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전생의 한 □
"어, 신기하다."
"뭐가?"
"나 찜질방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제주도에도 찜질방 많거든. 엄마, 아빠랑 자주 갔는데."
그랬군.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히 몰랐지.
"그냥, 네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 걱정돼서 그렇게 말 한 거야."
내 다정한 말투에 유나가 귀엽게 웃었다.
"그래, 가자, 찜질방. 재밌겠다."
"고마워."
"응?"
아차, 말실수를 해버렸다.
지난 생.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정말 1년에 한 두 번씩, 꼭 밤을 세어야 하는 사고가 터지곤 했다.
그런 사고가 터지면 새벽에 집에 가기엔 낭비 같고, 회사에 남아서 아침을 맞기엔 우울하고.
그럼 찜질방에 갔다.
따뜻한 황토방에서 몸을 녹이고.
달아빠진 아이스 다방 커피를 들이키고.
그렇게 새벽 시간을 때우고, 나는 다시 회사로 출근하곤 했다.
어차피 집에 가 봤자 따로 반겨주는 이도 없는 고독한 중년 아재의 삶.
서글프고 외로웠던 긴 삶.
그런데 그렇게 새벽에 찜질방에 가면 꼭 염장을 지르는 대학생 커플이 있었다.
서로 귓속말을 하며 키득 거리고.
모두 잠든 줄 알고 스리슬쩍 스킨십도 시도 하고.
서로를 마주보고 맥반석 계란을 까서 입에 넣어주는 어린 커플들.
'그때부터였을까."
다시 환생하고, 꼭 한 번 가고 싶었다, 찜질방.
단 혼자가 아니라, 예쁜 썸녀랑 함께.
그런데 드디어 꿈을 이룬 것이었다.
그것도 내가 질투하던 커플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예쁜 유나와 함께.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고마워'라는 말이 세어 나오고 말았다.
"응?"
"아, 네가 너무 피곤해보여서 걱정했거든. 내 말대로 따라줘서 고맙다고."
유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유나는 찜질방 근처의 드럭 스토어에 가서 이것저것 사소한 준비물 몇 개를 구매했다.
그리고 경쾌하게 말했다.
"자, 가자. 찜질방."
우린 카운터에서 두 사람 몫의 금액을 지불했다.
"유나야. 그럼 이따 봐."
"빨리 씻고 갈게"
아니, 내가 아무리 멍청해도, 목욕탕 앞에서 여자의 말을 믿는 그런 바보는 아니다.
"괜찮아, 천천히 느긋하게 씻고 와."
어차피 나는 기다리게 될 테니까, 그냥 성격 좋은 척 연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들어간 남탕.
아재답게 제일 뜨거운 열탕에 가볍게 몸을 담가주고.
미래의 탈모 방지를 위해 정수리에 냉탕 폭포도 한 번 맞아주고.
핀란드 습식 사우나에서 땀도 좀 빼주고.
그렇게 신나게 놀았는데도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들은 대체 어떻게 두 시간씩 목욕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회귀까지 했어도, 도무지 풀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먼저 욕탕을 빠져 나와, 5층 건물을 통째로 쓰는 찜질방을 혼자 산책했다.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사전 조사 정도는 할 수 있지.
만화책은 어떤 게 있나 훑어보기도 하고.
식당 메뉴도 미리 읽어보고.
안마 의자에도 앉아봤다.
'안마 의자가 있는 곳은 피해야 겠군.'
유나의 안마를 두고 기계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안마까지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다니.
'스카이넷에 침범당한 인류의 심정이랄까.'
아무튼.
전생에서는 늘 혼자였는데.
혼자라도 당당한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렇지는 못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그것도 아주 예쁜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여유롭고, 느긋하고 뿌듯했다.
유나는 나를 어디서든 당당하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혼자 한참 돌아다녔는데, 멀리서 예쁜 실루엣이 다가왔다.
목욕을 마친 유나가 뽀얀 얼굴로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여기야!"
펑퍼짐한 찜질방 옷도 예쁜 사람이 입으면 다르구나.
괜히 쇼핑몰 모델이 아니지.
행복이 밀려왔다.
* * *
우리가 처음 간곳은 찜질방의 오락실.
"나 이거 할래!"
유나는 좀비 사격 게임에 고정된 분홍색 총을 붙잡았다.
나는 미리 바꿔둔 동전들을 집어 넣고, 옆의 하늘색 총을 붙잡았다.
그리고 두두두둥.
신나게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통해 느껴지는 진동.
쓰러지는 좀비들.
환호하는 유나.
정말 꼭 해보고 싶었던 찜질방 오락실 데이트.
오늘도 전생의 한을 하나 풀고 간다.
"끼약! 나 죽었다."
"감히 우리 유나를 공격하다니, 이 사악한 좀비들!"
유나에게 듬직해 보이도록 덤벼오는 모든 좀비들을 격퇴했다.
그렇게 한참 광란의 사격을 한 후.
이번에는 그 옆의 게임기에 앉았다.
"버튼을 난타해 도둑을 잡으세요!"
우다다다다다!
유나와 나는 미친 듯 버튼을 두드렸다.
그렇게 두드리다 보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기운도 다시 솟아났다.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 쯤, 유나가 말했다.
"재밌다. 그런데 이제 배고프다."
"그래, 밥 먹으러 가자."
촬영이 끝났을 땐,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유나가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식당으로 가서 음식도 주문했다.
"가락국수 두 개랑, 맥반석 계란, 그리고 얼음 식혜 두 잔이요."
우린 마주 보고 앉아서 차가운 식혜를 쭈욱 빨아마셨다.
머리가 띵해지는 만족감.
하루 한 군것질.
얼음 식혜는 정말 맛있어.
나는 구운 계란 껍질을 꼼꼼히 벗겨서 유나에게 건넸다.
"계란 노른자를 국수 국물에 적셔 먹으면 맛있어."
"자상해라."
유나가 감동한 듯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행복이 충만한 순간, 갑자기 고백으로 훅 치고 들어가면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회귀자의 노련한 직감으로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이주원 20세, 미대 1학년.
해가 바뀌었으니 21세, 곧 2학년.
드디어 여친이 생기는 것인가?
"유나야."
"응?"
후루룩 국수를 먹던 유나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유나야. 나랑 사귀면 구운 계란 먹을 때마다 언제나 내가 껍질을 벗겨줄게."
내 고백을 듣고도 유나는 침착하게 입안의 국수를 씹어 삼켰다.
"와, 정말 감동적이다. 거의 넘어갈 뻔 했어."
"진짜?"
"응. 그런데 식혜도 사준다고 했어야지. 계란만 주면 어떡해."
이런.
내가 식혜를 빠뜨렸구나.
회귀자답지 않은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다음에는 꼭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쉽게도 또 한 번 오늘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하지만 포기는 없다.
더욱 새롭고 기발한 고백으로 반드시 유나를 내 여친으로 만들 것이다.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데 주원아, 배부르니까, 졸려."
난 유나를 데리고 황토굴 중간 온도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따끈따끈한 바닥에 베개를 놓고 유나를 눕혔다.
"여기서 자. 내가 어디 안가고 옆에서 지켜줄게."
"그럼 한 시간 뒤에 깨워줄 수 있어?"
"더 자도 되는데?"
"유미, 특강 듣고 집에 오면 밥 챙겨 줘야 해."
"걔가 꼬마도 아니고 밥은 알아서 먹겠지. 피곤할 텐데 푹 자."
"싫어. 시험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챙겨줄래."
하는 수 없지.
그래도 이런 게 유나의 매력일 것이다.
평소엔 유미가 까칠하다고 그렇게 불평하더니.
'그런데 동생에게 이렇게 헌신적이라면 자기 아이들에겐 어떨까?'
분명 좋은 엄마가 되겠지.
난 그래서 마음속으로, 또 한 번 유나가 포함된 나의 미래에 대한 세세한 계획을 세웠다.
아무튼.
"그래, 한 시간 후에 깨워줄게. 나 믿고 푹 자."
유나는 피식 웃더니 내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쌔근쌔근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
어두운 토굴에 이렇게 누워 있으니 기분이 색달랐다.
'먼 옛날 원시시대에 암컷을 지키던 수컷 호모 사피엔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렇게 나는 인간의 종의 기원을 사색하며 뒤숭숭한 마음을 달랬다.
* * *
다음 날.
나는 모처럼 사무실에 일찍 출근해 이것저것 일을 봤다.
오늘은 면접이 있었다.
오늘 면접 볼 사람의 직함은 '비주얼 디렉터.'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지만, 업계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었다.
옷 스타일링부터 소품, 사진 컨셉부터 현장 총괄까지.
다시 말해 완성도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하이 유나의 매출이 어지간한 중소기업은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니 사진도 조금 더 전문성을 띌 필요가 있었다.
오전에 시작된 면접.
일단 이력서와 함께 받은 포트폴리오는 상당히 우수했다.
그리고 꽤 유명한 비주얼 디렉터의 추천장도 있었다.
"에르메스부터 랄프 로렌까지 외국계 브랜드의 시즌 런칭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다수의 잡지 촬영, ,에세이 기고 경력도 있고요."
젊은 비주얼 디렉터 전소혜는 또박또박 자기를 소개했다.
"하이 유나는 학생들이 시작한 쇼핑몰에서 출발했습니다. 지금 큰 변화를 겪고 있는데, 전소혜님이라면 어떤 전략을 취하실 건가요?"
"일단 하이 유나의 고객과 운영자간의 끈끈한 유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서로 믿고 대화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된 거죠. 그래서 사진 역시 꼼꼼하고 정직하게 촬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스튜디오 촬영의 비중이 크게 늘었는데, 그만큼 개성도 줄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녀의 분석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학생다운 옷, 기본 스타일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옷들이 매출의 중심에 서겠지만, 의류 쇼핑몰은 단순히 옷을 고르는 곳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보는 재미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의 범위를 넓힌다고 접근하지 마시고, 메인 모델인 이수진씨나 한유나씨의 스타일을 넓힌다고 접근하면 고객들의 좋은 반응도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고객층도 넓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특히 한유나 씨나 이수진 씨의 경우, 과감하게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고, 오피스룩이나 정장 등에 도전한다면 충분히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방향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비쥬얼 디렉터인 전소혜와 반외주 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경력직 프리랜서인만큼 생각보다 보수가 강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하이 유나의 '보는 재미'를 살릴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투자였다.
이번에 채용된 비주얼 디렉터가 일을 잘해준다면, 앞으로 더욱 여러 분야의 고급 인력들과 협업을 강화해 갈 생각이었다.
* * *
그리고 오늘은 내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사실 집들이는 핑계고, 촬영이 쉬는 날 팀 수진 멤버들을 모아 같이 먹고 마시며 단합을 다지는 자리였다.
그리고 곧 수진 선배의 생일이라 생일 파티도 같이 하기로 했다.
"주원아, 그럼 나 먼저 들어가 볼게."
나는 하이 유나와 원 디자인의 일로 바쁘니까, 유나가 먼저 퇴근해서 내 빌라에서 요리를 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주원 집들이의 요리를 한유나가 하다니.'
매우 바람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모든 이주원의 집들이 요리는 전부 한유나가 맡아 줬으면 한다.
꼭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유나가 퇴근하고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김제우 감독님. 오랜만입니다."
김제우 감독은 영화사 마당의 대표로 자기가 제작하는 모든 영화의 홈페이지를 내게 의뢰하고 있었다.
거기다 인맥도 넓어서 그가 소개해준 일만 다 더해도 억이 넘어간다.
그러니 내 VIP 고객이라 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전화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사장 바쁜 거 내가 잘 알지. 그래도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 좋군. 다름이 아니라, 내가 부탁이 하나 있어서 전화 했네."
"말씀하시죠."
김제우 감독은 일적으로도 내 VIP이지만 내가 최근에 부탁까지 한 적이 있었다.
바로 '무대 인생'팀의 미술팀 채용.
그러니 김제우 감독이 내게 부탁이 있다면 내가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자네가 출연하는 방송 잘 보고 있네."
"아, 감사합니다. 창피하네요."
이제 영 아트는 우리가 UN팀을 무찌를 때를 방송하고 있었다.
"창피하긴. 다름이 아니라, 자네 팀의 리더 말일세. 그 한수진씨?"
"이수진씨요?"
"아, 그래. 아무튼 수진씨."
"네."
"내가 그 분이 나온 동영상까지 봤다네. 자네가 그 귀신 분장하고 나온 거."
이런.
그 사진의 이해 과제가 이렇게 우리를 따라다닐 줄은 몰랐다.
"그걸 보셨군요."
"그런데 그걸 본 감독이 나만이 아니야. 배동식 감독이라고 알고 있나?"
"들어본 것 같습니다. 유명하신 분이 아닌가요?"
"맞아. 실력 있는 사람이지. 우리 영화 쪽 사람들한테는 더 유명하다네. 그런데 내가 그 사람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 배 감독이 수진씨를 한 번 오디션 보고 싶다고 하는 거야."
"오디션이요?"
"어, 오디션. 내 생각에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도 적극 추천하네."
생각보다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수진 선배 정도면, 언젠가 공인이 될 외모라고 우리끼리 자주 농담하곤 했었다.
게다가 수진 선배는 실제로 길거리 캐스팅을 몇 번 당한 적도 있다고 했다.
드디어 올 게 왔을 뿐.
나는 김제우 감독에게 우리가 TJ 엔터와 맺은 출연 계약을 설명했다.
"그럼 내가 그쪽이랑 협의를 해야 하는 거군."
"네. 그럴 겁니다. 그래도 일단 저도 수진씨한테 말은 해두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주게. 분명 좋은 기회일 거야. 이쪽에 뜻이 있다면 말이야."
내 주변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재미있게 느껴졌다.
우리의 삶이 조금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 변화가 나와 친구들에게 나쁘지 않도록 내가 잘 이끌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