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바나나 □
"영상 보니까 어땠어요?"
최성진을 영 아트에 초빙한 이기호CP가 물었다.
"귀엽던데요? 영리하고."
최성진은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최성진이 이기호 CP에게 그 동안의 팀 수진의 미방송 작업 영상들을 요청한 것이었다.
'싸우기 전에 적들을 미리 알아둬야지.'
최성진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성진은 팀 수진을 귀엽고 영리한 팀으로 평가했다.
"어려서 그런지 캐릭터가 다들 매력적이에요. 다들 사이좋게 열심히 작업하는 것도 보기 좋고요. 시청자와 심사위원들이 팀 수진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죠. 하지만 전 역시 최성진 작가님이 이길 거라고 믿습니다. 아시죠?"
이기호 CP의 낯 간지러운 응원에 최성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다니.'
팀 수진은 대학생 아마추어 팀.
최성진은 자기가 질 거라고는 1%도 생각하지 않았다.
최성진은 영 아트라는 쇼를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다른 예술가들을 꺾고 결승까지 오는 동안 여러 유명 심사위원들로부터 화려한 찬사를 받았다.
거기에 그의 매력적인 외모와 화려한 경력도 시청자들의 관심을 얻기에 충분했다.
사실 그는 방송 전에도 충분히 유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같은 말을 계속해야 겨우 알아들으니까.'
그러니까 방송에는 자주 나올수록 유리하다.
벌써 그의 매니저를 통해 광고나 협업 제의가 여럿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든 성과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팀 수진을 이기고 당당히 우승까지 얻어야 했다.
그것도 가능한 압도적으로.
'예술가가 가난하다는 말은 이제 지나간 시절의 미신이야.'
그의 부모는 아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바랐다.
그래서 고른 직업이 의사.
의사라면 안정적인 수입과 적당한 존경까지.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성진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 어떤 일이든 의사만큼 고생하면 누구나 의사만큼 벌 수 있어.'
그리고 최성진은 직접 자신의 생각을 증명했다.
최성진은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었고, 지금은 같이 의과대학원에 다니던 친구들보다 훨씬 더 유명하고 부유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의 선택이 이제 영 아트의 결승으로 완성될 것이라 믿었다.
귀여운 꼬마들이 자신의 경력을 가로채도록 절대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CP님."
"네, 성진씨."
"이번 영 아트 말인데요. 결승이 끝나고도 참가자들이 같이 협업이나 전시를 했으면 좋겠어요. 팀 수진 같은 화제의 인물들을 한 시즌만 쓰고 버리긴 아깝잖아요. 프로 작가가 멘토식으로 어린 작가들을 이끌어주는 컨셉으로 잘 버무리면······ 방송이 끝나고도 같이 전시도 열면 보기도 좋고 화제성도 충분할 겁니다."
"오, 좋은 생각인데요? 방법을 구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최성진 작가님 기획력이 상당하십니다."
"기획력은요. 그냥 어린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방법들을 생각해본 거죠. 저도 한국의 젊은 작가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기도 하고."
"맞습니다. 예술가들 간의 교류는 중요하죠. 최성진 작가님처럼 든든한 멘토가 있다면 어린 참가자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팀 수진처럼 유명한 후배들이라면 얼마든 서로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대 출신이라니 똑똑해서 말도 잘 통할 것이다.
그렇게 최성진은 벌써 방송 후의 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다.
* * *
저녁 9시.
드디어 내일은 영 아트 결승전의 첫 녹화다.
내일부터 며칠 동안 나는 다시 정신없이 바빠진다.
그래서 그 전에 밤까지 남아 꼼꼼히 사무실 일들을 정리했다.
나는 오랜만에 하이 유나의 매출 그래프를 살펴봤다.
영 아트 출연전과 출현 후.
일일 매출이 거의 30배가 넘게 뛰었다.
방송 전에도 하이 유나는 절대 작은 쇼핑몰이 아니었다.
중견의 알짜 쇼핑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의류 쇼핑몰 중 거의 최상위권이다.
나는 영 아트 출연 전에 몇 가지를 스스로 다짐했었다.
그리고 운 좋게 그것들을 대부분 지켜냈다.
나와 친구들은 여전히 사이가 좋았고, 유명세나 큰 성과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물론 그것은 나 혼자 해낸 것이 아니야.'
팀 수진이 단결해서 친구들 서로를 지킨 것이다.
'거기다 결승까지 진출한 것은······'
생각 외의 성과.
이제 길어야 열흘 정도면 방송 촬영도 마무리고 지금의 정신없는 생활도 끝날 것이다.
방송 전에도 나와 유나는 일과 학교를 병행 하느라 무척 바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쇼핑몰의 매출이 크게 늘면서 직원도 늘어났고, 그만큼 우리의 일은 오히려 줄었다.
'그러니 방송만 끝나면······'
나와 팀 수진은 자기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대생으로 학교와 그림에도 집중할 수 있을 것이고.
방송 덕분에 상황이 많이 좋아진 것이었다.
'하지만 마무리가 제일 중요하겠지.'
이제 마지막 방송 경연.
화끈하게 열정을 쏟아 붓고 멋지게 이기고 싶었다.
그렇게 두 사무실의 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라?"
내 빌라가 또 왁자지껄했다.
내일이 촬영이라 오늘 밤은 별도의 술 계획이 없었는데······
집에는 태민, 유현 외에도 수진, 정화, 유나, 유미까지 와 있었다.
15평 빌라가 바글거렸다.
"또 무슨 일이죠?"
"그게 말이야. 오늘 수진이 오디션 했잖아. 그래서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거든.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떡볶이 떨이 판매를 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다 사버렸지. 떡볶이가 너무 많아서 같이 먹자고 쳐들어왔지."
김태민과 유현이는 빌라 거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삶은 달걀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안 봐도 그림이 그려지는군.'
수진 선배가 떡볶이에 들어간 삶은 달걀을 좋아했다.
그런 수진 선배를 위해 김태민이 추가로 달걀을 삶은 게 분명했다.
유현이는 그걸 돕는 중이고.
'암컷 침팬지에게 바나나를 선물하는 수컷 침팬지가 떠오르는 군.'
뭔가 애잔했다.
왜 항상 남의 연애는 웃긴지 모르겠다.
잘생긴 김태민도 결국 사랑 앞에는 별 수 없는 것이다.
"아, 수진 누나. 오디션은 어떻게 되었어요?"
수진 선배는 아직 화장과 머리를 고치지 않았다.
오디션 보러 간다고 비주얼 디렉터로 뽑은 전소혜가 수진 선배의 화장과 머리를 만져준 것이다.
전소혜는 메이크업 전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 수진 선배가 직접 하는 것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이었다.
"아, 오디션이 어떻게 되었냐면······"
"내가 말해줄게. 얘가 오늘 얼마나 웃겼는데."
정화 선배가 대답을 가로챘다.
나도 정화 선배가 들려주는 대답이 훨씬 정확할 거라고 생각했다.
* * *
수진 선배가 찾아간 오디션.
정화 선배가 매니저 역할로 동행했다.
아직 영화의 사전 제작 단계.
그리고 수진 선배도 전문 배우가 아닌 만큼 정식 오디션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자리였다.
그래도 김제우 감독과 배동식 감독, 두 명의 촬영 스태프가 추가로 동석한 자리였다.
수진 선배는 먼저 간단한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다.
"원래 예쁜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진짜 잘 받으시네요. 너무 예뻐서 주인공에게 가야 할 시선까지 뺏는 것 말고는 다른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카메라 테스트는 가볍게 통과.
그리고 배동식 감독과 김제우 감독의 이어지는 질문들.
"저희가 건넨 오디션 제의에 흔쾌히 승낙해 주셨는데요. 평소 영화나 연기 쪽에 꿈이 있으셨습니까?"
"있긴 있었지만, 대단한 꿈은 아니고요. 그냥 제 또래 여자들이 갖는 일반적인 동경이나 호기심 정도입니다."
'아, 그렇게 대답하면 어떡해.'
뒤에서 보고 있던 정화 선배는 수진 선배의 너무 솔직한 답변에 자기 이마를 때렸다고 한다.
하지만 뜻밖의 반응들.
"오, 재밌군요. 영화가 꿈이라느니, 자기 인생이라느니, 항상 판에 박힌 답변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솔직한 답변을 듣는군요. 감독과 배우 사이에 솔직한 유대가 있어야 좋은 영화가 나오거든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나도 전에 아이돌 가수 한 녀석이, 영화에 자기 두 번째 인생을 걸겠다고 해서 속으로 실컷 비웃었지. 수진 씨는 확실히 솔직해서 좋군요."
그리고 연기 테스트.
"저희가 보내드린 스크립트 받으셨죠? 그 스크립트를 기반으로 간단한 연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그 스크립트를 연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영 아트 출연 중이라서요. 저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라서 보내주신 스크립트를 충분히 연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준비 없이 온 걸까?
역시 오디션을 미뤘어야 했던 걸까······
수진 선배의 대답을 듣고 정화 선배가 대신 맘을 졸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뜻밖의 대답.
"아, 저희가 바쁜 분을 무리하게 뵙자고 했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건, 굉장히 좋게 보이는 군요."
"맞아. 영화 찍다가 CF찍으러 가는 배우들 보고 있으면 감독들은 속으로 열불이 터지지. 수진씨, 혹시 앞으로 유명해지더라도 자기 철학을 계속 지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스크립트는 어차피 확정된 시나리오도 아니라 상관없습니다."
정화 선배는 이때부터 조금 혼란이 왔다고 한다.
'원래 오디션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그리고 스크립트 대신 수진 선배는 영 아트에서 연습했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이어지는 뜻밖의 반응.
"확실히 수진씨는 재능이 있으세요. 요즘 어린 배우들은 전부 학원에서 연기를 배워서 똑같은 연기를 하죠. 수진씨는 달라서 좋네요. 물론 수진씨도 발음이나 발성 교정은 받아야 합니다."
"맞아. 연기를 잘 하는 게 재능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게 재능이지."
"이수진씨. 다행히 이번 영화는 아직 일정이 느긋합니다. 영 아트 촬영이 끝나고 다시 오디션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일주일 정도 연기를 교정 받으실 수 있도록 저희가 학원도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렇게 술술 일이 잘 풀렸다고 한다.
* * *
"영화감독들이 원래 그렇게 친절한 사람들이야?"
"저야 모르죠."
워낙 예쁜 사람이니 꼭 붙잡고 싶었는지도.
어쨌든 오디션이 잘 끝난 것 같아서 둘은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떡볶이도 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수진 선배는 영 아트가 끝나면 다시 오디션을 볼 계획이라고 했다.
수진 선배 본인도 적당히 기대하는 모양.
흘끔 김태민을 쳐다봤더니 서글픈 표정으로 계란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난 눈물 흘려. 너를 기다릴 뿐.]
문득 그런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하긴 자긴 군대에 가야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만인의 연인이 될 지도 모르니까.
나도 같이 마음이 아파왔다.
그래서 슬쩍 술이 땡겼다.
'그나저나 내일이 영 아트의 마지막 경연인데, 비장한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거야?'
오히려 다행스러운 느낌.
그냥 평소에 학교 과제를 해내듯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즐겁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게 더 좋은 결과물을 이끌어 낼 지도 모르니까.
시작은 떡볶이였지만, 결국 우리는 술병을 열었다.
요즘 들어 술을 자주 마시는 것 같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대학생들이 모이면 당연히 술이지.'
우리가 미대생이라 그런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어린 대학생들은 전부 집단 알코올 중독인 것 같다.
"형원 오빠랑 한철이도 부를까? 두 사람도 부르기엔 안주가 너무 초라한데······"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아직 재벌은 아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갑질을 할 수 있다.
"뭐가 걱정이에요? 제가 있잖아요. 돈 많은 사장님."
그렇게 우린 또 밤늦게 마셨다.
* * *
드디어 최후의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제 스튜디오에는 팀 수진과 최성진의 두 팀 뿐이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더 많은 질문과 카메라가 집중되었다.
최종 미션이 주어지기 전에 최성진, 윤상희 작가의 작업과 우리의 경연 과정이 길게 상영되었다.
"자, 이제 길고 긴 영 아트의 마지막 경연의 순간이 왔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쇼. 그 특별한 기획만큼 화제와 논란이 있었는데요. 여기 계신 두 팀과 또 많은 젊은 예술가들 덕분에 지금은 모두가 기대하는 방송이 되었습니다."
평론가 하종호에게 마이크가 갔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술로 어떻게 쇼를 만들까, 호기심에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정된 시간 안에 방송에 나갈 작품을 만드는 게 불가능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최성진 작가님은 자기 명성에 걸맞게, 또 팀 수진은 젊은 재치와 기발함으로, 각자 지금까지 잘 해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경연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이크는 최성진에게 전해졌다.
"먼저 즐거운 기회를 주신 채널 컬처온과 또 심사 때마다 좋은 말씀을 들려주신 심사위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팀 수진, 멋진 동생들과 끝까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어이, 최성진씨.
방송 중에 갑자기 친한 척 하지 말라고.
우린 대기실에서 인사 한 번 나눈 게 전부잖아.
나중에 결승이 끝나고도 내가 멋진 동생으로 보이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그리고 드디어 정경아가 마지막 경연의 주제를 발표했다.
"이번 미션은! 자유주제입니다!"
응? 자유주제?
"기간은 일주일. 컬처온에서 미리 준비한 작업실에서 자유롭게 각자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면 됩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은 3일 동안 전시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마지막 작품인만큼 어떻게 해야 아티스트가 가진 최고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다 결정된 미션입니다. 자유롭게! 무엇이든 원하는 걸 만들면 됩니다."
자유주제?
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유주제라면 최성진이나 윤상희 작가에게 유리할 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제까지 만들어오던 작품들이 있으니까.
그 작품들로 인정을 받고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니 평소 만들던 작품들을 기반으로 시작할 수 있다.
과연 슬쩍 쳐다봤더니 최성진이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고작 미대생들.'
제로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도 해 볼만 하다.
원하는 걸 마음대로 시도할 수 있으니까.
자유주제는 진행자 정경아의 말대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는 미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