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98화 (98/203)

■ 98. 본방 사수 □

"그림 말고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브레인스토밍 하듯 자유롭게 이야기 해 봐요."

우린 의자를 가져와서 둥글게 앉았다.

가능한 편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연출해야 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편이 아이디어도 잘 나오니까.

하지만 딱히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우린 늘 함께 붙어 다녔고, 편하게 토론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정화 선배가 먼저 시작했다.

"빛, 소리, 냄새. 음. 그런데 냄새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통제하기도 힘들고, 의미를 담기도 쉽지 않아."

"그럼 빛은요? 빛으로 공간을 채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나는 자연스럽게 진행자를 맡았다.

대답을 지목하지 않은 가벼운 질문을 던져서 자연스러운 참여를 유도했다.

그리고 은근슬쩍 노력 상점의 [환기]도 한 번 사용해줬다.

"빛으로 공간을 채운다는 게, 꼭 환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내가 몇 달을 어두운 방에서 노트북만 켜두고 살았잖아. 글을 쓰다보면 온갖 잡생각이 다 생기거든. 그래서 종종 어두운 곳에서도 빛의 입자들이 흩어져서 떠다니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멋진 생각 같아요. 어두운 방에도 빛이 있다. 문제는 밝기가 아니라, 관객에게 빛을 의식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형원이 형 방에 찾아가서 창문을 열었을 때, 창문으로 빛이 스며들 때가 생각나요. 빛을 타고 먼지가 날리는 장면이 꽤 근사했거든요."

형원 선배는 어두운 방에서 미라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형원 선배를 찾아가서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환한 빛이 먼지를 가르고 쏟아졌었다.

"어두운 곳에서의 빛이라니까 나는 영화가 생각나요. 극장에서도 빛에 집중하기 위해 안을 어둡게 하잖아요."

"괜찮은데? 영화를 이용한 작업은 어때? 영화라면 내용도 있고, 소리도 있으니까 의미를 부여하기에 편할 것 같아. 특히 전시를 방문한 관객들과도 접점을 찾기 쉬울 거야. 그래서 공감을 끌어내기 좋을 지도 몰라."

역시 내가 능숙하게 회의를 이끌자 여기저기서 좋은 의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VJ 양반 잘 찍고 있겠지?

이주원은 돈만 밝히는 사업가가 아니라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팀원을 이끄는 참여형 리더라고나 할까.

이쯤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면 하수다.

실수로 목이 돌아가지 않도록 목에 힘을 주고,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영화도 괜찮은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 영화를 하자고 결정 내리지는 말고, 하나씩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나 경험을 말해보도록 하죠."

그러고 보니 이준성 교수한테 받은 영화표 두 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최근 너무 바빠서 미루고 있었는데 두 번째 과제도 끝나면 유나와 함께 영화나 보러가야지.

아무튼 다시 회의로 돌아가서.

훌륭한 리더는 항상 먼저 나서는 법.

나부터 시작했다.

"일단 저는 극장에 가 본 경험이 아주 적어요. 손에 꼽을 정도? 영화를 좋아하긴 해요. 그런데 극장에 갈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극장에 가는 것과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은 아주 별개의 경험이 아닐까. 극장에 가는 것은 같이 볼 사람을 정하고. 외출을 준비하고. 장소를 찾아가고. 또 극장 안은 팝콘 냄새와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하죠. 약속한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자리를 찾아가는 것까지. 극장에 가는 일 자체가, 영화와는 별개로 즐거운 축제 같아요."

으음.

그리고 나 다음으로 유나가 말했다.

"영화에 관한 체험이라면, 이건 어릴 때 이야기예요. 아빠랑 동생들이랑 극장에 갔었거든요. 그런데 조금 늦었나 봐요. 극장에 들어갔는데 벌써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서둘러 자리를 찾았는데. 그러다 고개를 돌렸는데, 스크린에 내 그림자가 있는 거예요. 오래 전이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때 기분이 신기했어요. 마치 내가 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 그래서 영화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순간은 아직도 떠올라요."

역시 유나.

평소에는 사나울 때도 있지만, 감수성은 풍부하다.

그리고 수진 선배.

"가끔 과제 때문에 노트북으로 영화를 볼 때 있잖아. 하루는 자막이랑 영화 파일이 잘못 되었나봐. 그래서 엉뚱한 자막이 들어가 있었거든. 그걸 영화를 꽤 한참 보고 난 후에야 알았어. 그런데 그냥 조금 이상한 정도였고, 의외로 다른 영화의 자막이 생각보다 잘 어울렸던 거야. 나한테는 나름 신기한 체험이었어."

수진 선배는 너무 순둥이라서 엉뚱한 자막도 꿋꿋이 참고 본 것이었다.

수진 선배 답다고나 할까.

수진 선배의 이야기를 듣던 김태민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

그러자 수진 선배가 반가운 듯 말했다.

"태민이 너도 그런 경험 있구나. 그럴 줄 알았어. 너도 나랑 은근히 성격이 비슷한 것 같아."

그러자 김태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누나. 저는 영어를 알아들으니까 그런 경험이 거의 없어요. 그냥 그럴 수도 있구나, 신기해서 웃은 거예요."

"맞아. 보통은 자막이 틀리면 곧바로 눈치 채지. 수진이 너니까 오래 걸린 거야."

김태민이 단호하게 말하고, 정화 선배까지 거들자 수진 선배가 울상을 지었다.

하나 발견한 사실.

수진 선배와 김태민, 두 순둥이가 겨루면 둘 중에선 김태민이 이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화 선배.

"나는 약간 예술가 티를 내고 싶은 건지, 일부러 덜 알려진 영화를 찾아다니는 경향이 있어.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는 속으론 좋으면서도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하고."

"나도 그래요."

"실은 나도 그래. 예술가 티를 내고 싶은 것도 있지만, 자기 영화를 갖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해."

그리고 마지막 형원 선배.

"나는 고등학교 때 모범생이었거든. 주말에도 보충수업이랑 자습 때문에 영화를 볼 시간이 없었어.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비디오 가게에 찾아가서 케이스만 읽어보곤 했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케이스만 살펴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었거든. 나중에 수능 끝나고 그 비디오들을 빌려봤는데, 어떤 영화는 영화보다 케이스가 더 재밌었던 것 같아."

"맞아요. 나도 그랬어요."

한 명씩 영화에 관한 체험을 이야기하고 그것들을 적었다.

그랬더니 생각보다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영화를 주제로 작업해도 될 것 같은데요? 영화를 이용해서 전시관을 채워보는 거예요."

"응, 그러자. 한 번 이야기를 다듬어보자."

그리고 이것저것 다시 긴 회의를 시작했다.

영화를 이용해 어떻게 우리들을 담아낼지.

그리고 전시관의 구조를 어떻게 만들지.

공간을 채운다는 개념을 어떻게 풀어갈지.

등등등.

어느 새 우리는 경연 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이 전시를 맘껏 즐기고 있었다.

* * *

약 한달 전.

그녀의 이름은 우현주.

25세.

취업 준비생.

서울의 나름 괜찮은 대학의 졸업반이었고, 스펙도 착실히 쌓은 편이었다.

교환 학생도 다녀왔고, 어학 실력도 빵빵했고, 외모도 꾸준히 관리해왔다.

모두 취직을 위한 준비.

하지만 아쉽게도 원서를 낸 회사에서 모두 최종 탈락했다.

'너무 높은 회사를 노린 걸까? 아니야, 첫 도전이니까 실패할 수도 있지. 장기전으로 가자. 체계적으로 준비해서 다시 도전하자.'

그리고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녀가 구한 아르바이트는 의류 쇼핑몰.

바로 하이 유나였다.

'옷은 나도 좋아하니까!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거야.'

담당한 일은 고객 질문 답글 달기.

의류 포장.

배송 확인 등등.

비교적 깔끔하고 편한 일들이었다.

면접은 간단히.

"성실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자 면접을 본 담당자가 웃으며 말했다.

"네. 열심히 해주세요. 저희 사장님이 열심히 하는 분을 굉장히 좋아하시거든요."

그렇게 첫 출근.

첫날 쇼핑몰의 모델들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뭐지? 연예인인가? 연예인 지망생들이 피팅 알바 한다는 말은 자주 듣긴 했지.'

우현주 역시 외모엔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좌절을 겪고 말았다.

더 놀란 것은 다음 날.

모델들이 연예인 지망생이 아니라 일반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알바에 매진했다.

여성 의류 쇼핑몰이라 또래도 많았고, 여직원도 많아 모두 금방 친해졌다.

그래서 하이 유나의 실체에 대해 빠르게 알게 되었다.

"언니, 여기 사장님이 스무 살인데, 한국대 생이에요. 그런데 돈이 엄청 많대요. 금수저래요."

"진짜요?"

"그리고 모델들도 전부 한국대 생이래요."

"정말요? 그렇게 예쁜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전부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진짜 대박은 언니도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녀들이 말한 대박은 바로 김태민이었다.

큰 키.

사슴 같은 눈망울.

귀공자 같은 외모.

비현실적인 미남.

거기에 목소리도 좋았다.

가끔 고객 응대 전화를 받으면, 고객들이 전화를 끊기 싫어할 정도였다.

다른 알바생이 현주에게 속삭였다.

"어때요? 언니. 진짜 대박이죠?"

'확실히 잘생기긴 했어. 하지만······'

우현주는 25세.

이제 학생의 신분을 내려놓고 사회인을 준비하는 단계.

얼굴만 보고 남자를 평가하는 철없는 짓은 이제 하지 않는다.

'김태민이 대박이라고? 아니야. 이 쇼핑몰의 진짜 대박은 사장님이야.'

우현주는 이주원을 관찰했다.

출근 시간이 멋 대로라서 자주 볼 순 없지만, 이주원은 그래도 한 번 출근하면 부지런히 일했다.

수수하지만 서글서글한 인상.

김태민이 워낙 빛나서 그렇지, 이주원도 외모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엔 온화하지만, 일은 정확했다.

언제나 빠르게 결정을 내렸고, 자신감이 넘쳤다.

하이 유나 뿐 아니라, 다른 회사도 운영하는 것 같았는데 나이가 많은 직원들도 이주원을 믿고 따랐다.

그 듬직한 모습은 꽤 근사했다.

'역시 남자는 능력이지. 그리고 여친도 없는 것 같아. 하긴 한국대 생이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데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그리고 가끔 이주원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곤 했었다.

절대 20세라고 믿어지지 않는 깊은 눈빛을 하고······

'멋있어. 스무 살이 저런 눈빛이라면, 사장님이 마흔 살엔 어떨까?'

마침 우현주가 입사한 시기에 이주원은 한유나와 치열한 소원 내기 신경전 중이었다.

그래서 조금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의 점심시간.

하이 유나엔 여직원들이 대부분이라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도 많았다.

우현주도 그 중 한 명.

가져온 도시락을 풀어놓고 다 같이 먹으려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고 김태민이 들어왔다.

"어? 식사 중이셨어요? 맛있겠다."

"같이 먹어요. 어차피 많으니까."

그리고 하이 유나의 여직원들은 김태민에게 십시일반 도시락을 나눠줬다.

허겁지겁 먹는 김태민.

'확실히 귀엽긴 하군.'

우현주는 이주원파였지만, 아기새처럼 도시락을 먹는 김태민은 그녀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며칠 굶었어요?"

"제가 원래 잘 먹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두 분 다 바쁘셔서 집밥은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고마워요. 누나."

김태민의 해맑은 눈웃음에 우현주의 가슴이 요동쳤다.

'이렇게 친근하게 누나라고 부르다니. 아니야. 그래도 역시 남자는 우리 사장님처럼 듬직해야 해. 남자는 능력이지!'

그리고 한 달 사이 쇼핑몰에 많은 일이 생겼다.

사장님을 비롯한 몇몇이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정되었고, 쇼핑몰의 매출이 미친 듯 올라갔다.

우현주의 근무 시간도 조정되었고, 큰 금액은 아니지만 보너스도 받았다.

덕분에 잠깐 일할 생각이었던 우현주는 회사에 충성심이 크게 상승했다.

그리고 드디어 첫 방송의 날이 왔다.

"현주 언니, 우리 직원들끼리 사무실에 모여서 본방 사수 하기로 했는데, 언니도 같이 봐요. 맥주도 한 잔 하면서. 사장님도 허락했어요. 배달음식도 시키라고 과장님께 카드도 주셨대요."

"그래요. 같이 봐요."

이제 하이 유나의 직원도 꽤 많았다.

그들은 큰 화면에 방송을 띄우고 맥주와 치킨을 먹으며 영 아트 1화를 시청했다.

방송에 앞서 출연자의 소개부터.

그런데 김태민의 비중이 아주 컸다.

'태민이 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

이미 소문은 들었지만, 방송으로 보자 충격이 두 배였다.

옷 포장이 깔끔하게 되면 좋아하던 순둥이가 갑자기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시작된 벽화 그리기.

나레이션과 더불어 팀 수진의 벽화 작업이 등장했다.

[ 어? 어? 왜 두 사람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청소를 시작하죠? ]

김태민과 이주원은 수레를 끌며 가파른 비탈길을 뛰어다녔다.

두 사람은 무거운 쓰레기들을 치우며 거리를 청소했다.

두 스무 살 소년이 갑자기 성숙한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면에 김태민이 크게 클로즈업되었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더웠는지, 김태민은 입고 있던 야상을 벗어서 옆에 던졌다.

안에 입은 니트 스웨터가 한철을 따라 다니며 다듬은 김태민의 몸매를 훤히 드러냈다.

김태민이 소매를 걷자, 뜻밖에 튼실한 그의 팔뚝이 보였다.

그리고 김태민은 땀에 젖은 머릿결을 쓸어 넘기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

사무실의 여직원들이 일제히 맥주를 들이켰다.

"태민 오빠······"

우현주 역시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뱉고 말았다.

남자는 능력?

돈은 그녀가 직접 벌면 된다.

역시 남자는 얼굴이었다.

우현주의 머릿속에서 이주원은 까맣게 잊혀졌다.

현재 팀 수진 인기 순위 남성부.

1위 김태민

사인해준 사람 : 20명 이상

----(넘사벽)-----

2위 이형원

사인해준 사람 : 여고생 3명

각오 : 예술가는 모두 한 식구.

3위 이주원

사인해준 사람 : 0명

각오 : 형원 선배만 이기자.

0