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01화 (101/203)

■ 101. 바쁜 하루 □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쇼핑몰 사무실에 출근해 일을 점검했다.

최근 신상 업로드를 못하긴 했지만, 방송 녹화 전 최대한 올려뒀기 때문에 당분간은 지장이 없었다.

회사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 회사가 적당히 바쁠 때 직원들도 신바람이 나고 일할 맛이 나는 듯 했다.

원 디자인이야 강력한 승희씨가 도맡아주니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든든했다.

오늘은 수진, 정화 선배랑 김태민은 출근하지 않았다.

다시 며칠 뒤 녹화가 재개되고, 미션이 주어지면 또 며칠 간 강행군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도 중요했다.

유나는 나와 같이 아침부터 출근했는데,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미안. 촬영이 끝났더니 긴장이 풀렸나 봐. 몸이 으슬으슬 떨려."

"아픈 게 뭐가 미안해."

유나의 이마에 손을 올려봤더니 살짝 열이 있었다.

이것은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는 중년 회귀자의 센스였다.

"쇼핑몰 일도 없으니까 일찍 들어가서 쉬어. 집에 들어가는 길에 약 지어서 약 먹고 한숨 푹 자."

"응. 너도 일찍 퇴근해."

그렇게 유나는 일찍 들여보냈다.

나는 오후 2시 쯤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했다.

그리고 내가 간 곳은 집이 아니라 푸른 하늘 공부방.

사실 푸른 하늘 공부방의 자원 봉사 대학생과는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

[ 기회가 되면 저도 공부방 선생님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요. ]

[ 네, 환영해요. 서양화과라고 하셨죠? 미술 선생님 오셨다고 하면 아이들 좋아할 거예요. ]

[ 그런데 정식 자원 봉사 말고요. 그냥 공부방 선생님이 어떤 건지 한 번 체험해 보고 싶어서요. 궁금해서요. ]

[ 그럼 자원봉사 신청은 하지 말고, 제가 수업하는 날 같이 가실래요? 저 도와주면서 참관하시면 돼요. ]

[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

나는 사실 아이들과 즐겁게 보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물론 내 아이가 태어나면 다르겠지만, 내가 겪어본 일은 없으니까.

남의 아이라면 글쎄.

아이들을 완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착하고 예쁜 아이들만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정말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지난 생에 너무 여유가 없어서 남을 좋아할 겨를이 없었는지.

그리고 자원봉사도 한 번 체험해보고 싶었다.

돈을 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통장에 들어있는 금액 중, 당장 필요하지 않은 숫자의 일부를 지우는 것뿐이니까.

그래서 진짜 자원 봉사도 한 번 겪어 보고 싶었다.

자원 봉사 점수가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남을 돕는 일을.

그래서 오늘은 푸른 하늘 공부방에 가보기로 했다.

최근 바쁘긴 했지만 모처럼 혼자 보내는 하루였고, 또 단 두 시간뿐이었다.

[ 제가 두 시간 동안 아이들 공부를 봐주는데 그 중 한 시간을 주원씨에게 드릴게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아이들이랑 같이 놀아준다고 생각하면 돼요. ]

[ 그럴게요. 그럼 이따 봬요.]

공부방에 도착하자, 이미 몇 번 본 적 있는 자원 봉사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지은.

한국대 수학교육과 3학년이었다.

"방송 잘 보고 있어요. 바쁘실 텐데 와줘서 고마워요."

"제가 고맙죠. 전부터 늘 궁금했었는데 기회를 주시다니."

"다른 건 어려운 건 없어요. 제가 아이들 공부 봐주는 거, 한 시간 쯤 옆에서 보면 금방 요령을 아실 거예요. 다만 한 가지만 주의하시면 돼요. 여기 아이들이 전부 관심이 고픈 아이들이라서, 새로운 선생님이 오면 가끔 엉뚱한 돌발 행동을 할 때도 있어요. 그럼 너무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면 되세요. 아이들은 결국 다 착하거든요."

"그럴게요."

하지은의 우려와 달리 딱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부방 안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4명과 미취학 아동 2명이 있었는데 전부 하지은의 말을 잘 들었다.

수학교육과라고 해서 산수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전 과목을 다 가르쳤는데, 나도 금방 거들 수 있었다.

"자, 이제 한 시간 지났어요. 주원 선생님 차례."

나는 가방에서 미리 가져온 흰색 지점토를 꺼냈다.

"자, 이번 시간은 미술이에요. 선생님이 한 덩이씩 지점토를 나눠줄테니까 만들고 싶은 걸 만들면 돼요. 선생님은 비행기를 만들 거예요."

그림은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는 일.

하지만 조소는 3차원에서 3차원으로 옮기는 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엔 그림보다 조소가 더 쉬울 수도 있었다.

주물주물.

아이들은 금방 적응해서 지점토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가끔 나이든 화가들이 어린 아이처럼 그리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쩌면 모은 아이들이 재능이 넘치는 예술가일지도 몰랐다.

"주원씨, 잘하는데요?"

"정말요?"

"네. 이렇게 빨리 적응하다니. 좋은 아빠의 소질이 보이는데요?"

회귀한 이후 가장 큰 목표 중 하나가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보는 것이었다.

하지은은 무심코 한 말이었겠지만, 내게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럼 주원씨가 잘 하고 있으니까, 저는 가서 간식을 준비할게요."

잠시 후.

하지은은 일곱 개의 접시에 과자 한 움큼씩과 요구르트 여섯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 하나씩 나눠줬다.

정말 별 것 아닌 과자와 음료였지만, 아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지은은 내게도 과자 한 접시와 믹스 커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

"은근히 피곤하죠? 커피 마시고 힘내세요. 어때요? 공부방 선생님 해보니까."

글쎄.

아이들을 겪어보고 싶었던 건데, 이곳의 아이들은 다 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옆에서 계속 하지은이 거들어줬으니까.

자원 봉사라기보다는 두 시간 동안 아이들과 재미있게 같이 논 것 같았다.

내가 내 몫의 과자를 다시 아이들에게 나눠주자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 들었다.

나는 가방에서 그림엽서를 꺼내 아이들에게 한 장씩 나눠줬다.

"어머, 이건 뭐죠? 너무 예쁘다. 나도 주면 안 돼요?"

"드릴게요."

나는 하지은에게도 여러 장의 엽서를 나눠줬다.

"같은 과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주원씨한테 엽서 받았다고."

"친구들이 저를 알아요?"

"알죠. 한국대 생이 나온다고 같이 방송 봤거든요. 내가 자랑도 했죠. 공부방에서 만난 적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 공부방에 기부도 했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전부 주원씨 멋있다고 난리였어요."

"정말요? 보통 태민이를 더 좋아하지 않나요? 그때 저랑 같이 왔던 키 큰 친구······"

"에이. 남자가 그렇게 예쁘게 생기면 별로예요. 남자는 원래 주원씨처럼 얼굴도 까맣고 몸도 다부지고, 이렇게 듬직한 맛이 있어야죠. 아무튼 제 친구들 다 주원씨 팬이에요."

훗. 그렇군요.

제 얼굴이 좀 까맣긴 하죠.

보고 있습니까, 형원 선배?

분명 립서비스가 섞이긴 했겠지만, 그럼 좀 어떻습니까?

한국대 수학 교육과는 제가 접수했습니다.

이주원 20세, 제법 잘 나가는 편입니다.

나는 가방 안의 엽서를 탈탈 털어서 하지은에게 주고, 푸른 하늘 공부방에서 빠져 나왔다.

엽서를 꼭 쥔 아이들이 문 앞까지 따라와서 배웅인사를 했다.

앞으로도 자주 오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올 때마다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갈 수 있어서 무척 다행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전에 유나와 들렀던 전자대리점에 들러 전기온수기를 구매했다.

"설치까지 해 주시는 거죠?"

"네, 당연하죠. 그런데 경우에 따라 추가 비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추가 비용은 이 번호로 전화주시면 되세요."

하지은이 아이들 간식 접시를 차가운 물에 설거지 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소소한 기부도 하고 공부방 선생님 체험을 마무리 했다.

팀 수진 인기 순위

5위 이주원

싸인해 준 사람 0명.

공부방 어린이 6명.

한국대 수학교육학과 여학생 다수.

6위 이형원

싸인해 준 사람 : 여고생 3명

* * *

그리고 그날 공부방을 나와서 신촌으로 향했다.

은근히 바쁜 하루였다.

신촌으로 간 건 이런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 모두 잘 지내지? 포항 XX고 제 42기 서울 학생회 대표 장성우야. 우리가 서울에서 보낸 지도 이제 1년, 방학이 시작되어 포항에 내려가기 전 만남의 밤을 가지려 해. 포항 일화 여고와 동반 모임을 가질 예정이니 모두 참석해주길 바라. 장소는 합정역 ······ ]

장성우는 친하지는 않고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다.

포항의 지방 명문고인 우리 학교는 이른바 명문대 진학반을 따로 운영했는데, 나는 미술학원을 다니느라 특별 진학반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서울 학생회는 이름만 서울 학생회고 사실은 서울 지역에 진학한 명문대 진학반의 친목 모임이었다.

그래서 전생의 나는 이 메시지를 받지 못했었다.

이 문자는 원래 며칠 전에 받았고, 처음엔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마침 시간도 남았고, 솔직히 나도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좀 궁금하긴 했다.

그래서 밖에 나온 김에 신촌으로 향했다.

저녁 7시 반.

나는 문자에 적힌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시끌벅적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중에 몇몇은 알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좀 쿨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니까, 아는 목소리를 듣자 역시 반가웠다.

그리고 드르륵 문을 열었다.

"어! 이주원이다! 우리 스타 이주원 왔다!"

스타? 내가 스타라고?

숯불갈비 고기집은 통째로 우리 학교 학생회가 빌린 것 같았다.

60%는 눈에 익은 얼굴, 그리고 나머지 40%는 여학생들이었다.

아마 포항 일화 여고 여학생일 것이다.

"와, 이주원이다. 우리 천재 미대생! 우리 학교의 기적! 내 친구 주원이!"

내가 천재 미대생이라고?

거기다 기적이라고?

"방송 잘 보고 있어! 진짜 와 줬구나!"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열렬한 환호가 이어졌다.

"여기 앉아요. 포항의 자랑. 여기 자리 비었어요."

여학생 하나가 나를 끌어다 옆에 앉혔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잔에다 맥주를 채웠다.

내가 포항의 자랑이라니.

"내가 말했지. 얘가 그 기적의 이주원이라고. 주원아, 내 말에 거짓말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네가 증언해줘."

그리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녀석이 친한 것처럼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 친구가 고 2때까지 존재감이 제로였거든. 그런데 여름방학 끝나더니 성적이 미친 듯 오르는 거야. 그리고 전교 2등을 떠억! 그때 우리 학교 교장 샘이 우리 반에 찾아왔다니까. 이주원이 대체 누구냐고."

"그랬어? 난 몰랐는데."

"넌 몰랐겠지. 네가 컨닝을 했다는 둥, 의대생 고액과외를 했다는 둥 온갖 소문이 얼마나 무성했는데. 그렇게 전교생이 주목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 2 겨울 방학에 예체능계 선언을 따악! 그때 우리 담임이 울며불며 주원이를 붙잡고 애원을! 그러더니 1년 만에 한국대 서양화과에 떠억! 진짜 천재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우리가 다 몰랐던 거야!"

"와아! 진짜 레전드다."

"주원씨 일단 한 잔 마셔요!"

내가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그렸을 뿐이었다.

한국대 서양화과에 붙고 나서도 매일매일 노력해서 겨우 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띄워주는 것에 얼마나 진실이 들어 있을까?

그런데 솔직히 기분이 좋기도 했다.

나는 옆에서 건네는 맥주잔을 단번에 원샷 했다.

"자, 마셔! 우리 주원이! 우리 학교의 자랑! 방송까지 접수를 하셨다!"

"그때 주원이가 미대 안가고 계속 수능 팠으면 한국대 의대도 찍었을 걸!"

"주원이 한국대 붙고 나서 우리 담임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조금씩 그런 띄워주기에 적응할 무렵 옆에 여학생 하나가 다가와 앉았다.

"야, 너 나 몰라?"

"응, 어?"

같은 미술학원을 다녔던 여학생이 었다.

화장을 진하게 해서 단번에 못 알아봤지만, 다시 보니까 옛날 얼굴이 보였다.

수능 끝나고 내가 서울의 미술 학원으로 옮기면서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난 E대 갔잖아."

"아, 그랬구나. 축하해."

"축하는 무슨. 자기는 한국대 갔으면서."

"운이 좋았지."

"그래도 오늘은 대답해주네."

"응?"

"너 미술학원 다닐 때 내가 말 걸어도 못 들은 척하고 대답도 안했잖아. 그때 얼마나 기분 나빴는데. 한 두 번도 아니고."

아···

아마도 노력 상점의 '잡생각 제거'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꾸준히 말을 걸던 여학생도 있었다니.

이주원, 나름 괜찮게 살았구나.

"미안해."

"그래도 너 한국대 붙었다고 해서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다. 자, 내 잔도 받아."

그렇게 시끌벅적 불려 다니며 술을 받아마셨다.

"그런데 그 방송에 나오는 여학생 실제로도 그렇게 예뻐? 나 Y대 의대니까, 한 번 쯤 소개해줄 자격이 되지 않아?"

"거기는 출연료가 얼마야? 대본이 있는 거야?"

"영화배우 유인호 실물로 본 적도 있어?"

이런 질문도 계속 받았다.

아무튼 나도 나름 유명인이었다.

"야! 2차 가자. 2차! 오늘 신나게 놀자.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그 E대 여학생이 옆에 다가왔다.

"주원아, 너도 2차 갈 거지? 미술학원 다닐 때 계속 쌀쌀맞게 굴었으니 오늘은 같이 놀아줘."

그런데 핸드폰을 열어봤더니 유나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어디야? 뭐해?]

[응, 밖에 잠깐 나왔어. 몸은 좀 어때?]

[이제 아프진 않은데,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꼼짝도 하기 싫어. 그런데 배고파.]

[조금만 기다려. 먹을 거 사서 갈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시끄러운 2차 보다는 유나의 자취방이 백만배 정도 끌렸다.

깊은 밤, 유나의 자취방이라.

역시 낮에 착한 일을 했더니 복을 받는 모양이었다.

"미안! 나는 먼저 들어갈게! 모두 재밌게 놀아!"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주원! 너 진짜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니야!"

E대 여학생이 내게 큰소리로 불평했다.

훗.

형원 선배, 보고 있습니까?

저 이주원, 어느덧 비싼 남자가 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