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결과 □
30명씩 두 팀.
일반인 심사단이 미술관 앞에 줄을 섰다.
그리고 FD의 지시에 따라 일렬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유나와 정화 선배는 엽서 판매를 맡고, 형원, 수진 선배와 김태민은 영화가 상영되는 방에서 관객들의 안내를 맡았다.
나는 밖에서 잠시 혼자 기다렸다.
나는 중년 아재답게 혼자 이것저것 잡생각에 심취해 있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또 그것을 즐겼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주위가 살짝 분주해졌다.
고개를 옆으로 드니, UN팀의 리더인 강찬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강찬규의 옆에는 카메라를 짊어 맨 VJ도 같이 따라오고 있었다.
'딱 보니 연출이군.'
관객 평가를 앞두고 두 팀의 신경전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모양이었다.
강찬규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일주일동안 고생했어요. 이제 1학년일 텐데, 전시 준비 많이 힘 들었죠?"
"네. 정신없었죠."
강찬규가 너무 친절하게 말을 걸어서 살짝 적응이 어려웠다.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말을 심하게 했나 싶어서요. 그쪽들은 이제 1, 2학년이고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 간 게 잘못도 아닌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경연 끝나고도 형,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요. 앞으로 같이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 나갈 동료니까."
윽.
이런 오글거리는 멘트를 이렇게 당당하게 뱉을 수 있다니.
방송의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답을 주저하는 나를 향해 강찬규가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린 우리의 전시공간을 아크릴화로 가득 채웠어요. 정말 신나게 그려댔죠. 경연을 떠나서 영 아트는 진짜 괜찮은 경험 같아요. 그렇죠?"
"아크릴로 가득이요? 대단하군요."
"왜요? 팀 수진은 안 그랬어요?"
"저흰 6일 동안 페인팅으로 채우기엔 무리일 것 같아서, 영상과 드로잉으로······"
"하하. 그렇지 않아요. 우린 젊잖아요. 세상에 불가능은 없어요. 아마 그쪽이 아직 1학년이고 군대를 안 가서 그럴 거예요. 군대를 다녀오면 근성도 생기고 또 어떤 일이든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도 생기죠."
"그, 그렇군요."
왜인지 문득 김대성이 생각났다.
나의 겸손한 태도에 강찬규는 승리를 확신했는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녹화 끝나고 전화해요. 편한 형처럼 생각하고, 같이 모여서 맥주나 한 잔 해요. 내가 군대랑 미술계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해줄게요. 그럼 끝까지 파이팅!"
그리고 강찬규는 VJ를 데리고 멀어졌다.
이 친구야, 전화번호는 가르쳐주고 전화하라고 말했어야지.
아, 왜 세상은 잠시 혼자서 멍 때릴 틈을 주지 않는 건지.
아무튼 전시 공간이 꽤 넓은 편이었는데 거길 그림으로 가득 채우다니 UN 팀도 꽤 열심히 한 것 같긴 했다.
잠시 후.
두 전시관에 들어갔던 60명이 나와서 비밀 투표까지 마쳤다.
그리고 영 아트의 메인 진행자인 김경아와 6명의 메인 심사위원이 현장에 도착해 진행을 인계 받았다.
6명의 심사위원들은 일반인 평가가 집계되는 동안 두 전시관을 둘러보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드디어 본 녹화가 시작되었다.
유나 등등은 밖으로 나와 내 곁에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김경아입니다. 제가 지금 현장에 도착했는데요. 안심하세요. 그래도 모든 진행과정을 다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16팀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경연 중이었으니까, 진행자도 나름 힘든 모양이었다.
"제 손에는 드디어! 60분의 일반 평가단이 투표한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자, 과연 일반인 평가단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단, 일반인 평가단의 선택은 점수가 아닙니다. 누가 더 대중에게 호소하는 작업을 했는지, 확인하는 척도에 불과합니다. 영 아트의 목표가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예술이니까요. 그리고 PD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고 하는데요, 과연?"
모델 출신인 아트테이너 김경아는 진행도 꽤 능숙했다.
내 심장도 김경아의 멘트를 따라 같이 쫄깃해졌다.
예상 못한 결과라면 대체 누구의 어떤 예상을 벗어난 것일까?
"UN 팀과 팀 수진의 득표는 5:5!"
5:5?
설마 무승부라고?
"5:5가 아니라 5:55! 팀 수진의 압승입니다!"
억.
무려 10배가 넘는 표 차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일반인 평가단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지는 예상 못했다.
팀 수진은 다 같이 기뻐하며 환호했고, 반대로 UN 팀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 그럼 평가단과 짧게 인터뷰를 가져보겠습니다. 어느 팀을 선택하셨고, 그 이유가 뭘까요?"
김경아는 옆에 서 있는 평가단에 마이크를 내밀었다.
"예, 전 팀 수진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UN팀의 전시부터 봤는데요. 넓은 전시관에 근사한 그림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처음엔 UN팀에 투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인터뷰를 하던 일반인 심사위원은 손목에 걸어둔 작은 비닐 봉투를 들었다.
"팀 수진의 그림엽서가 너무 예뻐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정신 놓고 고르고 있었는데, PD님이 시간 됐으니 나가야 한다고 해서 이것밖에 못 샀는데요. 뭐랄까, 대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전시를 본 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팀 수진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른 분의 말씀도 들어보겠습니다."
"저도 엽서 때문에 팀 수진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팀 수진의 전시부터 봤는데요, 영상을 다룬 작업도 흥미로왔지만, 역시 엽서가 제일 좋았습니다. 나중에 UN 팀의 그림들을 보면서도 계속 엽서들이 생각날 정도였습니다. UN 팀의 그림은 그냥 그림이구나, 하는 정도. 하지만 크고 멋진 그림보다 내가 직접 가질 수 있는 작은 엽서가 훨씬 좋았습니다."
엽서가 효자였다.
힘을 빼고 예쁜 낙서를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그렸는데, 그게 일반인 평가단에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60명의 평가단의 손에는 하나같이 엽서가 담긴 봉투를 들고 있었다.
나는 유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나야, 엽서 모두 몇 장이나 팔린 거야?"
"놀라지 마. 모두 381장."
이런.
모두 60명이니까 한 사람이 6장씩 구매한 셈이었다.
'이 참에 본격적으로 엽서 장사를 해볼까.'
그리고 다시 김경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하지만 속단은 이릅니다. 아직 진짜 발표가 남았으니까요. 방금 여섯 분의 메인 심사위원도 똑같이 여섯 개의 공을 두 팀의 상자에 집어넣었습니다. 여섯 개의 공 중 더 많은 공을 가진 쪽이 다음 경연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건 당연히 집계가 빨리 끝났겠죠? 그래서 바로 이 자리에서 발표하겠습니다."
두근두근.
과연 교수들과 평론가의 선택은?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도 예상 못 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UN 팀 대 팀 수진! 결과는!"
아, 진짜.
그냥 좀 말 해주지.
방송국 놈들중에 괜찮은 사람은 김수희 작가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김경아가 한참 만에 외쳤다.
"6:0 팀 수진의 승리입니다!"
카메라를 짊어진 VJ들이 우리와 UN팀에 다가가 잔인하게 표정들을 클로즈업했다.
사실 나는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압승일 줄은 몰랐다.
특히 일반인 평가에서 그렇게 크게 이길 줄은 예상 못했다.
"자, 유예철 교수님. 두 전시를 둘러본 소감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네, 일단 경아씨 말씀 중에 틀린 게 있어서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무도 예상 못 한 결과가 나왔다고 했는데, 저희 심사위원들은 전부 팀 수진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네, 맞아요."
옆에 있던 박경원 큐레이터가 끼어들었다.
"실은 전시를 보기 전, 일주일간 작업 영상을 볼 때부터 이미 저는 팀 수진으로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의 본질은 즐거움이죠. 당사자들부터 즐겁게 작업하는 모습이 너무 풋풋하고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과정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원숙했습니다."
국선정 교수는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엽서 봉투를 들어올렸다.
"저도 엽서를 이렇게 많이 사버렸습니다. 간단하게 그린 엽서지만 재능과 감수성이 들여다보이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여섯 사람 모두 앞으로가 기대되는 훌륭한 예비 작가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영상으로 공간을 채우는 시도였습니다."
유예철 교수가 다시 말을 받았다.
"사실 우린 그냥 작품을 최대한 만들라는 의미로 경연의 주제를 결정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의도에 정확히 부응한 팀은 UN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팀 수진은 우리 심사위원 마저도 생각지 못한 부분을 파고 들었습니다. 빛으로 정말 빈틈없이 공간을 채워버렸죠."
"맞아요.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 바로 이럴 때입니다. 새로운 발견으로 교수를 놀라게 하는 순간이요. 아마 이번 경연에 참여한 16팀 중 가장 독창적인 전시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칭찬의 폭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 매운맛 평론가인 하종호가 남았다.
"저는 UN팀? UN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저도 UN팀의 사전 인터뷰를 봤거든요. 한국대가 아니라서 미술학원 아르바이트에서 차별 받는 다고요. 그럼 이 방송의 녹화본을 가져가서, 이렇게 빨리 많이 그릴 수 있으니까 월급을 좀 올려달라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요? UN팀도 그럭저럭 자신들의 문제를 잘 해결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역시 하종호는 승자를 칭찬하는 것보다는 패자 쪽을 괴롭히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방송이 마무리 되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일반인 평가단들이 모여들어 엽서를 더 구매하고 싶다고 아우성쳤다.
그리고 몇몇 스태프들도 전시장에 남은 엽서들을 자신들이 가져도 되는지 물어봤다.
우린 그렇게 승리를 만끽했다.
촬영이 끝나고도 친하게 지내자던 UN 팀은 어느새 철수하고 보이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일주일간 고생했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와 유나만 하이 유나의 사무실로 향했다.
새로 뽑은 경력직 사원들이 일을 잘 해줘서 이제 나 혼자 밤늦게 남아서 일할 필요는 없어졌다.
대신 사무실의 내 책상 위에는 피팅 모델들의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방송 때문에 세 사람이 모두 바빠졌지만, 동대문의 신상은 계속 출시된다.
촬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델을 새로 뽑아 세 사람의 부담을 덜어줄 생각이었다.
"좀 어때? 맘에 드는 사람 있어?"
사진들을 검토하는 내게 유나가 물었다.
음...
연예인 지망생도 있었고, 전문 피팅 모델도 있었지만 단번에 눈길이 가는 사람은 없었다.
쇼핑몰의 모델은 사실 굉장히 까다로웠다.
너무 예쁘기만 해서도 안 되고, 너무 평범해서도 안 되고.
몸매가 너무 화려해도 안 되지만, 옷빨은 좋아야 하고.
새 모델들의 이력서를 보면서 유나나 수진 선배들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들인지 한 번 더 알게 될 뿐이었다.
이렇게 좋은 모델들과 함께 일해 왔다니.
역시 나는 운이 좋은 남자였다.
"잘 모르겠어. 당분간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아."
"그래. 오늘은 일 그만하고 나가서 저녁 먹자."
"응."
긴 하루였으니까, 이제 퇴근해도 될 것 같았다.
유나는 알 없는 안경과 모자를 눌러썼다.
"안경은 왜?"
유나는 대답대신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넌 좋겠다. 편하게 다닐 수 있으니까."
그리고 우린 학교 근처의 작은 식당으로 갔다.
"소고기 덮밥 두 개랑, 수란 두 개 추가하고, 생맥주 두 잔이요."
살짝 어두운 식당.
소곤대는 사람들의 목소리.
오랜만에 맛보는 평온한 저녁이었다.
유나는 계란 노른자를 터뜨려 밥에 비벼 먹었다.
"수란 맛있다. 집에 가서 만들어 봐야지."
"응, 나는 세 개 정도 먹을래."
"은근슬쩍 우리 집에 오려고 하네. 수진 언니랑 같이 먹을 건데?"
음식이 맛있어서 그런지, 조용한 분위기에 취한 건지, 내 몫으로 주문한 맥주를 금방 마셔 버렸다.
맥주가 부족했지만, 한 사람 당 한 잔으로 제한된 식당이었다.
그러자 유나가 웃으면서 자기 잔을 내밀었다.
"이거 마셔, 바보야."
"넌 안 마셔?"
"됐어. 어차피 마실 거면서 걱정해주는 척 하지 마."
유나의 잔에는 반 잔 정도 맥주가 남아있었다.
내가 촌놈 아재라 그런지 나는 이런 사소한 일에 설레곤 했다.
그렇게 맥주를 아껴서 홀짝이는데 유나가 말했다.
"그런데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네가 그랬잖아. 영화관에 가는 일은 축제 같다고. 극장에서 같이 영화 볼 사람을 만나서 팝콘을 주문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랬지."
"누구야? 누구랑 갔길래 극장에 가는 일이 축제 같았어?"
"엉?"
"내 이야기는 아닐 거 아니야. 우린 항상 미리 만나서 같이 극장에 갔으니까."
"그게······전부 상상해서 말 한 거야. 나는 단지 회의를 이끌려고."
"상상을 그렇게 집요하고 치밀하게 해? 소름 돋아."
내가 그렇게 말한 것도 잊고 있었는데, 무심코 전생의 기억을 말했던 것 같다.
그걸 또 붙잡고 따지다니.
전생에서 나도 누군가와 극장에도 같이 가고, 데이트도 해 본 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 순간에 만족하고 행복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번 생이 없었더라면.'
나는 삶이란 생각보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믿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나같이 미련한 사람에게는 진짜 삶을 깨닫기 위해서는 두 번 정도 인생이 필요한 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때 유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유나는 영리하고, 예쁘고 착하니까.
분명 내가 불행했을 때도 어디선가,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책임감도 느껴졌다.
만일 내가 유나와 사귀고 유나의 삶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된다면, 지난 생의 누군가보다 훨씬 더 유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했다.
정작 한유나 본인은 햄스터처럼 부지런히 소고기 덮밥을 먹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 맘속으로 별별 결심을 다하고,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가 너무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