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04화 (104/203)

■ 104. 작전 □

강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수년간 육체노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시골 청년 다섯 명이 김대성을 노려봤다.

다행히 잘 수습되어, 녹화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 포스터, 가면, 영화, 인생 예술 계획 ]

김대성은 칠판에 4개의 키워드를 적었다.

"이 네 개의 주제는 지난 1년간 서양화과 1학년들이 수행한 과제다. 똑같은 주제를 줄 테니 전부를 하든, 몇 개를 고르든 알아서 작품을 만들어 오도록. 그리고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들과 같이 크리틱을 하겠다. 너희들 때는 잘 모르겠는데, 요즘 크리틱은 살벌하다. 그러니까 철저히 준비하도록."

김대성은 꿋꿋하게 교수 컨셉을 밀어붙였다.

김대성은 파워포인트를 넘기며 그동안 다른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들을 예시로 보여줬다.

"물론 여기는 서양화과다. 하지만 그림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자유로울 것. 예술가의 가장 큰 의무 가 바로 자유다. 입체든 그림이든 영상이든, 너희들이 잘 하는 걸 만들어오면 된다. 시간은 일주일이다. 그럼 좋은 작품을 기대하겠다."

그렇게 무대 인생팀에게도 과제가 주어졌다.

* * *

저녁.

내 넓은 오피스텔.

팀 수진 여섯 명이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대본을 읽고 있었다.

우리가 받은 대본은 세 개.

먼저 '사랑 이야기'.

3년 전 개봉한 로맨스 영화를 연극으로 각색한 것이다.

지금 극단 '좋은 친구들'이 공연하는 작품이었다.

두 번째는 '우리 마을로 놀러오세요.'

웹툰을 각색한 연극으로 시골을 배경으로 풋풋한 고등학생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브라질 소설가 바스콘셀로스의 글로, 모두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특이하게 세 편 다 원작이 있었다.

그리고 김종원 연출가가 그 이유에 대해 말해줬다.

"저희 같은 소극단은 몇 달 동안 준비한 연극이 실패하면 많이 힘들어져요. 그래서 흥행이 보장된 대중적인 작품을 고를 수밖에 없어요. 흥행이라는 게 돈을 많이 버는 흥행이 아니라, 계속 극단을 꾸려갈 수 있는 그 정도 흥행이지만요."

우린 여러 부의 대본을 가져와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태민, 유나, 정화 등등은 과연 미대생답게 대본을 읽으며 노트를 꺼내 떠오르는 무대를 스케치해보곤 했다.

물론 모두 집중할 수 있도록 내가 틈틈이 노력상점의 [환기]를 써 준 것은 당연한 이야기.

그리고 나는 드디어 노력상점 레벨 3의 신상품 [ 알래스카 얼음 호수 산책 (5코인)]을 구매했다.

나의 다른 산책 상품들인 [ 숲 속 산책 ]과 [바닷가 산책]은 머리를 맑게 해주고 심신을 안정시켜준다.

하지만 [알래스카 얼음 호수 산책]은 이름부터 살벌하다.

그리고 가격은 무려 5코인.

[ 알래스카 얼음 호수 산책 : 눈이 쌓인 얼어붙은 호수 주변을 산책합니다. 손발이 시리고 귀가 아프겠지만, 정신이 번쩍 듭니다. 피로가 날아가고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

상품 설명대로라면, 지금이 바로 얼음 호수 산책을 사용할 시점이었다.

'으윽'

잠시 후, 온몸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이 정돈되고, 세 편의 두꺼운 대본들이 술술술 읽혀졌다.

그리고 두뇌가 광속도로 회전했다.

'먼저 이 세 편의 대본. 문제가 있었군.'

그 문제점은 바로 지독하게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웹툰을 각색한 '우리 마을로 놀러오세요.'의 원작은 무려 100편이 넘는 분량.

그리고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역시 한 권의 도톰한 책.

그 긴 내용들을 한 편의 연극에 담아내려니 몇 개의 이야기와 장면만을 추려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본은 엉성하고 허점이 많았다.

'그래서 좋은 친구들 극단이 영화를 원작으로 한 대본을 선택했던 거야. 그나마 영화와 연극의 갭이 가장 적으니까 각색이 쉬웠을 거야.'

하지만 재미없기는 마찬가지.

물론 우리의 과제는 무대 꾸미기일 뿐이었다.

대본이 재미없어도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원래 좋은 작품이 나오려면 먼저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법.

이 엉성한 세 편의 대본으로는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슬쩍 형원 선배의 얼굴을 바라봤다.

'역시 어두워.'

형원 선배는 한국대 국문과.

거기다 신춘문예와 SF공모전 대상까지 수상한 이 분야의 엘리트였다.

어쩌면 이 대본들을 각색한 작가보다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날지도 몰랐다.

그러니 형원 선배 역시 나처럼 이 대본들의 문제를 발견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끙끙대며 열심히 대본을 분석하고 또 무대를 구상하며 셋 중 어떤 대본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좋은 무대를 만들어서 경연에서 이기는 것.

그게 팀 수진의 목표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하나의 목표가 더 있다.

'바로 이 세 사람.'

수진, 정화 선배와 유나의 매력을 방송에서 최대한 어필하는 것.

그것은 하이 유나의 매출과 직결된다.

친구들을 파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긴 하다.

하지만 이왕 어차피 방송을 탔으니까, 기회를 최대한 살려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목표를 위해 꾸준히 애써왔다.

첫 번째 경연인 벽화 그리기에서는 세 명에게만 벽화를 몰아줬다.

두 번째 경연인 공간 채우기에서는 수진 선배에게 작품 해설을 부탁했고, 유나 정화에게는 엽서 판매를 부탁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무대 꾸미기 플러스알파로 세 명의 매력을 부각시킬 방법도 모색해야 했다.

재미없는 대본과 세 명의 매력 어필.

'그래, 어쩌면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몰라.'

나는 역시 치밀한 중년의 회귀자.

언제나 파고들 허점을 찾아낸다.

삑삑삑.

나는 김수희 작가에게 한통의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회의를 이끌었다.

"자,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까. 대본을 다 읽지 못했더라도 일단 회의를 시작하죠."

그러자 모두 고개를 들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뭔가 모두들 표정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먼저 일단 이 과제에는 문제가 하나 있어요."

"음, 뭔지 알 것 같아."

내가 말하자 유나가 끼어들었다.

유나는 승부욕이 강해서 이런 퀴즈 같은 상황에는 어김없이 끼어들곤 했다.

"뭔데?"

"이 과제는 우리가 낸 과제랑 차이점이 있어요. 우리는 과제를 주고, 어떻게 평가할지까지 이야기를 해줬어요.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들이 참여하는 크리틱을 하겠다고 했죠. 하지만 이 무대 꾸미기 과제는 어떻게 평가할 지가 빠져 있어요. 방송 작가들도, 무대 인생팀도 그 부분을 두루뭉술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어, 정말 그러네."

유나가 설명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덧붙였다.

"유나의 말이 맞아요. 그런데 이게 오히려 기회일 수 있어요. 우리가 원하는 평가 방식을 우리가 정해서 제안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방식으로 싸우는 거죠."

"괜찮은데? 그럼 빨리 정해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난 아직 우리가 어떤 대본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

"나도, 나도 모르겠어. 결정 장애인가."

"저도요."

훗.

내가 가볍게 웃었다.

"결정 장애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선택을 못하는 건 이 세 편의 대본이 모두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재미가 없다'고 말하자 모두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착한 예술가들의 딜레마였다.

재미가 없으면서도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나 말을 쉽게 못하는 것이었다.

물론 유나나 정화 선배는 해당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문학 전문이 아니니까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처럼 당당하게 앞에 나서서 재미없다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특히 형원 선배.

내가 재미없다고 선언하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크게 숨을 뱉었다.

"주원이 말이 맞아. 이 세 대본 모두 솔직히 엉망이야."

그리고 띠딩띠딩.

때마침 내가 김수희 작가에게 보낸 문자의 답이 왔다.

나는 핸드폰의 긴 답장을 읽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형원이 형. 이 대본들이 재미가 없는 이유가 뭐죠?"

"그건······일단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야."

"맞아요. 저도 진짜 좋아해요."

"나도."

유나와 수진 선배가 재빨리 끼어들어 의견을 보탰다.

형원 선배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연극으로 꾸미기엔 무리가 있었나봐. 한 시간 조금 넘는 연극 안에 소설 한권을 끝내야 했으니까. '우리 마을로 놀러오세요' 웹툰은 읽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비슷한 이유일 거야."

이제 노련한 회귀자가 나설 차례.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는 2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만든 무대를 어떻게 평가받느냐."

어쩌면 미술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똑같을지 모른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포장도 중요하다.

특히 미술에서는 똑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설명하는지에 따라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세 편의 대본이 전부 너무 재미가 없어서 그 중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다. 그런데 어쩌면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쯤에서 유나를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한 번 날려주고.

"먼저, 첫 번째. 무대를 어떻게 평가 받느냐. 우리가 주문 받은 것은 무대 미술과 조명, 의상이었죠.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야,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지금은 카메라도 없잖아."

내 미소의 매력이 먹히지 않았는지 유나가 나를 다그쳤다.

"우리가 직접 연극을 하는 거야."

"엥?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일주일 동안 무대 만들기도 빡센데 어떻게 연극을 하자는 거야?"

유나 뿐 아니라, 모두 강하게 반대의 인상을 썼다.

"아니, 생각해봐. 연극을 통째로 할 필요는 없어. 방송이 우리한테 할애하는 시간은 겨우 10분 남짓이야. 우리가 직접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를 하는 것보다, 무대를 보여주는 더 좋은 방법이 있어?"

"난 찬성이에요."

그때 김태민이 모처럼 내 손을 들어줬다.

"전 늘 무대 미술이 궁금했어요. 아마 그림 그리는 사람은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들 연극을 한 번 쯤 동경하죠. 이번에는 방송이니, 경연이니 그래서 무대를 꾸미게 되었지만, 분명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무대를 다뤄보는 마지막 경험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김태민까지 찬성하자, 모두의 얼굴에 갈등이 비쳤다.

김태민의 말대로였다.

화가들은 모두 한 번쯤 무대 미술에 도전하고 싶어 한다.

방송을 떠나서 이건 무척 즐거운 기회였다.

"일리 있는 말 같아. 그리고 김종원 연출자도 그랬지. 소극단에서는 따로 역할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형원 선배까지 찬성의 의견을 보탰다.

"그리고 또 하나. 실은 제가 방금 전에 김수희 작가한테 문자를 하나 보냈어요. 이번 경연의 주제는 주어진 대본을 바탕으로 무대 꾸미기였죠. 그런데 우리가 대본을 각색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김수희 작가가 상관없다고 답을 줬네요. 각색 역시 예술의 일부니까, 더 좋은 결과물만 나오면 상관없다고 설명까지 붙여서요."

"각색을 한다고?"

"이 대본들이 재미가 없어진 것은 긴 이야기를 1시간 안팎으로 줄였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린 1시간도 필요 없어요. 10분 남짓. 그러니까 이 대본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최적화된 대본이 아니었던 거예요."

1시간짜리 대본의 무대와 10분짜리 대본의 무대 미술은 처음부터 밀도가 다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린 세 편의 원작 중 하나를 골라서, 10분 남짓한 장면과 대사만 뽑아서 짧은 연극을 꾸리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만든 무대를 보여주는 최고의 방법이죠."

동시에 유나 등등의 매력을 최대한 방송에 보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형, 어때요?"

우리 팀의 비밀 무기이자, 신춘문예와 SF공모대전을 제패한 형원 선배에게 물었다.

이 계획은 형원 선배가 있기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음. 10짜리 대본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확실히 지금 이 대본들보다는 나아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회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우리가 직접 연기를 하는 것.

부담스럽긴 하겠지만, 그게 무대를 제일 잘 보여주는 방법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대본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웹툰이나 영화는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모두 읽어봤고, 또 모두 좋아하는 책이었다.

'게다가 수진 선배를 꼬마 제제로 분장시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후후후.'

'제제'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주인공인 귀여운 사고뭉치 꼬마였다.

물론 전문 배우처럼 매끈하게 연기를 하진 못하겠지만, 수진 선배랑 무척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게다가 수진 선배는 연기를 할 때는 묘해지는 구석이 있어 은근 기대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소설책에서 몇 개의 탐나는 장면을 골라냈다.

그리고 의견을 모아 같이 무대를 구상해보기도 했다.

"그럼 형원이 형은 이 장면들을 모아서 각본을 써주세요. 나랑 수진 선배, 태민이는 같이 무대를 만들고. 유나와 정화 선배는 의상을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형원이 형이 각본을 완성하면 대본 연습에 들어가는 거예요. 바쁘긴 하겠지만, 도전해볼 가치는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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