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시립미술관 □
"흔히 현대 미술은 어려운 것, 소수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김경아가 목소리 톤을 바꿔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미술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과 전문 분야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영 아트의 목표 역시 미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공유하는 것에 있습니다."
확실히 현대 미술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종종 미대생인 나조차 가끔은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작품들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정말 김경아의 말대로 옷부터 영화, 가구, 상품 포장지까지 다양한 디자인과 예술적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기도 했다.
김경아는 멘트를 이어갔다.
"시장 경제는 스스로 끊임없이 시장을 확대하려 합니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죠. 특히 저변이 약한 한국 미술계는 미술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술계가 최근 주목하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튜디오의 대형 스크린에 어린 아이와 가족들의 영상이 떠올랐다.
"바로 아이들입니다. 교육과 생활 의 수준이 높아지며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그 자체로 강력한 소비 주체인 동시에, 미래의 미술 시장의 근간이기도 합니다. 한국 미술계가 발전하기 위해 반드시 붙잡아야 할 소중한 고객이죠. 더 많은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다양한 미술을 접하며 성장할 때, 한국 미술계의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이들이라고?
이런.
난감한 주제였다.
"이번 경연의 주제는 바로 '가족과 어린이'입니다. 이 주제를 어떻게 해석할지, 어떻게 접근할 지는 모두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기간은 10일. 그리고 영 아트가 500만원의 경비를 지원합니다. '가족과 어린이'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해주세요. 심사는 지난 2차 경연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2차 경연이라면 '공간 채우기'였다.
일반 심사위원들이 빨간 공으로 점수를 매기고, 최종 결과는 6인의 심사위원들이 결정했다.
"단, 이번에는 일반 심사위원들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역시 그들의 평가는 강제성이 없는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그럼 젊은 예술가 여러분들. 이번에도 저희를 놀라게 해 주십시오.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아이들이라······
아이들은 나의 가장 큰 취약점 중 하나였다.
회귀자가 만능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바로 아이들.
'난 아이를 갖고 싶었지.'
정말 사랑하는 아내와 아내를 닮은 아이들.
하지만 갖고만 싶었지 가져본 적은 없다.
아이들을 싫어하진 않지만, 남의 아이들에겐 딱히 큰 관심은 없는 편이었다.
나는 주로 착하고 예쁜 아이들만 좋아했다.
그날 저녁.
우리 여섯 명은 직원들이 퇴근한 사무실에 모였다.
"으, 어렵다."
유나가 입술을 내밀고 불평했다.
유나랑 수진 선배랑, 형원 선배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주 열광하는 정도는 아니고, 그냥 마주치면 귀여워하는 정도.
정화 선배는 원래 쿨한 사람이고, 김태민은 고양이를 좋아한다.
아이도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20살 대학생들.
아이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아이들을 겪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가족과 어린이를 자유롭게 해석하라고? 가족과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만들라는 거야? 아니면 단순히 어린이를 작품의 주제로 삼으라는 거야?"
정화 선배가 불평했다.
확실히 그 두 가지는 크게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이미지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응?"
나의 제안에 모두들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어리고 풋풋한 이미지예요. 그리고 시드 배정자들과 비교하면 아마추어들이죠."
"그래서?"
"시청자나 심사위원이 우리에게 갖는 이미지를 적당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린 어리고 선량한 학생들이죠. 그러니 우리는 대학생다운 작품을 해야 해요."
미술가라면, 자신의 이미지를 팔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때로는 자신의 이미지에 정면으로 도전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승산이 있을 때만.
지금처럼 불확실할 때에는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내 말에 형원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이가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아. 그리고 동의해. 우리는 풋풋하고 착한 작품을 해야 해. 그러니 아이들을 위한 미술. 아이와 가족들을 위한 착한 미술을 해야 해."
그렇게 우리는 겨우 최소한의 해석 방향만 정했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이 팀의 리더 역할을 해오긴 했다.
하지만 내가 항상 해결책을 내어 놓을 순 없다.
그렇다면 무얼 해야 할까?
'바로 한계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내가 의견을 말했다.
"우린 모두 아이들에 대해 잘 몰라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죠. 그러니 앉아서 고민하지 말고 직접 발로 뛰어보죠.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으니까요."
서진석 교수가 그랬지.
그림은 발로 뛰면서 그리는 거라고.
예술은 역시, 막막할 때는 직접 몸으로 굴러야 한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각자 돌아가서 푹 쉬죠. 그리고 내일 하루는 머리를 비우고 직접 돌아다니는 겁니다. 계획을 먼저 섣불리 세우면 시야가 좁아질 수도 있어요. 그러니 정말 마음을 비우고 즐기듯이, 내일 하루는 아이들을 위한 미술을 찾아서 밖을 돌아다니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팀을 나눴다.
여섯이서 우르르 몰려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비효율적이다.
각자 돌아다니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수진 선배랑 태민.
형원 선배랑 정화 선배.
나와 유나.
이렇게 팀을 나눴다.
"사촌 언니가 수유에 살아. 4살, 7살 조카가 있는데, 내일 같이 가보자."
이건 수진 선배와 김태민.
정화 선배는 노트북을 꺼내 이것저것 검색했다.
"형원 오빠. 우린 내일 키즈 카페를 돌아요."
키즈 카페라.
그곳은 정말 아이들을 위해 꾸며진 공간이다.
장난감도 많고, 볼거리도 충분할 것이다.
괜찮은 생각 같았다.
형원 선배도 OK.
"유나야. 그럼 우린?"
유나도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었다.
"우린 이거."
유나가 가리킨 노트북 화면에는 서울 시립 미술관 홈페이지가 떠 있었다.
"어린이 갤러리?"
시립 미술관에 마침 어린이를 위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응. 우리한테 딱이지? 전시 보고, 시간 되면 어린이 전용 영화 상영관도 가보자."
그렇게 내일은 직접 아이들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하긴.
아이들이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알아야 할 대상이다.
어려운 주제이긴 하지만, 그냥 예습한다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겠다.
물론 예습한 걸 나중에 써먹으려면 먼저 유나에게 고백을 성공해야 한다.
* * *
"언니!"
"수진아!"
김태민과 이수진은 이수진의 사촌 언니인 이수민의 집을 찾았다.
아기자기한 아파트.
거실엔 아이들을 위한 조각 매트가 깔려있고, 벽에는 가나다라 한글판이 붙어 있었다.
서재에는 온통 그림 동화책.
김태민은 당황했다.
그곳에 미술적 질서는 없었다.
오직 알록달록만 있었다.
"얘들아. 이모랑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두 꼬마가 공손히 인사했다.
"어머, 신기하다."
"언니, 뭐가?"
"지서랑 지은이 낯 엄청 가리거든. 그런데 오늘은 낯을 안 가리네. 아이들도 잘생긴 사람 알아본다는 말이 진짠가 봐."
그랬다.
김태민은 아이들에게도 통했다.
"아이들을 위한 미술? 글쎄."
이수진의 사촌 언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도 나중에 애 둘 길러봐. 생각할 겨를이라도 있나. 그냥 예쁜 옷 사 입히고, 예쁜 장난감 사주는 게 거의 전부지. 거기서 어떻게 예술적 의미를 찾아?"
사촌 언니 인터뷰는 별 소득이 없었다.
"아, 이건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예쁜 건 비싸. 아이들 게 어른 것보다 더 비싸. 그래, 아이들 미술이 중요하긴 하겠다. 비싸니까!"
이수진은 아이들 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이들 가구, 아이들 책장.
하지만 딱히 영감을 주는 특별한 소재는 찾을 수 없었다.
"호랑이들이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어요."
밖에 나오니 김태민은 두 꼬마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낯을 가린다는 아이들은 얌전히 앉아 김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수진아, 태민씨 점심 먹어요."
이수진의 사촌 언니는 점심까지 대접했다.
"언니! 전에 나 혼자 왔을 땐 떡볶이만 해줬잖아!"
이수진은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 사촌에게 따졌다.
"어머,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많이도 차려버렸네."
그랬다.
김태민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이들 엄마에게도 통했다.
* * *
나와 유나는 서울 시립 미술관으로 갔다.
평일의 오전.
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데려온 엄마들이 제법 많았다.
그 중엔 과연 오늘을 기억이나 할까 싶은 어린 아기를 데려온 엄마들도 있었다.
"엄마들은 진짜 대단하다. 혼자서 아기들 둘, 셋씩 데리고 온 사람도 있네."
감탄한 유나가 중얼거렸다.
안심해.
내가 다 기를 테니까.
넌 낳아만 주면 돼.
'어린이 갤러리'는 여러 작가의 단체전이었는데 그 중엔 꽤 유명한 작가도 보였다.
특히 강예성 교수.
강예성 교수는 '해방 이후의 한국 미술가 50인'에 꼽힌 적도 있는 현역 중에서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작가였다.
김용철 작가가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면 강예성은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느낌.
다만 강예성이 나이가 훨씬 많아서 서로 비교대상은 아니었다.
"우리가 정신없이 지내니까 강예성 작가 전시도 모르고 있었네."
"그러게 말이야. 영 아트 끝나면 같이 미술관 순례라도 돌자."
강예성 교수는 대상을 기호화해서 표현하는 꽤 어려운 작품을 만든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단순하고, 온화한 색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음악을 곁들인 영상 작업이었다.
대상을 단순화 시킨 기호들이 스크린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꽤 신비롭고 우아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아! 재미없다!"
"야, 거기 안 서!"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뚱뚱한 꼬마가 소리 지르며 전시장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그 꼬마를 잡으려 쫓아갔다.
유나와 나는 마주보고 조금 웃었다.
'강예성 정도면 우리나라 미술의 정점에 오른 사람인데.'
그런 대가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작품이, 초등학생 남자 꼬마에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괴로운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거 큰일이네."
어린이 갤러리를 한 번 둘러봤지만 어린이를 위한 미술에는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솔직히 넌 재미있었어?"
유나가 내게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재미는 잘 모르겠어."
우리는 미대생이다.
우리는 당연히 일반인과 보는 시각이 다르다.
솔직히 우리는 재미가 없어도 참고 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머릿속으로 능동적으로 고민한다.
하지만 일반인이라면?
특히 어린이라면?
"어렸을 때가 생각나면 좋겠는데. 어렸을 때, 우린 대체 뭐가 재미있었지?"
이제 겨우 스물인데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구나. 내게는 수십 년 전이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우린 근처의 어린이 전용 극장도 가 봤다.
차마 아이들과 섞여 애니메이션을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이 라운지와 어린이 도서관을 둘러봤다.
"인형은 탐나는데?"
유나는 라운지의 얼룩말 인형과 기린 인형을 가리켰다.
"그림책도 은근히 재밌어."
하지만 우리가 인형과 그림책을 건드리자, 다른 엄마들이 우리를 수상한 시선으로 살펴봤다.
그래서 급히 극장을 탈출했다.
"1년간 미대를 다니면서 오늘처럼 막막한 날은 처음이야."
유나가 힘없이 말했다.
"밥이나 먹고 가자."
그리고 우린 근처의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머릿속이 답답하고 기운이 없을 땐, 시원한 콜라에 감튀를 우걱우걱 씹어주면 정신이 든다.
미술관 근처의 가게라 그런지 아이들 손님들이 여럿 보였다.
"세트 두 개는 먹고 가고, 햄버거 네 개는 포장해주세요."
그렇게 집에서 게임하고 있을 유현이 몫의 햄버거까지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었더라?
"그냥 빅맥 시켜! 네 덩치에 무슨 해피밀이야!"
"아, 싫어! 요괴 시계 준단 말이야!"
"어차피 너, 작은 거 먹으면, 이따가 또 배고프잖아!"
"싫어!! 그럼 두 개 먹으면 되지! 해피밀 두 개 사 달라고! 으아!!"
미술관의 강예성 전시에서 도망쳤던 그 뚱뚱한 꼬마와 엄마였다.
정말 내 아들이 저런다면 끔찍할 것 같았다.
'다행히 그럴 리는 없지.'
내 아들은 유나를 닮아 훤칠한 미남에 성격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내가 고백을 성공해야 한다.
"유나야. 이건 어때?"
"뭐가?"
나는 회귀자다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해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