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02화 (102/203)

■ 102. 겨울 밤 □

다행히 신촌에서 유나 집까지 가는 길에 음식점은 아주, 아주 많았다.

나는 양손 가득 먹을 걸 사들고, 만화책도 스무 권 빌리고, 귤도 한 봉지 사고 유나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솔직히 기뻤다.

정말 해보고 싶었다.

스무 살, 새내기 대학생 시절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것.

여학생 자취방에 놀러가서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누워서,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읽고 싶었다.

유나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되긴 했지만, 은근히 설레고 뿌듯했다.

'뭐, 이제 거의 나았다니까.'

마침 쉬는 날 맞춰서 너무 심하지 않게 적당히 아프다니.

그것도 수진 선배가 없는 밤을 틈 타서.

유나는 정말 최고의 친구였다.

지금은 12월.

얼마 전에는 눈도 내렸고, 밤공기는 차다.

나는 노련한 중년 회귀자.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것이 아니다.

나는 목에 감았던 목도리를 풀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티셔츠의 단추를 마지막까지 풀었다.

'최대한 추워보여야 해.'

유나가 음식만 받고 나를 쫓아내는 불상사가 생겨서는 안 된다.

콧물이 흐른 것처럼 침도 찍어 바르고, 불쌍해 보이도록 머리도 헝클었다.

똑똑.

끼이익.

문이 열리고 잠옷에 숄카라 카디건을 걸친 유나가 나타났다.

"어휴."

유나는 나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발발 떨면서 애처로운 눈으로 유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술 마셨어? 빨리 들어와, 바보야."

후후.

과연 우리 중 누가 진짜 바보일까?

무심코 불러들였겠지만, 날이 밝기 전에는 이 방에서 결코 나가지 않으리라.

"누구랑 술 마신거야?"

"응. 고등학교 동창회."

"그래? 그럼 더 놀지 그랬어."

하하. 한유나씨.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다뇨.

저는 이미 당신을 충분히 존중하니, 그런 의미 없는 말로 사소한 자존감을 채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역시 비싼 남자라서 그 기분을 잘 알거든요.

"약은?"

"지어둔 거 남았어."

"그래. 잘 기다렸어. 내가 사온 음식으로 속부터 채우고 약 먹자."

"설마 밍밍한 죽 같은 거 사온 건 아니겠지?"

후후.

회귀는 괜히 한 것이 아니다.

유나가 감기 기운이 있어 냄새를 잘 못 맡는 듯해서, 나는 가지고 있던 검은 봉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양념 꼼장어 구이는 어떨까? 20년 전통의 포장마차에서 짚으로 초벌구이해서 불맛을 살렸으며 다량의 수분과 콜라겐을 함유해 기력 회복과 피부 보습에 도움을 주지. 거기에 설탕과 청양 고추 각종 자극적인 양념으로······"

"꺄악! 역시 이주원!"

입맛이 없어서 이런 게 끌렸는지 유나가 좋아서 방방 뛰었다.

아픈 사람 맞나.

그런데 죽도 사오긴 했었다.

"빈속에 매운 거 먹으면 탈나니까, 만화책 보면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죽 데워줄게."

그리고 당당하게 유나의 방을 가로질러, 싱크대에서 그릇들을 꺼내 죽을 퍼 담았다.

이제 언제 쫓겨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자신의 집 부엌처럼 떳떳하게 행동했다.

왜 이런 사소한 게 이렇게 뿌듯한지.

나도 잘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소고기 야채죽을 작은 그릇에 담아서 전자렌지에 데우고, 꼼장어도 예쁘게 접시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만화책을 보고 있던 유나 앞에 밥상을 놓았다.

예전에 유나가 내게 밥을 차려준 작은 밥상이었다.

"잘 먹을게."

호록. 호로록.

밍밍한 죽은 싫다더니 유나는 부지런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애완동물을 기르면 이런 기분일까.

토끼처럼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만 봐도 흐뭇했다.

"그런데 이주원. 꼼장어만 사온 거야?"

"응? 깻잎이랑 풋고추도 챙겨왔어. 같이 먹어."

"아니, 그게 아니라 꼼장어엔 소주지. 소주는 왜 안 사온 거야?"

"아프다며?"

나 역시 여대생의 자취방에 가면서 술을 사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양심이랄까?

열심히 일해서 몸살 난 유나에게 차마 술까지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시 남녀 사이에 양심 따윈 필요 없었던 것일까?

술을 사와야 했던 것일까?

노련한 회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실수를 한 듯 했다.

하지만.

"으이그."

후회가 온몸을 강타할 때, 유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작은 냉장고를 열더니 냉장고에서 푸른색 소주병을 꺼냈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모범생 유나의 방에 소주가 준비되어 있었단 말인가?

이것이 요즘 미대생의 현실인가?

시대에 뒤쳐진 회귀자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수진 언니랑 밤에 배고프면 야식 시켜 먹고 자거든. 그럼 소주가 딸려 와. 가끔 수진 언니랑 한잔 하고 자면 꿀잠을 잘 수 있지. 고달픈 학교 이야기도 하면서."

그랬군.

유나를 타락시킨 원흉은 수진 선배였다.

아무튼 서양화과 최고의 미녀 두 명이 가끔 잠옷 바람으로 소주를 한 잔 하고 잔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대 생활은 어린 여학생들이 종종 술의 힘으로 잠 들어야 할만큼 가혹했던 것이다.

아무튼 유나는 꼼장어를 먹고 소주를 직접 부어 한잔 들이켰다.

이제 1학년도 종강한 시점.

"캬아."

유나의 소주 효과음도 제법 능숙해졌다.

그나저나 역시 우린 찰떡 호흡이었다.

내가 술을 빠뜨리고 준비하지 않으니까, 유나가 미리 술을 준비해두다니.

게다가 알아서 스스로 마시기까지 하다니.

역시 유나는 내게 최고의 친구였다.

"이주원. 너도 한 잔 받아라."

"그래."

"꼼장어 맛있다. 술이 술술 들어가네."

포장마차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아주머니는 이 추운 날들을 견디며,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20년을 장사하셨죠.

아주머니의 20년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꼼장어는 술을 부르는 묘약.

겨울밤의 다정한 친구입니다.

유나는 입가에 빨간 양념을 묻혀 가며 부지런히 꼼장어를 먹었다.

정말 배고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가지고 있던 술을 다 마시고 나자, 유나는 뺨이 발그레 기분이 좋아졌다.

"주원아. 고마워. 이제 좀 살 것 같다."

"아니야. 아프면 언제든 불러. 난 괜찮으니까."

"그래."

"응."

"그래. 이제 가 봐."

"응?"

"이제 가 보라고."

"내가 죽이랑 꼼장어까지 사 왔는데?"

"응. 정말 고마워. 맛있게 먹었어. 다음에 네가 아프면 내가 간호해줄게. 그러니까 이제 가 봐."

"아니, 나는 강철 인간이라 절대 안 아파."

"그래? 좋겠다. 알았으니까 어서 가봐."

"아니, 이 추운 날. 우리 집에 가면 그 넓은 오피스텔에 아무것도 없어."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나는 단호했다.

하지만 함부로 고집을 부리면 안 된다.

자칫하다간 오늘 쌓은 점수마저 전부 날릴 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주섬주섬 내가 빌려온 만화책을 챙겼다.

"어이, 이주원. 뭐하는 거야?"

"응? 내가 빌려온 만화책 챙기는 건데?"

"만화책은 두고 가."

"안 돼. 내일 반납이라서."

만화책은 1박 2일.

그것은 정해진 규칙.

내가 빌려온 만화책은 슬램덩크.

얼핏 소년 만화처럼 보이지만 여학생들도 좋아하는 농구 만화의 명작.

한권, 한권 이어지는 숨 막히는 승부.

그래서 한 번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만화책이 아니라, 중년 회귀자의 노련한 보험이었다.

"야! 나 이제 1권 보는데 그럼 10권까지는 두고 가."

"싫어."

"야! 치사하게 보던 만화책을 가져 가는 게 어딨냐?"

치사하다니.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여학생의 자취방에서 남학생을 쫓아내는 것보다 더 치사할 수는 없었다.

유나는 살벌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만화책과 귤까지 전부 챙겼다.

귤까지 챙긴 건 좀 치사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는 냉정할 때는 냉정해야 하는 법.

"그럼 약 먹고 푹 자. 내일 보자."

"야. 이주원. 그럼 만화책만 다 보고 가."

"그럴까? 하는 수 없네."

역시 회귀는 괜히 한 것이 아니었다.

한 권당 30분.

느긋하게 보면 약 10시간.

그럼 내일 아침 10시.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는 이 방에서 나가지 않으리라.

"잠깐 있어봐. 나 누워서 볼 거야."

그리고 유나는 방을 치운 후, 두 개의 이불을 깔았다.

수진 선배 이불은 자기 쪽에.

자기 이불은 내 쪽에.

우린 멀찌감치 누워서 라디오를 들으며 만화책을 보며 귤을 까먹었다.

따뜻하고 조용한 밤.

밖에는 이따금 바람 소리가 들리고 라디오에서는 이주연의 영화음악이 방송되고 있었다.

가끔 유나가 낄낄거리면 '뭘 보고 웃는 거야?' 그렇게 물으며 은근슬쩍 접근하기도 하고, 유나가 노려보면 다시 멀리 떨어져 누워서 귤을 까먹었다.

"어이, 강백호. 싸움은 이제 안 돼."

"정대만, 그래 이제는 자기한테 솔직해 지라고."

유나는 이따금 만화책에 몰입해 중얼거리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유나는 만화책을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졸린 모양.

나는 유나의 손에서 만화책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담요를 가져와 유나를 덮어주고 불을 껐다.

사근사근.

어두운 방에 유나의 숨소리가 채워졌다.

그리고 내 안에서 착한 이주원과 못된 이주원이 싸우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지만, 지금 이런 순간도 괜찮지 않아? 이렇게 착하고 예쁜 여자 아이가 너를 믿고, 너의 보호 속에 잠 들었어.'

'웃기고 있네. 밤은 짧아. 잠든 유나를 흔들어 깨우라고.'

'숨소리가 너무 듣기 좋잖아. 오늘 이 순간은 두고두고 기억해둘만한 밤이야. 그리고 유나는 오늘 아프다잖아.'

'아프긴 뭐가 아파. 꼼장어 먹을 때보니 쌩쌩하더구만.'

아쉽게도 오늘은 착한 이주원이 이겼다.

난 유나와 기분 내키는 대로 사귀었다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우린 일도 학교도 얽혀 있다.

남자인 내게도 이렇게 복잡하게 느껴지니까, 유나의 입장에서는 훨씬 조심스러울 것이다.

거기다 나는 지난 1년간 여러 모로 유나의 도움과 보살핌을 받았다.

그 달콤하고 따뜻한 맛을 아니까, 어떻게든 영영 유나를 내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느긋하게 유나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유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도 편하게 누웠다.

불을 끄자 천장에 야광별이 반짝 거렸다.

여학생 자취방이라고 언제 저런 것도 사서 붙여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주원아."

유나가 반쯤 잠든 목소리로 힘겹게 나를 불렀다.

"자는 거 아니었어?"

"응. 너무 졸려. 주원아, 자명종 일곱 시에 맞춰줘."

"일곱 시? 더 자."

"아냐. 아침 차려줄게. 먹고 가. 너도 잘 자."

"그래."

그리고 유나는 정말 잠들었다.

나는 라디오도 끄고, 창밖이 파랗게 될 때까지 혼자 깨어 있다가 겨우 잠들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오후, 김수희 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죠? 다음 녹화는 며칠 남았잖아요."

"그렇긴 한데, 다음 상대와 경연 주제는 정해졌거든요."

"설마, 그래서 저희한테만 살짝 말해주는 건가요?"

전화기 너머 김수희 작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니고요. 다음 주제가 '상대편에게 직접 과제를 주기'예요. 우리 쇼의 취지가 다양한 미술을 시청자에게 소개하는 거니까요. 참가자끼리 서로 교류하는 컨셉인 거죠. 각자 자기 팀의 분야를 상대편에게 과제로 주는 거예요."

"아, 그렇군요."

"팀 수진이 정한 주제를 우리 작가들하고 조율해서 상대편의 경연 주제로 만들 거예요. 그래서 미리 회의하시라고 전화 드린 거예요."

살짝 민망했지만, 그래도 나는 당당한 남자.

그나저나 팀 수진의 공식적인 리더는 수진 선배였다.

그런데 김수희 작가는 내게 전화를 했다.

내가 실세라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 상대편은 누구죠?"

"무대 인생팀이라고요. 아시죠? 일반인 평가단 최고 득점팀과 최저 득점팀이 겨루게 되었거든요."

"아, 알죠."

역시 방송에서 우리를 경쟁상대로 지목한 팀이었다.

그런데 뭐랄까, 그 팀은 미워 보이진 않았다.

약간 어리버리한 모습이 전생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뚜렷한 성과 없이 미술계에서 버텨온 약력도 은근 존경스럽기도 했다.

방음벽 벽화의 반응도 좋아서 시청자들에게 지명도도 높은 팀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경연에서는 점수가 낮았던 모양이군.'

어쨌든 우린 오후에 회의를 소집했다.

하이 유나 사무실에 여섯 명이 모였다.

"아, 그 오빠들. 나 그 오빠들 좋아. 우리랑 겨루는 구나."

수진 선배가 해맑게 웃었다.

어쩌면 우리 손으로 떨어뜨려야 할 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좋아하다니.

"그래? 그럼 우리가 해 온 과제들 주욱 적어서 전달하면 되겠다. 미대생의 생활을 소개합니다. 이런 개념으로."

정화 선배의 명료한 정리.

"그래요. 그럼 될 것 같아요. 그분들도 다 미대생 출신이니까 잘 하실 거예요."

그리고 우린 우리가 그 동안 겪어온 과제들을 적어보았다.

"포토 리얼리즘은 빼는 게 어떨까요? 미대 졸업하고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포토 리얼리즘은 힘들 지도 몰라요. 그리고 경연은 보통 일주일일 텐데 시간도 촉박하고."

요건 유나.

"다른 화가의 작품 모사하기도 뺄까요? 역시 어렵기도 하고, 다른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는 건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

요건 나.

그러자 형원 선배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 상대편을 너무 배려해주는 거 아니야?"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한 주제, 복잡한 주제가 있긴 하겠지만 결국 본 실력은 드러날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가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주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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