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결전 □
배우 유인호가 소유한 건물.
스튜디오 A.
보통은 그가 속한 예술가팀 City-A 혹은 다른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가 열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다른 전시 오프닝보다 훨씬 많은 관객과 기자들이 몰려 들었다.
바로 영 아트의 4차 경연의 발표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유인호씨, 준비한 작품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진행자인 모델 정경아가 유인호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유인호는 유명 배우답게 느긋하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또렷이 대답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그의 시 가탄잘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자의 옷으로 치장을 하고, 목에는 보석을 걸면 어린 아이는 도무지 즐겁게 놀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고가의 명품 아동복들에 비판적으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유인호는 영화배우인 동시에 패셔니스타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유명 브랜드의 모델이기도 했고, 또 각종 패션쇼에 초대받아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를 선택한 것이었다.
"저희가 준비한 작품은 바로 패션쇼입니다. 저도 명품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과연 순식간에 자라버릴 아이들에게 너무 비싼 옷을 입히는 행동이 명품의 가치에 어울리는 행동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 타고르의 시처럼 너무 비싼 옷은 아이들을 구속하는 감옥이 될 테니까요."
역시 패션모델인 정경아 진행자는 유인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명품 아동복은 지나치게 예쁩니다. 아이들의 옷이 아니라 작아진 어른의 옷이라고 할까요. 마음껏 뛰어 놀기 위한 옷이 아니라 SNS에 사진을 올리기 위한 옷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런 반성 없는 소비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이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정경아와 유인호는 스튜디오 A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을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
건물 안에는 패션쇼를 위한 무대가 꾸며져 있고, 유인호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 친구들, 여러 유명인들도 보였다.
기자들은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셔터를 눌렀고, 초대받은 가족 심사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희는 어른들의 명품 옷을 가위로 잘라서 아이들의 옷으로 리폼 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짝퉁이라는 가짜 옷을 섞기도 했고요, 동대문 옷을 리폼해서 유명한 명품 디자인들을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디자인과 의미의 재구성을 통해 볼거리와 반성, 두 토끼에 전부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아동복 패션쇼인만큼 성인 모델과 아동 모델이 함께 무대를 걸었다.
기성 예술가인 City-A와 패셔니스타인 유인호가 같이 만든 무대인만큼 옷들은 꽤 훌륭했다.
"와아아."
그리고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를 지르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유명한 아역 배우인 김송아가 무대에 선 것이었다.
"송아도 일정이 많이 바쁠텐데······"
정경아가 중얼거리자 유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제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어제부터 와서 리허설도 같이 했습니다. 전에 같이 영화를 찍은 적이 있어서 꽤 친하거든요."
"대단하시네요. 유인호씨. 어른 배우보다 더 바쁘다는 김송아를······"
"저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무대에 서기로 했거든요."
"디자인뿐만 아니라 모델까지. 유인호씨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이 무대를 불사르고 있습니다. 그럼 기대할게요, 유인호씨."
"진짜 모델인 경아씨 앞에서 무대에 서려니 긴장되는데요?"
하지만 사실은 별로 긴장되지 않은 표정.
그렇게 유인호의 패션쇼는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리폼한 옷들도 괜찮았고, 연예인 2세와 아역배우들이 모델로 참여해 시선을 붙잡았다.
거기에 화려한 음악과 조명.
누가 봐도 절대 500만원짜리 무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맥 찬스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우니까.
"이거 편집 없이 통으로 다 살려서 방송에 내보내도 되겠는데."
영아트의 메인 PD인 김우철이 흐뭇한 얼굴로 무대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유인호 진짜 칼 갈았네요. 이실장님까지 나서서 유인호를 섭외한 보람이 있어요."
영 아트의 메인작가인 최희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인호 저 친구 좀 특이한 딴따라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말도 잘하고, 감각이 있네."
"김 PD님도 참. 방송일 하시는 분이 딴따라가 뭐예요."
"아니야. 옛날 배우들이랑 가수들은 진짜 아티스트였지. 하지만 요즘 젊은 놈들은 돈과 인기만 바라는 딴따라들이 맞아. 그래도 유인호 저 친구는 딴따라에서 제외시켜야겠어."
그리고 박수와 환호 속에 유인호와 City-A의 무대가 마무리되었다.
"그쪽은 어떻게 되었대?"
김우철 PD가 묻자 전화기를 들고 있던 조연출이 대답했다.
"거기는 1일 식당 컨셉이라 벌써 장사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거기도 반응이 좋답니다. 사람들이 줄서서 정신없다는 군요."
"그래? 곧 여기 마무리하고 가족 심사단 데리고 간다 그래. 한 삼사 십 분 걸린다고 해."
김우철은 거기까지 말하고 무대 쪽을 다시 쳐다봤다.
유인호는 패션쇼를 마치고 관객과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전문 심사위원들도 팔짱을 끼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유인호 쪽은 성황리에 끝난 것 같았다.
잘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무대였다.
김우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몇 시간 전.
"원래는 지금은 저렇게 손님이 오는 시간이 아닌데······"
햄버거 가게의 사장 내외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마치 물가에 애들을 내어놓은 것처럼 불안한 눈으로 카메라 옆에서 계속 서성댔다.
가게 밖에는 벌써 손님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1일 가게 컨셉인데, 충분한 손님을 받기 위해 김수희 작가가 영 아트 홈페이지에 영업 소식을 올린 것이었다.
덕분에 가게 앞에는 계속해서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기름 온도 먼저 확인하고······"
우리보다 사장님 내외가 더 긴장한 모양.
어제까지 연습한대로 나, 김태민, 유나는 주방을 담당했다.
수진, 정화 선배는 카운터와 각종 쉐이크.
형원 선배는 인형과 엽서를 맡았다.
도자기 인형은 어린이 세트 구매시 1개 선물.
엽서는 세트 구매시 1장 선물, 그리고 장당 500원에 따로 판매도 하기로 했다.
단, 해피밀과 다른 점도 있다.
해피밀은 몇 가지 종류의 인형이 있고, 번호로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수제 도자기.
같은 종류의 인형이라도 모양이 전부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도자기 초보다.
그래서 만일의 실패를 고려해 넉넉히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인형의 생존율이 좋았다.
우리가 준비한 도자기 인형은 모두 170개.
1인당 3~40개의 인형을 만들었다.
참고로, 그 중 내 공룡은 32마리였다.
"과연 저 중에 몇 개나 팔릴까?"
우리들은 인형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보며 초조히 기다렸다.
주위에서야 인형이며, 포장지며 모두 예쁘다고 해줬지만 역시 손님의 평가가 아니면 믿을 수 없다.
딸랑.
그렇게 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우르르 가게 안으로 몰려들었다.
"안녕하세요! 방송 잘 보고 있어요!"
"저 하이 유나 단골이에요! 직접 보고 싶어서 홈페이지 보자마자 곧바로 달려왔어요!"
주방 팀은 곧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처음엔 주문 들어온 것만 만들었는데,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린 멈추지 않고 계속 만들기만 하면, 햄버거는 알아서 팔려나갔다.
"인형 너무 예뻐요! 어른도 어린이 세트 구매할 수 있죠?"
"저 어린이 세트 두 개요!"
"나는 세 개!"
"어린이 세트는 1인당 한 개로 제한됩니다! 양해 부탁드릴게요!"
"그럼, 그림엽서 여섯 장이요!"
매장의 선배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차츰 적응하는 듯 했다.
하지만 준비한 재료보다 손님이 너무 많았다.
"중간에 손님을 그만 받아야 나요? 이렇게 많이 재료를 준비하진 못했는데······"
"촬영이 중간에 끊기면 안 되는데."
내가 묻자 김수희 작가도 당황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우리 재료를 써요. 내일 장사하려고 미리 준비해둔 재료가 있어요."
"그럼 사장님 내일 장사는요?"
"하루 쉬죠, 뭐! 내일 장사는 이따 밤에 준비해도 돼요!"
하지만 다행히 지켜보던 사장님 찬스로 위기 극복.
그리고 도자기 인형은 40개는 가족 심사단을 위해 따로 남겨두기로 했다.
"으억."
계속 들어오는 주문에 김태민이 비명을 질렀다.
튀김기에 한 번에 너무 많은 감자를 넣으면 감자튀김이 자기들끼리 엉겨 버린다.
치킨도 마찬가지.
그래서 한 번에 넣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었다.
덕분에 김태민은 쉬지 않고 계속 감자와 닭다리를 소량으로 튀겨냈다.
내 쪽도 비슷했다.
"겨울인데 땀이 나네."
고기 패티와 달걀, 버거 번을 쉴 새 없이, 계속 불에 구웠다.
"나도 으악."
유나도 비명을 질렀다.
유나는 허리도 펴지 못하고 계속 햄버거를 만들었다.
그리고 돕지 않기로 했던 사장님 내외는 어느새 카메라 뒤에서 야채 손질을 하고 있었다.
"도자기 인형은 다 떨어졌습니다! 대신 어린이 세트를 구매하시면 엽서 다섯 장을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형원 선배의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91번 손님! 91번 주문 나왔습니다!"
"103번 딸기 쉐이크와 치킨 버거 세트 나왔습니다!"
"태민 오빠는요? 유나 언니는요? 사진 찍고 싶은데 어디 있어요?"
"그 분들은 지금 곤란해요."
"햄버거 포장지도 얻어갈 수 있나요?"
"이 냅킨은 따로 구매가 불가능한가요?"
그렇게 매장의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우린 진짜 장사를 하는 것처럼 계속 버거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영혼이 빠져나갈 무렵, 김수희 작가가 주방에 들어와 외쳤다.
"자, 이제 가족 심사위원단 도착해요. 주방 팀, 모두 더 신경 써 주세요!"
주방 팀이 따로 신경을 더 쓸 필요는 없었다.
미리 밀려온 손님들 덕분에 주방 팀은 충분한 훈련을 했다.
그래서 한층 더 능숙해진 솜씨로 햄버거를 카운터로 내보냈다.
"으아앙."
그때 카운터 쪽에서 여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인형마다 모양이 전부 달라서요."
"이 고양이도 귀엽긴 한데, 옆 테이블 아이가 가진 고양이랑 같은 걸로 갖고 싶다고 해서요."
"그게, 샴 고양이는 이제 다 떨어져서요. 죄송합니다."
김태민이 여러 종류의 고양이를 만든 덕분이었다.
역시 김태민.
감자만 튀기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여자를 울린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하프 물범은 다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공룡 인형도 귀여워요!"
"으아아아아앙!"
내 공룡은 잘못이 없다.
아이가 버릇이 없는 것이다.
이주원 20세, 회귀자.
드디어 두 번째 생 처음으로 본의 아니게 여자를 울렸다.
김태민과 거의 동급이랄까.
아무튼.
도자기 인형은 전부 팔릴 것 같아서 꼴찌는 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1등은 유나의 하프 물범.
2등은 김태민의 고양이로 결정되었다.
바쁜 게 좋은 점도 있었다.
원래 경연을 촬영할 땐 조금 떨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떨릴 틈도 없었다.
"촬영 끝낼게요! 촬영 끝났습니다!"
"다행이다. 어차피 재료도 다 떨어졌어요."
주방 팀은 동시에 힘없이 냉장고에 등을 기댔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6시간 동안 정말 정신없이 일했다.
"아, 하얗게 불태웠어."
유나가 한참 만에 겨우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는 노련한 회귀자.
"이따가 어깨 주물러 줄게."
"그래. 오늘은 부탁할게."
왜 내가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가 잘 해낸 건지, 못 해낸 건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래도 또 한 번의 경연이 끝났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최선을 다했다.
다만, 앞으로 두 달 정도는 햄버거는 못 먹을 것 같았다.
가게 밖에서는 가족 심사위원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City-A의 패션쇼와 팀 수진의 어린이 세트. 두 작품을 모두 감상하셨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패션쇼는 TV에서만 보다가 직접 현장에서 보니까 진짜 대단했어요. 유명인들도 많이 봐서 즐겁기도 했고요. 또 명품이나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주제도 공감이 갔습니다. 팀 수진 쪽은 어린이 세트라고 해서 많이 의아했습니다."
"어떤 점이 의아하셨나요?"
"햄버거를 파는 일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직접 가게에 들어와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햄버거도 맛있었고, 포장이나 엽서도 정말 예뻤습니다. 특히 아이가 인형을 너무 좋아해서 만족합니다."
우린 다 같이 가족 심사위원들의 인터뷰를 엿들었다.
"유인호는 패션쇼를 했구나. 유인호랑 어울린다."
"그런데 다들 좋았다고 말하네."
모두들 뒤늦게 걱정이 밀려오는 모양이다.
"지금 막 공을 넣으셨는데요, 팀 수진의 어린이 세트. 어떻게 보셨습니까?"
"아이도 좋아하고, 정말 즐거웠습니다. 집 앞에 이런 예쁜 인형을 주는 버거가게가 있으면 매일 갈 것 같습니다. 다만, 인형 크기가 아이들이 입안에 넣기 좋은 사이즈라서요. 단단히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이가 좋아하네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따끔한 지적이었다.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 서툴러서 그렇게 놓친 점도 있었다.
하나 더 아쉬운 건, 기념으로 인형 몇 개는 가지고 있고 싶었는데 탈탈 털어서 판매했다는 것.
뭐, 그래도 손님들이 좋아했으니 다행이었다.
"수고했어요. 이번에도 재밌게 봤습니다."
심사위원인 하종호가 찾아와 인사를 건네기도 했고, 길었던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심사 결과는 내일 스튜디오에서 발표될 예정이었다.
과연 우리의 영 아트는 여기까지일까?
아니면 앞으로 더 촬영하게 될까?
만약 이번에 지게 된다면 우리의 쇼핑몰이 받고 있는 버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 여섯 명은 모두 땀 범벅, 기름 범벅이었다.
그래도 하루가 끝나니까, 기분은 상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