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해피밀 작전 □
"해피밀?"
해피밀은 장난감이 포함된 어린이용 버거 세트였다.
"그래. 해피밀. 우린 하루 종일 아이들을 조사하고 다녔잖아. 그런데 저렇게 행복한 아이들을 본 적이 있어?"
유나는 눈을 찡그리고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정말 내 말대로, 미술관의 아이들과 햄버거를 입에 문 아이들은 표정이 천지 차이였다.
마치 모두들 '햄버거를 먹기 위해 미술관을 견뎠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봐. 아이들 옆에는 엄마가 같이 있어. 가장 사랑하는 보호자가 옆에 있으니까, 아이들은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낄 거야. 그리고 입에는 맛있는 햄버거가 물려져 있고, 손에는 오늘 밤 가지고 놀 장난감이 들려 있지."
게다가 장난감은 평범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평소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조잡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가격 대비 뛰어난 품질.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작은 기능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해피밀은 단순히 장난감을 끼워 파는 햄버거 메뉴가 아니었다.
해피밀은 단돈 몇 천원을 가지고 아이들이 가장 쉽고 빠르게, 철저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
"해피밀은 과학이야. 잘 다듬기만 하면 괜찮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지도 몰라."
내 말을 듣고, 유나는 눈알을 굴리며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봤다.
그리고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유나도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은 친구였다.
그래서 해피밀을 작품화할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유나가 날 보고 피식 웃었다.
"이런 아이디어를 내다니. 너 방금 좀 멋있었던 것 같아. 뭔가 섹시했어."
훗.
이정도 쯤이야.
역시 여자들은 머리가 좋은 남자에게 끌리는 것이다.
나 이주원.
언제나 거침없이 난관을 해쳐나가는 만능 회귀자.
오늘도 예술과 사랑을 둘 다 얻기 위해 치열한 노력으로 돌파구를 찾아냈다.
조만간 거침없이 고백도 성공하고, 여자 친구가 생기면 소원 두 개도 써 볼 생각이다.
* * *
그날 늦은 오후.
유나와 나는 해피밀 세트들을 포장해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엔 정화 선배와 형원 선배가 미리 와 있었다.
우린 각자 수집한 자료들을 이야기하고 같이 살펴봤다.
"주원이 아이디어가 제일 좋은 것 같아. 해피밀이 제일 강렬해."
형원 선배가 내 의견에 표를 던졌다.
"나도 그래. 그런데 일단 해피밀을 어떻게 예술 작품으로 만들 지를 정해야 할 것 같아. 단순히 햄버거와 장난감을 같이 내어놓는 것만으로는 작품이 되지 않으니까."
이건 정화 선배.
정화 선배의 말도 옳았다.
예술 작품은 언제나 전시와 판매의 수단까지 고려해야 완전히 완성된다.
"내 생각에 해피밀을 파는 행위 전부를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싶어요. 우리가 직접 햄버거를 파는 거죠. 내 생각에 해피밀은······ 어른 세트와 아이들 세트를 나란히 두고, 아이들이 장난감에 끌려 해피밀을 선택할 때, 비로소 해피밀의 개념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때 김태민과 수진 선배가 도착했다.
"수진 누나. 태민아. 이거 먹어."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우리가 포장해 온 햄버거를 내밀었다.
하나는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 세트.
또 하나는 장난감이 포함된 해피밀 세트.
김태민은 재빨리 해피밀을 낚아챘다.
"야, 김태민! 해피밀이 내 꺼야. 나 배불러서 큰 거 못 먹는단 말이야!"
"그럼 햄버거만 바꿔요!"
"그런 게 어딨어! 작은 햄버거 먹는 사람이 장난감도 가져야지."
"싫어요.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예요."
정화 선배와 형원 선배, 나와 유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정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피밀, 먹힐 것 같군."
곧 우리는 김태민과 수진 선배에게도 해피밀에 대해 설명했다.
두 사람도 곧 괜찮은 생각이라며 수긍했다.
"그런데 제일 큰 난관이 있어. 해피밀의 제일 큰 장점은 어른들도 갖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장난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정화 선배가 김태민과 수진 선배를 가리켰다.
물론 두 사람은 평범한 어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하여튼 우리는 장난감을 준비해야 했다.
"사실 제가 생각이 하나 있어요."
유나가 입을 열었다.
"해피밀의 장난감이 괜찮긴 해요. 몇 천원짜리 버거 세트에 끼워져 나오기에는 얼핏 과분해보이죠. 하지만 메이드 인 차이나, 대량 생산, 플라스틱 제품이죠. 그리고 꼼꼼히 살펴보면 사실은 조악해요."
달그락. 달그락.
그리고 유나는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뒀다.
"이건 지난 학기에 기초 도예 시간에 만들었던 도자기 인형들이예요."
문어와 불가사리 그리고 물개와 돌고래.
"크기를 좀 더 작게 만들면 남은 일정에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김미숙 교수님 공방에 갔을 때, 초등학생 수강생들이 모두 탐낼 만큼 반응도 좋았어요. 그리고 공장의 플라스틱과 수제 도자기가 대척점에 있으니 그 점도 노려볼만 하다고 생각해요."
우린 유나의 도자기 인형들을 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손재주가 있는 건지, 모두 탐나는 귀여운 인형들이었다.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의 동글동글한 인형들.
특히 물개 인형이 귀여워서 초등학생 꼬마들이 모두 갖고 싶어 했었다.
"예쁘긴 해. 일정도 맞출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고. 또 이것 말고는 우리가 다른 장난감을 만들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정화 선배가 탁자 위에 놓인 해피밀 장난감을 손에 같이 들었다.
"이 플라스틱 장난감들은 단순한 인형 이상이야.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지. 부족한 완성도를 배경 스토리로 보완한 거야."
"그거라면 방법이 있긴 해요."
나는 우리의 든든한 형원 선배를 가리켰다.
"우리가 도자기 인형을 만들면 형원이 형이 그 배경 스토리를 짜줄 수 있을까요? 해피밀 캐릭터처럼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캐릭터 성격이나 설정. 사소한 에피소드 몇 개 정도. 그것만 더해도 도자기 인형들이 훨씬 더 매력적이 될 거예요."
"그 정도라면 가능할 거야."
그렇게 우린 해피밀 판매 작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방법들을 모색했다.
그리고 김수희 작가에게 연락했다.
이제 우리의 아이디어를 방송에 맞게 다듬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 설명을 전화로 들은 김수희 작가는 몇 가지 확인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햄버거를 직접 팔겠다는 거죠? 1일 식당 개념으로요. 그런데 햄버거를 만든 경험은 없고요."
"맞아요. 그런데 비슷한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은 많아요."
물론 전생에서였다.
전생에 나는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었다.
특별했다기보다는 가난한 대학생의 숙명 같은 것.
그게 이번 생에 쏠쏠히 도움이 되곤 한다.
"좋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 우리 입장에서 촬영할 거리도 충분하고. 또 해피밀이란 아이디어도 좋아요. 그럼 우리가 식당을 섭외해줄게요. 햄버거 만들기 전수도 가능한 곳으로요."
원래 김수희 작가는 예산 집행 뿐 아니라, 작품과 촬영에 필요한 제반 절차들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했었다.
일정이 다급한 만큼 방송국의 협조는 필수적이었다.
"넵. 그럼 저희는 곧바로 도자기 인형 제작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해피밀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다.
* * *
도자기 인형 만들기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그리고 원가도 높아서 진짜 햄버거 장사를 이렇게 했다면 적자였을 것이다.
먼저 백자토로 인형을 만든다.
작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정교하게 만들기는 힘들다.
하지만 다들 미대생이라 손재주는 있는 편.
각자 악조건 속에서도 최대한 형태를 뽑아냈다.
"우리 내기를 하는 게 어때요?"
"무슨 내기?"
"아이들이 인형을 선택하니까, 가장 선택 못 받은 사람이 뒤풀이 노래방 쏘기."
우린 경쟁과 내기를 좋아하는 한국대 학생.
내가 노동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내기를 제안하자, 모두 눈이 반짝였다.
"아이들 마음 사로잡기는 내가 자신 1인자죠. 동생이 둘이나 있으니까."
유나는 하프 물범을 선택했다.
"바다 친구들 중 귀여움으론 이 녀석이 최강이지."
모양도 동글동글해서 만들기도 쉬웠다.
참고로 우린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수량을 만들어야 했기에 한 사람당 한 가지 캐릭터만 만들기로 했다.
"그럼 난 고양이. 내가 고양이 전문이거든."
이건 김태민.
수진 선배는 테디 베어.
정화 선배는 토끼.
단 토끼는 조심해야 한다.
귀를 길게 만들면 깨질 수 있기 때문에 짧은 귀 토끼를 만드는 게 포인트였다.
"훗. 모두 귀여움만을 생각하는군요. 해피밀을 먹는 아이들의 절반은 남자 아이죠. 아마 1등은 내가 될 겁니다."
나는 공룡을 만들었다.
다만 이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티라노를 만들었다.
그렇게 모양을 만들고, 시간을 줄이기 위해 건조기에 넣고 인형을 말린다.
다음은 초벌구이.
그리고 초벌구이 한 도자기 인형을 사포로 다듬고, 물감으로 색을 그린 후,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하면 귀염 근사한 도자기 인형이 나온다.
우리의 인형들을 바탕으로, 각자 형원 선배와 의논해서 캐릭터의 설정들을 간략히 잡았다.
그리고 그 캐릭터를 따라 그림엽서와 햄버거 포장지, 컵홀더, 종이봉투까지 추가로 제작해 인쇄했다.
일정이 빠듯했지만 귀여운 결과물들이 바로바로 나오니까 우린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
* * *
그리고 5일차.
김수희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햄버거 가게를 섭외했어요. 대학과 여고 근처의 작은 수제 버거 집인데 촬영하기에도 적당하고, 맛도 좋아요. 주방 일할 사람을 정해서 사장님께 교육을 받도록 해요."
"고맙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방송국에 미뤄버렸네요."
"아니에요. 우린 전문 섭외팀이 있으니까, 늘 하는 일이예요."
주방 담당은 나, 유나, 그리고 김태민이 맡기로 했다.
일단 나와 유나는 카페 알바 경험도 있고, 요리에도 자신이 있다.
그리고 김태민은 원래 새로운 걸 배우는 걸 좋아했다.
가게는 젊은 부부가 운영했는데, 맘 좋아 보이는 뚱뚱한 사장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며칠 만에 다 배우긴 힘들 거예요. 그래도 메뉴를 줄이고 또 열심히 연습하면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주방은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항상 조심하도록 해요!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린 역할을 나눠서 사장님 내외에게 각자 비법을 전수 받았다.
메뉴는 치킨 버거와 치즈 버거, 2가지로 줄였다.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더블 버거.
더블 버거는 치즈버거에 패티를 하나 더 넣은 것뿐이었다.
김태민은 감자튀김과 치킨패티 담당.
"우린 뼈 없는 닭다리살을 쓰는데 염지를 잘 해야 해요. 여고생 손님들이 냄새에 민감하거든요."
감자튀김은 4분.
닭다리는 7분간 튀긴다.
"튀김기 앞에서는 항상 긴장해야 해요."
김태민은 열심히 튀김을 배웠다.
나는 계란과 고기 패티 담당.
간 고기를 배합해서 패티를 만들고, 숙성시킨 후 그릴에 굽기까지 내가 맡았다.
햄버거 번과 계란도 내가 굽는다.
유나는 야채 손질과 버거 포장.
"햄버거를 포장하면서 빵을 자연스럽게 눌러주는 느낌이 들어야 해요. 그러면 손님들이 드시기 한결 편해지거든요."
우린 그렇게 열심히 햄버거를 배웠다.
설명으로는 간단해보여도 사장님처럼 근사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꽤 많이 연습해야 했다.
"유나야. 토마토 강판에 썰 때 항상 손 조심해."
"너도, 불 앞에선 항상 긴장해!"
요렇게 세심한 배려로 틈틈이 유나에게 점수도 따 주고.
그렇게 읏샤읏샤.
우리는 레시피를 처음 전수받은 날 이후 매일 저녁 가게로 찾아가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길 3일째, 우린 꽤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바사삭.
"난 이제 거의 닭다리 장인이야."
김태민은 자기가 튀긴 닭다리를 씹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정말 질리도록 버거와 치킨을 먹었는데도 김태민은 꿋꿋했다.
'새로운 걸 즐겁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예술가의 큰 재능이 아닐까.'
나는 김태민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정신없이 지냈지만, 김태민은 매일, 매일 예술가로써 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치킨을 아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우린 우리가 그린 캐릭터 일러스트와 엽서들을 하나씩 가게에 가져와 걸어보았다.
'며칠 만에 인테리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약간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봐줄만했다.
그리고 우리가 인쇄한 컵홀더와 포장지, 냅킨들도 버거 가게에 가져갔다.
거기엔 하프 물범과 공룡, 고양이와 테디베어가 아기자기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저, 그런데 이것들 촬영 끝나고 우리가 계속 써도 될까요? 너무 탐나서 그러는데······"
버거집 사모님이 우리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다.
"얼마든지요."
며칠 동안 우리에게 열심히 가르쳐준 것도 고마웠고, 또 열심히 만든 작품이 1회성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쓰일 수 있다니 뿌듯하기도 했다.
* * *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좀 걱정되기도 했는데, 결과물들이 예뻐서 다들 기대가 커요. 이야깃거리가 많아서 방송 분량도 충분히 뽑아냈고요."
결전 하루 전날.
나는 김수희 작가와 통화 중이었다.
"다행이네요."
"유인호씨 쪽도 이번에 작정하고 준비한 모양이에요. 그래도 저는 팀 수진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우리 작품이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팀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우리 작업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주원씨, 좀 멋있는데요?"
김수희 작가의 전화를 끊고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멋있다니.
그냥 무심코 속마음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내가 어느새 멋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마 친구들이랑 공동 작업이라 그럴 거야. 여럿이 같이 하니까 작업도 괜찮게 나오고, 든든하기도 하고.'
나도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긴 했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했다.
찌질할 때도 있고, 어리숙한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내가 정말 멋있는 사람이 되려면 서너 번 더 회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나도 나아지고 있으니까.'
성장하고 있는 것은 김태민 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친구들도 있었고, 찌질한 고백에도 계속 기회를 주는 유나도 있었다.
그러니 우린 이번에도 잘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