을 못 견디고 또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 소세지빵이랑 참치 김밥도 부탁해! ]

원래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것들이 계속 생각나는 법.

하지만 이렇게 먹고도 또 새벽에는 배달음식까지 또 시켰다.

역시 화가는 항상 배가 고픈 직업이었다.

"안녕하세요! 잘 되어가고 있으시죠?"

작업실엔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수시로 VJ들이 들이닥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었다.

물론 작업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그런데 가끔 우리가 야식을 먹을 때 습격받기도 했다.

막 수진 선배가 보쌈과 소주를 삼키려는 순간이었다.

"이수진씨는 보기와는 다르게 소주도 잘 드시네요."

"절대 제가 좋아서 먹는 건 아니에요. 그림에 집중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할 때가 있어요. 예술가들만의 고충이죠.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땐 가능한 술을 멀리 합니다."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유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도 술을 참 싫어해요. 그런데 가끔 궁금할 때가 있잖아요. 소주는 어떤 맛일까. 그런데 하필 이때 카메라가 왔네요. 엄마, 아빠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맛만 봤어요."

김수희 작가도 몇 번 작업실에 찾아왔다.

"오, 형원씨는 어떡하려나 걱정했었는데, 실크스크린을 하시네요. 그런데 꽤 근사한데요?"

정말 그랬다.

3일쯤 지났을 때부터 형원 선배의 실크스크린은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오빠, 색을 많이 쓴다고 좋은 게 아닌 것 같아요. 복잡한 그림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오빠는 초보니까 도안은 간단히, 색도 1~2가지 정도만. 그래도 실크스크린 자체가 갖는 매력이 있으니까, 오히려 단순할 때 작품이 잘 나올 거예요."

정화 선배의 조언을 따르자 형원 선배의 실크스크린이 갑자기 발전했다.

꽤 근사한 작품이 나오자 재미있어 보였는지, 김태민과 유나도 실크스크린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쉴 때마다 하나씩, 자기들도 찍어볼 정도였다.

실크스크린이 손에 익자 형원 선배는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며 작업실의 풍경과 우리들을 찍었다.

그리고 그걸 실크스크린으로 옮겼다.

그때 마침 김수희 작가가 온 것이었다.

"머릿속 이미지를 여러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해요. 힘들긴 하지만 재밌어요."

"부럽네요. 그런데 형원씨 감각이 좀 있나 봐요. 초보 같지 않은데요?"

"아니에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작가님도 제가 가르쳐드릴까요?"

"어머,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역시 형원 선배.

놀라운 적응력이었다.

실크스크린을 배운 지 며칠 되었다고, 벌써 그걸 남에게 가르치려 하다니.

하긴.

사랑에 필사적인 것은 죄가 아니다.

예술가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형원 선배, 응원하겠습니다.

밤을 새고.

또 그림 그리고.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

몸이 뻐근하면 라디오 음악에 맞춰 멋대로 몸도 흔들어보고.

피곤하면 한두 시간 소파에서 잠들었다가, 헝클어진 머리로 일어나 다시 그림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젊음과 생명을 마구 갈아 넣자, 그림들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버스 의자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유나.

그날의 기억과 감정이 다시 내게 떠오르면, 고개를 들어서 맞은편 이젤을 바라봤다.

그럼 캔버스에 가려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슬리퍼를 신은 유나의 발끝과 팔꿈치가 보였다.

그림을 그리다 고개를 들었을 때, 유나가 그 자리에 있으면 왠지 안심이 되곤 했다.

그리고 또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는 든든한 친구이자 동거인, 그리고 따라잡고 싶은 내 목표인 김태민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림으로 날 놀래주라. 내가 정신 차리고 또 열심히 그릴 수 있도록.'

또 그 옆에는 항상 기분 좋은 수진 선배.

언제나 든든한 정화 선배.

또 잉크를 잔뜩 뒤집어 쓴 형원 선배까지.

형원 선배는 제일 초보주제에, 더러운 작업복은 꼭 10년차 화가 같다.

'하긴 원래 초보가 더 지저분하게 그리겠지.'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6시였다.

모두 지친 얼굴로 자기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제가 아침 사올게요. 모두 5분 내로 먹고 싶은 것 적어내요. 아니면 내 맘대로 사 올 거니까."

나는 노력 상점이 있어서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다.

그러니 내가 봉사해야지.

죽어가던 사람들이 아침이란 소리에 갑자기 부활했다.

그리고 좀비처럼 달려와 자기 메뉴를 적었다.

"같이 나가자. 살 거 많잖아. 나도 잠도 좀 깨우고."

유나가 나를 따라 나섰다.

남자는 원래 이런 사소한 친절에 감동하는 법.

유나가 아침 사러 같이 나가줘서 고마웠다.

"소고기 죽이랑 야채죽 포장해주세요."

다행히 서울의 식당들은 24시간 연다.

어쩌면 서울은 예술가들이 살기 좋은 도시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빵집에 가서 달걀 샌드위치 세 개랑 슈크림빵, 바나나 우유도 샀다.

왜 사람은 6명인데 한 끼에 15인분을 사야하는 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김밥과 라볶이도 포장했다.

'라볶이는 또 누굴까. 아침부터 매운 음식을.'

하긴 모두 밤을 샜으니 아침인지 저녁인지 나도 헷갈린다.

그렇게 유나랑 둘이서 양손 가득 음식 봉투를 들고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

"유나야."

"응?"

유나는 아침 먹을 생각에 지금 기분이 좋을 게 분명했다.

음식은 원래 사람을 느슨하게 만든다.

영리한 회귀자는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는 법.

"너랑 같이 그림 그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중에 나 좀 씻고, 사람처럼 하고 있을 때 시작해라. 잠도 못 자고, 테라핀 기름 뒤집어써서 꼬질꼬질한데."

하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좋지 않았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낭만을 모른담.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 애 셋 쯤 낳은 후에는 어쩌려고.

하지만 회귀자는 포기를 모른다.

"아니야. 지금도 진짜 예뻐."

그랬더니 이번엔 깔깔 거리며 웃었다.

"아, 이주원. 진짜 많이 늘었다."

내가 칭찬을 듣다니.

역시 뭐든지 노력하면 된다.

나는 그림 뿐 아니라 고백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조만간.

그리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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