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21화 (121/203)

■ 121. 나쁜 남자 □

"대체 내가 뭘 본 거죠? 나만 지금 홀린 것 같나요?"

영 아트 메인 스튜디오 촬영장.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예철 교수가 말했다.

"아, 안심하세요. 저도 지금 그러니까요. 팝업북. 저도 아이를 키워서 집에 팝업북이 몇 권 있어요. 그런데 이게 정말 일주일 만에 가능한 건가요?"

이건 국선정 교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경원 큐레이터가 뭔가 익숙한 말을 뱉었다.

"대체 당신들 정체가 뭐죠?"

영 아트 4강전도 2주에 걸쳐 방송된다.

한 주에 두 팀씩.

한 번의 승부가 방송되는 것.

그래서 오늘은 우리와 강우 크루, 두 팀만 스튜디오에 나와 있었다.

* * *

먼저 강우 크루의 작업이 상영되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뮤직 비디오.

강우 크루는 워크디스웨이라는 3인조 남성 밴드를 선택했다.

뮤직 비디오의 내용은 심플했다.

워크디스웨이 세 명이 스프레이로 길과 벽에 아무렇게나 의미 없는 색을 칠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럼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강우 크루 두 명이 따라가며 스프레이 자국들을 즉석에서 그림으로 바꿔버렸다.

'이건 이거대로 마법이군.'

강우 크루는 역시 강적이었다.

벽마다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순식간에 그림들이 피어났다.

강우 크루는 한국 최고의 그래피티 팀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경아의 진행.

"다음은 팀 수진입니다. 그런데 팀 수진의 발표는 특별히 작품을 먼저 감상하시고, 준비 과정은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이유는 작품을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여기까지가 우리 작품이 상영되기 전까지 있었던 일이다.

영상의 내용은 우리 계획 그대로였다.

그런데 우리 생각보다 훨씬 잘 나왔다.

우리 팝업북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이 최선을 다해주었고 꽤 근사한 작품이 나왔다.

[ 어둠이 걷힐 때야 난 비로소 알게 되었어. 난 잠들지 못한 게 아니라, 벌써 꿈꾸고 있었다는 걸. ]

이세연은 노래를 부르며 방 안을 펼쳐진 팝업북들로 채워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팝업북을 펼치면, 그 안에는 이세연의 방과 창가에 서 있는 소녀가 들어있다.

끝으로 팝업북 속 창밖 밤하늘을 비추며 뮤직 비디오가 마무리된다.

그리고 우리의 작업과정이 나중에 상영되었다.

항상 독설로 유명하던 하종호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CF같은 데서 이런 거 많이 봤잖아요. 난 그게 다 CG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수작업이라니. 이건 진짜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작업 과정을 보지 않았다면 저는 끝까지 믿지 않았을 겁니다."

심사위원들의 반응을 보면서 우린 고생했던 지난 며칠들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강우 크루가 워낙 강력해서 승리를 예측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 우린 충분히 우리 팀이 자랑스러웠다.

"어휴."

국선정 교수가 마이크를 붙잡고는 한숨을 뱉었다.

"이건 심사를 하러 온 게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러 온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두 팀 중 한 팀을 고르라는 건지. 오늘 하나 결심을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슷한 쇼에는 출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국선정 교수의 엄살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자,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심사위원님들은 이제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자 정경아가 심사위원들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들은 평소보다 긴 회의를 가졌다.

우린 이제 별로 긴장되지도 않았다.

설령 진다하더라도 상대는 국내 최고의 강우 크루.

우린 할 만큼 했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이, 강우 크루 두 형들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까지 들어줬다.

'멋있는 형들. 이따 방송 끝나고 꼭 번호 받아 둬야지.'

그런 결심을 할 만큼 여유도 생겼다.

"자! 드디어 심사위원분들이 결정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정경아가 소리치듯 외쳤고, 우린 다시 카메라를 향해 똑바로 앉았다.

과연?

결과는?

먼저 유예철 교수가 마이크를 붙잡았다.

"일단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두 팀은 선택한 표현의 방식이 다릅니다. 두 팀의 인원도 다르고, 두 팀이 고른 음악도 다르죠.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상대적입니다. 처음부터 예술은 경연을 위한 게 아니니까요. 우린 선택을 강요받아서 한 팀을 골랐을 뿐입니다. 두 팀 다 훌륭한 예술가고, 오늘 좋은 작품을 보여줬습니다. 저는 분명 두 작품 모두 재밌게 잘 봤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박경원 큐레이터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유예철 교수님이 치사하게 혼자 빠져나갈 구석을 만드시는 군요."

재미있는 농담 같았는데 전혀 웃기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이제 져도 괜찮아.'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발표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쿵쾅 거렸다.

"저희 여섯 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제가 제일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팀을 우승자로 꼽아야 한다고. 저도 두 팀 모두 완성도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완성도를 끌어내는 과정은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둘 중 한 팀은 자기들이 늘 해오던 방식대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완성도가 높겠지요. 그리고 또 한 팀은 아무도 예상 못한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설마 우리의 손을 들어주는 건가?

마지막으로 국선정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국선정 교수는 평가에서 늘 우리를 응원해주는 교수였다.

"저 역시 박경원 큐레이터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편하게 콕 집어서 말하겠습니다. 강우 크루의 작품은 다른 음악가의 음악에도 어우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연성이 부족했다고 할까요? 하지만 팀 수진의 작품은 이세연 밴드의 이브닝이라는 곡에 맞춤옷처럼 들어맞았습니다. 저는 거기에 점수를 부여했습니다."

어? 설마 우리가 강우 크루를 이기는 것인가?

그리고 국선정 교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누구나 알 듯이 예술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애정과 진정성입니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인 지표가 될 수 없고, 또 경쟁의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두 팀 모두 최선을 다해 끝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오늘의 승자를 정하겠지만, 그것은 절대 작품의 우열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승자는 바로!"

진행자인 정경아가 '팀 수진'을 외쳤다.

'맙소사.'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간절히 이기고 싶었지만, 이겼다는 사실은 끝까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곧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강우 크루의 우정용이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심사위원님들은 오늘의 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고민했다고 하셨지만, 저희 생각은 다릅니다. 저희는 팀 수진의 작품을 보는 순간 저희가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작품은 언제나 놀랍고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가 그래피티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팀 수진의 작품이 오늘 저희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줬습니다. 만약 팀 수진이 아니라, 우리가 승자였다면 저는 항의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 형들 끝까지 너무 멋있었다.

그런데 독설가인 하종호가 마이크를 붙잡았다.

"진짜요? 그건 약간 무책임한 발언 아닌가요? 영 아트에 참여한 강우 크루의 지난 인터뷰를 보면, 음지에서 고생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을 알리고 싶어서 출연했다고 하셨는데요, 원하는 목적을 충분히 이루신겁니까?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학생들에게 지고도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강우 크루의 강현민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예술가의 나이를 따지는 건 정말 유치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최선을 다했고, 질만한 팀에 졌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팬의 입장에서 팀 수진의 다음 작품을 즐겁게 기대할 생각입니다."

"정말 즐거울 수 있습니까? 영 아트의 상금이 얼마인지 알고 계시죠?"

자기를 유치하다고 말하자 하종호가 발끈했다.

그래서 더 유치하게 말꼬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강현민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애초에 돈을 원했다면 그래피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하다보면 새로운 기회는 얼마든지 또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녹화가 마무리 되었다.

어쨌든 우리가 결승에 진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녹화가 끝나자마자 우린 곧바로 강우 크루를 찾아가 인사했다.

"팀 수진의 작품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응원할게요. 나중에 결승까지 끝나면 모두 모여서 같이 소주나 한 잔 하죠."

"물론입니다. 결승전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대한다고 했으니까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그런데 형원 선배가 갑자기 뜻밖의 말을 했다.

"저, 실은 늘 타투를 새겨보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상담을 드려도 될까요?"

강우 크루의 우정용은 타투이스트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형원 선배가 타투라니.

정말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왜지? 강해보이고 싶었던 걸까?'

우정용은 즐겁게 웃었다.

"상담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단 가격 에누리는 없으니까 꼭 우승 상금을 타서 오세요."

* * *

며칠간 너무 무리했던 탓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골아 떨어졌다.

노력상점의 [압축잠]을 이용했지만, 몇 시간 더 잠들고 말았다.

알람도 맞춰뒀는데 일어나보니 밤 10시였다.

그리고 집에는 유현이와 김태민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하이 유나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응?"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하자 불이 켜져 있고 유나가 사장 책상에 앉아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어났어? 사무실 일은 내가 다 끝냈어."

"아, 미안. 너무 피곤해서 잠 들었나 봐."

"아냐. 너 며칠간 고생 많았잖아. 일부러 내가 유현이한테 너 깨우지 말라고 했어."

다행히 오늘은 새벽부터 노력상점의 6시간을 채워둬서 늦잠은 문제되지 않았다.

다만 매일 저녁 출근해서 일 마무리하기는 내가 스스로에게 정한 규칙이었다.

그걸 지키지 못하다니.

"주원아."

"응?"

"너 이번에 진짜 멋있었어. 매일 새벽까지 남아서 팝업 만들고, 틈틈이 사무실 일도 처리하고, 마지막 날은 뮤직 비디오 촬영까지 혼자 찾아가서 끝까지 마무리하고."

"뭐, 당연히 내가 늘 하던 일이니까."

"언제나 그렇게 당연하게 고생을 도맡아주니까 너무 듬직한 것 같아."

"진짜?"

"응. 진짜."

평생 기대고 싶을 만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을 했다가는 또 좋은 분위기를 날리겠지.

이주원,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해서 유나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물을 치자.

그런데 미처 생각을 시작하기도 전에 유나가 먼저 말했다.

"주원아, 오늘 찜질방 가자."

찜질방?

내가 맞게 들은 걸까?

깊은 밤.

자기를 쫓아다니는 남자에게 찜질방에 가자고하는 스물한 살 소녀의 심리는 과연 무엇일까?

'그래, 유나야. 너도 지난번 찜질방이 뭔가 아쉬웠구나.'

지난 번.

유나는 반쯤 내게 안기듯 찜질방에서 잠들었다.

다만 그때는 유나가 너무 피곤해보였고, 시간도 얼마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착한 남자를 연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가끔 나쁜 남자가 되는 것도 괜찮겠지.'

후후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내 머릿속에 헐렁한 찜질복을 입은 유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밤은 길고, 찜질방은 넓지.'

찜질방은 공개적인 장소.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몸을 숨길 곳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 유나에게 고백을 거절당하는 중이다.

그래도 의지의 사나이, 이주원.

은근슬쩍 착실하게 스킨십 포인트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 밤 또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긴다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차하면, 내게는 고이 아껴둔 소원권도 두 개나 있지.'

역시 유나.

내 그간의 고생을 알고 이제 보상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가자 찜질방.

유나가 원한다면 기꺼이 함께 해야지.

그때, 덜컹.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수진 선배와 김태민, 정화 선배가 들어왔다.

뒤이어 유미와 유현이도 들어왔다.

그들 손에는 이것저것 많이도 들려 있었다.

"유나야, 루미 큐브랑 부루마블이랑 트럼프 카드까지 사왔어. 이 정도면 밤새 놀 수 있겠지?"

밤새 놀다니요?

정화 선배,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와 유나는 찜질방에 가야 합니다만?

그리고 수진 선배가 나에게 따졌다.

"야, 이주원! 너 유나랑 단둘이 찜질방 갔다며? 우리도 찜질방 얼마나 좋아하는데. 치사하게."

그게 치사한 건가요?

"누나, 그거 알아요? 구운 계란이랑 얼음 수정과 같이 먹으면 겁나 맛있어요."

이건 김태민.

"그래, 사장님한테 전부 사달라고 하자."

꼭 이럴 때만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덜컹.

그리고 한 번 더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철이와 형원 선배도 들어왔다.

그리고 한철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와! 나 찜찔방 완전 좋아하는데. 내가 등판이 좀 넓잖아. 그래서 혼자 목욕탕 가면 완전 고생하거든! 주원아, 오늘 내 등 좀 빡빡 밀어줘."

왜 하필 나를 콕 찝어서 지목하는데?

저기 김태민도 있는데.

꿈은 유나였지만, 현실은 한철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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