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17화 (117/203)

■ 117. 집들이 □

벌써 늦은 오후.

모처럼 날 잡아서 사무실 일을 돌봤더니 뿌듯하고 알찬 하루였다.

'한 가지 일만 제대로 신경 쓸 수 있다면.'

일이 재미없고 피곤한 것은 어쩌면 생각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이든, 공부든 한 가지 일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무엇이든 꽤 재미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장 상사든, 학교 선생이든, 선배나 친척이든, 세상은 사람들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난 다른 사람들에게 휴식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친구들이나 유나 혹은 어머니가, 피곤할 때 나를 떠올리면서 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두 번째 삶이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힘이 되어주는 삶을 살고 싶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그건 제가 마무리할게요."

"이제 거의 끝나가요."

"그러니까요. 제가 마무리 할게요."

나는 원 디자인의 승희 씨에게 말했다.

승희씨는 이제 원 디자인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디자인 인력지원부터 사이트 세팅, 회사 경영 전반까지.

나는 거의 원디자인을 신경 쓰지 않아도 회사가 잘 돌아갈 정도였다.

승희 씨가 없었다면 하이 유나도 없었을 것이고, 방송도 없었을 것이다.

내게는 정말 고마운 사람.

이제는 직원이라기보다는 누나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 승희씨가 하던 일이 단순 업무라 내가 맡기로 하고, 정시 칼퇴근시켰다.

그렇게 산뜻하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나의 집.

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왔다.

김태민은 아직 도착 전이었고, 한철이와 형원 선배, 유미와 유현이까지 이미 와 있었다.

집안에는 젊은 사람들 특유의 활기와 에너지가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젊은 사람들이 항상 밝은 건 아니겠지.'

나이든 사람만큼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위축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팀 수진은 전부 건강하고 성실하고 재미있는 사람들.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사람들.'

내가 이 사람들 사이에 속한다는 사실이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유현이랑 같이 만들었어."

"고생했어, 유나야."

머리를 묶은 유나는 뿌듯한 얼굴로 자기가 만든 요리들을 내려다봤다.

배달음식은 너무 자주 먹으니까, 집들이를 기회 삼아 유나가 모처럼 요리를 한 것이다.

특히 수진 선배의 생일이기도 했으니까, 유나가 더 정성을 쏟고 싶었던 모양.

둘은 같이 살아서 정도 많이 들었고, 또 하이 유나의 모델일로 도움을 많이 받아서, 고마운 마음도 컸다.

그러니 유나의 성격상 손수 요리를 할 수 밖에.

잡채랑, 불고기랑, 나물 반찬들이랑 또 여러 가지들.

그렇게 음식들이 끝도 없이 차려졌다.

물론 음식이 많아도 절대 걱정은 없다.

'김태민과 김한철 두 먹성 좋은 덩치가 있으니까.'

10대 소년 한유현도 마찬가지고, 21살 이주원도 지지 않는다.

그래서 차려지는 음식만 봐도 벌써 모두들 신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린 음식상 주위에 빙 둘러 앉았다.

"그런데 태민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배고픈데.""그러게 누나들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오면 따끔하게 혼내야지."

다행히 곧 도착한 김태민.

그런데 김태민은 손에 커다란 상자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덕분에 기대감이 수직 상승했고, 김태민을 혼내겠다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설마 그 상자 내 생일 선물이야?"

"비슷해요."

"우와. 이게 뭐야?"

김태민이 풀어놓은 상자를 보고 수진 선배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

김태민이 집들이 상 가운데 내려놓은 것은 커다란 케이크였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파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압도적인 크기와 비주얼.

"누나 생일이라서 엄마한테 배우면서 같이 만들었어요. 우리 엄마 취미가 빵 굽는 거거든요."

투박하지만 그래서 더 뭔가 있어 보이는 수제 케이크.

그런데 잠깐.

'김태민의 어머니라면 산양 미술관의 관장님?'

대형 미술관의 관장이라면 미대생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산봉우리 같은 존재다.

스물두 살 미대생의 생일 파티에 관장님 메이드 케이크가 등장하다니.

이렇게 황송할 수가.

왠지 이 케이크를 먹으면 그림을 열심히 그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김태민은 가져온 종이봉투도 열었다.

그 안에서 꺼낸 것은 샴페인 병이었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지만, 이름은 모두 아는 바로 그 브랜드였다.

역시 월드클래스 김용철 작가님.

대학생들이 모인 소박한 집들이가 갑자기 럭셔리해졌다.

"이건 친구 생일 파티 간다니까 아버지가 챙겨 주셨어."

"으악."

"자, 모두 한 잔씩 받으세요."

호화 샴페인마저 모습을 드러내자, 혼내겠다는 누나들은 김태민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큰누나. 큰누나가 내 보호자니까 나도 마셔도 되지?"

"언니, 나 수능 끝났으니까 나는 마셔도 되지?"

"모두 꿈 깨."

"아, 언니!"

"큰누나!"

두 동생들이 유나의 양 옆에 매달려 한참을 애원했다.

"샴페인 정도는 괜찮지 않아?"

형원 선배와 나까지 같이 두 동생을 거들었다.

"그럼 유미는 반 잔. 유현이는 딱 한 모금만."

그렇게 유나가 판결을 내리고, 우린 드디어 파티의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신나게 먹고 마셨을 때, 유나가 내게 사인을 보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에서 품에 가득 선물 상자를 들고 왔다.

수진 선배의 생일이기도 했고, 또 팀 수진의 방송 출연으로 하이 유나는 엄청난 매출 상승이 있었다.

그래서 유나와 함께 친구들의 선물을 준비했다.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지만, 겸사겸사 감사의 선물들.

"먼저 오늘의 주인공 수진 선배 꺼. 안심하세요. 유나가 골랐으니까."

"끼약!"

내가 건넨 상자를 풀어보고 수진 선배는 소리를 질렀다.

유나가 고른 선물은 반짝 거리는 목걸이.

나야 보석은 봐도 잘 모른다.

다만 수진 선배가 저렇게 기뻐하니 성공인 모양이다.

그리고 비슷한 상자 하나를 정화 선배에게도 건넸다.

"제가 항상 선배한테 고마워하는 거 알죠?"

정화 선배는 모델도 하고 코디도 해주지만 플러스알파가 있었다.

어른스럽기도 하고 영리하기도 해서 하이 유나를 운영하다 고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연락하는 사람이 바로 정화 선배였다.

작년에 정화 선배의 생일을 챙길 땐 하이 유나가 없어서 지금처럼 럭셔리한 선물을 해주진 않았다.

그래서 수진 선배 선물을 고르는 김에 정화 선배 선물까지 같이 고른 것이었다.

"고마워. 주원아, 유나야."

평소 쿨한 정화 선배가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다니.

이번에도 성공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형원 선배.

이번에는 내가 직접 고른 선물이었다.

"형, 이건 형 거예요."

"어? 내 것도 있어? 내가 뭘 했다고?"

"어서 풀어 봐요."

형원 선배는 자타공인 팀 수진의 일등공신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같이 기숙사를 쓸 때 한철이와 함께 새벽까지 불 켜놓고 일해도 한 번도 불평한 적 없는 고마운 형이었다.

한철이는 원 부동산과 각종 코딩 외주로 같이 일하며 내가 챙겨줄 기회가 많았다.

김태민과 두 선배도 하이 유나에서 같이 일하니까 마찬가지.

다만 형원 선배는 나와 금전적인 접점이 없어서 따로 챙겨줄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형원 선배의 선물도 같이 골랐다.

항상 난해한 여자 선물만 고르다가 내가 아는 분야의 선물을 고르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어? 이건 엄청 비싼 거 아니야?"

내가 고른 선물은 노트북.

형원 선배의 노트북이 좀 낡아 보여서 졸업을 앞두고 고른 선물이었다.

"소설가가 카페에서 글 좀 쓰려면 역시 노트북 뚜껑에 이 마크가 있어야죠."

"아, 내가 이렇게 비싼 걸 받아도 되는 거야?"

"당연히 되죠."

"고마워, 주원아. 왠지 이 노트북은 글이 술술 나올 것 같아."

그게 다가 아니다.

카페에서 이 노트북으로 글을 쓰면,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유미에게도 작은 상자를 건넸다.

"내 것도 있어요?"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어."

포장을 뜯어보고 유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빠, 진짜 고마워요."

처음 만난 여름 날, 유미는 내게 슬픈 상처를 줬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형부의 숙명.

유미와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

내가 고른 유미의 선물은 신형 핸드폰이었다.

깔끔하고 얇은 디자인의 모토롤라 레이저.

초콜릿폰이나 문근영폰도 나름 인기가 있다고 했지만, 미대생의 시각에서 가장 예쁜 전화기는 역시 모토롤라의 레이저였다.

유현이가 자기 껀 없냐는 듯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넌 공부해야지. 전화기는 대학 가면 사는 거야."

하지만 유나가 옆에서 칼 같이 차단.

그래도 유현이를 빼먹을 순 없지.

내 든든한 아군.

유현이에겐 농구화를 선물했다.

여전히 핸드폰이 더 탐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농구화도 꽤 신나는 모양이었다.

우린 그렇게 선물 잔치까지 마쳤다.

꽤 큰돈을 쓰긴 했지만, 친구들이 모두 기뻐해서 뿌듯했다.

돈이야 쓴 만큼 더 벌면 되니까.

"배부르다. 이제 노래방 가자! 노래방!"

실컷 먹고 마신 후, 기분 좋아진 수진 선배가 외쳤다.

수진 선배는 요즘 노래방에 재미를 붙였다.

수진 선배 생일 파티니까 하자는 대로 해야지.

오늘도 통아저씨 춤을 볼 수 있겠구나.

"그럼 먼저들 가 있어요. 금방 따라갈게요."

그렇게 모두 먼저 출발하고 나와 유나만 남았다.

내가 남은 이유는 간단히 치우고 가려고.

이따 밤늦게 돌아와서 치우면 힘드니까.

"나 혼자 치우면 돼. 너도 노래방 먼저 가."

"아니야. 내가 요리했으니까 마무리까지 잘 해야지. 내가 설거지 할게, 넌 반찬들 정리해."

그리고 유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걱실걱실 빈 그릇들을 씻었다.

갑자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

나는 살금살금 뒤에서 유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싱크대 앞의 유나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뭐야."

뭐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나는 가만히 안겨서 내게 살짝 몸을 기댔다.

"고마워. 맛있는 요리도 해주고. 설거지도 도와주고."

"고마우면 나한테 잘 해."

"평생 잘 할게."

나는 진지했는데, 유나는 내 내답에 키득거렸다.

"아, 진짜 그 놈의 평생."

물론 지금은 사소한 저항이 있다.

하지만 계속 주입하다보면 유나도 나중엔 평생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우린 잠시 그대로 안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유나가 물었다.

"너 오늘도 노래방 가서 트로트 부를 거야?"

"당연하지. 유현이랑 태민이까지 셋이서 삼중창으로 불러줄게."

유현이는 원래 트로트를 잘 알았고, 김태민은 요즘 내가 가르치고 있었다.

* * *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로 뽑은 비주얼 디렉터 전소혜와 나, 팀 수진 세 명은 회의를 가졌다.

"하이 유나의 촬영분이랑 상품 사진들을 전부 살펴봤어요. 그래서 몇 가지 의견을 가져왔어요."

전소혜는 29세.

하지만 20살부터 10년 가까이 이 쪽 분야에서 일해 온 베테랑이었다.

전소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지금 하이 유나의 메인 모델은 세 분이세요. 그런데 세 분은 느낌이 달라요. 당연하죠. 셋이 다른 사람이니까. 얼굴도 다르고 체형도 달라요. 하지만 연출한 스타일은 서로 비슷해요. 여대생들의 일상룩? 코디 사진을 보면 세 사람의 옷 색깔만 달라지는 정도에요. 조금 더 과감히 세 분의 스타일을 세분화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소혜의 지적에 팀 수진 세 사람이 진지하게 물었다.

"세분화라면, 어떤 식으로 나누는 게 좋을까요?"

"일단 정화 씨는 키도 크고 몸매도 이목구비도 서구적이에요. 메이크업부터 헤어까지 조금 더 과감한 시도를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수진 씨는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선망하는 스타일이죠. 조금 더 고객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줘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유나 씨는 옷빨이 제일 좋으세요. 스쿨룩이나 정장 쪽으로 특화시키면 메리트가 있을 거예요. 셋이 컨셉을 정하고, 역할을 나누면 더 많은 상품을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분이 비슷한 스타일을 연출하는 것은 서버 데이터의 낭비죠."

으음.

따끔한 지적.

물론 유나를 비롯한 세 사람이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셋은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모델 본능과 함께 약간의 망설임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과감한 시도보다는 자신 있는 일상복 위주로 코디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전문가가 왔으니 달라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전소혜의 따끔한 지적은 계속 되었다.

"특히 세 분 다 헤어와 메이크업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요즘 방송국에서 메이크업 받을 때마다 느껴요. 우리가 진짜 어설프구나, 하고."

"나도 그래. 우리 셋 다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아."

"음, 그럼 이건 어떨까요?"

내가 말하자 네 명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아마 내 생각에 우리 쇼핑몰 손님들도 전부 세 사람과 비슷할 것 같아요. 나이도 성향도. 그러니까 메이크업 선생님을 고용해서 화장을 배우는 과정을 유나's 다이어리 에 올리면 어떨까요? 쇼핑몰 사진처럼 화장하는 방법. 코디 사진처럼 머리 만드는 방법, 이런 식으로."

그러자 네 사람의 눈빛이 반짝 거렸다.

"괜찮은 메이크업 선생님은 제가 섭외할 수 있습니다."

전소혜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역시 사람을 잘 뽑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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