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25화 (125/203)

■ 125. 겸사겸사 □

그렇게 녹화가 끝나고 우린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어떤 작업을 하실지 정해지면 저희한테 연락주세요. 그럼 필요한 장비나 물품들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김수희 작가가 우리 여섯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시죠?"

"응원할게요. 처음엔 제가 배정받은 팀이고, 인터뷰까지 맡은 팀이라 응원했어요. 그런데 계속 팀 수진을 지켜보다 보니까······ 정말 능력 있는 팀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꼭 여러분들이 이기셨으면 좋겠어요."

오. 기분 좋은 격려.

"방송 작가님이 이렇게 저희를 편 들어도 되는 거예요?"

"안 되죠. 방송을 위해서라도 한 번 더 좋은 작품 부탁드려요. 팀 수진이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최성진과 윤상희 작가.

둘 다 나름 쟁쟁한 작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젊은 작가가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는 게 쉽지가 않다.

나이 따지고, 학위 따지고, 선후배, 경력 따지고, 뭘 그리 따지는 게 많은지.

그러니 젊은 나이에 인정받았다면 그만큼 능력이 있단 이야기.

그런 쟁쟁한 두 작가를 상대로 우리가 이길 거라 믿겠다니.

"고맙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팀 수진은 근처 카페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회의치고는 쉽게 결론에 다다랐다.

"자유주제면, 우린 역시 그림을 그려야겠지?"

우린 서양화과 학생.

서양화과에 오기 위해 모두 몇 년씩 죽어라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모두 우리의 전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제일 잘 하는 일이다.

그리고 개인작업.

역시 공동작업보다는 캔버스 하나씩 맡아서 자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린 개인작업에 더 익숙하고, 더 나은 작품이 나올 것이다.

여기까진 모두 이견이 없었다.

"저기, 그럼 난 어떡하지?"

형원 선배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오빠도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정화 선배가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

"실크스크린이요."

"아······"

정화 선배의 대답에 수진 선배와 내가 동시에 탄성을 뱉었다.

실크스크린.

말 그대로 실크를 이용한 판화기법이다.

원래는 실크를 이용했겠지만, 요즘은 나일론을 많이 쓴다.

천 위에 잉크가 투과되지 않는 용액을 바르고 원하는 부위만 용액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 위에 잉크를 흘려주면 용액이 제거된 구멍을 따라 잉크가 흘러나와 그림이 찍히게 된다.

이렇게 구멍을 이용해 그리는 기법을 '공판화'라고 부른다.

판화는 서양화과 2학년 과정이라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는 배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생에 디자인을 전공하며 배운 적이 있었다.

실크스크린은 서양화뿐만 아니라 디자인이나 도예, 기타 등등 거의 모든 미술 분야에서 쓰이는 기법이기 때문이다.

"그거 멋진 생각인데요? 실크스크린이라면 따로 그림을 훈련받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진짜?"

"약간의 관심과 노력, 요령. 거기에 그리고 싶은 것만 있으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어요."

"그래?"

"주원이 말이 맞아요. 나중에 오빠 책표지도 직접 찍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오빠, 이 참에 저희가 제대로 가르쳐줄게요."

"어, 그래. 그럼 열심히 할게."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고 싶은 게 있을 것이다.

형원 선배는 특히 소설가.

그러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니까 형원 선배는 꽤 신난 표정이었다.

"그럼 우리 다섯은 유화. 그리고 형원 선배는 실크스크린. 이렇게요?"

내 정리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린 김수희 작가에게 작업실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해서 문자로 전송했다.

[ 작업실에 스피커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음악 들으면서 그려야 하니까요. 그리고 낚시 의자랑 소파랑 담요도 빼먹으면 안 됩니다. 밤새서 그리려면 수시로 자야 하니까요.]

"그럼 주제는? 우리 뭘 그릴지 주제도 맞춰 봐야지."

기법을 정했으면, 당연히 무얼 그릴지도 정해야 한다.

우리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려면 개인 작업으로 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단순한 개인 작업이어서는 안 된다.

'이건 팀전이니까.'

개인 작업인 동시에 공통된 주제를 가진 공동 작업이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팀 수진 여섯 명 각자가 모두 수긍하고, 또 끌리는 주제어야 한다.

특히 나나 정화 선배는 비교적 상관없겠지만, 김태민 같은 경우에는 특히 영향을 받는다.

김태민의 경우에는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때와 관심 없는 것을 그리는 것을 그릴 때 기복이 클 것이다.

'더군다나 그림이라면······ 김태민이 우리의 주력이 될 지도 몰라.'

그러니 나는 김태민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유나는?

유나의 경우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가끔은 감성파인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이성파인 것 같기도 하고.

유나에 대해서는 내가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

우리는 그림의 주제에 관해 각자 잠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는지도 모른다.

'김태민이 제일 자신 있으면서, 또 지금 가장 그리고 싶은 것은 뭘까?'

아마 자기 입으로 말하기는 좀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내가 대신 말해주기로 했다.

"인물화를 그리면 어떨까요? 친구들 그리기. 우리 팀 수진 서로를 그려주는 거죠."

"우리를? 서로?"

정화 선배는 갸우뚱했지만, 수진 선배는 대찬성했다.

"그거 좋은데? 친구 그리기라면 의미도 괜찮고. 또 인물화라면 우리 모두 많이 연습해 봤으니까!"

사실 인물화는 그리기 쉬운 그림이 아니다.

흔한 동시에 아주 어려운 소재.

그래서 그만큼 자주 그리고 연습도 많이 하게 된다.

하지만 제대로만 그릴 수 있다면, 가장 볼 게 많은 그림이 바로 인물화였다.

"좋은 생각 같아요! 우리 모두 한 명씩 정해서 서로를 그려주는 거예요. 그럼 몇 달 간 함께 보낸 시간을 돌아볼 수도 있고, 또 나중에 좋은 추억도 될 거예요. 마치 사진을 꺼내 보는 것처럼."

역시 김태민도 적극 찬성했다.

김태민이 이렇게 찬성하는 걸 보니 좀 뿌듯했다.

'짜아식, 역시 나 밖에 없지?'

정화 선배와 형원 선배도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도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찬성 반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벌써 누구를 어떻게 그릴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내가 할 일은?

'은근슬쩍 태민이가 수진 선배를 그릴 수 있도록 밀어줘야겠지.'

"그럼 주제도 결정했습니다. 서로를 그려주기. 그럼 가나다순으로 가죠. 그럼 김태민부터네요? 태민아, 넌 누구를 그리고 싶어?"

사실 가나다순이면 정화 선배가 김태민보다 빠르다.

'김정화' vs '김태민' 이니까.

하지만 눈치가 빠른 정화 선배는 가만히 있었다.

정화 선배 역시 김태민이 우리의 주력인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김태민이 그리고 싶은 사람을 그리도록 배려하는 게 우리의 승리의 비결이란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래······

'여자들의 눈치가 항상 남자보다 빠르니까.'

김태민이 누굴 그리고 싶어 할지, 정화 선배도 벌써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팀 수진 대부분 다 알고 있을 지도.

하지만 김태민은 잠시 고민하는 척 혼자 열심히 어설픈 연기를 했다.

"아······음······제 그림 스타일이나 색감을 고려했을 때, 전 수진 누나를 그려보고 싶어요. 머리색이나, 평소 누나가 입는 옷을 생각해보면, 그냥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제 그림에 맞지 않을까······"

그렇게 김태민은 그냥 한 번 수진 선배를 그려보고 싶은 것처럼 대답했다.

"야, 김태민. 너 나 그릴 거면 제대로 그려라."

"뭐, 한 번 노력해 볼게요."

우린 두 사람의 귀여운 협박과 거짓말을 잠시 감상했다.

녀석.

최선을 다해 죽어라 그릴 거면서.

다음은 정화 선배 차례.

"아, 내가 수진이 그리려고 했는데, 뺏겼네. 난 좀 생각해볼게. 일단 패스."

정화 선배 다음엔 수진 선배차례였다.

"그럼 난 정화를 그릴래. 1학년 때부터 항상 같이 다녀서 그리기 제일 편할 것 같아."

"너도 나 제대로 그려라."

정화 선배의 경고.

'이건 좀 진심이 담긴 협박 같은데.'

하긴 수진 선배는 조금 압박을 줘야 더 열심히 할 것 같긴 하다.

그리고 다음은 내 차례.

"그럼 뭐, 하는 수 없죠. 저도 유나를 그릴게요. 쇼핑몰 하느라 사진을 하도 많이 찍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유나가 그리기 편할 것 같아요."

"너도 나 제대로 그려라."

이것도 조금 진심인 듯.

"뭐, 그냥 늘 하듯이 그리는 거지."

실은 전에도 나는 유나를 그리려 도전했다가 쓴 맛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의 얼굴은 당연히 감정이 담긴다.

그려지는 대상의 감정과 그리는 화가의 감정.

그래서 화가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는 게 쉽지가 않았다.

'특히 눈이랑 입이 어려웠어.'

흔히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자주 말한다.

당연히 눈에는 많은 감정과 성격이 담긴다.

하지만 직접 인물화를 그려 봤더니, 눈 못지않게 입도 중요했다.

입에도 여러 감정과 의도가 담기는 것 같았다.

특히 유나처럼 잘 웃는 사람이라면 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고 싶은 장면도 있었고, 시도해 보고 싶은 구도도 있었다.

그래서 재도전 해 볼 생각이다.

사실 김태민이 수진 선배를 그리고 싶은 만큼, 나도 간절히 유나를 그려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친구를 돕는 척하며 은근슬쩍 내 실속도 챙긴 것이었다.

'세상이 원래, 겸사겸사 돕고 사는 거지.'

다음은 형원 선배.

"난 아직 실크스크린을 잘 모르니까 배우고 나서 정할래. 그리고 어차피 너희랑 나는 장르가 달라서 인물이 겹쳐도 별 상관없을 거야."

일리가 있는 의견.

그리고 한유나.

"한 번 보자, 남은 사람 중에. 하는 수 없죠, 뭐. 저도 그냥 주원이 그릴래요. 제일 무난하게 생겨서 그리기 편할 것 같아요."

그리기 편하게 생겼다니······

나도 거기엔 동의하지만, 유나의 입에서 들으니 조금 상처였다.

마지막으로 정화 선배.

아직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은 김태민과 형원 선배 둘이었다.

"그럼 난 형원 오빠로 할래."

일단 나나 김태민처럼 사심이 담긴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내 생각에 아마도, 김태민은 앞으로도 누군가가 그려줄 일이 많겠지만, 형원 선배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또 김태민은 자기가 선택 받지 않아도 별 관심 없겠지만, 형원 선배는 상처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화 선배가 형원 선배를 골라준 듯 했다.

정화 선배도 알고 보면 은근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린 무엇을 그릴 지도 결정했다.

결정한 이상 어서 빨리 열심히 그릴 일만 남았다.

* * *

우린 캔버스 다섯 개를 컬처온이 제공한 작업실로 가져왔다.

김태민은 그리고 싶은 게 많은지 큼지막하게 100호를 골랐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100호 캔버스는 크다.

정말 크다.

하지만 실력만 있다면 그림은 클수록 좋다.

'설렁설렁 김태민이 100호를 준비하다니.'

김태민은 이번에 각오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나는 소박하게 80호.

모험은 하지 말고 80호라도 충실히 채우고 싶었다.

물론 80호도 충분히 큰 사이즈다.

우린 각자의 캔버스에 젯소를 꼼꼼히 발랐다.

젯소는 흰색 석고물을 생각하면 된다.

젯소 바르기는 여자의 기초화장과 비슷하다.

그림을 그리기 전, 캔버스에 젯소를 발라주면 물감의 착색도 좋아지고, 캔버스 표면도 매끄러워진다.

젯소는 여러 번 꼼꼼히 발라야 한다.

그래서 젯소가 마르는 동안 나는 형원 선배의 실크스크린을 도왔다.

"일단 나일론으로 틀을 짜야 해요. 그리고 틀 위에 감광액을 발라요. 감광액으로 나일론의 틈새를 전부 메워주는 거죠."

그리고 감광기에 넣어서 강력한 빛을 쬐어준다.

그때 검은색 그림이 그려진 투명한 필름을 틀 위에 올려둔다.

그럼 빛을 쬐지 못한 부분에는 나중에 감광액이 사라지고 구멍이 뚫리게 되는 것이다.

감광기는 작업실 근처 공방의 것을 빌려 쓰기로 했다.

"필름은 손으로 그려도 되지만, 사진으로 찍어서 인쇄해도 돼요. 형은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 원하는 장면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인쇄하도록 하죠."

사진을 찍고 나서도 절차가 남아있다.

실크스크린은 한 번에 한 가지 색만 찍을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색을 사용하려면 사진의 색을 포토샵으로 분리해서 여러 개의 틀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한 장의 종이 위에 여러 색의 틀로 여러 번 잉크를 찍어주는 것이다.

그 과정을 완벽히 해내려면 끈기와 세심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래도 직접 그리는 것보다는 실크스크린이 편할 걸.'

그렇게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다시 찍으면, 단순한 변환 이상의 재미가 생겨난다.

당연히 색도 달라지고, 또 예상 못한 여러 효과들도 같이 발생한다.

미술에 있어서는 대부분 등가교환이 일어난다.

고생스러운 작업 과정이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나름의 가치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찍은 실크스크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앤디 워홀의 유명인 시리즈들이었다.

"형, 저희가 그림 그리면서 틈틈이 계속 같이 봐드릴게요. 일단 실크스크린에 익숙해지려면 계속 찍어봐야 해요."

"오케이. 고마워."

부지런히 밤새서 찍다보면 일주일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 몇 개는 건질 것이다.

처음엔 힘들겠지만, 익숙해지면 나름 재미도 생길 것이고.

무엇보다 직접 완성한 작품 하나를 손에 쥐면 그 뿌듯함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기회에 형원 선배가 실크스크린을 충분히 맛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린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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