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09화 (109/203)

■ 109. 준비 □

유나와 수진 선배, 정화 선배는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며 끙끙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셋이 지금 작성하는 문서는 '1월의 코디 제안'.

월간 입시미술이란 잡지에서 칼럼 비슷한 의뢰가 들어온 것이었다.

원래 우리나라에는 미대 입시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생 잡지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월간 입시미술입니다."

며칠 전 우리 사무실로 이렇게 전화가 왔었다.

"실은 이번에 저희 잡지의 주고객인 10대 여학생들을 타깃으로 한 새로운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시중의 인기 쇼핑몰 MD에게 코디나 화장법, 트렌드를 묻고, 그들의 조언을 칼럼처럼 싣는 거죠. 안 그래도 하이 유나가 저희 리스트에 있었는데, 영 아트 때문에 더욱 유명해지셨더라고요. 그래서 1회의 초대 손님으로 부탁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아, 한 번 의논하고 다시 말씀 드릴게요."

그리고 우린 잠깐 회의를 가졌다.

"아, 월간 입시미술. 나도 고등학생 때 많이 봤는데."

"맞아요. 나도."

정화 선배가 말하자, 유나와 수진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쇼핑몰 홍보에도 도움이 되고, 또 고등학생 시절도 생각나니까 셋은 협조할 생각이었다.

영 아트가 방송되는 동안, 모든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는 TJ 미디어를 거치도록 출연 계약을 맺었다.

다행히 월간 입시 미술의 기고는 TJ 미디어로부터 쉽게 승인 받았다.

"그런 기고는 우리 방송에도 도움이 되니까요."

그리고 잡지사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을 따라 세 명은 머리를 맞대고 글을 썼다.

나는 셋이 쓴 글을 받아서 읽어보았다.

"좋은데요?"

"진짜? 다행이다. 글을 쓰는 게 생각보다 어렵구나. 형원 오빠가 다시 보였어."

내가 칭찬하자 세 사람이 동시에 안도했다.

"이걸 정기적으로 쓰면 어떨까요?"

"무슨 말이야?"

"우린 상품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덕분에 모델 촬영은 점점 길어지죠. 앞으로 지금보다 훨씬, 유나랑 누나 둘이 너무 바빠질 거예요. 그래서 새 피팅 모델을 추가로 구하고 세 사람의 부담을 줄여야 해요. 세 사람은 모델 외에도 하는 일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함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우리 사이트는 세 사람의 비중이 절대적이니까. 우리 사이트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세 사람을 보러 오는 거죠."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신상 사진이 올라오면 세 사람의 팬들이 댓글로 은근히 경쟁할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사이트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드는 거예요. 이 글처럼 코디 제안도 쓰고, 또 세 사람의 일상 사진도 올리면서 고객과 소통하는 거죠. 대신 상품 촬영에는 전문 피팅 모델을 쓰고요."

으음.

정화 선배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신중하게 고민했다.

"일리가 있긴 해. 대신 사이트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점진적으로 바꿔나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반응이 안 좋으면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재미는 있겠다. 약간 패션 잡지 기자가 된 기분도 들고."

유나와 수진 선배도 동의.

새로운 카테고리의 이름은 '유나's 다이어리'로 정했다.

마치 SNS처럼 세 사람의 생각이나 제안, 그리고 일상 사진을 올리는 카테고리.

그리고 한편에서는 전문 피팅 모델을 고용해 신상품 촬영도 시작했다.

최근 유나 세 사람이 너무 바빴지만, 그래도 신상 등록을 늦출 수는 없으니까.

다행히 이제 우리도 금전적 여유가 있으니까, 꽤 괜찮은 느낌의 피팅 모델을 고용할 수 있었다.

당분간은 수진, 유나, 정화 선배의 사진과 섞어 쓰면서 고객들의 반응을 확인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주원씨."

이번에도 김수희 작가는 실세인 내게 곧바로 전화했다.

"네, 말씀하시죠."

"아마 다음 촬영은 크리스마스 이후가 될 것 같아요. 이제 본선이니까 준비할 게 더 많거든요. 또 방송국도 연말에는 더 바쁘고요."

1차전과 2차전 사이.

2차전과 3차전 사이에는 3~4일의 텀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며칠 더 주어진 모양.

촬영이 힘들고, 일도 바빠서 우리에게는 괜찮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뭔가 개운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왜 그래?"

"방송국은 이제 본선을 준비하고 있잖아.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나는 우승도 하고 싶거든."

나는 유나에게 본격적인 야심을 드러냈다.

원래 여자는 야심찬 남자에게 끌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준비해? 예상 문제를 분석하고 공부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잖아."

준비라······

더 나은 예술 작품을 위한 준비라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 * *

타닥. 타다닥.

춥고 어두운 방.

형원 선배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야심차게 도전한 첫 장편 소설이 곧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고 나와 한철이 들어왔다.

"어어······무슨 일이지?"

"형, 일어나요. 갈 곳이 있어요."

"갈 곳이라면?"

"형, 서둘러요. 밖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까."

형원 선배는 급히 옷을 걸치고,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웠다.

우리는 거의 납치하듯이 형원 선배를 내 카니발에 태웠다.

차에는 이미 유나 등등과 김태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데?"

"속초요."

"속초?"

겨울 속초는 춥다.

하지만 추위를 감내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3주 넘게 이어진 촬영에 몸도 마음도, 두뇌도 전부 지쳐 있었다.

다음 주, 새해를 맞아 시드 배정자와 화끈하게 겨루려면 차가운 겨울바람 정도는 쐬어줘야 할 것 같았다.

한철이 조수석에 앉아서 자기가 가져온 헬스클럽 음악을 재생했다.

우리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혈관 안에 새로운 피가 채워지고 나의 카니발은 속초행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갑자기 속초?"

"형. 속초는 원래 갑자기 가는 곳이에요."

"주원아. 어른이 되었구나."

형원 선배는 작년 초, 어리버리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달라진 내 모습에 보람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나는 속초를 정말 좋아했다.

서울에서 가깝고, 맛있는 음식도 많고 경치도 예쁘고.

전생에서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혼자 다녀오곤 했었다.

하지만 역시 여행의 완성은 같이 가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혼자 가는 여행도 충분히 괜찮다.

그래도 나는 전생에 혼자 너무 많이 다녔으니까.

다시 태어나고 처음 가는 속초.

그것도 친구들과 함께.

나도 헬스클럽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속초의 중앙 시장.

우리는 튀김과 오징어순대, 삶은 문어를 샀다.

회도 종류별로 넉넉하게 뜨고, 닭 강정도 포장했다.

대게도 빠지면 섭섭하다.

찜통에서 갓 나온 김이 무럭무럭 솟는 대게들을 그대로 차에 실었다.

그리고 예약해둔 펜션으로 향했다.

바로 가까이 바다에 닿은 펜션이라, 안에서도 은은히 바다 소리가 들렸다.

바다 매니아인 유나는 무척 들뜬 표정.

뿌듯했다.

"일단 먼저 취하고, 시작하죠."

우린 장 봐온 음식들을 넓게 차렸다.

음식이 끝도 없었지만, 우린 어리고, 다 먹을 자신이 있었다.

유나는 대게의 집게발마다 작은 초를 하나씩 끼웠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미리 하는 거예요."

일곱 개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회와 게살을 한 젓가락씩 준비하고 다 같이 건배했다.

"팀 수진을 위해!"

나는 문어 다리를 썰어 넣고 라면을 끓였다.

"국물이 있으면 더 많이 마실 수 있지."

뜨거운 라면을 가운데 놓자 모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역시 이주원! 사장님 최고!"

마음껏 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 지도 몰랐다.

하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일한 시간.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취했을 때를 돌봐줄 든든한 친구.

오늘 마침 그 두 가지가 다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일곱 명은 정말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신나게 먹고 마셨다.

잠시 후.

"음. 큰일이다."

"뭐가요? 뭐가 큰일이죠?"

수진 선배가 말하자 김태민이 물었다.

"이따 밤바다 보러 가야하는데 너무 마셨다. 겨울 바다에 빠지면 많이 추울 텐데."

하지만 중년 회귀자와 함께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년 회귀자는 언제나 어떤 위기가 닥쳐도 해결방법을 알고 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술도 깨우고, 배도 꺼지게 술 게임을 하는 겁니다."

"술 게임?"

"마피아 게임을 하죠. 머리를 쓰다보면 술도 깨고, 신나는 벌칙을 받다보면 배도 꺼지겠죠."

우리는 모두 경쟁을 즐기는 한국대 학생.

마피아 게임이란 말에 눈빛이 살벌해졌다.

마피아 게임은 마피아가 아닌 척 숨어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게임이었다.

잠깐의 의논 끝에 첫 진행은 한철이가 맡기로 했다.

"제가 두 명의 마피아를 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는 팀은 벌칙으로 5분간 섹시댄스 추기."

"섹시댄스?"

우리 일곱 모두 섹시댄스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만 걸리지 않으면 되니까.

우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철이가 두 명의 마피아를 지목했다.

"자, 모두 눈을 뜨세요. 그리고 앞에 놓인 소주잔에 술을 채우세요! 원활한 게임을 위해 다들 한잔 씩 먼저 들이키고 시작하는 겁니다."

술을 깨우기 위해 시작한 게임.

그런데 왜 또 술을 마셔야 하는 걸까?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린 일제히 잔을 비웠다.

"히이. 형원 오빠."

수진 선배가 살짝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원 오빠 방금 나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형원 오빠 마피아죠?"

음.

형원 선배는 원래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 음흉하게 웃는다.

그것이 마피아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만 아니면 된다.

일단 죽이고 보는 거다.

"아니야. 난 아니라고! 집에서 소설 쓰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는데, 첫 번째로 죽을 수 없어. 주원아, 살려줘. 난 아니야. 날 죽이면 마피아의 음모에 넘어가는 거야."

나는 형원 선배를 향해 대답 대신,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

그리고 외쳤다.

"형원이형 죽일 사람 손!"

다섯 명이 동시에 손을 들었고, 형원 선배는 처형되었다.

"아쉽게도 형원이 형은 마피아가 아니었습니다. 엉뚱한 사람을 죽인 죄로 모두 한잔씩!"

한철이가 진행을 잘하긴 했지만, 왜 게임 전보다 더 취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때 중년 회귀자의 예리한 눈에 수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수진 누나."

"응?"

"누나는 항상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처럼 소주 한 잔을 두어 번 끊어서 삼키죠."

"응? 무슨 소리야?"

"그런데 왜 지금은 한 번에 원샷을 했을까요? 평소와 다른 모습. 긴장이라도 한 걸까요?"

"겨우 그 이유로 내가 마피아라고? 말도 안 돼! 오늘은 안주도 푸짐하고. 술이 달콤해! 내가 문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득바득 항변하는 게 더 수상했다.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녜요. 수진 누나. 오늘은 누나답지 않게 연기가 서툴군요. 심지어 누나는 지금 소주를 마시고 안주도 먹지 않았어요. 저 이주원은 수진 누나를 마피아로 기소하겠습니다."

"이수진이 마피아다, 동의하는 분은 손!"

이번엔 과반수 세 명이 손을 들었다.

"이수진은 마피아가 맞았습니다! 이제 한 명만 더 잡으면 수진 누나는 섹시댄스를 춰야 합니다!"

"안 돼!"

역시 회귀는 괜히 한 것이 아니었다.

난 다음으로 김태민을 지목했다.

"태민이, 넌 왜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지? 눈에 띄지 않기 작전이라도 쓰는 건가?"

내게 지목당한 김태민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주, 주원아. 나는 아니야. 난 진짜 아니야. 날 믿어줘. 우린 친구잖아!"

"여기 친구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 주원이 말이 맞는 것 같아. 김태민이 마피아인 것 같아."

유나까지 자신을 지목하자 김태민은 거의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자, 모두 저를 주목해주세요."

나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사실 제가 김태민을 지목한 것은 함정이었습니다."

"뭐라고?"

"방금 유나를 보셨죠? 여러분. 지난 1년간, 한유나가 이주원의 말에 아무 태클도 걸지 않고 순순히 동의하는 걸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한 번도 없을 겁니다. 무고한 김태민을 범인으로 몰다니. 범인은 바로 너, 한유나다!"

유나는 다급히 손을 저으며 부인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의 논리에 모두들 완벽히 설득당한 후였다.

"유나가 마피아라고 생각하는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투표 결과는 만장일치.

"크읏"

유나는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숙였다.

"한유나는 마피아가 맞았습니다! 이수진, 한유나씨는 일어서서 5분간 섹시댄스를 춰주십시오! 충분히 섹시하지 않을 경우,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모두 박수!"

* * *

밤이 되고 우린 속초 대포항 근처를 산책했다.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나는 유나와 단둘이 걷고 있었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보이고, 파도 소리가 듣기 좋았다.

"유나야."

"어."

"내가 안마해주는 거 좋아하지? 나랑 사귀면 평생 안마해줄게. 하루 30분씩."

유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웃었다.

"안마는 네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오늘도 거절이야."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평생은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니야?"

"아니. 나는 평생 자신 있어."

유나는 다시 웃었다.

"지금 그건 좀 괜찮네. 그래도 기회는 하루 한 번이야. 오늘은 벌써 거절했으니까, 다음에 다시 도전해."

아마, 나한테 체포된 앙금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했다.

그래서 하루 1회 고백이란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게 분명했다.

파앙! 팡!

멀리서 불꽃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원아! 유나야!"

형원 선배랑 친구들이 모래사장에 불꽃놀이 폭죽을 꽂아두고 우리를 불렀다.

겨울바다지만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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