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낭만에 대하여 □
"그럼 모두 푹 쉬세요. 내일도 촬영이니까 푹 자야죠."
그렇게 팀 수진은 해산했다.
"유나야, 너도. 몸살 걸릴라. 푹 쉬고 유미랑 맛있는 거 시켜먹고 푹 자. 사무실에도 가지 마. 나도 안 갈 거니까."
"정말? 우리 둘 다 사무실 가지 않기로 약속한 거다. 너도 푹 쉬어."
그렇게 유나도 집으로 보내고, 나는 사우나로 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탕 속에서 [전신 스트레칭]과 [숲 속 산책]까지 사용해주고 피로를 완전 날려버렸다.
기름도 땀도 깨끗하게 씻어낸 것은 덤.
그리고 목욕탕을 나와 하이 유나의 사무실로 향했다.
'유나에게는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원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쁜 남자가 더 매력적인 법.
'나 이주원, 절대 고분고분 여자 말을 듣는 순한 양이 아니지. 가끔 여자를 속이기도 하는 늑대 같은 남자.'
내 생각에 회사는 화분과 비슷한 것 같다.
경영자가 신경 쓸수록 더 잘 돌아간다.
그러니 피곤하다고 함부로 쉬면 안 된다.
사무실은 직원들이 퇴근을 앞두고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거들기도 하고, 하루 주문과 댓글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럼 모두 퇴근하세요. 오늘도 늦게까지 수고 많았어요."
직원들을 모두 보내고 혼자 남았다.
나는 창가에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요새 조금 머리가 복잡했다.
'내일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이기든 이기지 않든 크게 상관없다.
어차피 영 아트는 이제 5부 능선을 넘었고, 언젠가는 결국 촬영도 끝날 것이다.
'곧 김태민은 군대를 가야하고······'
그리고 형원 선배는 이제 졸업을 할 것이다.
물론 그들과는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긴 하겠지만, 우리들의 일상은 크게 바뀔 것이다.
그리고 하이 유나는 수진, 정화, 유나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으니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직원도 너무 많아졌어.'
아르바이트도 많았지만 경력직 정직원도 몇 명 뽑았다.
방송이 끝나고도 직원들을 계속 고용하려면 지금의 매출을 꾸준히 유지해야 했다.
'어쩌면 늘어난 규모에 걸맞게 전문 스타일리스트들을 고용해야 하는 걸까? 아니야. 우리의 강점은 여학생다운 풋풋함이야. 우리의 강점을 포기해서는 안 돼.'
아리송했다.
여학생 이미지를 고수하기 때문에 고객층이 좁은 것은 아닐까?
아니면 기존의 이미지를 충실히 지켜야 하는 것일까?
나는 회귀자.
또래보다는 확실히 깊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야.'
전생에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삶에 지친 그냥 흔한 중년 회사원일 뿐이었다.
당연히 이렇게 큰 회사를 경영해본 적은 없었다.
직원으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찰하는 것과 회사의 수장으로써 모든 일을 책임지고 결정하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살짝 무섭긴 해. 그런데······'
피하고 싶은 무서움이 아니라, 맞서고 싶은 스릴이었다.
나도 이제 진짜 경영자가 되어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 * *
약간 싱숭생숭하기도 했고, 푹 잠들고 싶어서 편의점에 들러 소주 2병을 샀다.
그리고 빌라의 문을 열자 집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김태민과 한유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해?"
"형 올 때 되었다고 태민이 형이 밥 하는 중이예요."
"꽁치 김치찌개야."
꽁치는 통조림.
김치는 유나 어머니표 제주도 김치였다.
그리고 이미지와 달리 김태민도 가끔 요리를 했다.
뉴욕에서 자취도 오래 했고, 또 부모님 두 분 다 바쁘시니 혼자 해결할 때도 많았던 것이다.
물론 나와 약간 이미지는 다르다.
'내가 생존을 위한 자취 요리라면······'
김태민은 가끔 즐기는 취미 활동?
아무튼 내가 소주를 사온 걸 어찌 알고, 보글보글 찌개가 끓고 있었다.
"자 모두 밥 먹자!"
찌개를 완성한 김태민이 뿌듯한 얼굴로 외쳤다.
"이야! 소주 사 온 거야? 안 그래도 사러 나가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우리 셋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식탁에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그리고 유나가 공수해 온 밑반찬들.
크으.
"소주를 부르는 상차림이네. 태민아, 잘 먹을게."
나는 김태민의 소주잔을 채우고, 내 잔에도 직접 술을 따랐다.
쩝.
유현이는 분위기에 끌려 우리의 소주잔을 흘끔 거렸지만, 어림도 없지.
유현이에게 술을 먹였다간 유나에게 죽도록 야단맞을 것이다.
"넌 콜라로 만족해. 나중에 스무 살 되면 같이 마시자."
"네, 형."
그렇게 시작한 남자들의 밤.
피곤한 날에는 혀에서 어떤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소주가 쓰면서도 달았다.
소주가 달다는 것은 오늘 하루가 인상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술이 들어가니 의외로 남자들끼리도 이야기할게 꽤 많았다.
'내가 너무 유나만 쫓아다니느라 친구들에게 소홀했구나.'
그런 반성도 했다.
"그런데 형들은 어떻게 미대를 가기로 결심한 거예요? 저도 내년부터는 고등학생이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뒤숭숭해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하니까요."
음.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우리나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물론 전공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도 많지만, 확실히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었다.
그 결정을 앞두고 있으니 걱정이 많을 법도 했다.
"실은 아버지한테 제주도 식당을 잇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그랬다가 진짜 크게 혼났어요. 아버지는 칠순, 팔순 계속 직접 식당하실 계획이라고. 제 직업은 알아서 직접 찾으라고 하시면서요."
음, 그렇군.
장인어른은 계속 일하실 생각이군.
장모님은 선생님이니 연금이 계속 나올 테고.
'그럼 용돈으로 회유하긴 힘들겠군.'
어쨌든 유나와 나의 미래에 대한 좋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먼저 김태민이 대답했다.
"난 생각해보면, 미대에 가는 걸 내가 결정한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냥 당연히 가야하는 걸로 알고 있었어."
"그랬군요."
사람마다 역시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김태민은 타고난 미대생인데, 그 역시 나름의 불만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미대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경험도 많이 해보고, 그림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도 해보고."
다행이었다.
게임.
옷포장.
거리 청소.
감자튀김.
이상은 김태민이 나 때문에 하게 된 일들이었다.
내가 김태민을 타락시키는 줄 알았는데 자기가 만족하고 있다니 그럼 된 거다.
나중에 김태민이 어떤 삶을 살더라도 거기에 내 잘못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냥 미대생들이 부러웠어.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는 법도 배우고, 내 그림을 완성하는 방법도 배우고. 그런 학교생활이 너무 부러웠어. 그래서 나도 꼭 미대생이 되고 싶었어."
"그렇군요. 형 말 들으니까 저도 미대가 갑자기 끌리는데요."
유현이는 서글서글하고 대화를 잘 받아주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유현이와 있으면 자꾸 이야기하게 된다.
괜찮은 술친구의 자질을 타고 났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큰누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그림 그렸거든요. 그리고 입시 미술도 진짜 독하게 그렸고요. 그래서 누나가 그렇게 하는 걸 옆에서 봤더니, 미대는 엄두가 안나요. 또 나도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유현이의 말을 들으니까, 어린 시절 유나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하긴, 유나라면 진짜 열심히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누가 그 사람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흐뭇한 상상에 잠겨 있는데 김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찾아낼 거야. 유나도 그렇고, 유미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찾아서 여기까지 왔잖아. 그러니까 너도 잘 해낼 거야."
우리 태민이가 이렇게 근사하게 형 노릇을 하다니.
옆에 있는 내가 다 뿌듯했다.
"그런데 누나들이 너무 잘하니까 오히려 걱정되는 부분도 있어요.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나 싶어서요."
그말엔 내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의미가 있을 지도 몰라. 나중에 찾아올 진짜 꿈을 맞을 준비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초조해 하지 마."
난 어쩌면 내 꿈을 찾기 위해 한 번의 인생을 다 쓴 건지도 모른다.
물론 누구에게나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린 유현이가 벌써부터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 형. 내가 좋아하는 형들이 해주는 말이라 더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유현이가 은근슬쩍 잔을 내밀었지만, 나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하게 콜라를 따라주었다.
그것 말고도 우리는 이것저것 속내를 털어놓으며 우린 소주를, 유현이는 콜라를 즐겁게 마셨다.
"실은 요즘 글 쓰는 일도 꽤 끌려요."
"그래? 그럼 형원이 형한테 물어봐."
"안 그래도 이번에 올라오면 형원이 형 붙잡고 이것저것 여쭤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너무 바빠 보여서요."
"아니야. 형원이 형은 아무리 바빠도 너한테 시간 내 줄 거야. 좋은 조언도 많이 해 줄 거고. 단, 가끔 이상한 말도 하니까 거기에 휩쓸리면 안 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언제나 내 삶에 지쳐 있었는데, 이젠 내가 남에게 조언을 해 준다.
잘 컸다. 이주원.
앞으로도 잘하자.
길고 피곤한 하루였고, 좋은 친구들이라 곧 취기가 올라왔다.
"형, 라디오 틀게요."
역시 한유현.
유나의 동생이라 그런지, 어리지만 느낌을 알았다.
우리 집 거실에는 아날로그 라디오가 있었다.
사실 라디오는 미대생의 친구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굉장한 정신 노동.
그래서 때로 밤샘을 할 때에는 음악을 고르는 일조차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럴 때, 라디오를 틀어두고 DJ에게 전부 맡겨두면 된다.
그래서 우리 학교 작업실에는 몇 대의 낡은 라디오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금 내 방의 라디오는 살림살이를 들여올 때, 디자인이 예쁘다며 유나가 고른 것이었다.
그리고 곧 라디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어?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다."
그래? 역시 장인어른.
음악을 들을 줄 아신다.
그리고 나는 반사적으로 라디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자 열일곱 유현이랑 스무 살 김태민도 가사를 아는지 같이 불렀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원래 잘 부르는 노래도 아니었고, 술에 취해서 더 엉망이었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다.
그냥 술 생각이 났을 때, 미리 안주를 준비해주는 친구가 있고, 노래를 불렀을 때 같이 불러주는 친구가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이번에는 김태민이 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노래 가사처럼 우리도 나이 들었을 때, 그때도 이렇게 같이 마시면 진짜 재밌겠다."
"그러게. 그때까지 우리 잘 버티자."
그때도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하긴 그때도 같이 지낼 수 있다면, 그게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끼리 잔을 부딪히자, 유현이도 같이 콜라잔을 내밀었다.
"형, 그때 저도 꼭 불러주세요."
"당연하지."
그날 밤은 술기운을 빌어 푹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또 한 번 결전의 날이 밝았다.
* * *
화려한 스튜디오.
자신만만한 젊은 예술가들.
그리고 도도하게 앉아있는 심사위원들.
진행자인 정경아가 우리 팀을 지목했다.
"팀 수진. '어린이 세트'라는 작품을 냈는데요. 예술을 하라고 했더니 햄버거를 팔았습니다. 재밌다면 재미있는 시도, 난해하다면 난해한 시도였는데요. 그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형원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해피밀, 햄버거 세트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햄버거의 고기는 호주산이고, 밀가루는 미국산입니다. 그리고 장난감은 메이드인 차이나. 단순한 이유로 전 세계의 재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MBA에서 학위를 취득한 전문가와 비싼 컴퓨터들이 가장 낮은 원가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한 결과입니다."
이제 형원 선배는 카메라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즐기는 느낌.
"그리고 장난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에니메이션부터 디즈니까지, 철저히 상업적으로 검증된 캐릭터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피밀 세트는 시장이 어린이를 자본주의에 길들이는 첫 번째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처음 접하는 가장 빠르고 가성비 좋은 행복, 그리고 삼천 원짜리 기억은 아이의 머리에 새겨져 평생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가 해피밀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물론 그렇게 거창한 이유로 해피밀이 떠오른 건 아니었다.
그냥 미술관에서 괴로워하던 뚱뚱한 꼬마가 해피밀을 먹겠다고 고함지르던 장면을 우연히 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원래 이유를 만들어 붙이는 것 역시 예술의 일부였다.
그러니 형원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린 해피밀 세트를 조금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플라스틱 장난감대신, 따뜻한 도자기 인형이면 어떨까. 비싼 캐릭터대신 손으로 그린 고양이 그림이면 어떨까. 아이가 손에 쥔 장난감이, 모두가 아는 캐릭터가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고양이라면 어떨까. 그게 저희가 직접 장난감을 만들고 햄버거를 판 이유입니다."
형원이 형, 사랑합니다.
오늘도 형원 선배는 찬란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