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05화 (105/203)

■ 105. 동물원 □

각자 역할을 나누고, 미션에 돌입했다.

나의 제안으로 이제 우리의 과제는 무대 설치를 넘어서 짧은 연극으로 변해버렸다.

팀 수진은 손발도 잘 맞고, 또 말도 잘 통하는 사람들.

일이 갑자기 늘어나긴 했지만, 한 번 계획을 세우자 모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김태민, 수진 선배와 함께 무대 꾸미기를 맡기로 했는데,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일단 좋은 친구들 극단을 한 번 더 찾아가보죠. 그래서 지금 상영하고 있는 연극은 무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조명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세세하게 살펴보죠."

그리고 김종원 연출과 약속을 잡고 그날 저녁 바로 극단을 재방문했다.

그런데 우릴 맞아준 사람은 김종원 연출이 아니라, 김영오와 박승건이었다.

"안 그래도 저희가 너무 어려운 주제를 드렸나 걱정했거든요. 서양화과 학생들한테 뜬금없이 무대를 만들라니."

"죄송해요. 저희가 하는 일이 무대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대신 오늘 확실하게 가르쳐드릴게요."

경연의 상대인 우릴 이렇게까지 걱정까지 해주다니.

이 사람들은 착한 걸 넘어서 미련해보이기까지 했다.

"따라오세요."

마침 저녁 공연이 끝난 시간이라 김영오와 박승건은 무대를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리고 창고로 안내해 보관되었던 지난 연극의 배경까지 전부 보여줬다.

"감이 오세요?"

"예, 대강 알긴 하겠는데."

"대강으로는 부족하죠. 저희가 다른 극단의 무대도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김영오는 근처의 다른 극단에 전화를 해서 즉석에서 약속을 잡았다.

"따라오세요. 전부 형, 동생 하는 사이라서요. 그리고 우리가 작업한 것도 있고."

그렇게 두 사람을 따라 대학로 극단 순회까지 하자, 무대 꾸미기에 감도 잡히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제법 떠올랐다.

"솔직히 소극단을 찾는 관객들은 많이 이해해주세요. 배경이 허접하고, 소품이 어설퍼도 그 맛에 본다고 해주시죠. 하지만 우리 무대 놈들이 타협하면 안 되거든요. 타협할수록 연극에서 우리의 비중이 줄어드는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무대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삶에 찌든 가난한 예술가를 상상했는데, 형편은 좋지 않더라도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전생의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전생의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전기 선반이랑 에어 타카 사용법은 아세요?"

무대를 설치하려면 목공 작업은 필수였다.

업체에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그럼 당연히 돈이 든다.

그리고 예술가의 세세한 입맛을 맞추려면 역시 직접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친구들이 조소과라서, 학교의 목공실을 쓸 생각이었거든요. 친구들한테 배우려고 했어요."

"그거 조심해서 잘 배우셔야 해요. 잘못하면 손가락 잘리거든요."

"으악."

박승건이 겁을 주자 수진 선배가 우는 표정을 지었다.

수진 선배의 우는 표정을 견딜 수 있는 한국 성인 남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에이 안 되겠다. 따라오세요. 저희가 가르쳐드릴게요. 안전 교육은 많이 받을수록 좋으니까."

김영오와 박승건은 우리 세 사람을 강제로 붙잡고 좋은 친구들 극단의 작업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각종 전기 공구 사용법, 무대에서 쓰는 접착제와 페인트, 각종 부자재 구입하는 방법들, 등등등.

여러 실무 기술을 몇 시간이나 꼼꼼히 전수해줬다.

내가 참다참다 견디지 못하고 물어봤다.

"저, 저희 경쟁 상대인데 이렇게 가르쳐주셔도 괜찮아요? 저희가 드린 과제만 해도 엄청 바쁘실 텐데."

내 질문에 김영오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당연히 괜찮죠. 어린 동생들한테 이렇게 힘든 과제를 주고 걱정하는 것보다, 하루 가르쳐주고 맘 편히 지내는 게 우리한테도 도움 되죠."

"우리가 이 일을 6년 가까이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일에 관심 가져주고 배우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세 사람이 열심히 배우니까 우리도 신나서 가르쳐주게 되네요."

이런 순박한 시골청년들을 봤나.

이건 거액의 상금과 기회가 걸린 대회였다.

이기려고 발버둥 쳐도 모자랄 판에.

'역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유가 있는 지도.'

잠시 이런 못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꼼꼼히 배우고 났더니 벌써 새벽이 되어버렸다.

"저, 배고프시죠?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 동생들한테 밥 얻어먹는 놈들 아닙니다. 저희가 살게요."

밥이라도 꼭 내가 사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두 사람보다 몇 백배 부자였다.

긴 설득 끝에 내가 밥을 사기로 하고, 두 사람을 식당으로 데려갔다.

"여기 수육 대자랑 특제 곰탕 다섯 개요."

나는 24시간 곰탕집에서 제일 비싼 메뉴를 주문했다.

그러자 박승건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이왕 사주는 김에 소주도 한 병 주문해주면 안 될까?"

아차, 내가 이런 실수를.

"두 병 드셔도 됩니다."

나는 솔직히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달랐다.

젊고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그리고 착하고 멍청한 사람들.

영 아트에 출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더 들었다.

나는 두 사람의 잔에 차가운 소주를 가득 부어줬다.

"자, 세 사람도 받아요."

그리고 우리 다섯 명은 경쟁은 잠시 잊고 기분 좋게 건배했다.

"캬아."

수진 선배가 소주 반잔을 들이 키고는, 소주가 너무 써서 견딜 수 없다는 효과음을 냈다.

청순과 귀여움이 뚝뚝 떨어졌고, 나를 제외한 김영오, 박승건, 김태민이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맘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건 전부 연기야.'

나는 수진 선배의 비밀을 알고 있다.

사실 수진 선배는 유나와 둘이서 잠들기 전 소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수진 선배도 살짝 가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만약 이 연기력을 무대에서 보여준다면······'

그리고 그게 전국 방송을 탄다면?

역시 직접 연극을 하자고 한 나의 제안은 탁월한 선택인 것 같았다.

"아, 맞다. 저희가 드린 과제는 어떠셨어요? 그리고 대성이 오빠는 잘 했어요?"

수진 선배가 묻자, 김영오와 박승건은 대답보다 먼저 소주를 한잔 씩 들이켰다.

"과제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성씨는 강렬했죠. 멋있는 분이더군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때는 몰랐다.

"아, 그리고 보내주신 자료들 고맙게 봤습니다."

우린 무대 인생 팀이 오랜만의 대학 과제에 당황할까봐 우리가 했던 과제들을 파일로 정리해서 보내줬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먼저 무대 인생팀을 도운 셈이었다.

'선의가 선의로 돌아온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김영오나 박승건은 계산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우리가 먼저 자료를 정리해서 이 사람들을 도와준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형들도 준비하다 모르시는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요."

김태민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으로 보고, 너무 잘생겼길래, 굉장히 도도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잘생긴 사람이 이렇게 성격까지 좋은 건 진짜 처음 보네."

잠깐, 박승건씨.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잘생기지 않았단 말입니까?

아니면 성격이 좋지 않단 말입니까?

아무튼 그날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기분 좋게 헤어졌다.

여러 가지를 배우기도 했고, 무대를 어떻게 만들지 힌트를 얻기도 했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 * *

유나와 정화 선배는 사실 옷 만들기의 준 마스터쯤 된다.

자체 생산을 하며 여러 옷을 살펴보기도 했고, 그 동안 직접 만든 옷만 서른 벌도 넘을 것이다.

물론 자체 생산 전에 엎어진 옷도 많으니까, 대량 생산한 옷은 그것보다는 적다.

두 사람은 완전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 무대 의상은 동대문 샘플집에 의뢰했다.

그리고 리폼으로 해결되는 옷은 둘이서 직접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의상 쪽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양.

형원 선배도 열심히 대본을 쓰고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 엄마를 한 번도 못 봤죠? 우리 엄마는 인디언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인디언의 아들."

형원 선배는 크게 소리 내어 읽으며 대사를 고쳐 썼다.

긴 문장은 짧게 고치고,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다른 단어로 대체했다.

그리고 배우가 된 것처럼 직접 연기까지 하며 동선에 대사를 녹여냈다.

'각본을 쓰는 게 생각보다 일이 많구나.'

형원 선배가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얼마나 쉽게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분량이 많지 않고, 형원 선배가 능력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잠깐 시간을 내어 동네 부동산에 다녀왔다.

내 오피스텔은 혼자 쓰기엔 너무 넓어서 계약기간이 남았지만 미리 내어놓은 것이었다.

다행히 자리가 좋아서 금방 나갔다.

이사갈 집도 금방 구했다.

15평짜리 작은 빌라 전세.

그리고 집에 관해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좋은 집을 구하기 힘들었던 것은, 예산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어. 예산만 충분하면 이사 갈 곳은 많았구나.'

이사는 이번 경연이 끝나면 하기로 했다.

짐이 거의 없어서 이사는 어려울 게 없을 것이다.

* * *

그리고 우리의 무대가 지어지고 있는 방송국으로 갔다.

세트장으로 갔더니 유나 혼자 전기난로를 쬐며 대본을 외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밥 먹으러 갔어."

"넌? 배 안고파?"

"난 빈 속일 때 잘 외워지거든."

그리고 내게 자기 대본을 건넸다.

"나 다 외웠다. 이주원, 네가 상대역 해줘."

밥도 굶으면서 대본을 외우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유나는 주인공 제제의 어린 남동생인 루이스 역할이었다.

유나가 머리를 묶어서 모자 안으로 넣자 정말 어린 꼬마처럼 보였다.

오늘의 장면은 제제가 루이스에게 상상 속 동물원을 구경시켜 주는 부분.

동물원은 실재하지 않지만, 가난한 어린 형제가 상상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유나가 먼저 시작했다.

유나가 동생 루이스.

수진 선배가 주인공 제제.

물론 오늘은 내가 제제다.

"제제 형, 이제 어떤 동물을 보러갈 거야?"

"원숭이 우리에 가보자. 원숭이 우리에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돼. 원숭이들이 바나나 껍질을 던지니까."

"아니, 아니. 이주원. 좀 더 감정을 넣어서 수진 언니처럼 제대로 하라고."

유나 루이스는 까다로웠다.

"형, 이 동물은 이름이 뭐야?"

"루이스 어서 손을 빼. 그 검은 표범은 조련사의 팔을 열여덟 개나 먹었어."

"형, 그럼 이 표범은 서커스단에서 온 거야?"

"맞아."

"전에는 그런 말이 없었잖아. 그 서커스단 이름이 뭔데?"

"로젠버그 서커스단."

"그건 우리 동네 빵집이름이잖아!"

수진 선배 같은 마력은 없었지만, 유나 루이스도 나름 진짜 꼬마처럼 열심히 연기했다.

"제제 형. 이제 동물원은 지겨워. 나 노래 불러줘."

"안 돼, 이 동물원은 사람이 너무 많잖아."

"아니야. 사람들은 이제 다 가버렸어."

원래의 소설에서는 제제가 루이스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하지만 우리의 대본은 여기서 끝났다.

형원 선배가 작곡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유나는 대사를 다 외워서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제제 형, 어서 노래불러줘."

"대본은 여기까진데?"

"제제 형, 나 춥고 배고파. 이게 전부 형이 낸 아이디어 때문이야. 노래 한 곡은 불러줄 수 있잖아?"

음, 그렇다면.

나는 꼬마 제제가 된 것처럼 손을 내밀며 내가 아는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중년의 회귀자.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근."

애석하게도 마흔을 넘길 무렵부터 이런 노래들이 좋아졌다.

내 트로트가 울려 퍼지자 유나는 배를 붙잡고 웃어댔다.

그래도 웃어주니 다행.

유나가 뒷 소절은 자기가 부르겠다고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곧 유나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 지나치는 시간이 되면, 나는요 어느 샌가 거울 앞에 있어요.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해주세요. 눈물만큼 고운 별이 될래요. 그대 가슴에."

유나가 노래를 잘 하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다니.

오늘은 유난히 듣기 좋았다.

유나는 노래를 끝까지 부르고는 혼자 신나게 웃어댔다.

"엄마, 아빠랑 노래방 자주 갔거든. 아빠한테 배웠지. 이주원, 너는 어떻게 된 게 우리 아빠랑 노래 취향이 똑같냐."

그렇단 말이지.

좋은 징조였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밥 먹으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뭐가 그리 좋아서 두 사람 싱글벙글이야."

아무튼 우리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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