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03화 (103/203)

■ 103. 무대 □

스튜디오 녹화가 시작되었다.

이제 남은 팀은 모두 8팀.

이번 경연인 '서로에게 과제주기'를 통해서 4팀이 남게 된다.

그리고 4팀은 유인호나 최성진 같은 시드 작가들과 겨루게 된다.

스튜디오 화면에 짧게 편집된 영상이 상영되었고, 진행자인 김경아는 영상에 맞춰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아마추어 출연자들인만큼 스튜디오는 좀 어수선하기도 했다.

특히 우리 팀은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었고, 그 중에서도 역시 형원 선배가 제일 질문을 많이 받았다.

질문을 많이 받았다기 보다는 질문을 자기에게 끌어왔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른다.

김경아는 모두에게 골고루 기회를 줬지만, 단연 형원 선배의 답변이 눈에 띄었으니까.

"지난 주 '공간 채우기'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치러졌는데요. 팀 수진을 이기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하던 상대팀을 압도적으로 물리치셨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소감이요? 소감이 있긴 하지만 상대팀에 대한 소감은 아닙니다. 벌써 그 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걸요. 그냥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기쁘고, 즐겁게 같이 노력해준 팀원들에게 고마울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매일 경연하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가장 무서운 심사위원이나 경쟁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요. 그래서 늘 하던 대로 우리를 위한 과제를 하나 마쳤을 뿐입니다. '상대팀'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형원 선배는 이번에도 멋있게 말했다.

그리고 이게 방송으로 나간다면 UN 팀은 벽에 머리를 찧으며 약 올라할 게 분명했다.

UN팀은 앞으로도 영영 한국대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제의 인물 이수진씨."

"네?"

김수희 작가가 내게 귀띔해준 적이 있었다.

'유나씨나 태민씨는 생각보다 방송에 별로 쓸 게 없어요. 정화씨도 그렇고요. 유나씨랑 정화씨는 대답을 너무 똑부러지게 해서 어린 대학생 느낌이 나지가 않거든요. 그리고 태민씨는 대답을 자꾸 얼버무리니까······ 그런데 수진씨는 그냥 웃기만 해도 그림이 나와요. 딱 우리가 바라는 풋풋한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요.'

실제로 지금 영 아트 홈페이지의 댓글 순위 1위는 수진 선배였다.

온갖 추측과 환상이 난무하는 댓글들.

하지만 나는 수진 선배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 유나랑 둘이서 소주 한 잔 하는 사람이라고. 안주는 족발과 곱창. 당신들이 꿈꾸는 순수한 스물한 살 여대생이 아니야.'

수진 선배는 이번에도 카메라를 향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예쁘고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수진씨. 그럼 마지막으로 여덟 팀을 대표해서 다음 미션을 소개해주시죠."

PD와 작가들이 수진 선배에게 역할까지 맡긴 모양이었다.

수진 선배는 카메라를 보며 준비한 대사를 외쳤다.

"영 아트 코리아, 벌써 세 번째 미션이 시작되는데요. 이번 주제는 '상대팀에게 과제를 내주기'입니다. 우리 여덟 팀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미술을 추구하고 있는데요. 서로의 분야를 바꿔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저희 팀 수진은 이번에 어떤 모험을 하게 될까요. 두근두근 거···"

수진 선배는 여기까지 말한 후, 숨이 찬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혀를 내밀려고 하자, 옆에 앉아있던 정화 선배가 재빨리 수진 선배의 허벅지를 때렸다.

수진 선배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멘트를 이어갔다.

"벌써 두근거리는데요! 그럼 다음 주도 채널 고정!"

스태프 쪽을 쳐다보니 PD와 촬영팀들이 모두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기들이 원하는 그림이 그대로 나온 모양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방금 둘의 케미로 또 한 번 쇼핑몰 매출이 요동칠 거라 생각하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촬영이 끝난 후 스튜디오 뒤쪽.

"어, 무대 인생팀이다."

우리는 여섯 명이 모여 있었는데, 유나가 갑자기 한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정화와 수진 선배도 그쪽을 쳐다봤다.

"어, 진짜다."

다섯 명의 무대 인생팀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곧 서른 살이 된다는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들.

나보다 한참 선배였겠지만, 속으로는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 꾸벅.

그들이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나이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무대 인생팀의 김영오입니다. 아마 우리가 직접 만날 일은 별로 없겠지만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저희가 낸 과제로 촬영하실테고, 또 저희 일을 방송에 소개도 해주실테니까요. 그리고 저희가 지난번에 팀 수진을 지목한 건 그냥 저희 목표라는 거지, 다른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순박한 말투.

이번에는 VJ도 데려오지 않았다.

내가 나서서 대답하려 했는데, 어느새 수진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꼭 이럴 때만 알아서 리더 역할을 했다.

"네. 나쁘게 생각한 적 없었어요. 그리고 벽화 그리신 거 너무 멋있었어요."

유나와 정화 선배까지 앞으로 나서서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희도 잘 부탁드려요. 혹시 저희가 낸 과제에서 궁금하거나 도움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정화 선배는 자기 전화번호까지 가르쳐줬다.

"응원할게요. 오빠들 너무 멋있어요."

이건 유나.

오빠라는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다니.

또 멋있긴 뭐가 멋있어.

어리버리 촌놈들 같은데.

유나도 취향이 참 특이한 것 같았다.

아무튼 뜻밖의 환영에 무대 인생팀은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이건 우리 팀 유나 세 명의 잘못이었다.

서른 즈음의 순박한 청년들에게 상큼한 여학생들이 갖는 파괴력을 세 명이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팀 유나의 공격은 계속 되었다.

"저희도 경연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해도 되죠?"

"그래도 되죠? 저희도 오빠들 번호 가르쳐주세요!"

"네, 얼마든지 전화하십쇼! 저희 번호 여기, 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우리와 헤어질 때까지 무대 인생팀은 몇 번이나 우리를 향해 인사를 했다.

* * *

그리고 이틀 후 오전.

우리는 작가와 VJ들과 함께 대학로의 소극장을 찾았다.

우리의 다음 과제를 받기 위해서.

"안녕하세요. 극단 '좋은친구들'의 연출을 맡고 있는 김종원입니다. 영오와 승건이 부탁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저희 일을 소개해드리고 또 경연의 주제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김종원의 안내를 따라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오전의 불 꺼진 연극 무대는 묘한 맛이 있었다.

"여기가 저희 무대입니다. 저희가 지금 공연하는 연극은 '사랑 이야기'. 3년 전에 개봉했던 동명의 영화를 연극으로 옮긴 것입니다. 직접 무대에 올라와 보시죠."

나무로 지어진 무대 위를 걷는 게 느낌이 묘했다.

단단한 바닥이 아니라, 밑이 텅 빈 세상에 서 있는 기분.

잠깐이지만 내가 정말 배우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무대 뒤의 배경 그림들.

나는 손을 뻗어 직접 만져 보았다.

나무판에 그려진 그림들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 객석도 한 번 내려다보세요. 느낌이 새로울 겁니다. 처음 연극 배우가 되면 객석의 시선들에 긴장하게 되는데, 나중엔 객석의 반응을 보며 안도하게 됩니다. 연극은 관객들과 같이 만들어가는 예술입니다."

객석은 텅 비어 있었지만, 텅 빈 객석도 뭔가 우리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끼약!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유나와 정화 선배가 무대에서 뛰어내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객석 쪽에서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무대 위에서 보는 배경 그림과 객석에서 올려다보는 배경 그림은 느낌이 다를 것 같았다.

나도 아래로 내려가 무대를 올려다 보았다.

"역시 미술하시는 분들이라 예리하시네요. 이런 소극장은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짧긴 하지만, 그래도 객석의 시야는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

수진 선배는 겁먹고 못 내려오고 있어서 김태민이 손을 잡아주었다.

"자, 다 보셨으면 따라 오시죠. 무대 뒤쪽을 보여드릴게요."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우르르 김종원을 따라갔다.

그리고 팀 수진 중 미대생 다섯 명은 동시에 웃음을 지었다.

소극단 연극 무대의 뒤편.

뭔가 신비롭고 근사한 예술의 진면목을 볼 줄 알았는데, 너무 익숙한 광경이었다.

우리가 늘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진짜 거짓말 안보태고 서양화과 작업실과 싱크로율이 거의 80% 이상이었다.

지저분하고 짐과 옷이 굴러다니고, 침대로 쓰는 낡은 소파와 냄새나는 담요까지.

야심찬 표정으로 소개하는 김종원 연출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잘 보셨죠? 그럼 이제 분장실도 보여드릴게요."

우린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분장실은 우리 쇼핑몰 분장실과 싱크로율 90% 이상이었다.

커다란 거울.

고데기와 드라이기.

쌓여있는 옷과 메이크업 도구.

종이컵 가득한 탁자.

다만 다른 것은 손때 묻은 대본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것뿐이었다.

"어때요? 근사하죠? 여러분들이 보는 화려한 연극무대와 배우들은 전부 이렇게 무대 뒤에서 만들어지는 거죠."

그래도 우린 친절한 김종원 연출의 설명에 최대한 호응해줬다.

우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김종원 연출자는 꽤 흐뭇한 모양이었다.

"영오랑 승건이가 팀 수진 오면 잘 부탁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 갔거든요. 상대편인데 대체 왜 그러나 싶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이해가 되네요. 계속 퍼주고 싶게 만드시네요. 딱히 드릴 건 없지만요."

그렇다니 다행.

"그 친구들 지방에서 올라와서 배우도 하고, 무대일도 하면서 고생 많이 했거든요. 아무튼 그 친구들도 잘 돼야 할 텐데."

"무대 인생팀이 배우도 했나요?"

"네, 그렇죠. 저희 같은 작은 극단은 역할이 분명히 나눠져 있지 않습니다. 해야 되면 다 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김종원 연출자는 몇 개의 연극 대본을 가져와 손에 들었다.

"자, 그러면 저희의 과제를 드리겠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저희가 드릴 과제는 무대 꾸미기입니다. 여기 우리가 지난 가을에 검토했던 대본 3개가 있습니다. 이 중 하나를 골라서 작은 무대를 꾸미고, 조명과 의상까지 준비해주시면 됩니다. 다만 저희가 열악한 소극단인 점을 고려해 시간과 비용의 제약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산은 백만원.

우린 방송국이 제공한 세트에 작은 무대를 꾸며야 했다.

대신 조명은 방송국에서 제공해주고, 우린 배치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한 시간은 7일입니다."

크지 않은 무대라서 충분한 시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굉장히 촉박한 시간이었다.

우린 대본 검토부터 시작해야 했고, 또 무대 꾸미기에서 모르는 것은 배워가며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간에 대해서는 김수희 작가가 우는 소리를 했다.

"저희도 시간을 더 드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어요. 여덟 팀의 과제를 동시에 촬영하고 편집해야 하니까요. 일주일도 최대한으로 드린 거예요."

그러니 우리로서는 곧바로 시작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야 바쁜 걸 즐기니까.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 팀은 잘 해왔으니까.

"그럼 이번에도 잘 해봅시다."

우리 여섯은 모여서 또 한 번 파이팅을 외쳤다.

* * *

한국대 서양화과의 빈 강의실.

대부분 종강했지만, 그래도 미대 건물은 아직 학생들이 이따금 보였다.

그들은 방학 중에도 작업실을 쓰는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유난히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카메라를 든 VJ들과 작가와 PD들.

무대 인생팀이 자기들의 주제를 받기 위해 학교로 온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김대성입니다."

과제를 주기로 한 학생이 오늘의 책임 연출자인 황재국 PD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교수를 섭외해서 과제를 받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니까 팀 수진이 김대성이라는 학생을 추천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황재국 PD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재국은 안도했다.

김대성이란 학생이 의욕도 있는 것 같고, 목소리도 씩씩했다.

사람도 순수해보였고, 한국대 생은 원래 영리하니까.

그러니 오늘 촬영은 금방 끝날 것 같았다.

"대성씨. 팀 수진이 준 과제 내용은 저희가 다 잘 검토했습니다. 저희가 드린 스크립트는 참고만 하시면 되시고요. 편하게, 자연스럽게. 평소 학교에서 보시던 대로, 과제만 전달하시면 됩니다."

"네, 평소 보던 대로."

"긴장하지 마시고요. 한국대 서양화과의 일상을 소개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네, 저희의 일상을······"

드르륵.

그리고 김대성은 문을 열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에는 무대 인생팀의 다섯 명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오랜만의 학교가 조금 긴장된 모양.

김영오와 박승건은 지방대 미대 출신이었다.

그들에게는 완전 다른 세상처럼 보이던 한국대 서양화과의 강의실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촬영은 늘 떨렸지만, 오늘은 더 떨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강의실 뒤편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와 작가들, 그리고 FD들이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쿵.

"어, 어흠."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김대성은 교탁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무대 인생팀과 촬영 스탭.

모두의 시선이 김대성을 향했다.

그리고 김대성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 쓰레기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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